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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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는 원 헌드레드. 

한글로 쓰면 일백. 

한자로는 百. 

2월의 마지막날은, 네가 내 코피에 겁을 집어먹고 

사귀면 되지않냐고 울음을 터뜨렸던 날부터 꼭 백일이 되는 날이다. 

나이 스물일곱에 일주년도 아니고, 백일따위를 챙긴다면 

주책이라고 다들 한마디씩 하겠지만 

이 나이에 열여덟살의 팽팽한 애인을 사귀려면 

까짓 백일쯤이야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의 어린, 아니 싱싱한 연인은 감수성이 대단히 풍부하다. 

그리고 아주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그 날, 특별한 선물을 주지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역시도 기다려지기는 한다. 

"음... 다음날은 삼일절이라 쉬지만 

2일부터는 새학년이니까, 어디 여행가고 그런건 좀 무리일거 같고..." 

테이블위에 종이까지 펼쳐두고, 턱을 괸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너의 옆모습을 보고있다. 

백일을 근사하게 보낼 계획을 세우겠다며 볼펜끝을 잘근거리고 있는 것이다. 

"란우야." 

"응." 

나쁜놈. 돌아보지도 않는다. 

"볼펜이 그렇게 좋아?" 

"응?" 

못알아들을 질문을 던지니, 그제야 토끼눈을 하면서 뒤를 돌아본다. 

"내 입술도 좀, 그렇게 잘근거려줘." 

뭐야아, 하고 눈을 흘기면서도 금새 네 얼굴이 붉어진다. 

고개를 휙 돌리고 다시 테이블위에 턱을 괸다. 

아으, 저 상큼한 것. 

보통 다른 연인들은, 백일쯤되면 쓴물단물 서로 다 빠지고 

정으로 버텨가는거 아닌가. 

아니, 백일은 좀 오반가. 

아무리 그래도, 이집에서 거의 같이 살다시피하면서 백일을 보냈는데 

어쩌면 저렇게 아직도 사람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콱 달려들어서 고 예쁜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다. 

"란우야아-" 

"됐어, 이 변태." 

이제 변태란 말에는 완전히 적응해버렸다. 더이상 발끈하지도 않는다. 

나 스스로, 정말 변태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될 정도로 

너는 말끝마다 나보고 변태란다. 

자기 애인한테 야한 농담 좀 한다고, 그게 변태면. 

쳇, 너 잘났다, 김란우. 

"쇼파로 올라와서 생각하면 안돼?" 

"속보여, 반태성." 

아, 정말.. 저 튕김의 여왕. 

백일동안 그렇게 열심히 가르쳤으면 

이제 좀 뭔가가 트이고 깨달음이 와서, 자기가 먼저 덤벼들때도 됐는데 

도통 너는 그쪽으로는 감이 없는지 

아직까지도 내가 울며불며 사정사정해야 

못이기는척 넘어와준다. 

반태성 테크닉, 겨우 그 정도였던가.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막상 엑셀을 밟고 쭉쭉 진도가 나가기 시작하면 

분명히 너는 섬세하게 느낀다. 

제법 내 반응을 계산에 넣은 것같은 신음도 흘릴줄 안다. 

그런데, 문제는.. 

_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폭발직전의 화산을 부여잡고 

네 속옷을 끌어내리려 할때마다 

너에게 저지당한다는 것이다. 

뭐야, 꼬리를 치지 말던가! 

오- 저 눈빛이야말로 오케이 싸인이렸다! 싶어서 

얼른 브리프로 손을 가져가면, 

방금전까지 숨을 헐떡이며 사람 애간장을 다 녹여대던 너는 

순식간에 안면몰수하고는 내 손목을 매몰차게 쳐낸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언젠가는 네가 너무한다싶어서, 화를 낸적도 있었다. 

