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00018
자고 가라며 능글맞게 내 허리를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너를
식은땀을 흘려가며 억지로 떼어놓고
이번에는 그럼, 집에 데려다 주겠다며 자동차 키를 주워드는걸
또 낑낑대며 빼앗아 제자리에 놔두고
아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엘레베이터앞에 서있던 너에게
안녕, 이라는 말도 못해주고 돌아와 버렸다.
아아아, 복잡해.
너는, 모든게 너무 당연하다는듯이 확신에 차있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쨌거나 17년 동안이나 공식적으로는 형 동생 사이였고,
(비공식적으로 우리 둘의 감정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건간에)
너를 향한 내 감정이 유별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보통 남녀 사이에 오가는 그런 종류의 애정일거라고는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면, 다른 뭐가 있을까?"
너는 그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면 뭐겠느냐고.
그 말도 맞는 것 같지만, 난 그렇게 쉽지가 않다.
네가 말하는게 뭔지, 나도 알고있다.
더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또래에 비해서 특별히 순진한 편도 아니다.
난 네꺼, 넌 내꺼. 서로 약속하자는거 아닌가.
그러니까.. 흔히들 하는 말로, 사귀자고..
아, 뭐야, 말해놓고 나니까 진짜 좀 그렇네.
전철로 두 정거장 되는 거리를 찬바람 맞으며 걸었다.
비가 내린 다음이라 제법 공기가 쌀쌀하다.
정신이 번쩍 나기를 바랬지만, 왠지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허공을 딛는 기분이다.
모든 것은 아득해지고, 내려다보는 내 발끝도 현실감이 없다.
네가 둘러준 니트목도리안으로 턱을 묻으면
아련하게 네 향기가 난다.
어릴때부터, 네 냄새를 너무 좋아해서 아무도 못말릴 정도였다.
확실히 우리, 정상은 아니였다.
그래도 정말, 사랑인걸까?!
이대로 나, 반태성이 하자는대로 따라가도 괜찮은걸까?!
"후아-"
사랑한다고 너무 말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티비에 나오는 모습만 봐도,
전화로 목소리만 들어도,
혼자 가만히 이름을 불러봐도
그저 무턱대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져서 난처했던 때가 있었다.
엄마아빠와 네 부모님에게도 문안인사처럼 쉽게 할 수 있었던 그 말을
유독 네앞에서만큼은 머뭇거려야 했던건,
엄마아빠와 네 부모님마저도 시도때도없이 내게 해주셨던 그 말을
유독 너만큼은 내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그건, 그냥 느낌이다. just feeling.
마음안에 있는 변덕스런 누군가가 가만히 알려주는 것이다.
슬쩍 밀어준 쪽지를 열어보면, 거기 그렇게 써있었다.
'절대로 말하지 말 것'
싫다는 나를 억지로 등떠밀면서 말하라고 시킬때는 언제고.
너도, 그랬을까?
그래서 그토록 애절한 눈빛광선을 쏘아대도, 절대로 사랑한다고 해주지 않았던 걸까.
네말대로라면,
우린 같이 있을때도 떨어져 있을때도 항상 같은 길을 걸어왔고
같은 느낌을 가져왔고, 같은 진통속에 있었다니까.
그 말이 진짜인지는 못미더웠지만
확실히, 그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더라도
씁쓸함은 가시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든다.
네말대로 우린 정말, 서로를 연인으로 원하는걸까.
모든게 갑작스럽다.
너는 또 갑자기 돌아와서, 삐걱거리며 겨우겨우 돌아가고있던 내 생활을 휘저어 놓았고
갑자기 키스를 했고
나를 야릇한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 그 눈빛,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나도 알건 다 아는 열일곱 살인데,
그런 노골적인 눈빛으로 쳐다보면 어쩌라는건가.
하지만 네 그 눈빛이 아주 조금쯤은 멋지다고 느끼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아직 용서하면 안되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날을 찢긴 가슴을 움켜쥐고 울어야 했는데.
얼마나 원망하고, 얼마나 미워하고, 그러다가 지쳐서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돌아와주기만 해달라고.
그런데 또, 아무렇지 않은 듯 나타나서는
이번엔 정말로 내 전부를 내놓으란다.
처음부터 자기것이였던 것처럼, 맡겨놓고 간 사람처럼, 너무도 당당하게.
하지만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기다림에 지쳐 너를 포기해 버렸던걸까.
입술에 가만히 손가락을 대본다.
달콤한 폭군처럼, 강압적이면서도 세심하게 내 안을 사랑해주었다.
