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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어?"
밖은 날씨가 흐리다.
내 침대에서 잠이 깬 너의 모습은 당장 달려들어 온 몸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다.
네가 몸을 일으키자 야윈 상반신이 이불위로 드러난다.
하얗고, 작고, 가느다란 몸.
밤새도록 내 품을 파고들면서 이마와 뺨을 내 가슴에 부벼댔던 것을 생각하니
약간 긴장이 되면서, 허리쪽에 힘이 들어간다.
주정인지 뭔지 모를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너는 밤새도록 울다 잠들다를 반복했었다.
나라고해서, 내 생살과도 같은 너를 떨어뜨려놓고 싶었을까.
늘 이기적이였던 내가 처음으로 너를 위해 내린 결정이였는데.
과연 그게 옳은 일이였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봤다.
정말 그래?
우리 둘이 꼭 끌어안고 함께 검은 바다밑으로 가라앉아 버리는게 나았을까?
아니다.
아무리 네가 혼자였던 시간들의 끔찍함을 내게 원망해도, 그건 아니다.
너의 행복을 확신할 수 없어서 보냈다.
내곁에 있는게 너의 행복이라던 나의 뻔뻔한 이기심도
더는 버텨낼수가 없을만큼, 나는 망가져가고 있었으니까.
미친놈이다, 정신병자다, 집착이다
뭐라고들 떠들어도, 결국 내가 바라는건
김란우의 행복이니까.
내 선택이 잘못 됐을리는 없다.
칭얼거리면서 품을 파고드는 너에게 밤새도록 얘기해주었다.
괜찮다고, 이제 다시 만났으니까 괜찮다고.
"내 옷, 줘."
숙취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모양이다.
한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미간을 찡그린다.
어린애였을 때보다 더 사랑스럽다. 이건 말도 안돼.
"자, 물부터 마셔."
어젯밤에 내 옷깃을 꼭 붙잡던 작은 손이
취기를 빌린 행동이였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치 납치당해 온 사람처럼 쌀쌀맞게 굴줄은 몰랐다.
귀여운 너.
네 발로 걸어왔잖아. 김란우.
"필요없어! 내 옷 내놔!"
신이여, 보라. 보고 후회하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물리치고 이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당신 스스로를 저주하라.
아름다운 피조물은, 미소로 꽃이 되고
눈물로 이슬비가 되고
심지어, 소리치고 밀어내는 것으로도 가련한 작은 짐승이 된다.
한없는 사랑의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아무것도 모른채 웃고, 울고, 토라지고, 입맞추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때의 너도 내게는 절대적이였건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상처를 간직한 제 가슴을 무기로 상대를 위협하는 소년의 위기는
그야말로 아찔하게 펼쳐지는 화려한 유혹이다.
안돼, 너무 빨라.
가느다란 두 팔과 두 다리를 결박시키고 짓누르고 싶다.
상처로 유린당한 눈동자는 나를 홀린다.
그 상처가 나로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나를 전율시킨다.
내가 왜 이제껏 네앞에서 그토록 힘들었는지.
어느 순간, 함께있는 것마저 고통이 되버렸는지.
딴청을 피우면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시간, 그 자체를 파괴해 버리고 싶었던 내 괴팍함까지.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
안개가 걷히고, 두통이 사라진다.
눈물을 걷어내고, 고개를 든다.
훌륭하게 성장한 너의 모습.
얇은 눈꺼풀이 반쯤 흘러내려 투명한 눈동자를 가린다.
촉촉한 머리칼이 목덜미를 타고 내려간다.
길고 홀쭉해진 목선과 야윈 어깨, 무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한줌의 허리.
스물여섯의 나는 그 앞에, 소리없이 열광한다.
동등해진 것이다.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내가 무엇을 기다려 왔는지.
게으름을 피우는 시간을 왜 그렇게 잡아끌고 싶어했는지.
대답은 너무 뻔하다.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겠는가.
인생의 보람이랄까.
이제까지 잘 버텨온 나 자신이 무한히 대견스러워진다.
맹세코 나는, 단 한번도, 어린 너를 눈앞에 두고 딴 생각을 품었던 적이 없다.
내가 너에게 보이는 강한 집착들을 굳이 따지고 해석하려 들어본적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뿐.
정말로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
아버지가 아들을 품에 안듯이.
형이 아우를 지켜주듯이.
스승이 제자를 끌어주듯이.
아니, 너와 나는, 세상의 그 모든 관계를 다 아우르고 뛰어넘는다고.
