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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카파로 가자-5화 (5/107)

5화

요하네스버그에서 출발한 기차가 팔라보르와까지 가야 할 길은 장장 225마일 즉, 362km나 되는 먼 거리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420km쯤 되니 그 거리가 어느정도일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는 거리였다.

가이드인 유병민이 은준에게 준 표에 나와있는대로라면 기차가 팔라보르와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8시간. 각 역에서 정차하는 시간이 한국에서보다 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평균 60km 정도의 속도로 달린다고 보면 되었다. 이것은 서울의 지하철 속도보다 늦은 것으로 현재 은준이 타고 있는 기차의 외양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와! 꼭 서부 영화에 나오는 기차 같네? 열차 안도 나무로 만들어져 있고 말이야!"

요즘 나오는 기차들은 엔진의 성능 뿐만 아니라 외형에 있어서도 공기역학 등을 고려하여 디자인되었기 때문에 마치 총알처럼 매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은준은 이 생소한 기차를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차 안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은준은 기차표 값이 저렴해 주로 흑인들만 있을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은 오해였다. 비록 이것이 다른 로보스레일에 비해 저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아공 사람들이 쉽게 타고 다닐만큼 싼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버스를 타고 다녔다. 은준이 한국에서 접한 관광객이 버스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버스였다.

잠시 나무로 만든 창들과 팔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두리번거리던 은준은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안에 적어온 메모를 살폈다. 그것은 팔라보르와에 도착해 만나야 할 사람의 전화번호였다. 그가 은준이 뉴-카파에 정착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한 사람이었다. 은준은 다시 번호를 확인하고는 수첩을 가방에 넣어 잃어버리지 않도록 발밑에 내려놓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까지 8시간이나 남았지만, 은준은 잠을 청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을때 몇 번 기차를 타본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긴 여행의 지루함을 잠으로 채워넣었었다. 하지만 타지에 막 도착한 은준은 혹시나 강도나 소매치기가 나타나 잠든 사이에 자신의 짐을 들고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주변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물론 주변에 다른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혹여 강도가 무기로 위협한다면 그들도 은준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은준은 여전히 아프리카는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들걸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은준은 창밖에 펼쳐지는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선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자연이 그를 반겼다.

숲을 지나자 지평선이 보일 만큼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그곳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거대한 농장이 펼쳐지기도 했고, 갈라진 대지 너머로 기차의 길이보다 더 긴 폭포에서 맑은 물이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기도 했다.

아치형의 교량은 아슬아슬했고, 갑자기 솟은 산맥이 창밖에 가득 들어오기도 했다. 이따금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쳐야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때면 은근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겁먹은 사람은 그 혼자인듯 다른 관광객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환호하며 시끌벅적했다.

팔라보르와로 향하는 기차는 대체로 시끌벅적했다. 관광객들의 대화만이 아니라 이곳 사람으로 보이는 흑인들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큰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무슨 이야기가 나왔는지 누군가 짐에서 이름 모르는 작은 북을 꺼내 두드리자 주변의 다른 이들도 같이 창틀이며 팔걸이 혹은 좌석을 손바닥 등으로 박자에 맞춰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관광객들은 손뼉을 쳐가며 즐거워했다. 그것은 은준도 마찬가지였다. 흥겨운 분위기가 그의 경계심을 흐트렸다.

다시 몇 번이나 교량을 지나고 터널을 빠져나왔다. 크고 기다란 철마에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한 모습도 쏠쏠한 눈요기감이었다. 그러다 석양이 지면서 초원은 붉게 불타오르다 보랏빛으로 온통 물들었다. 은준은 넬스프로이트도 지났으니 곧 팔라보르와에 도착할 것이고, 지금까지 괜한 걱정을 했다며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분좋은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앞 칸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은 은준도 누군가의 목청이 제법 크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진 목소리에는 분명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은준과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은 갑작스런 이 상황에 조용하며 문 너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은준은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남아공이 영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분명 그들끼리 쓰는 언어가 있었고, 앞 칸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은 바로 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러다 은준은 통로 건너편에서 가이드인지 백인 여행객들과 합석하고 있는 흑인이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고객에게만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쉿! 목소리 낮추세요. 서로 적대하는 부족 전사들이 함께 탄 모양입니다. 음... 지금까지 몰랐는데 한명이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알아본 모양입니다."

은준은 아직 영어가 완전히 익지 않아 빠르고 낮선 억양 때문에 원활하게 알아듣진 못했지만, 귀에 신경을 집중해 하나라도 알아들으려 노력하니 대충이나마 상황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아! 잘못하면 싸움이 나겠구나. 설마 여기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겠지?'

그는 은근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지만, 다들 걱정스럽고 조마조마한 표정이라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너무 일렀다. 갑자기 목소리가 더 커지더니 돌연 총성이 울린 것이다.

탕!

"꺄아악!"

"으아악!"

갑작스런 총소리에 사람들은 머리를 감싸며 좌석에 몸을 웅크렸다.