분명히,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말해주지 않아도, 그 혀끝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 느낌만을 믿고 뛰어들기엔
내 눈은 아직 너무 말랑말랑하고, 거기에 새겨진 상처는 너무 날카롭다.
그런 키스 한 번으로 다 없었던 일이 될수는 없는 것이다.
너는, 열일곱살을 너무 모른다.
"어떻게 할래, 란우야?
엄마아빠는, 란우가 하고싶은대로 해주기로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손을 꼭 잡은 엄마의 눈은 슬퍼보였다.
엄마, 미안해.
하지만 나에게 물어봐도
애초에 선택권같은건 여기 없었는걸.
그건 나에게는, 생존의 문제였으니까.
"...생각해 볼게."
어린 마음에도, 단번에 너를 따라가겠다고 대답하면 안 될것 같았다.
언제나 내게, 엄마보다 너를 더 좋아하는거 아니냐며 놀리던 엄마였는데
그게 사실이라는걸 알게되면 충격으로 쓰러지실까봐 겁이 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너를, 자꾸만 껴안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나하고만 있기를 바랬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안아주려고 하면 도망갔고, 집에서는 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엄마가 너희 어머니와 온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도 전혀 질투나지 않았으니까.
"란우야, 란우야."
"으으응.."
한참 깊이 잠들어 있다가, 쌀쌀한 바람냄새에 눈을 떴다.
검은 점퍼를 입은 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네가 자고있는 나를 다 깨우다니. 무슨 급한 일인가 싶었다.
너는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란우, 형이랑 같이 갈거지?"
그건 채근하는 목소리가 아니였다.
너는 얄밉게도,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저 너의 일정표에 차질이 없도록, 내 확답을 듣고싶었을 뿐.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자다말고 일어나서도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네 품에서 마냥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간다.
네가 그놈의 데이비드를 때려치우고,
나에게 둘만의 세계로 떠나자고 하는데
내가 뭣때문에 거절하겠는가.
간절히 바라던 바다.
엄마?
괜찮다. 엄마에겐 아빠가 있다.
아빠? 아빠에겐 회사가 있다.
엄마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버리고 두분이서 결혼하신거 아닌가.
내 경우엔 상황이 조금 다르긴했지만, 나에겐 결혼보다 더 중요했다.
엄마는 처음엔 내 학업을 걱정했지만
분명히 네가 또, 온갖 자료들을 펼쳐보이면서
'란우의 교육에 대해서는..'어쩌고 저쩌고하며, 구워삶아 놓았을거다.
결국 엄마도,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어쨌든, 너를 믿었던 것이다.
(네가 나에게 키스한걸 알면, 엄마는 뭐라고 할까.
그거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기분이겠지.)
정말 네말대로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나는 짜릿함까지 느낄 지경이였다.
방송국마다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어,
데이비드의 해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시시각각 전하느라 혈안이였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혀 버렸다.
해체의사가 담긴 싱글앨범이 같은 날, 같은 시간
전국에서 동시발매 되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비드의 첫번째 싱글을 손에 넣은 팬들은
뜻하지않은 서프라이즈 선물까지 받게된 것이다.
추구할만한 가치란 하나도 남기지않고 말살되어 버린 시시한 세상.
그 안에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유일한 beauty.
이 세상의 모든 9 를 향한 전쟁선포.
나는 한 번도, 대중의 것인 적, 없었다.
_데이비드 싱글앨범, special thanks to
내 나이 열네살.
끝내 눈물을 보인 엄마를 떨쳐두고,
천하의 불효자는 네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잔인한 동심은, 행복했다.
이제 너는 완전히 내꺼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도 너를 모르는 곳에서, 나만을 아껴주는 너와 함께
매일매일이 행복할거라고.
그래, 분명 너는 완전히 내것이였고 나만을 아껴주었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씩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벌써 오래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어긋남이였을지도 모른다.
그 무겁고 어두운 공기.
방안가득 긴 꼬리를 늘어뜨리면서 떠돌아 다니던, 검은 공포.
생각만해도 가슴이 짓눌린다.
기억은, 되살려지기를 거부한다.
괜찮아.
넌 돌아왔어.
좀전까지 같이 있었잖아.
키스까지 하면서 프로포즈 비슷한 것도 해왔다고.
동요하기 시작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붙잡는다.
그래, 네가 와있다. 여기 같은 하늘 아래에.
예전처럼. 내 말 한마디에 살고죽는 사람처럼 굴면서.
그러니까.. 무서워할거 없어.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는 거라고 분명.
가까스로 기억으로부터 튕겨져 나온다.
