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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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하고 음산한 예감이 희생양을 찾아 묽은 어둠속을 떠돌아 다니는, 서울의 깊은 밤. 

영화 배트맨 속의 고담시처럼, 

모든 종류의 욕망이 억제당하고 

마지막 희망 하나까지도 모조리 말살당한 것 같은 이곳은, dark gray. 

낮에 본 너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거의 2년만에 보는 얼굴이였다. 

집으로 찾아가도 방안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번번이 퇴짜를 맞은게 귀국 후 벌써 네번이였다. 

교복을 입은 네 모습을 처음 보았다. 

나의 너는, 그 사랑스러움을 그대로 간직한채로 아이에서 소년이 되었다. 

믿기지가 않는다. 

네가 열일곱 살이 된 것이다. 

두 달이 지나면, 열여덟 살이다. 

다 자랐다고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젠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 증거로, 낮에 본 너는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걸고있지 않았나. 

잔에 남아있던 위스키를 한모금에 털어 넣는다. 

아직도 솜털이 보송한 네 얼굴이였지만, 그 어디에도 어린이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마쯤은 예상한 일이였지만, 눈으로 확인한 너의 성장은 내게 충격이였다. 

어쩌면 당황이라는게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담배라니. 

나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꾸민 짓이라는걸 모르는건 아니였지만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비뚤게 자라버린 너의 모습에 

다시 또 가슴이 아파왔다. 

가장 사랑스러운 너를, 나는 얼마나 괴롭혀 왔던가. 

그런데도 그 두 눈에 아직까지도 나를 담고있는 네가, 그저 감격적일 뿐이다. 

가까이 나를 당기는 너의 두 손도 달콤하지만, 

차갑게 고개를 돌리면서 입술을 피해버리는 너의 마음도 똑같은 애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니, 매일을 그리워했다. 

나의 지독한 이기심 

그건 거의 동물적이였다. 

날카롭게 드러난 손톱과 잔인한 송곳니 아래서, 두려움에 떨고있던 너. 

하지만 너를 놔줄 수가 없었다. 

너는 나의 호흡기였고, 안정제였고, 영감이였고, 심장이였다. 

네가 아니면 나는, 숨을 쉴 수도, 멜로디를 만들어 낼수도,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수도 없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는 똑똑히 느끼겠는데 

겁에 질려 울고있는 너를 붙잡고, 날마다 그늘이 더 짙어지는 너의 어린 얼굴을 붙잡고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너는 내것이라고. 

처음부터 그랬다고. 

이렇게까지, 내 몸속의 작은 세포 하나와, 손톱끝, 머리카락 끝까지 

온 몸에 돌고있는 피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너와 하나로 엮여있다는걸 나는 너무 잘 알겠는데 

너는 모르겠냐고. 

물을 수 없었다.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징검다리를 놓고 건널 수 있는 시냇물이였던 9년라는 갭(gap)은 

어느 순간, 물살이 사나운 깊은 강물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9년을 먼저 태어난 죄로, 나는 강줄기 건너편의 너를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네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 고통이 나를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그 일그러짐이 너를 병들게 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이마를 짚어보던 너의 작은 손. 

답답하지 않냐는 내 질문에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던 너의 어린 마음. 

그 모든 것을 가슴 찢기도록 아파하면서도 너를 놔줄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던 비겁하고 무능한 나. 

너와 내가 태어나기 전, 하늘나라에서 

나는 누가 너를 갖느냐를 가지고 신과 맞서 싸웠다. 

전쟁은 나의 승리였고 

너를 가질 수 없게 된 신은, 나를 시기했다. 

그래서 너를 내게 주되, 9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보내준 것이다.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너와 함께 열두살에 머무를 수도, 나 혼자서 세상속으로 사라져 버릴수도 없었던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피를 흘려야 했다. 

적어도, 그 피를 너에게 들키지는 말았어야 했다. 

네 울먹임이 검게 물든 유리창 너머에서 일렁거린다. 

"형아- 왜그래.." 

욕실 입구에 서서 잠에서 다 깨지 못한 눈을 부비며 나를 불렀다. 

함께 미국에 가주겠냐는 말에 내 목을 끌어안고있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응, 갈래! 라고 몇번이나 힘차게 대답했던 너. 

너는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 엄마아빠와 떨어지는 것쯤은 망설이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끝나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나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던 너의 말에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열두살의 너는 아무것도 몰랐겠지. 

지옥같았던 첫번째 잠적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환한 햇살속에서 보냈던 매일매일. 하루하루.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도 거의 없는 이류 주택단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네가 들려줬던 웃음소리의 힘. 

