32화
<욕구 불만>
수확한 옥수수를 저장할 창고를 건설하는 일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기실 때때로 건설 현장에 찾아와 재촉하는 은준이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작업 속도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했다. 그 이유는 작업 중간중간에 일꾼들이 막대기를 들고 어디선가 줏어온 통을 두들기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 등의 자체휴식시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은준은 속이 답답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중에 누가 흑인의 소울이 어쩌니 저쩌니 하기만 해봐라..."
어쨌든 돈 주는 은준이 수시로 작업장을 시찰하며 재촉을 하는 효과가 있었는지 창고 건설은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쉬사네가 찾아가 계약을 맺어온 마을 사람들까지 합쳐, 농장에서 일하는 이들만 근 쉰명이 넘었다. 그중엔 남자도 있었지만, 여자도 적지 않았다. 도시와 동떨어진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곤 하지만, 어쨌건 그들도 현대 문명을 전혀 모르는 이들도 아니고, 먼 길이라지만 간혹 마을에서 생산한 가축 같은 것들을 가져가 상거래를 하는 입장이었으니, 이렇게 차로 데려오고 데려다주면서까지 일을 시키고 일당까지 주자 반색하며 사람들이 몰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다만 사람이 많아질수록 앞서 일어난 문제처럼 짱박혀 농땡이 부리는 인간들이 많아졌지만 말이다.
오히려 일손이 더 많아지는 상황이 벌어지자 은준은 완전히 일에선 손을 떼고 현장을 관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나마도 말도 잘 통하지 않으니 실제론 은준은 퉁야나 쉬사네에게 지시하는 것이 전부였고, 고용주의 지적을 받으면 퉁야와 쉬사네가 다른 일꾼들에게 세세하게 지시를 하는 식이었다.
한국에서의 것과 비교를 하자면 퉁야와 쉬사네는 현장 관리소장과 현장관리자 쯤 되었고, 은준은 건물주 혹은 본사에서 어쩌다 한번 내려오는, 아니 그냥 은준이 건설사 사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야였다. 오히려 퉁야와 쉬사네의 경우는 고용주인 은준이 현장에 상시 붙어있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지만, 이 작은(?) 농장에 은준이 현장에 가있지 않다면 있을 곳이 어디 있겠나? 결국 은준이 있는 곳은 야의 시선 안 일수밖에 없었다.
"..."
야는 한동안 열정적으로 바깥일에 힘쓰던 보스가 다시 집 안에서 뒹굴거리기 시작하자 작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울타리를 세우라는 둥 뭘 하라는 둥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17살인 야지만, 쉰 명이 넘는 고용인들이 밖에서 일하고 있는데 보스를 밖으로 내쫒아 거기에 섞여 함께 삽질하고 흙투성이가 되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위치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은준의 새로운 일과는 이랬다. 저택 안에서의 일을 제외하곤 아침에 나가 일꾼들이 일을 시작할 때쯤에 천천히 땅을 둘러보며, 그리고 운동삼아 걸어 창고 건설 현장에 나가 눈도장을 찍는다. 누가 돈을 주는 고용주인지 보여주려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다시 더운 날씨를 피해 저택에서 쉬다가 점심때쯤 한번 순찰을 돈다. 중간 점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일 작업이 끝나고 돌아갈 때쯤에 다시 한번 눈도장을 찍으러 나갔다 들어오면 끝. 결국 실질적으로 은준이 일을 하는 시간은 저택과 건설 현장까지 왕복하는 시간까지 합쳐서 하루 3~4시간이 전부인 셈이었다.
본의 아니게 전기를 아끼려다보니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들게된 은준은 나름대로 곤혹스런 매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처음엔 직접 문짝을 만드는 것을 돕겠다고 나섰던 적도 있었으나 금세 뒤로 물러나야 했다. 중간중간 농땡이를 부리는 일만 아니라면 차라리 일꾼들이 직접 일하는게 은준이 돕겠다고 나서는 것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은준이 도울수록 손발이 안맞는 일이 번번했다. 그로서는 단순히 게을러서 노는게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도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게 더 좀이 쑤시고 있었다.
