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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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 정말.. 이러는게 맞는거야?" 

혼란스러워, 라고 써있는 것 같은 눈동자로 

내게 그렇게 물어봤자 

내 귀에는 질문으로 들리지 않는걸. 

네 그 애원하는듯한 묘한 울림의 목소리만이 내 고막을 간지럽혀 댄다. 

난 모르겠어 그러니까 네가 나에게 그렇다고 말해줘. 

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이 응석쟁이. 

내 쇼파위에 웅크리고 앉아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뜯고있는게 

그러니까 벌써.. 한시간 삼십분째. 

저런 류의 비슷한 질문을 받은게.. 음.. 열번째인가, 스무번째인가. 

아무튼 무척 여러번. 

"그러면, 다른 뭐가 있을까?" 

네 옆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내가 말한다. 

너는 움찔하면서 슬그머니 좀 더 옆으로 비켜난다. 

하하, 뭐하는거야, 김란우? 

네가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괜시리 나까지 들떠 버렸다. 

난 전혀 그런 생각 없었다고.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부추기지? 

네가 옆으로 옮겨간만큼 능청스럽게 나도 엉덩이를 끌어간다. 

"뭐, 뭐야! 장난치지마, 이런 심각한 순간에." 

그건 좋은데,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래? 

검은 파도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비죽이 고개를 내밀고있는 동그란 귀가 눈에 들어온다. 

혀를 대고 핥으면, 분명, 그대로 녹아버리겠지. 

난 얼른 고개를 돌린다. 

네말대로 지금은, 심각한 순간인 것이다. 

나로서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어린 연인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으니 

적어도 그걸 넘길 수 있도록 협조하는 척이라도 해야한다. 

하지만 생각해봐, 김란우.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건, 이제 딱 하나뿐이야. 

내 논리에 전혀 오류가 없잖아, 안그래? 

억지쓰고 있는거 아니잖아, 정말. 

열일곱해 동안 공들여 물을 주고 시간맞춰 햇빛을 받게하고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면서 소중히 길러온 풀잎에서 

드디어 막 솟아난 봉오리는, 조심스럽게 다뤄야하는 것이다. 

그게 맞다. 

천-천히, 꽃잎 하나하나를 내 손끝으로 살며시 열어가야지. 

그럼. 난 할 수 있고말고. 

17년이나 기다렸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물론, 아무것도 아닐리가 없다!) 

"난.. 모르겠어." 

넌 늘 몰랐어. 

하긴, 나도 정확히 알게 된지는 얼마 안됐으니 잘난척할 처지는 아니지만. 

"내가 알아. 그러니까 그냥 따라와." 

나름대로는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를 내보겠다고 했는데 

넌 도저히 신용이 생기지 않는다는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잔뜩 찌푸려져있는 귀여운 미간. 

네가 뭘 말해도, 어떻게 행동해도 

입술부터 들이밀고 싶어지는 스물여섯의 다 큰 남자. 

이런 식은 곤란하다. 

"뭐, 뭘 어떻게 어디로 따라오라는거야, 도대체! 

알 수 없는 얘기만 하잖아, 넌 항상." 

급기야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참을성없는 열일곱살. 

"그거야 뻔하잖아?" 

어째서 못 알아듣는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마음 급한 스물여섯살. 

"넌 어떻게 그렇게 편안해? 

그게 날 열받게 해. 

왜 늘 혼란에 빠지고 갈등하는건 나뿐이냐고! 

넌 항상, 너무 태연해 보이잖아. 

키.. 키스도 그렇고.." 

한껏 흥분해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따지고 들다가 

순식간에 말끝을 흐리면서 눈을 피해버리는 사랑스러움. 

도대체 저런걸 어디서 배웠을까!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 대면서 

마음속으로 포인트를 적립한다. 

당장 덤벼들고 싶은 기분이 들때마다 차곡차곡 포인트를 적립해 두었다가 

드디어 네가 ok하는 그 순간에 모조리 풀어버릴 셈이다. 

아, 날 이상한 사람 취급은 말아주길 바란다. 

17년동안 그 고생을 하면서, 저애의 영혼만을 붙잡고 있었으니 

이제 그 보상을 좀 받겠다는데, 그게 뭐 문제가 되나?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다. 

우린 영혼의 결합은 잠깐 좀 쉬어도 된다. 

나이가 되었으니 거기에 어울리는 사랑을 하겠다는데 

내가 어디 이상한거 아니잖아? 

게다가 저 빚어진 형상을 봐라! 

신에게 맞서 빼앗아온 보람이 있다. 