형아, 하고 부르던 맑은 목소리의 힘. 

그 강력한, 입술뽀뽀의 위력.

그 힘에 가려져 잊고 있었다. 

내가 혼자서 맞서야하는 외로움의 지독함을. 

호흡기 없이 산소를 빨아야 하고, 심장이 멈춘채로 굳어가면서

쥐어짠 눈물의 소금기와 토해낸 고독의 검은 피로 써내려 가야하는 음절 하나하나의 혹독함을. 

내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잠이 든 너의 얼굴을 

희미한 달빛속에서 몇 시간이고 바라볼때면, 

혼자서 달래야했던 보고픔의 허기보다 더 큰 두려움에 오장육부가 오그라들었다. 

보내야 한다는 것. 

내가 떠나는 것보다, 너를 보내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걸 스물한살에야 알았다. 

핸드폰에 눈이 팔린 사이에 훌쩍 떠나버린 나때문에 

너도 많이 아팠을까. 

그랬겠지. 

목소리를 듣고나면 네가 더 힘들어질까봐

매일매일 울고불고 밥도 잘 안먹는다는 얘기를 듣고도 전화할 수 없었다.

뭐라고 알아듣게 설명해 줄수도 없을만큼 작았던 네가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금지옥엽 쓰다듬기만해도 모자랐을 네가.. 

그런 네가 고통스러워 하는걸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했던 나역시도 제정신일 수 없었다. 

9년이라는 강줄기가 다 말라버릴때까지 

나는 저 건너편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우는 너를 바라만 봐야하는 것이다. 

그건 가수가 되고 안되고의 문제가 아니였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운들, 내게는 다 같은 고통일 뿐. 

너아니고 내가 기댈 수 있는건 음악 하나였을 뿐. 

차라리 나를 어린애로 만들어 달라고 아무리 절규해봤자 

나에게 너를 빼앗긴 하늘위의 신은 냉담할 뿐이였다. 

가엾은 나의 라푼젤.

"형아.. 아파?"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 숨결의 뜨거움이 느껴졌다. 

반쯤 풀린 눈꺼풀 사이로 힘겹게 네 모습을 찾았다. 

어린 너의 겁에 질린 목소리. 작은 얼굴.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자, 

울먹이며 서있던 너는 얼른 내 두팔속으로 달려 들어왔다. 

부드러운 존재감과 살가운 체온에 더욱 가슴이 울컥였다. 

나는 너를, 널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란우야. 

"형아, 왜그래애-" 

결박하듯 꽉 껴안은탓에 가슴과 양팔이 아팠을텐데도 

너는 내 심장에 바짝 귀를 대고 땀에 젖은 내 셔츠자락을 꼭 쥔채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런 너에게, 이건 약과라고. 

네가 없는 세계속에서 나는, 듣는이 없는 고통을 호소하고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외로움에 짓눌리면서 

단 한명도 남김없이 철저히 혼자라는 무색무취의 공포에 식은땀을 흘린다고. 

너에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너를 내가 갖는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그 당연한 일이 너무도 힘들게 흘러가고 있었다. 

흐름을 놓쳐버린건 이미 오래전 얘기였다. 

영원히 어린애로 남아서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너를 택할래 

빨리빨리 자라서 나를 벗어날지도 모르는 너를 택할래?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내 머리속에서 집요하게 물어댔다. 

결국 네 향긋한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네 작은 손이 내 목을 감싸쥐었다. 

종말이 온다해도 너를 지켜줄거야. 

발작처럼 덮쳐오던 공포에 쫓기고 있다는걸, 그때 너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아니, 아마 그 다음의 언제라도 나는 

참지 못하고 너를 찾아 움켜쥐었을 것이다. 

네 미소와 목소리와 아릿한 살내음에 기대서라도 숨을 붙이고 있으려는 내 이기심은 

여전했을 것이다. 

다크 그래이의 서울을 향해 쓴 웃음을 뱉는다. 

그런 네가 고등학생이 되었다니. 

사랑스러운 얼굴에는 나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만을 가득 새긴채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라도 괜찮으니, 나만 아는 너로 자라달라던 내 바람대로 된건지도 모른다. 

그게 미움이든 증오든, 어쨌든 낮에 봤던 네 얼굴에는 

내 이름만이 빽빽했으니까. 

미워해도 상관없다. 

나를 사랑하는 너를 바랐던건 아니다. 

내가 바랐던건 늘, 내곁에 있는 너였을 뿐.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됐다.

넘치게 충분하다.