그런 신음에, 그런 눈빛에, 그런 움직임으로 

사람 마음 구석구석 들쑤셔놓고는 

마지막에 가서 나몰라라하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날 놀리는 것 같아 좀 화가 났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애무가 좀 짙어질때마다 그런식이니 

아무리 나라고해도 기가 꺾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주일후면 우리가 공식적인 연인이 된지도 어언 백일. 

너처럼 분위기에 약한 녀석이라면, 

그날을 위해 이제껏 아껴놓았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나까지 덩달아 네 계획표에 귀가 솔깃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교외의 한적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둠속에 잠겨있는 굵은 강줄기를 내려다보면서 

제법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기념일이라는 의미에 자잘하게 들떠있는 너의 얼굴을 보니 

나도 즐겁고 행복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싶은 마음뿐이였다. 

분위기에 한껏 취한 네 눈망울이 왠지 자꾸 기대하게 한다. 

"자, 선물." 

긴 입맞춤끝에 네모난 상자를 네게 내밀었다. 

눈앞에서 검게 일렁거리는 강줄기와 달빛을 받아 부드러운 금빛을 띠는 네 눈동자. 

나도 거기에 취해 버렸다. 

너는 뭘 받고싶은지 아주 구체적으로 내게 일러주었었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뭘 받고싶은지 물어보지 않았다. 

네 꿍꿍이가 뭘까. 

저 조그만 머리속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거참, 궁금해 죽겠다. 

"아니야. 이따가, 집에가서." 

분위기에 젖은, 한없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너는 내가 내미는 상자를 도로 밀어놓는다. 

그래그래, 목걸이야 이미 사놓은 것. 언제주면 어떻겠는가. 

신의 드라이브 실력으로 잽싸게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서는 네 뒷모습을 보던 순간부터 가슴이 미친듯이 방망이질하고 

불안 초조 긴장이 나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강강수월래를 해댄다. 

오늘.. 아아.. 그래, 오늘.. 정말, 할지도 모른다. 

으윽, 조심해야지. 

또 생각만으로 코피가 터져버리면 곤란하니까. 

난 소파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고있다. 

네가,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겠다고 욕실로 들어간 것이다. 

이게 오케이 싸인이 아니면, 도대체 그 무엇이란 말인가. 

피는둥마는둥 건성으로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꺼버리고 

온 집안의 조명을 어둡게 가라앉힌다. 

특히, 침대머리맡에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바다색 조명이 대기하고 있다. 

_바다속에 있는 것 같아 

너의 도드라진 쇄골을 입술로 숭배하고 있을때, 너는 그렇게 말했었다. 

_그럼 난 지금, 인어공주랑 하고있는 건가 

맞받아친 나의 말에 너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었다. 

작고, 간지럽고, 넋을 놓게 만드는 웃음이였다. 

으으으. 

도리도리. 

조명빛이 넘실거리는 침대를 내려다보면서 

기억속을 더듬더듬거리고있던 내 머리를 도리질친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다. 

정신 바짝 차려라, 반태성. 

상대는 보통내기가 아니야. 

둘다 말끔히 씻고 샤워가운을 입은채로 침대위에 올라, 마주 앉았다. 

정말 바다속에 있는것처럼, 네 얼굴위로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며 흐른다. 

아름답다. 

물을 머금어 더욱 고슬고슬해진 머리카락과 

잡티는 커녕 숨구멍하나 뚫리지않은 매끄러운 피부 

그 양볼에는 약간의 홍조가 띄워져있다. 

분홍색 꽃잎을 두개 올려놓은 것 같아, 가만히 손을 대본다. 

"예뻐." 

웃는다. 

날 보고 웃는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네가 되어, 

내 부름에 답하고 내 키스에 입술을 열고 내 무게를 받아내며 내 목을 끌어안는 너다. 

아름답다. 

여기서 더 많은걸 바라는 나는, 욕심쟁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칠 정도로 

이 순간, 내 손에 뺨을 맡긴 너의 모습은 

아름답다. 

"목걸이, 보고싶어." 