나는 거기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적이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형이 아우를 어여쁘게 여기는건 당연하지만
스승이 제자를 위해 가진 것을 풀어놓는건 당연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너를 갖는 것보다 당연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된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물부터 마시고, 밥 먹어. 그러면 옷 줄게."
"나 장난치는거 아니야, 반태성.
지금도 내가 네 마음대로 될거라고 생각한다면, 진짜 착각이야."
적대감이 철철 흘러넘치는 말투.
확실히, 어젯밤에 내 현관에 서서
술에 취한 눈으로 흘겨보던 것보다는 상당히 타격이 컸지만 그래도 참을만 하다.
아름다운 피조물들의 강점은 이런 것이다.
"그런 눈으로 그런 말 늘어놓을거면, 찾아오지 말았어야지."
흰 티셔츠를 네 머리부터 뒤집어 씌웠다.
팔을 끼워주려고 하자,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내 손을 쳐내더니
혼자서 티셔츠에 두 팔을 꿰넣는다.
계속 그런 반누드 차림으로 날 쏘아보면서 반항한다면
오늘 여기서, 범죄가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건 내가 바라는 방법이 아니다.
가장 기대되는 선물 상자는 마지막에 풀어봐야 하는 법.
우린 언제나 같은 마음이였고
N극과 S극처럼,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그게 서로의 삶의 전부였다.
지금은 잘 모르고 있더라도, 너도 곧 나와 같은 마음이 되겠지.
어젯밤의 네 모든 행동들이 내 추측을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로, 시간문제.
기쁘지 않아, 넌?
어린 너를 그렇게까지 괴롭히면서 나 혼자 지켜왔어야 했던 모든 것들.
이제 필요없어진거야.
너를 가둬두고 구속했던 무겁고 음침한 족쇄들도 이제는 풀어줄게.
왜냐하면, 넌 이제 다 컸으니까.
우리 착한 김란우
네 그 두 발로 내 품까지 직접 걸어와.
이래도 모르겠어?
"술먹고 뭔들 못해."
여전히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말투.
그걸 변명이라고 하다니.
열일곱살의 너는 여전히 좀 어리숙한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순진함을 다 잃어버린 닳고 닳은 예쁜 인형이라면, 물론 그건 안된다.
너는 역시나 완전하다.
내게 꼭 맞췄다.
"너, 울면서 나한테 가지 말라고 했어."
침대위에 마주 앉아있는 지금 이 상황.
왠지 묘하지 않아?
괴롭히려는건 아닌데, 코너로 몰아가고 싶은건 아닌데.
노려보는 두 눈동자의 건방짐이, 자꾸만 울리고 싶어져.
나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너를 보고싶어져.
"내, 내가 언제!"
펄쩍 뛰면서 정색을 하는 바람에 침대시트가 울렁거렸다.
이렇게 쉬운데도 질리지가 않는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줄곧, 반태성이라는 남자에게
한없이 휘둘리기만 하면서 살아온 김란우.
그런데도 싫증이 나기는 커녕, 더더욱 내것으로 만들고만 싶은 김란우.
이런게 운명이 아니라면, 세상에 운명은 없다.
"여기 안보여?
네가 하도 파고드는 바람에 네 눈물이랑 콧물이랑 다 묻어있는거."
티셔츠에 얼룩져있는 네 흔적을 눈앞으로 바짝 끌어다 보여주었다.
너는 입술을 꼭 깨문다. 분하고 억울해서 말을 잇지 못한다.
네 눈에 핑그르르 고여오는 눈물에, 동물적인 가학성이 움틀움틀한다.
저 눈물에 넘어오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게하는 강압이다.
하지만 너의 눈물은, 마음 자체를 뒤흔든다.
그 눈물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너지고 약해진다.
네가 내게 요구하는 무엇이라도 네앞에 내놓고 싶어진다.
단, 조금만 더 후에.
"완전히 울보구나."
부르르 몸을 떨어가면서까지 너는 필사적이였지만
결국,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또륵 굴러 떨어진다.
미안.
그래도 견뎌줘.
괴롭히지 않으면, 키스해버릴 것 같아서.
"너같은 새끼, 진짜 꼴도 보기 싫어.
재수없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
네가 날, 도대체 몇 번 버렸는지 기억이나 해?
그러고도 다시 날 보겠다고?
도대체 얼마나 얼굴이 두꺼운거야?"
"그때 보내지 않았으면, 넌 지금보다 더 많이 나 미워했어."