_쾅. 쾅. 쾅 

찾아올 사람도 없었지만, 멀쩡한 벨을 놔두고 거의 문을 걷어차다시피하는 

저 요란한 방문자가 누구일지 

굳이 비디오폰을 확인할 필요도 없이, 곧장 현관을 연다. 

네이비 재킷에 풀어 헤쳐진 줄무늬의 타이. 

그 타이보다 더 형편없이 헝클어진 두 눈동자와 

흰 목덜미에 감겨 물결치는 검은 곱슬머리. 

너는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고꾸라지듯 벽에 몸을 의지한채 나를 노려본다. 

키가 제법 자랐다. 

눈동자가 내 턱끝에 걸릴 것 같다. 

젖살이 다 빠져버린 헬슥한 뺨과 어린애티를 벗은 이목구비의 생김이 낯설어 긴장이 된다. 

현관 손잡이를 잡고있는 오른손에 땀이 배어난다. 

너는, 누구지? 

"개새끼."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혀를 억지로 꼿꼿하게 붙잡아 

한음절 한음절 똑바로 뱉아내려 애쓴다. 

백점맞은 받아쓰기를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나의 꼬맹이는 

이제 교복을 입은채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내게 반항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거야, 너?" 

무방비 상태의 그 허술한 옷차림이 신경에 거슬렸다. 

바지겉으로 다 삐져나온 셔츠자락과 아무렇게나 걸쳐져있는 재킷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어디서 누구와 이렇게까지 취하도록 마셔댄건지.

"뭐야아! 네가 뭔데 나한테 그런걸 물어?" 

시간을 건너뛰듯 껑충 자라버린 네앞에서 

나는 고리타분한 어른흉내를 내야할지, 

아니면 예전처럼 마냥 너를 감싸주는 형이여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동자의 매력은 숨이 막힌다. 

소년의 젖은 눈동자처럼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게 또 있을까. 

깊어진 눈매속의 brown eyes가 내 마음을 쿡쿡 쑤신다. 

윽. 아프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 뾰족하고 날카로운 창으로 찔러대는게 아니였다. 

그건, 새침하게 입술을 다물고 검지손가락으로 옆구리를 누르는 간지러움이랄까? 

나는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다. 

너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이렇게 된게 다 누구때문인대." 

네가 내 멱살을 잡으며 덤벼들었다. 

혼자서는 제대로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취해 있었다. 

이래서는 멱살을 잡는게 아니라, 내 셔츠에 매달려있는 꼴이다. 

두 무릎이 꺾이면서 주저앉으려는 너를 얼른 한손으로 추스렸다. 

재킷 아래의 허리가 놀랍도록 가늘다. 

어릴때부터 늘 체격이 왜소한 편이기는 했지만, 

무거운줄 알고 힘을 잔뜩 준채로 주전자를 들었는데 너무 가벼워 헛힘이 들어갔을 때처럼 

나는 흠칫 놀라버렸다. 

"들어가자." 

막무가내로 저항하는 너를 거의 바닥에 끌다시피해서 침대에 눕혔다. 

하얀 베개위에 흩어진 흑발의 곱슬이 여전히 눈이 부시다. 

코를 찌르는 술냄새에도 얼마쯤 익숙해지고나니, 아련한 복숭아 내음이 섞여 난다. 

아직 솜털이 보송한 결이 고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풀어진 두세개 단추 사이의 가는 목덜미와 두 손도, 여전히 아기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살며시 그 손등을 감쌌다. 

감고있던 네 두 눈가로 눈물줄기가 주륵 흘러내린다. 

정말 우리 란우 맞구나. 

이제는 용서해 달라는 말로도 네 마음 다 돌릴 수 없을만큼 많은 것들이 얽혀 버렸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마워. 

날 찾아와줘서. 

술기운인지 뭔지는 몰라도, 네가 눈을 잘 뜨지도 못한채로 손을 더듬어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내 무릎을 찾아 머리를 누였다. 

이제는 다 커버린 소년이 되어 내 무릎위에서 눈물을 흘리고있는 나의 에로메노스.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시간의 흐름이란, so amazing. 

"잠들때까지 머리 만져줘. 

안그럼 가버릴거야." 

입술을 틀어막아 울음을 씹어삼켰다.

내 머리카락 사이로 너의 촉촉한 곱슬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너에게, 키스하고 싶다고. 

_20060223_김다윗 

불특정한 다수를 위한 이야기는 아니다. 

먹고싶은 것만 먹으면서 살 수 없고 

하고싶은 것만 하면서 살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쓰고싶은 것만 쓴다. 

그런 나와 내 이야기를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마지막의 파라다이스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thank you, all my company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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