"한국에서 최신형 데스크탑이랑 패키지 게임 같은거나 다운 받아서 보내달라고 할까? 전력이야 마음만 먹으면 캠핑용 축전지 같은거 하나 사서 낮엔 발전기 돌려서 충전해놓고, 저녁엔 그걸로 컴퓨터 하면 되고. 그러는 김에 므흣한 동영상도..."
은준의 상상이 엄한 곳으로 흘러가자 바지춤이 불편해지면서 그는 자세를 바꾸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거실 쇼파에 앉아있던 그의 시야에 한참 거리를 숙이고 청소를 하던 야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아씨, 저 엉덩이좀 봐라...'
은준의 목울대가 크게 꿀럭였다. 동시에 자신의 귀로 침 넘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자 야가 몸을 돌리는 모습에 깜짝 놀라 그도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순간 그의 얼굴에 붉은 꽃이 폈다. 자신이 생각해도 몰래 뒷태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이 변태같아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지춤은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본의 아니게 수절을 하게 된지도 꽤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 있었을 때였다면 정신적으로 하루하루가 힘들었으니 딴 생각을 할 기력도 없었다. 물론 그래도 신체적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아예 생각이 안 들수는 없으니 가끔은 쌓인 욕구를 풀기는 했었다. 물론 수음이나 금전 관계가 포함된 그런 일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처지인 상대방과 하룻밤 위로였을뿐.
게다가 지금 같은 상황이니 므흣한 영상에 관심이 가지, 한국에서는 그쪽은 여자를 알게 되면서 끊은지 오래였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서도 노트북에 영상물을 가져올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지금은 후회하고 있지만.
어쨌든 은준이 수절하고 있는 이유는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전체 인구의 10% 이상, 그중 60%는 여성! 에이즈 감염 환자의 비율이 이렇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그가 본 글의 작성일자가 10년 전인 것을 감안하면 현재는 그보다 더 많을수도 있다는 것이 은준을 조심스럽게 만든 이유였다.
"한번 좋자고 인생 망칠수는 없지!"
솔직히 은준도 주말에 뉴-카파에 가게 될 때면 여자를 살 기회는 많이 있었다. 그가 딱히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접근해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째는 성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둘째는 흑인은 은준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에 그냥 지나치는게 보통이었다.
그러니 밤은 길고, 매일 잘 먹고 적당히 걸으며 건강하니 한창때의 남자가 여자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그 앞에서 왔다갔다 하는 야를 바라보는 은준의 눈빛은 음흉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사실 야는 은준이 생각하기로 나름 상대로서 적합한 상대였다.
'야가 혼혈이라 그런지 피부색도 여기 사람 같지 않단 말이야. 얼핏 보면 생김새도 동남아 필이 나기도 하고. 그래도 젊어서 그런지 피부는 탄력있어 보이고... 게다가 어려서부터 성당에서 자랐고, 평소 모습을 보면 아직 처녀일 것 같단 말이야?'
물론 은준은 특별히 처녀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본인이 숫총각이 아니었으니 평생 아내 삼을 생각이 아니라면 딱히 처녀일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더 어렸을 때에는 그도 상대가 처녀였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처녀는 그야말로 천연기념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설문조사에 따르면 중 고등학교때 처녀 딱지를 뗀다지? 상대는 한 두살 많은 학교나 교회 오빠고... 그런데 난 왜 학교다닐때 아는 후배 여학생이 없었지?'
그러니 은준이 야를 보며 처녀 운운하는 것은 그녀가 처녀일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처녀=성경험 없음 은 즉, 성병이 없다'와 직결되는 이유 때문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상상속에선 야를 대상으로 이런저런 야리꾸리한 망상을 하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않는 이유는 마음 한편에 있는 양심 때문이었다.
