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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정말 싫어.
연한 아이보리의 목련이 담을 따라 탐스럽게 열리고
구김 하나없는 화이트의 햇살이 소리도 없이 공기속으로 충만하게 스미는 봄.
모두의 얼굴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느슨한 봄의 오후에도
나는 끈끈한 어둠속에서 혼자였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데이비드를 알고, 반태성을 아는 사람들이
전부 다 네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겉으로는 선량한 서민인척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실은 너에게, 자신들을 놀래켜줄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모습을 요구하고
널 먼 곳으로 내쫓고 자신들의 세계속에 받아들여주지 않고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너를 밀어 올리면서
네게 잔인한 짓들을 하고 있다고.
너는 울고있을텐데, 검은 커튼을 꼭꼭 여며 빛을 가린 아파트에서
거대하고 차가운 머신(machine)들에 짓눌려가면서
담배만 늘어가고 있을텐데.
사람들은 한 인간을 그토록 철저히 고립시켜놓고는
자기들은 모르는 일이라는듯이 너무도 태연하게 봄의 축복을 누리고 있었다.
나는 세상 그 자체에 반발심을 느꼈다.
뭔가 이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
너를 아프게하는 이 세상이 옳은 편일리가 없었다.
너를 깜깜한 외로움속으로 미끄러뜨리는 세상.
너와 나를 이토록 먼 거리에 떨어뜨려놓는 세상.
어딘가 먼 곳, 다른 차원을 보는 것같은 몽롱하게 취한 눈빛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통을 호소하던 너의 모습은, 우주의 위기나 마찬가지였다.
나의 영웅에게,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시련이 존재할리 없는데.
이길 수 없는 적이 있을리가 없는데.
"란우야, 이리와."
화분에 물을 주거나
(간소한 가구들 외에는 음악기기밖에 없는 아파트가 너무 삭막해서 내가 몇 개 사자고했다)
마루바닥에 엎드려 책을 보고 있으면
네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너의 눈동자는 오직 나 하나로 넘실거렸다.
쓸쓸한 실루엣, 위태로운 실루엣.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얹으면,
그대로 수백개의 퍼즐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바싹 건조한 실루엣.
그러지마.
네 발치에 앉아서 네 두 무릎을 꼭 껴안았다.
아파하는 네 모습은 내 존재에 대한 위협이였다.
딛고있는 땅이 흔들리고 갈라진다.
너는, 내가 바라볼 맑은 하늘인데
뛰어놀 넓은 들판인데
마음껏 뒹굴 포근한 구름카펫인데
내가 달려가 열매를 얻고 그늘을 얻을 커다란 나무인데
세상에 그런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건 어쩌면, '맞아, 결국 세상엔 나 혼자야'하는 최초의 깨달음과도 비슷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인생에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는 것이고
우습게도 난, 슬프게도 난, 내 영웅의 비참히 꺾인 날개앞에서
그것을 느껴야 했다.
완전한 것은 정말 없는거야?
언제까지나 나를 지켜줄 너는, 처음부터 없었던거야?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여태껏 너를 괴롭혀온 철없는 꼬맹이에 불과했다는거야?
너는 아프지 않은줄 알았다.
너에게는 모든 것이 쉬운 일이라고.
모두가 칭찬해 마지않는 new의 음악을 만들어내는것도
그 음악에 어울리는 참신한 스타일링과 무대매너도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과정의 능률좋은 비지니스도
너에게는 그저, 척척 처리해나갈 수 있는 쉬운 일들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너무 간단한 이유에서다.
힘들어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 떨어뜨려놓고 미국에 가서
영화에 나오는 것같은 궁전같은 집에서
수영이나 하고 일광욕이나 하다가
번뜩 영감이 떠오르면 옆에 있던 오선지를 집어들고
단숨에 한 곡을 써내려 가는 줄로.. 나는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6개월 동안 혼자서만 재미있게 놀고 와서는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인척 불행을 연기하면서
내게 '용서해줘'라고 눈물작전을 쓰던 네가 얄미웠었다.