그 뺨을 가볍게 쓸어주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상자를 꺼내온다. 

스쳐 지나간 생각은, 스쳐 지나간 생각이고 

나도 네가 원하는걸 줬으니, 뭔가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가만.. 나, 진짜 변태인가. 

네 얼굴에 홀려 좀전까지 하고있던 생각은 멀리멀리 던져버리고 

어느새 또 내 욕심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못말린다 못말려. 

네가 원한 것은 

네 이름과 내 이름의 영문 이니셜이 각각 새겨진 두개의 백금 목걸이였다. 

나는 특별한 루트를 수소문해서 목걸이를 주문제작해두었다. 

"와아-" 

눈을 반짝이며 진심으로 좋아하는 네가 너무 예뻐서 

당장 품으로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오늘을 그르쳐서는 안된다. 

오늘만큼은 얌전히, 네가 정해놓은 페이스에 따를게. 

대신, 꼭 원하는걸 줘야돼. 

"아무것도 없는 내 몸위에, 이거 걸어줘." 

네가 내 눈앞에서 스스로, 샤워가운을 벗어내린다. 

순간,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허리까지 미끄러져 내려간 가운위로 아직 덜 다듬어진 소년다운 몸이 눈이 부시다. 

아무것도 걸쳐지지않은 네 몸위에 

내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채운다. 

미성숙한 아름다움을 나른하게 발산하는 너의 몸위에 

내 이름을 새겨넣는다. 

이렇게, 내 생각이 닿지 못하는 부분까지 뻗어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일들로도 작은 감동을 만들어주는 너. 

이 선물을 부탁한 것도, 집에 가서 풀어보겠다던 말도 

너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신성한 의미였던 것이다. 

내 꼬맹이는 이제 정말 자신의 의지로, 내것이 되려고 한다. 

가늘고 야윈 목덜미에서부터 쇄골을 타고 흘러내려 

하얀 살결위에 떨구어진 내 이름을 내려다본다. 

아름답다. 

오늘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 란우야. 

너는, 네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내 목에다 걸어주기 위해 

무릎으로 침대위에 섰다. 

그 바람에 허리께에 걸쳐져있던 가운이 이번에는 무릎으로 스르륵 흘러내린다. 

아아 

스트라이프 브리프를 입은걸 보고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 

마음속으로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신성한 이 의식에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한다. 

네 작은 얼굴은, 그만큼 진지하다. 

"반지는.. 할 수 없이 빼두어야 할 일이 자주 생기지만 

목걸이는 그렇지 않잖아. 

내 몸에 네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네 몸에 내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항상, 항상 이렇게, 우리 약속을 목에 걸고있자." 

내가 여자였다면, 단숨에 무너져버렸을 대사였다. 

요고, 제법인데. 

제대로 감동 받아버린 나는 엷게 미소지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너도 무릎을 받치고 선채로 마주 웃어준다. 

좋아, 그대로 가느다란 두 팔이 내 목에 감겨져온다. 

야윈 허리와 등이 가슴 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음- 이 순간은 언제라도 정말 황홀하단 말야. 

내 목덜미를 꼭 껴안은채로, 네가 귓가에 속삭인다. 

변성기가 다 지난건지 만건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게 아마도 이런거겠지. 

"네가 받고싶은 선물, 나 알아."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아찔한지 

그 말투가 얼마나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자극하는지 

하마터면 그대로 벌떡. 할 뻔했다. 

난 아무 대답도 할수가 없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그 위로 기러기 한마리가 태평스럽게 날아간다. 끼룩끼룩. 

흐흐흑. 오늘, 우리, 정말로 역사를 새롭게 쓰는거야, 란우야? 

"셋중에 하나 골라." 

응? 

이건 또 무슨 깜찍한 장난이야. 

뭘 준비했길래, 셋중에 하나를 고르래. 

그 짧은 순간에 혼자서 나만의 리스트를 뽑아본다. 

