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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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서 바로 소년이 되버리는 거라면 정말 좋을텐데. 

네게 약속했던대로, 가장 화려한 불꽃이 온 하늘을 수놓은 순간 

보기좋게 모두를 따돌리고 너와 함께 도망쳐 나갔었다. 

나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너는 다른 모든것을 버리고 스스럼없이 내 손을 찾아쥘만큼, 

나를 믿고 원하고 있었으니까. 

비행기안에 무사히 몸을 실었을때는 

홀가분함과 짜릿함에 서로 마주보며 웃기까지 했다. 

배를 잡고 웃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너는 나의 어깨에 기대, 난 내 어깨에 기댄 네 작은 머리에 기대 

긴 잠을 잤다. 

이제는 단둘이서 행복하리라 믿었다. 

너를 더욱 철저히 가두어 놓으려했던 나의 괴기스러운 이기심. 

그러나, 나에게도 역시 네가 전부였다. 

네가 처음 태어났던 열살무렵. 

그때부터 나는 온통 너때문에 골머리를 썩혀왔다. 

너를 잃으면, 나도 끝이다. 

게다가 너역시도 이렇게나 나를 좋아하는데 

네가 날 밀어내지 않는데 

그럼, 그렇게 나쁜짓이 아닌것도 같았다. 

나에겐 너만 있으면 되고, 너에겐 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런 너에게 굳이 다른 세상을 보여줘야할까. 

필요없었다. 

우린 둘이서 영원히 행복할거니까. 

너는 새학기부터는 현지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한인들이 사는 곳과는 멀찍이 떨어진 곳이여서 안전했고 

일정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집안의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사립형 중고등학교였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너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왔다. 

써클같은 방과후 활동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너도 내가 퇴짜를 놓은 것에 대해서 두번 조르지는 않았다. 

나와 있는것이 더 좋기때문이라고 혼자 결론내 버렸다. 

친구도 사귀지 않길 바랐다. 

아이들의 괴롭힘을 받는 소위 왕따가 되기를 바란건 절대 아니였지만 

학교란 그저 너에게, 의무사항같은 것이기를 바랐다. 

공부를 잘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들의 작고 평화로운 공간에서 네가 다 자라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조용히. 

나는 스물세살이였고, 사랑하고 싶었다. 

나를 잘 따르고 내가 돌봐줘야하는, 그런 귀여운 꼬맹이로서의 네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을 털어놓고 서로를 열렬히 원하는, 연인으로서의 너를 원했다. 

네가 커서, 내 색시가 되리라는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나이로 열네살. 

중학교 1학년. 

어린이도 아닌, 그렇다고 소년도 아닌. 

여전히 뺨에는 솜털이 보송했고, 

야윈 몸뚱이에는 2차성징의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않는 것 같았지만, 분명 달랐다. 

깊은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 곁에서 곤히 잠든 네 얼굴을 볼때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마냥 천진한 눈빛이 아닌, 뭔가 좀 알아듣는 것같은 표정으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일때, 

더이상 아기처럼 칭얼거리는 말투를 쓰지 않는다는걸 새삼 느낄때 

내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자라고 있었다. 그때까지의 느려터졌던 성장과는 확실히 속도가 달랐다. 

더이상 동화책을 읽지도 않았고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가지고 마루바닥에 엎드리지도 않았다. 

내 무릎위에서 TV를 보지도 않았고 

입술뽀뽀도, 없었다. 

초조해졌다. 

드디어 내 기다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더욱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몸이 닳았다. 

담배가 늘었고, 술이 늘었다. 

네 수업이 마치기 두시간전부터 교문앞에 차를 대놓고 서성거렸다. 

네가 없는 시간에는, 주사를 맞지못한 약물중독자처럼 굴었고 

너와 함께 있을 때에는, 통제하기 힘든 감정때문에 식은땀을 흘려야했다. 

빨리.. 조금 더 빨리.. 내 품에 

방과후에 만나서부터 저녁식사때까지 한마디도 하지않던 너를 붙잡아 앉혔다. 

이래서 싫었던거다. 

내가 지켜줄 수 없는 곳에, 너를 혼자만 보내야하는 불안감. 

그딴거, 정말 싫었다. 

"나... 10학년에 선배가, 사귀자고 했어." 

어질어질했다. 

입술을 악 물어야했다. 