(얄미워도 어쩔건가. 눈감아 줄 수 밖에는 없었지만)
하지만 모두 헛된 상상.
안그래도 햇빛이 잘 들어오지않는 낡은 벽돌 아파트에서
두꺼운 커튼을 꽁꽁 여며놓고
사람 사는 집 같지도 않은 어설픈 살림살이로
너는 궁상을 떨고 있었다.
함께 마켓에서 장을 보고, 가까운 근교로 매일같이 드라이브를 나가고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늦은 밤까지 케이블채널로 만화영화를 보고
(어차피 영어였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침대위에서 피자를 먹고...
한국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상에 하루하루가 무섭도록 행복했다.
그리고, 감춰졌던 너의 하이드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으로 떠날 내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 날, 새벽이였다.
네가 죽는 줄 알았다, 난.
그래서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었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죽어가고 있던게 맞았다.
그 날 이후, 시시각각, 시계의 초침과 같은 속도로
네 눈이 어둠의 하이드에게 정복되어 가는걸 보면서
때때로 네 얼굴 전체가 어떤 두려움에 경직되는걸 보면서
잠을 잘 때도 내 어깨가 아플만큼 꼭 껴안고 놔주지않는 너를
난 정말 내버려둘수가 없었다.
언젠가, 처음 술에 취해 내곁으로 들어와 누우면서 네가 했던 말.
지켜달라던 말.
진짜 영웅이 아니였더라도 상관없어.
늘 동경의 눈으로 올려다보던 피레네의 성이
사실은 거미줄이 둘러지고 마루바닥이 삐걱이는, 잔인한 어둠의 정복지였다고 해도
나는 그 성의 주인을 떠나지 않아.
떠날 수가 없어.
성의 화려한 테라스에 서서
거만한 눈동자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열렬한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는 빛의 시간이 끝나고, 천천히 뒤를 돌면
앞에는 비열하고 지독한 어둠이 입을 쩍 벌린채로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 이제 사람들 앞에서 쇼는 끝났으니
우리끼리의 남은 일을 처리해볼까. 하는 듯이.
어쩌면 낄낄낄, 하는 기분나쁜 웃음소리까지 동반했을지도 모른다.
창조의 천재라는 데이비드 반태성의 진실은, 그런 것이였다.
너는 혹시, 악마와 계약을 했던걸까?
지금에와서까지 그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으로 남아있다.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네가
어째서 앨범을 계속 냈어야 했는지.
아침마다 너는 아직 잠에서 다 깨지도 못한 내 얼굴을 감싸쥐고
오늘은 뭘 하고싶으냐며 귀찮게 물어댔지만
열세살 김란우. 원했던건 언제나 단 하나.
다른 가족들처럼, 다른 친구들처럼, 다른 연인들처럼
사람들이 북적이는 햇살 환한 거리를
너와 손 꼭 잡고 걸어가는 것.
다리가 아플때까지라도 좋아.
같은 자리를 계속 맴돌 뿐이라고해도 좋아.
혹시라도 내가 걸음이 뒤쳐지면,
너는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고 나를 기다려주는거야.
한 손은 나를 향해 내민채로.
언제나 하는 말처럼, '이리와, 란우야' 하고.
그럼 나는 활짝 웃으면서 얼른 달려가 그 손위에 내 손을 마주 포개겠지.
그리고 우리는 다시 사람들속으로 걸어들어가.
내가 원한건 정말 그 단 하나였다.
자신들은 고마운줄도 모르고 매일같이 하는 그 일을
너와 나에게만은 금지시켜 놓은 비정한 세상.
그렇게 열세살의 내 눈에 비친 세상은... 다 미워.
어쩌다 전화라도 하는 날이면,
우는 목소리 내지 않으려고 어금니에 잔뜩 힘만 주고 있다가
하고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하고, 안녕.