혹시... 그거, 그거, 그거 중에 뭘 해줄까, 하는 얘기?? 

그거랑 그거도 물론 받아보고 싶지만, 역시 아무래도.. 그거지. 

음, 결정했어. 

"네 생일, 우리 일주년.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 여기까지 얘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미 짐작했겠지만 

백일기념일에도 우리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셋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네 말에 

그거, 그거, 그거중에 하나일거라며 혼자 행복한 고민을 하던 나는 

완전히 뒷통수 제대로 맞고 말았다. 

김란우 요거, 진짜 어떻게 해줄까. 

"그런게 어딨어! 오늘은 백일 기념일이니까 백일 기념 선물을 줘야지! 

내 생일에 받는건 생일선물이고! 

일주년에 받는건 일주년 선물이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받는건 성탄 선물이지!" 

여태까지 분위기에 휩싸여 

정말로 줄 것 같았던 네 암시들에 들떠있던 나는 

모든걸 내팽개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젠장. 진짜 눈물까지 나려고 한다. 

"싫어? 싫으면 마." 

잔인하고 야비하고 무책임한 너역시, 언제 자기가 분위기 탔었냐는듯 

내 무릎에서 내려가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어느새 평소의 새초롬한 얄미운 표정으로 돌아와있다.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실망감을 감추기가 어렵다. 

표정관리가 안된다. 

내가 잔뜩 기대하고 있었던걸 네가 다 알고있을까봐 쪽팔려 죽을거 같다. 

난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지압을 해본다. 

담배를 한대 피우고 싶지만, 네앞이라 참는다. 

너도 말이 없다. 

침대시트만 손으로 쓸어보고 있다. 

저 쬐그만걸 그냥! 

어쩌겠는가. 

아홉살이나 더 먹은 내가 참아야지. 

더 정확히 말하면, 아쉬운건 내쪽이니 내가 먼저 분위기를 풀어봐야지. 

너 두고보자, 김란우. 

진짜 아프게 해줄거니까. 

"내 생일." 

퉁명스럽게 말을 툭 던진다. 

그거, 그거, 그거 중에 고르라는게 아니였다면 

그 질문은 참으로 비능률적이였다. 

일주년이야, 오늘이 백일이니 265일이 남은 셈이고 

크리스마스 이브는 아직도 까마득하고 

당연히 제일 가까운 내 생일이지, 뭐겠는가. 

물어보나마나지. 

너는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곧 풉 하고 웃어버린다. 

어쭈, 웃음이 나오냐. 요게. 

다시 무릎으로 기어와 품에 안겨오는 너를 좀 째려봐주고나서 끌어안는다. 

"분명히 내 생일이야. 나중에 딴소리하지마, 너." 

단단히 으름장을 놓자, 뭐가 그렇게 흡족한지 

아랫입술까지 꼭 깨물고 웃어보이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웃음앞에 또 사르르 마음이 녹아버린 나는 어느새 

그래, 그래도 생일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나가 죽어라, 반태성. 

나는 이래서 옛날부터 로맨틱 코미디가 싫었다. 

멜로면 멜로고, 코미디면 코미디지. 

로맨틱 코미디따위가 다 뭔가. 

제기랄. 

내 생일이면, 도대체 몇일이 남은거야. 

그러니까 그게... 오늘이 2월 28일이니까. 

하루, 이틀, 삼일, 사일.. 

잠깐. 그럼 

일단 '그거'는 생일선물이고 

나머지 그거랑 그거는.. 어떻게 되는거지? 쩝. 

어느새 귓볼을 핥아오는 네 부드러운 혀의 촉감에 

그런 생각들마저 연기가 되어 흩어져버리는 밤이다. 

역시 오늘은, 아름답다. 

_20060315_김다윗 

그걸로 된거야. 

이건 성숙이나 발전과도 다른 얘기지. 

할수만 있다면 

내가 내 뺨에 힘껏 입맞춰주고 싶은 기분. 

i love david 

you, too?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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