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창고 열쇠가 있는 열쇠 꾸러미에서 지하실 열쇠도 함께 발견한 은준은 열쇠를 찾은 김에 지하실도 살펴보기로 했다. 어차피 당장 무언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앞으로 자기가 살 집인데 그가 모르는 곳이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은 계단을 올라가는곳 반대편 뒤쪽에 있었다. 계단 옆에도 문이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곳은 남는 공간을 활용한 작은 창고로 전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난 잡지나 신문이 들어있는 박스와 그 외에도 양초가 든 큰 박스와 갖가지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그런데 무슨 양초를 이렇게 많이 쌓아놨던거지? 전기도 들어오는데."
은준은 거의 사과상자와 비슷한 크기의 박스에 묶음 포장된 양초가 한가득 들어있자 의아해했다. 하지만 아직 이곳 생활에 익숙치 않은 은준은 지붕 위의 태양광 발전기가 있으니 한국에 있을때 처럼 걱정 없이 전기를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제론 태양광 발전기의 크기도 그리 크지 않고 좀 지난 물건이라 효율도 그다지 기대하긴 어려웠다.
특히 태양광 발전기의 특성상 낮에 태양이 있을때 충전해두었다가 밤새도록 써야 하니, 한밤중에 냉장고의 전원이 나가 다음날 상태가 안좋은 식사를 할 생각이 아니라면 항상 충분한 전력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때문에 전에 살던 사람들은 전기를 이용한 불빛 보다는 이 양초를 사용했던 것이다.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선 은준은 스위치를 찾아 불을 키고는 깜짝 놀랐다.
"와! 이게 다 뭐야?"
은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 양쪽 벽면에 가득 진열되어있는 개봉도 안한 포도주병들 이었다. 벽을 개조해 구멍을 내고 그곳에 포도주병을 쏙쏙 집어넣어 보관한 것으로, 한쪽은 까만 적포도주병들이, 반대쪽엔 은은한 올리브빛의 백포도주병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역시 프랑스인인가? 와인이 정말 많네."
신기한 마음에 은준은 눈 앞에 있는 포도주를 하나씩 빼내어 라벨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생전 와인과는 친분이 없었던 은준으로서는 '책을 펼쳐도 하얀건 종이요 검은건 글자로다' 하는 식으로 휙휙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한국에 있을때도 와인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하우스 와인 마셔본게 전부였는데, 내가 아프리카까지 와서 소믈리에가 되겠구나!"
은준은 워낙 많은 포도주를 보며 혼자 농담을 던졌다.
"근데 이것들 혹시 비싼건가? 언제 뭘 본적이 있어야 비싼건지 싼건지 알지. 흠, 설마 나중에 누가 이것들을 가져간다고 하는건 아니겠지? 암, 내가 이 집을 샀으니 이것들도 다 내꺼라고!"
견물생심 평소 즐기던 와인도 아닌데 욕심을 부리는 은준이다. 한국에 있을때도 은준은 술을 퍼마시던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술자리를 사양하는 법은 없었다. 한국의 대인관계는 주로 술자리에서 이뤄지지 않던가. 물론 그것이 소주, 맥주, 막걸리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여자를 사귈때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안 갔었으면 지금껏 와인은 포도주스에 술탄맛이라고 알고 있었을 은준이었다.
"오늘 내가 개안을 하겠구나! 소주, 맥주, 막걸리, 백세주, 오십세주, 그리고 제사때 마신 집에서 담근 술은 뭐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여기에 오늘 와인을 추가해야겠다! 하우스 와인은 마셨다고 하기엔 조금 양이 적었지."
아무도 없다고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대사를 흉내내 중얼거리며 떡 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와인을 마셔보기로 했다.
"어차피 존이 차를 가져올 때까지는 딱히 할 일도 없을것 같고, 인터넷도 안되니 컴퓨터를 켜도 할 일이 없고. 로밍폰으로 인터넷을 했다간 전화요금이 어찌될지 엄두가 안나니 포도주가 어떤 맛인가 맛좀 보면서 느긋하게 있어야겠다."
은준은 어떤게 좋을까 이것저것 꺼냈나 넣었다 하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놀라워했다.
"오! 이건 생산년도가 2011년이네? 이걸로 할까?"