충분하다. 

신이 그토록 나를 시샘할만 하다. 

이해한다. 

용서는 못하겠지만. 

"키스가 왜?" 

쇼파 등받이위로 팔을 두르면서 네쪽으로 상체를 숙인다. 

그 말랑말랑한 입술에서 나오는 '키스'라는 말의 어감에 

절벽끝에 선 내 두다리가 휘청거린다. 

아찔하다. 

"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렸잖아!" 

"아무렇지 않을리가 없잖아. 바보." 

솜털이 보송한 뺨을 가볍게 꼬집어 주었다. 

어떻게 내가 아무렇지 않을수가 있나. 

너의 호흡 하나, 눈빛 조각 하나,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쩔 줄 몰라 마음만 다급한 나인데 

어떻게 내가 태연할거란 생각을 하는거지. 

"네가 태어나서 이만큼 자랄때까지, 온통 너를 중심으로 돌아왔어, 내 인생." 

"거짓말." 

아, 이런 비슷한 말 

언젠가도 들었던 것 같다. 

데이비드의 두번째 앨범을 가지고 귀국했을 때. 

한강이 내려다보이던 아파트에서. 

반년만에 만난 너는 5학년이 되어있었고, 보고싶지 않았냐는 내 질문에 

거짓말쟁이 라고 비수를 꽂아버렸었지. 

하지만 누가 알아줄까. 

너에게 거짓말쟁이에 나쁜놈일 수 밖에 없었던 내 처량한 신세를. 

"하고싶은대로 다하고 살았으면서. 

나같은거,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잖아!" 

언젠가 이런 가슴 찢어지는 말을 들을 날이 올거라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 각오가 실전에서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시켜주느냐 하면, 

절대 네버. 

"그렇지 않아!" 

어떻게 할까. 

이 자리에서 내 왼쪽 가슴을 십자로 긋고 

그 안에 들어있는 썩어 문드러진 심장을 꺼내, 눈앞에 보여줄까. 

그러면 내 마음 다 알아줄래? 

"너는.. 아니, 네가.. 너무 작아서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너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네가 나를 이해 못할리 없다. 

나는 시간도 이길 수 있다. 

그깟 9년이라는 시간때문에, 떨어져 있었던 2년이라는 시간때문에 

너를 놓칠만큼 바보가 아니다. 

운명이라는게 그렇게 쉬운 것이였다면 

난 진작에 너를 놔버렸을 것이다. 

어린이가 소년이 되기까지는, 

아이가 사랑이라는 말 안에 담긴 복잡한 것들을 이해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17년. 난 벌써 스물여섯살이 되버렸다. 

"그래서. 이젠 내가 다 컸으니까 

이것저것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생겼다는 거야?" 

"왜 자꾸 비뚤게 얘기해? 그런 말 아니잖아!" 

"상처 받았으니까!!" 

야위고 작은 몸안에는, 혹시 눈물만 가득차 있는게 아닐까. 

네 어깨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면, 찰랑찰랑하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눈 주위의 여린 피부가 발갛게 짓물러 있다. 

어젯밤부터 내내 울어댔으니, 그럴만도 하다. 

가슴에 찬물을 끼얹은듯 냉기가 엄습한다. 

나는 벌을 받고 있다.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너에게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렸던 너를, 내곁에 붙잡아두었던 잔혹함에 대해서 

죄값을 치루고 있다. 

그게 너에게 상처가 되리라는 것을 몰랐던건 아니다. 

그래도 

"너를 잃지 않기 위해서, 어쩔수가 없었어." 

"내가 원했던건! 그냥.. 그냥 같이 있는거였어!" 

알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너의 순수함 역시, 나에게는 잔인함이였다는 걸. 

너는 아직 순수한 마음이 너무 예쁘게 남았어 

하지만 나는 왜 그런지 모두가 어려운걸 

세상은 분명히 변하겠지 

우리의 생각들도 달라지겠지 

생각해봐 어려운 일 뿐이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을 때로는 외면하고 얼굴을 돌리는건 

넌 느끼니 

너를 싫어해서가 아니야 

_서태지와 아이들, 너에게

서태지는 비겁했다. 

그가 부른 '너에게'에는 온통 감정을 숨기고 제어하려는 비관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세상을 상대로 마침내 네 마음을 지켜낸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고독한 싸움이였다. 

누군가, 한 번 더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손사래를 치겠지만 

한 번 더 이겨내야만 너를 가질 수 있는거라면 

결국 또 나는 그 지독함속으로 걸어 들어가겠지. 