나는 침대 이쪽끝에 걸터앉아있고
너는 조금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손만 뻗으면 끌어안고 입을 맞출 수 있는 거리.
이젠 너도, 진짜 키스가 뭔지 알고 있겠지.
"난 보내달라고 한적 없었어!!"
드디어 내 어린 연인이 폭발했다.
어젯밤에 그렇게 흘려대고도 아직도 저렇게 넘쳐날만큼의 눈물이 남아있다니.
겉모습만 반항적으로 그럴싸할뿐,
정말 울보로 자라버렸다.
어렸을 때의 너는
그저 내가 꼭 안아주고 입맞춰주고 잘못했다고 귓가에 속삭여주면
못 이기는척 내 목을 마주 끌어안곤 했는데.
그리고 햄버거에 포켓몬스터 카드면 완전히 상황종결이였지.
열일곱살이 된 너는,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거지?
"그래, 넌 보내달라고 한적 없었어.
내가 놔준거야.
내옆에서 하루하루 병들어 가는걸, 내가 어떻게 보고있어?"
"돌아와서도 나, 멀쩡하지 못했어.
이러나 저러나, 네가 나한테 못할 짓 한건 마찬가지 아니야?"
이렇게 내 가슴을 후벼팔 줄도 알고
정말 이제 다 커버린거다.
왜 그런건지, 아무 이유도 모른채로 내게 끌려다니기만 해야했던 어린 시절과는 분명히 다르다.
좋아. 내 이기심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면.
언젠가 너에게 뺨 한대 정도는 맞지 않을까, 늘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란우야.."
"내 이름 부르지도마! 이 개새끼야!"
그리고 너의 주먹질이 시작됐다.
닥치는대로 발로 걷어차고 주먹을 휘두르는 버릇은 조금도 고쳐지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넌 이제 꼬맹이가 아니라고.
시원하게 뺨 한대 맞고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아프다. 란우야.
란우도, 많이 아팠어?
"그렇게 데리고 날라버렸으면, 죽이되든 밥이되든 끝까지 책임을 졌어야 될거 아니야!!"
사정없이 내 등과 어깨를 두드려대는 네 두손을 꽉 붙잡았다.
서럽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를 노려보는 두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꼬르륵, 눈물에 가라앉아 버릴 것 같아서 겁이 난다.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그럼 된거야."
"아니야. 난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돌아와서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너 알아?
매일매일 악몽에 시달리고, 너 죽었다는 기사에 믿지도 못하고 안 믿지도 못하고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버텨왔는지 아냐고!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도 날 피말려 죽일 생각이였으면
차라리 옆에 데려다놓고 단칼에 죽여버리는게 나았을거 아냐!"
너를 보지 못했던 나에게도, 그건 죽음과 같은 시간이였다고.
너와 나는 마치 하나를 둘로 갈라놓은 것처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같은 길을 가게 되니까.
그건, 서로를 향해서 나아가는 길.
네가 느끼는 꼭 그만큼 내가.
내가 느끼는 꼭 그만큼 너도.
어젯밤부터 내내 내 시선을 붙잡아왔던 그 허리에 손을 뻗는다.
힘없이 내 팔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나긋함에 온 정신이 휘청거린다.
눈물에 젖은 검은 곱슬머리를 한손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 불과 5cm도 되지않는 사정거리안에서
네개의 눈동자가 애틋하게 맞부딪혔다.
란우야, 나 들어간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완전한 어둠인 동시에 눈부시게 환한 너의 세계.
나는, 그 안을 최초로 항해하는 선택받은 순례자.
유일한 정복자.
울지마.
자꾸만 흘러 들어오는 눈물때문에, 우리의 첫키스가 망가지잖아.
울지만 말고, 가만히 눈 감아봐, 김란우.
내가 하고싶은 모든 말들을 지금 너에게로 흘려넣고 있잖아. 들려?
말로는 다 못해.
말로는 못 전해.
입술을 떼고나면, 시원하게 한 대 올려붙여줘.
각오하고 있던 일이니까 괜찮아.
울지마. 누가 너 잡아 먹는대?
잡아 먹는건 나중이니까, 미리 울지마.
혹시라도 처음이 아니라고 잡아뗄 생각은 하지마.
너의 조그맣고 귀여운 혀가, 벌써 나한테 다 불어버렸으니까.
'꺄악- 누구세요!'
'주인님이시다'
_20060302_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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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무리 많은 불이 켜져 있어도
이미 내게는 아무런 위로가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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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