눈물을 닦고 호흡을 진정시킨다.
어쩌면, 내가 정말 묻고 싶었던 하나는,
"네가 하자는대로 하면,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되면,
그럼, 정말 다시는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거야?
떨어져있지 않아도 되는거야?"
내 안에서 천천히 자라고 있었던 감정이 뭐였든지간에
17년 동안을 형이라고 부르고 형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단 한순간에 '아, 그렇구나'하고 연인으로 쉽게 받아들여 지지는 않는다.
네가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정처리가 잘 안되는데
너는 역시, 보자마자 더 엄청난 폭탄을 떠안겨 주었다.
싫다던 나를 억지로 한국에 보내버리고 증발해버렸던 그 2년동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디에서 뭘 하면서 보냈는지
그동안 내가 입어온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해줄건지..
등등, 똑 부러지게 따질 것들이 산더미처럼 있었는데.
결국 또, 어린애처럼 울면서 다그친건 내쪽이다.
"이제오니? 어제, 태성이한테서 잤다며?"
엄마가 반갑게 맞아준다.
네가 그사이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술먹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놈의 집에서 아무렇게나 구겨져 잔게 아니라,
네집에서 편안하고 안전하게 있었다는 사실이 엄마를 안심하게 했으리라.
하지만 엄마 생각처럼
반태성이 안전한 인간일까.
"좀전에 태성이가 전화했었어.
너 도착할때 됐으니까 걱정마시라고.
형이랑, 얘기 많이 하고 재미있게 놀았어?"
나의 일상속으로 네가 섞여들어오는 이 느낌.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먼저 안심해 버린다.
이래가지고는, 어리광쟁이 딱지를 뗄 수 없다.
"나 아직, 다 용서한거 아니야.
그러니까 엄마도 너무 좋아하지마."
내가 너때문에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다 알면서도
엄마는 너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너는 나를 정말로 아끼고 있다면서, 오히려 네 편을 들었다.
그래, 세상은 다 반태성편이고
혼자 꽁해서 속좁게 고집부리는건 김란우 하나뿐이다.
그래도 뭐 어떤가.
너는, 그런 내 마음 하나가 간절하다고 했다.
방안에 들어와 침대위에 털썩 엎드려 누웠다.
엉켜있는 실타래 모양으로 까맣게 칠해진 머릿속을
너의 부드러운 입술이 슬그머니 열고 들어온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잔뜩인데, 머릿속에 남은 것은
네 혀의 강렬한 움직임 뿐이다.
날 그대로 삼켜버리려는 줄 알았다.
아는가?
촉각의 힘은 너무도 지배적이라는 것을.
눈앞에 보이지않으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을만큼
내 상처는 깊고, 내 마음은 약해져 있지만
나를 정성스럽게 다루어주던 너의 움직임을 떠올리니 얼마쯤 위로가 되었다.
뭔가, 다정하고 따스하면서도 엄청나게 야한 느낌.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
아직 정말로 거기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지지만,
그럼 난 또 모든걸 너에게 기대려고만 하겠지.
혼자서 생각하는 것도, 결정하는 것도, 받아들이는 것도 하지 못하고
어느 순간, 에라 모르겠다 너만 있으면 상관없는 거잖아, 하고 다 던져버릴테니까.
네가 꼭꼭 둘러준 목도리에 뺨을 대본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
17년 동안 줄곧 귀찮도록 네 뒷꽁무늬만 쫓아다녀 놓고선
이제와서 그저 형동생 사이일 뿐이라며 뻣뻣하게 굴 생각은 아니지만,
난 계속해서 비뚤게 자라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둘리기만 하는동안 완전히 지쳐버린 가슴은
예쁘게 웃고, 예쁘게 말하고, 예쁘게 가서 안기는 방법을 전혀 모른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건지
아아, 벌써부터 생각의 실타래따윈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반태성, 지켜보겠어.
난 절대로, 좋아, 라는 말따위 먼저 할 수 없는 애가 되버렸다고.
그건 네 책임이니까, 네가 한번 잘해봐.
흥. 남자라면 밀어 붙일줄도 알아야지.
큰일이다.
아무리 진지해지려고 해도, 심각해지려고 해도
네 혀가 핥고 지나간 자리의 감각만이 점점 비대해져
마치 내겐 감정도 생각도 없고, 오직 그 감각만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첫키스를 하면 종소리가 들린다더니, 그 말은 진짜였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인생의 종소리가 들릴 것 같다.
키스, and the next big thing
_20060307_김다윗
#
the next big thing
다음번의 큰 것
#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