그게 나의 운명이다, 꼬맹아. 

네가 아니면 안되는 것. 

"김란우. 나도 이번에는 용서해달라고 하지 않을거야. 

같이 있을때도 떨어져 있을때도, 우린 항상 같은 길을 걸어왔어. 

같은 느낌을 가져왔어. 

똑같은 진통속에 있었어." 

서럽게 울음을 삼켜내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내 이야기를 듣는다.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들썩이는 두 어깨에 내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만 같다. 

너는 어떻게, 이토록 애절할 수 있나. 

"네가 나이고, 내가 너였다면.. 그럼 넌 어떻게 했을지,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나에겐 최선이였다는 거야. 

너를 영영 잃어버리느니, 함께 힘들어하는게 낫다고 생각했어. 

내 생각이, 틀렸어?" 

너는 대답이 없다. 

어깨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기다렸어. 사랑한다고 말해도 되는 날.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기다려왔어."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 주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내 마음을 고백해야 알아듣는건가? 

이렇게 바닥까지 다 보여주고나면, 그럼 널 얻을 수 있는건가? 

겨우 좀 진정이 된 것 같은 너는, 그래도 아직 3%는 나를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네 마음인데 

뭘 그렇게 겁먹어서 이리저리 재보는건지. 

"너도, 내 마음이랑 같잖아. 

아니야? 내가 헛다리 짚은거야? 

나, 짝사랑이야?" 

음.. 이제 한, 2.7%로 줄어든건가? 

"내가 꼬맹이였을 때도, 그때도 날 보면서 그런 생각.. 했어?" 

웃어버렸다. 

조그만 얼굴을 내 두 손바닥으로 가려버렸다. 

한 손바닥으로도 충분할 것 같지만. 

"어린이였던 김란우는, 어린이 김란우대로 사랑했어. 

절대로, 이상한 생각한적 없어. 이 바보야. 

그냥.. 빨리 자라기를 바란 적은 몇 번 있지만." 

헛기침이 절로 나온다. 

이런 것까지 말해야 되는건가, 정말. 

그 안에 담긴 무엇이라도 그대로 비칠 것 같은 맑은 두 눈이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다. 

1.8%? 

"언젠가는 이렇게 자라서 

'난 형아가 좋아'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렸지." 

"뭐야!" 

아아, 다른건 몰라도 이 막무가내로 걷어차는 버릇만은 고쳐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제 0.5% 정도만 남은건가? 

슬슬 굳히기를 들어가려고 하는데, 

네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도.. 난 아직 잘 모르겠어. 

아직 너, 다 용서하지도 못했고." 

아니! 

반태성이 그렇게까지 망가져줬으면, 예의상으로라도 

못이기는척 넘어와줘야 하는거 아닌가? 

넌 몰라도 돼. 

넌 몰라도 상관없어. 내가 안다니까, 내가. 

어디까지 내 애간장을 녹여먹여야 네 마음이 풀리는걸까. 

그런 탐스러운 눈코입으로 줄듯말듯 약을 올리면, 

속마음까지 다 드러내 보여주고 밑천이 바닥나버린 나는 어떻게 하라는건가. 

쳐다보면서 침이나 흘리고 있으라고? 

안돼. 못해. 

"그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어." 

자뭇 진지하게 목소리를 쫙 깔아줬다. 

호기심에 가득찬 두 작은별이 나를 향해 반짝인다. 

내 언젠가 저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주리라. 

"뭔대?" 

잡고있던 네 두손을 내 가슴쪽으로 가까이 당긴다. 

너의 상체도 내쪽으로 이끌려온다. 

이제 서로의 얼굴은 불과 10cm의 사이를 두고있고, 그 사이로는 

무수한 감정들이 번개가 되고 천둥이 되어 몰아친다. 

소리가 없는 천둥과, 번쩍임이 없는 번개다. 

"아까 했던 거, 다시 해보는거야." 

불행하게도 

넌 더이상, 내 어설픈 속임수에 넘어갈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믿을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였지만 

모르는척, 내 입술을 받아주기를 아주 기대하지 않은것도 아니였는데. 

"못믿어! 네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믿어!" 

억울하다. 

과연 나는, 얌전히 기다릴 수 있을까. 

자신없는데. 

신의 마지막 발악이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반태성이다. 

꼬맹아, 형이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사탕주면서 부드럽게 달랠때 고분고분 따라와줘야 착한 어린이지. 

안 그러면 형아도, 무서워질지 몰라. 

정말이야, 약속해. 

하나도 안아플거야. 

_20050306_김다윗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같은 나의 마음을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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