"으헉!"

은준도 깜짝 놀라 헛바람을 토해내며 좌석 밑으로 쭈그리고 주저 않았다. 그는 나무로 만든 이 좌석들이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총알이 나무 판자를 뚫고 날아올 것만 같았던 것이다.

타다다탕!

탕! 탕!

앞 칸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도망쳐 나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인종의 구분 없이 전부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오자 공포가 전염이라도 된 듯 은준이 타고 있던 열차의 사람들도 당장 총을 든 사람들이 달려와 자기를 쏘기라도 할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일부는 통로를 따라 다음 칸으로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어, 어쩌지!'

은준은 순간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 자신도 뛰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머리에선 여러가지 생각이 서로 대립했다.

'일어섰다가 총알에 맞으면 어쩌지? 눈 먼 총알에라도 맞으면 그게 무슨 횡액이야! 하지만 도망쳤다가 나중에 짐을 못 찾게 되면? 이 가방들이 내 전재산인데 이걸 잃어버리면 땅이고 뭐고 당장 굶어 죽는다고!'

게다가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옆 자리와 앞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웅크리고 앉은 바람에 통로로 나설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다. 좌석을 넘는다면 가능은 하겠지만, 좌석 위로 몸을 내밀면 당장이라도 총알이 날아와 자길 죽일것만 같았다.

그렇게 목숨과 짐을 저울질하던 은준은 점점 총소리가 가까워지자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그저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총소리 사이로 이따음 터지는 비명은 그를 더욱 공포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한쪽이 밀리는듯 점점 은준이 탄 칸 쪽으로 다가오던 총소리는 결국 문을 넘어오고야 말았다. 은준은 바로 옆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으악!"

그때 총에 맞은 사람이 옆으로 쓰러지며 은준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도 은준처럼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있었는데, 무언가 자기 머리위로 털썩! 하고 떨어지자 깜짝 놀라며 자기가 죽은 것처럼 비명을 내질렀고, 그러자 덩달아 주변의 사람들까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꺄아아악!"

"악! 악! 악!"

잠시 후 다시 총소리는 뒤로 멀어져갔다. 하지만 다시 앞쪽에서 총소리와 달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은준들이 있는 칸을 지나 뒤로 멀어져갔다.

사람들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때 은준은 한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죽은 이가 떨어트린 총이었다.

AK-47

은준에게 너무나 익숙한 총기였다. 물론 영화나 소설들에서 말이다. 대부분 악당 역할을 하는 이들이 들고 나오는 무기였고, 실제론 만져보기는 커녕 실물은 구경도 못해본 은준이었다.

그순간 은준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첫날이다. 아프리카에 온 첫날! 그런데 벌써 총격전에 연류(?)된다니. 정말 아프리카 치안이 형편없다더니, 가이드가 보장한 기차에서까지 총격전이 일어날 줄이야! 게다가 사람이 죽었어. 정말 사람 목숨이 덧없구나.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수는 없겠지. 있는돈 없는돈 박박 긁어모아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을 떠나 아프리카에 왔는데, 하루만에 무슨 얼굴로 한국엘 돌아갈까.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8천만원을 내게 주셨는데...

그래! 저들이야 여행을 왔으니 내키지 않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비행기를 타고 떠나겠지만, 나는 아니다! 이곳에 정착하려고 왔으니 여기서 뼈를 묻을 각오로 살아갈 수밖에. 그러면 언젠가는 내 앞에도 이렇게 총을 든 인간들이 나타날수도 있을거야. 아니, 벌써 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잖아. 비록 내가 당사자는 아니지만, 총알에 눈이 달린건 아니지.

만약 강도가 돈이라도 내놓으라고 총을 들이밀면 내가 뭘 할수 있을까. 나도 스스로를 지킬 자위 수단이 필요해! 게다가 여긴 아프리카잖아? 도시 밖에 농장을 만들면 야생동물들이 나타나는 경우도 많을 거야. 사자라도 나타나면 총으로라도 쏴서 쫒아내야할테니 내게도 총이 꼭 필요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준은 죽은이의 손에서 떨어져 은준의 옆으로까지 밀려온 AK-47 총에 천천히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이 여전히 혼란에 빠져있는 틈을 타 그것을 자신의 좌석 밑에 밀어두었던 캐리어에 집어넣곤 시치미를 뗐다.

은준은 총이 있으면 총알도 필요하리라 생각을 했지만, 죽은 시체에서 총알까지 뒤지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총이야 자기 옆에 떨어져있었으니 슬쩍 챙겼지만, 총알을 찾으려고 시체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남들이 자신이 총을 챙겼다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됐다. 그러면 총을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치안이 이런 동네지만, 그래도 총에 의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경찰이나 그 비슷한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고, 누군가 자신이 총을 숨긴것을 밀고한다면 일이 커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프리카에 온 첫 날. 한국에선 어렴풋이 위험한 동네라고 생각했던 것이, 하루만에 절실한 생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은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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