은준이 생각하기론 포도주는 양주다. 사실 말을 풀이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양주 즉, 서양에서 들여온 술이니 포도주도 양주긴 양주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오래된 술은 비싸고 만들어진지 얼마 안된 술은 싸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무슨 17년산, 혹은 몇 년산, 몇 년산 이런걸 주어듣다보니 가지게된 고정관념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가 집어든 2011년 포도주는 자기가 생각해도 암것도 모르는 그가 막 마셔도 아깝지 않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음, 지역은 Cape penincula 이고, Winery 라면 포도주 양조장을 말하는건가? 어쨌든 그건 Fairview 라고 써있네. 포도는 Syrah, Pinotage, Grenache, Cinsault 라고? 뭐가 종류가 이렇게 많아? 아, 그럼 정말 싸구련가? 하긴 유럽인이라고 맨날 비싼 와인만 먹겠어? 그랬다간 진작 거덜나겠지. 비싼건 특별한 날에나 마시고 평소엔 이런걸 마시는 걸거야."
은준은 포도주에 들어간 포도의 종류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네가지나 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각대로 저렴한 포도주가 맞다고 생각했다. 또 다시 그의 얕은 술에 대한 상식으론, 섞였다 라는 것은 싸구려라는 말과 동일어였기 때문이었다.
"쏘맥도 섞은거고, 막걸리에도 사이다를 타서 마시고, 오십세주도 백세주에 소주를 섞은거지."
하지만 이것은 오해였다. 한국인에게 포도주로 유명한 보르도 와인도 사실은 여러 종류의 포도 품종을 섞어 만든게 많다. 물론 한 종류의 포도만을 가지고 만든 포도주도 있지만, 세계에는 수많은 품종의 포도가 있고, 이것들을 취합해 포도주를 만들어보면 어떤 조합에 따라서는 단일 품종으로 만든 포도주보다 맛이 좋고 향이 깊은 포도주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전이고 노하우인 셈이다.
즉, 은준이 여러 종류 포도가 들어갔다고 싸구려라고 생각한것은 큰 오해라는 거였다. 하지만 이번만은 소 뒷걸음치다 쥐 집은 꼴이었다. 추론 방법은 틀렸지만, 어쨌든 그가 집어든 포도주가 비싼 포도주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집은 와인은 케이프타운 가까운 포도주 양조장에서 만든 패러디 와인으로 저렴한 가격이지만, 맛과 향은 진품에 떨어지지 않는 매체에도 소개된 적 있는 포도주였던 것이다.
어쨌건 포도주를 하나 골라든 은준은 위로 올라가면 맛을 볼 생각으로 병을 한손에 쥐고는 덜렁덜렁 팔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한 번 더 깜짝 놀랐다. 정면의 벽에 스코프가 달린 라이플이 떡하니 걸려있었던 것이다.
"와, 이거 총 아냐! 전 주인이 사냥을 다녔다고 하더니..."
은준이 집어든 총은 사냥용 라이플이었다. 개머리판까지 나무로 만들었고, 총신과 총알알 발사하는 구조만 금속으로 만든 구식 라이플이었는데 무려 볼트액션이었다.
"카빈은 예비군 훈련때 쏴봤어도 볼트액션은 또 처음이네. 터지는건 아니겠지?"
은준은 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어서 녹이 슬거나 화약재가 남아있는 곳도 없었다. 다만 주인이 오래 사용했는지 나무로 만든 몸체엔 세월의 흔적인 손때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윈체스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축구팀 이름 아냐? 원래 총 만드는 회사였나?"
총에는 윈체스터라는 단어가 쓰여있었다. 제조 회사인 셈이다. 하지만 은준으로서는 총기 제작 회사까지는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흘려보고는 다른데에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총기 거치대 바로 밑에 있던 선반이었다.
은준은 다시 사냥용 라이플을 벽에 걸어놓고 선반을 살폈다. 작업용으로 쓰인듯한 선반에는 프레스기를 비롯해 용도를 알 수 없는 몇가지 기계들이 놓여져 있었는데, 발을 움직이다 뭔가 채이는 느낌에 발 밑을 본 은준은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겨있는 탄피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반의 서랍에는 아직 쏘지 않은 총알이 플라스틱 박스에 들은채로 정리되어있었으면 다른 서랍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플라스틱 원통들이 들어있었다. 사실 이 기계들은 총을 쏘고 남은 탄피를 재생하는 도구들이었는데, 주는 총알을 받아 쏠줄만 알았지 총알이 만들어지는 장면을 본적이 없는 은준으로서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고, 그대로 더이상 지하실에 볼만한게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다.
집 안을 그런대로 살핀 은준은 이번엔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간밤에도 동물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그는, 근방에 별다른 야생동물이 없다고 생각하곤 주방 서랍에서 오프너를 찾아 코르크 마개를 뽑아 잔에 포도주를 한잔 따라 가지곤 저택 담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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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사랑님, 천지패왕님, 전모삽님 안녕하세요.
음... 한번 썼다가 다시 쓰려니 같은 내용인데도 분량이 확 주네요 ㅋㅋㅋ내용도 완전 똑같이 써지지는 않고, 흙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