'애가 보면 참 순진해보인단 말이야. 자라온 환경 때문인지 마음씨도 착하고. 괜히 나 때문에 몸 버리는거 아냐? 그런데 성당에선 어떻게 가르치지? 관계를 가진 남자하고 결혼하라고 하나? 내가 뭘 성당에 다녀봤어야 알지... 어쨌든 잘못 건드리면 탈 나기 십상 같단 말이야. 게다가 나이도 아직 어리고.'
하지만 은준이 망설이는 이유는 뒷감당 때문이지 사실 나이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아프리카도 많이 현대화 되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옛 풍습이 남아 조혼이 있으니 한국에서처럼 미성년자랑 관계를 가진다고 잡아갈 경찰은 많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곳은 외딴 농장이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알기나 할까? 또한 법 상에서나 그렇지, 사람들 인식이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선 17살은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의 망상은 계속되었다. 게다가 망상이 깊어질수록 스스로 만든 망상이 현실에 덧씌우지기 시작했다. 즉, 그의 망상이 야를 상대 여자로 좋은 쪽으로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확실히 좀 위험하기는 하지. 닳고 닳은 애도 아니고, 왠지 한번 건들면 내가 책임져야할 것 같단 말이야. 내 욕심만 채우고 버리긴 양심에 걸리기도 하고. 참, 이럴땐 한국에서 원나잇 하던 애들이 편했는데... 어쨌든 결혼은 어렵단 말이야? 집에서 허락을 할지 안할지도 모르겠고. 그럼 현지처는 어떨까? 음, 동생이 얌 이었지?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 대학을 보내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내가 지원을 해준다고 하면 야도 나를 받아들일까? 일종의 스폰서로? 야가 동생을 생각하는 걸 보면 승낙을 할 것 같기도 한데...'
은준의 눈이 다시 벽의 장식을 닦고 있는 야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아 진짜, 확 저질러 버려? 먹고 죽지는 않겠지. 그런데 진짜 처녀일까? 혹시 알아, 보면 그런 애들 많잖아. 겉으로 보기엔 참해 보이는데 뒤로는 호박씨 까는 애들. 그런 애들일 수록 더 놀았지 아마? 그래, 일단은 에이즈에 걸렸는지부터 확인해보자. 건들지 말지는 그 뒤에 결정하지 뭐. 그리고 에이즈 검진은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도 하는게 좋겠어. 내가 먹고 마시는걸 전부 야가 관리하는데, 잘못 나한테 옮길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 물론 야가 감염자라면 말이지만.'
"좋아! 이건 사심 때문이 아니라 직원 복리 후생 차원에서 하는 일이야. 암, 그렇고말고. 보통 회사에선 건강검진 같은거 시켜주잖아? 나도 그런거지. 에헴!"
은준은 순식간에 자기 합리화까지 끝마쳤다. 때문에 야 뿐만 아니라 퉁야와 쉬사네 까지도 건강검진 대상에 포함되게 되었다.
"나랑 항상 마주치는게 이 셋이니 기회가 생겼을때 확실히 해야지. 아, 그런데 셋 모두를 병원에서 종합 검진을 하려면 비용이 장난이 아닐텐데... 그냥 에이즈만 검사할 수는 없나? 음, 혹시 모르니까 차호중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볼까? CT나 MRI같은건 아니더라도 피검사 같은것 만 해도 충분하잖아. 오래 시간 끌 것도 없이 피만 조금씩 빼면 검사가 가능하니 이게 좋겠다!"
은준은 결심이 서자 바로 전화를 꺼내 번호를 찾았다.
"여보세요? 아, 네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하하하, 별 이 없으시죠? 네, 네. 다른게 아니라 제가 사람을 몇 명 고용을 하고 있는데요.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종합 검진 까지는 어려워도 피검사 같은거 있잖습니까? 네, 그거요. 그걸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번 해주고 싶어서요. 어휴, 뭘요.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니 제가 책임을 져야죠. 그럼요~. 저, 그런데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시기 전에 한 번 연락 주세요. 네네, 들어가세요~"
통화를 끝낸 은준은 쇼파에 깊숙히 몸을 파묻으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망상 속에선 벌써 야와 함께 일을 벌이고 있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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