굉장한 모욕이라도 당한듯이 수치심이 느껴졌다. 

누가 너를 욕보인듯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걸 참느라, 몇 분 정도 말을 입안에서 굴리기만 해야했다. 

"잘해주겠대. 내가 예쁘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야, 너?!!" 

그렇게 애썼는데. 

네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어금니를 물고 셔츠깃을 꽉 쥐었는데. 

그렇게 애썼는데.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으려고 

누구도 너에게 손대지 못하게 하려고 

나만 너를 알려고, 네가 나만 알게 하려고 

나는 내 인생을 통째로 바쳐왔는데. 

이런 씨발 

"왜 그렇게, 화를 내?" 

정말 몰라서 묻냐? 

내가 지금 무슨 자선사업하냐? 

야, 김란우. 나 그렇게 착한놈 아니야. 

피 한방울 안섞인 옆집동생, 가수짓까지 때려치우면서 

미국 데려와 먹여살려줄 정도로 한가한 놈 아니라고.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그러는 너야말로, 그렇게 묻는 말투가 왜 신경질적인건대? 

"그 선배, 남자야..." 

그렇게 말하고 너는 나를 노려보던 눈을 거두어 고개를 피해버렸다. 

그딴거 이미 알고있어! 

그럼 너보다 세살이나 많은 여자애가 프로포즈했겠냐? 

네가 앉은 의자앞에 무릎을 굽히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방안을 서성거리며 어떻게든 화를 식혀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얼굴도 잘 생기고, 금발이고, 이...!" 

"시끄러!!!" 

뭐하는 짓이야, 지금. 

김란우, 질투심 유발작전이라도 쓰고있는거냐? 

네 말투, 표정. 꼭 그래보인다. 

에라, 관둬라. 이 애송이야. 

그래봤자 너 열네살이야. 

엄마젖 더 먹어야돼. 

열네살짜리 붙잡고, 나보고 뭐하라고. 

너 좋다고했던 그놈은 그래도 너랑 세살차이지, 

지금 내가 너 데리고 입술부비면 바로 쇠고랑 신세다. 아냐? 

"내가 너, 사내놈들한테 연애나 걸라고 학교보내줬는지 알아?" 

너에게 그런식으로 말한건 처음이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한채 입술에 힘을 주고 나를 노려보는 네 얼굴에 

가슴이 다 뜯기는 것 같았다. 

네게 상처를 주는 내 입술을 갈기갈기 다 찢고싶었다. 

이 저주스러운 혀를 산채로 뽑아다가 태워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너같은거, 죽어버려!" 

라면서, 네가 욕실로 들어가버린 후에야 

겨우 입을 닥칠 수 있었다. 

창가에 늘어서있던 작은 화분들을 모조리 뒤엎어버리고, 

몇일전에 네가 사온, 이름을 알 수 없는 보라빛 꽃들이 풍성하게 꽂힌 꽃병을 

바닥에 내리꽂아 산산조각을 내버리고 

맨주먹으로 몇번이나 벽을 박아대고 나서야 

나는 광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열어주지않는 욕실 문에 기대어 앉아서 

몇번이나, 몇번이나, 네게 용서를 빌었다. 

한참후에 욕실에서 나온 너는, 말개진 얼굴로 나를 꼭 안아주었고 

다음날로 나는, 너의 학교에 찾아가 

이러저러한 일로 네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학교에 오기를 기피하고 있으니 홈스터디를 성적으로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상담을 신청하고 왔다. 

물론, 그 정신적 충격이란건 

너보다는 내 사정에 가까웠지만. 

워낙에 아이들의 정서쪽으로는 예민하신 나라다보니, 

당장에 허가가 떨어졌다. 

일주일에 한번씩 근처의 시립 상담소에 가서 

한시간 가량의 상담을 받아야만 했지만, 너를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그렇게나 투덜투덜 불평도 많고, 까르르 웃음도 많았던 네가 

점점 더 과묵한 아이가 되어가고. 

정말로 반태성이라는 좁다란 세계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자라나는걸 보면서. 

나역시 김란우라는 세계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럼 우리가 갇혀있는 이 세계는 그저 작은 점 하나뿐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매일매일이 무겁게 느껴졌었다. 

너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않았고, 울지도 않았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온종일 내곁에 있으려고 했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려고 했고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란우야, 한국... 가고싶지 않아?" 