그럼 또 분하고 억울해서
침대에 엎드려 한참을 울어대다가,
떨어진 거리가 더 실감날 것 같아
액자에 하나 껴놓지도 못한 네 사진들을 꺼내서
몇 시간이고 질리지도않고 들여다보곤 했다.
"괘..괜찮..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잠깐의 틈을 두고나서 너는 장난스럽게 웃어주었다.
"형아 괜찮아, 란우야.
란우가 주고 간 파워업때문에
이젠 안 아파."
정말일까?
아닐 것 같았지만, 이기적인 나는 믿고싶었다.
마음 편하고 싶었으니까.
내가 품에 안겨줄수도 없는 곳에서
극복할 수 없는 고통에 혼자 몸부림치는 너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난 그때 너무 어렸고
너의 고통이라는건, 그때의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중에 가장 끔찍한 일이였으니까.
"진짜 마지막이야, 이번이."
그 말을 할때면, 아무리 의젓하려고 노력을 해도
어린애같은 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내 징징대는 말투는 정말 질색이다.
"응.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란우도, 형아 걱정하지 말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있어."
"으응.."
바보같애.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고.
다른 사람들도 다 해주는 말이잖아.
내가 정말로 듣고싶은 말은..
전화를 끊으려고 인사말을 꺼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초조하고 서글퍼져서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전화를 끊고나서 혼자 감당해야할 사무치는 그리움이 벌써부터 두려워지는 것이다.
너없이 혼자서 뭔가를 이겨내야 하는건, 난 그런거, 알고싶지도 않았다.
그냥, 네가 다 지켜주면 되잖아.
"보고싶다, 란우야."
나도 보고싶어, 라는 그 말은 도저히 입술밖으로 꺼내올릴 수 없는 얘기.
빨리 돌아오라고 또 징징거릴테니까.
내 우는 목소리, 너는 알아챌테니까.
말대신 내가 줄 수 있는건, 고작해야 전화기에 대고 입을 맞추는 것.
바보같아.
모든게 말도 안되는 얘기야.
네말대로, 이깟 플라스틱 기계에 대고 하는 입맞춤따위 아무 의미도 없어.
네 뺨위에 내 입술의 감촉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잖아.
"이젠 해달라고 안해도 잘해주네-
란우 뽀뽀 힘으로 또 한 곡 해치워버릴 수 있겠는데!"
내 입술에 정말로 그런 힘이 있다면,
당장 미국으로 달려가서 그까짓 입술뽀뽀쯤 백번천번도 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앨범따위, 하루만에 다 만들어버리고 빨리 돌아오도록.
"잘자, 우리 란우."
전화를 끊으려고하는 네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언제나 그 말이 하고싶어 졌었다.
엄마아빠와 네 부모님께는 그토록 쉬웠지만
생각을 하고 또 하고,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그만 삼켜버리고 말았던 딱 한마디.
열세살의 내가 정말로 듣고싶어진 그 말을, 너는 절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때껏 한 번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단 한번도.
내가 그 말을 하면 너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면서도 겁이 났다.
엄마아빠도 사랑하고, 심지어 네 부모님도 사랑하는 열세살 김란우였지만
너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건, 사랑하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엄마아빠나 네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는 어딘가 기분이 달랐기때문에.
그런것도 사랑이라고 하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냥 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었다.
우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런데도 내 마음은 너에게 꽁꽁 묶여 꼼짝할수가 없었고
나는 육학년이 되었고
목련은 다 져버렸고, 사랑해.
반태성
노트에 네 이름을 써놓고 생각했다.
무슨 이름이 이렇게 슬픈거냐고.
_20060225_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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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돈 스탑.
모든 것을 보여줘.
네가 불러주는 내 이름은 너무 달콤해.
나는야 슈퍼 히어로
김다윗 컴패니
#
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