가끔 물으면, 

아주 짧은 틈도 두지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형이랑 있는게 좋아." 

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져가도, 네 입술에서 재잘거림이 멀어져가도 

내곁에 있는게 좋다던 너의 말로 나를 합리화했다. 

아직은, 아직은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열다섯살짜리 남자애를 같은 침대에서 재우면서도 

나는 그것이 우리의 끈끈한 우애때문이며,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날마다 되뇌었다. 

너와 내가 살던 조그만 전원주택에는 

일이층 전부합쳐 방이 다섯개였는데. 

그렇다. 새로운 봄이 오고, 너는 열다섯살이 되었었다. 

외국에서 살다온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너도 한국의 또래들보다 어딘가 조숙해 보였다. 

그건 동안인 얼굴과는 관계없이, 옷차림이나 분위기에서 뿜어져나오는 느낌이였다. 

적당히 할랑한 청바지. 

조그마한 엉덩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어느 사이에 넋을 놓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친구도 없이, 부모님도 없이, 오직 반태성이라는 한 인간안에 갇혀서 

아는 사람 하나없는 곳에서 숨을 죽이며 살아가야 하는 너. 

네가 잠이 들면, 조심스럽게 현관을 열고 나와 

몇개비고,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혼자 눈물을 삼켰다.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감싸쥐고, 

도저히 너를 놔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 내안의 악마를 설득해야 했다. 

"웃기지마. 우리는, 그 정도로 변하지 않아." 

네 어머니에게 연락을 드리고, 몇일 동안만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다녀오라는 말로 

너를 비행기에 태워보내고 

그 길로, 살던 집을 모두 정리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몇번이나 돌아보던 너에게 

약속한 날짜에 돌아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능청을 떨어댔었다. 

아마 너는, 한국에 돌아가고 나서야 

내가 너를 완전히 돌려보낸 것이라는걸 알았을 것이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얼굴이 만지고 싶었고 

한밤중에 잠에서 깼을때 옆에 네가 없다는 사실에 

시트를 부여잡고 울어야만 했지만 

내 하나뿐인 소중한 꼬맹이, 우리 란우. 

놓치기 싫었고, 뺏기기 싫었고 

예쁘게 곱게, 그렇게 금지옥엽 길러서 

꼭 내가 갖고싶었던 우리 란우. 

이제 마지막으로 몇 년만 더 견뎌내면, 꿈꾸던 날들이 찾아오리라 믿으면서 

극한의 외로움을 이 악물고 독하게 견뎌냈다. 

처음엔 술과 담배에 찌들어서 지냈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를 지켜주려면 강해져야 했다. 

네가 내것이라고 설명해줄 수 있을만큼. 

높은 산을 기어오르고, 넓은 사막을 횡단하면서. 

닥치는대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너에 대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내면서. 

내 정신도, 마음도, 그리고 사랑도. 

조금씩 청명해져 갔다. 

그래, 다시는 널 못보는게 아니다. 

이건, 마지막의 마지막 기다림이다. 

이것만 끝이 나고나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가 된다. 

9 라는 저주스러움과의 전쟁에도 진정한 매듭이 지어진다. 

신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축복하게 된다. 

네가 있을 서쪽을 향해 담배를 태우는 밤이면 

아무리 입술끝에 미소를 걸어봐도, 눈꼬리 끝에는 촉촉함이 느껴졌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왔다. 

내 어린 연인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기위해서. 

이제 나를 맞이할 준비가 다 되었는지 기쁜 마음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그 가느다란 허리. 

헝클어진 눈빛과 옷 매무새. 

당돌한듯 하면서도 결국엔 꼬리를 내려버리는 천진함. 

완연한 소년이 되어, 내 눈과 마음을 홀리는 너의 완벽함. 

내 입술을 핥고 내 목에 팔을 감는 너는, perfect body & soul. 

각오해. 

열여덟살이라고해서, 봐주는 것 없을테니까. 

김란우. 남자 대 남자다. 

우는 소리 하지마. 

남자는, 끝까지 참는거야. 

어어? 내 손, 밀어내지마. 

그동안 얼마나 컸는지, 좀 보려는 것 뿐이니까. 

_20060314_김다윗 

무너져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해도 

너는 아니야 

나 혼자서 갑니다 

내가 더 미안해요 마이럽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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