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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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내내 수영장 한 번 못갔어도 

목이 빠져라 날 기다리고 계셨을 전라도 할머니댁에 못 다녀왔어도 

너의 아파트에서 보낸 한달이, 내게는 짧게만 느껴졌다. 

엄마도 아빠도 보고싶지 않았다. 

이상할만큼. 

미안할만큼. 

네 스케줄에 맞춰 여기저기 따라다니느라 

밤이면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져도, 네곁에서 잠드는게 좋았다. 

벤안에서 잠이든 나를 조심조심 안아옮기는 너의 팔을 느낄때, 

혹시라도 내가 깰까봐 다른 사람들을 모두 조용히 시키는 네 작은 목소리를 들을때 

어린 마음은 한없이 흡족해졌다. 

반태성이라는 틀에 갇혀, 내 세계는 언제나 그대로인것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나는 단순하고 맹목적이였다. 

네가 잘해주면 행복해하고 

네가 못해주면 불행해하는, 나는 완전히 너의 인형이였다. 

나이를 먹으면, 거기에 맞게 세계도 넓어지고 호기심도 커져야하는데 

한창 또래들과 어울리는걸 좋아할 나이에 

나는 아직도 반태성 바지폭에 휩싸여 정신 못차리고 있었다. 

아무도 싫었다. 

누구도 싫었다.

또래들이 뭘 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어서 빨리 자라서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를 가고, 대학생이 되고싶은 마음뿐. 

그때까지, 언제까지, 너의 가장 가까운 자리를 내것으로 지키고싶은 마음뿐. 

확실히 내 성장과정은 정상적이지 못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내 마음 편하게 해줬으면 

날 안달나게 하지 않았으면 

쥐었다 폈다 하지않고, 밀었다 당겼다 하지않고,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지않았으면 

그랬다면 나도, 밝고 구김없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을까. 

너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세상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 있었을까.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성안에 갇힌 비련의 라푼젤은, 네가 아닌 나였다. 

"란우야, 란우야-" 

으응, 숨막혀. 

지금 생각하면, 둘 다 미쳤었다. 

열두살 짜리 사내놈을 

(아무리 내가 또래에 비해 왜소한 편이였다고는해도) 

제 팔안에 꼭 가두고 잤던 반태성이나

그 안에 얌전히 안겨서 네 어깨에 코를 박고 잠들던 김란우나. 

그때는 이상하다고 생각못했다. 

모든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맨 처음부터 그래왔었으니까. 

너는 언제나 최고로 나를 사랑스러워하는 사람이였고 

너의 귀여움을 받는건 내게 숨쉬는것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터뜨릴듯 나를 꽈악 껴안고 

내 귀에 입술을 바짝 갖다대고 

너는 내 이름을 부른다. 

란우야, 란우야. 소근. 또 소근. 

내가 사랑스러워 죽을것 같다는 너의 두 팔. 

내가 귀여워 못견딜것 같다는 너의 목소리. 

열두살의 김란우는 그것만 있으면, 다른 나머지는 어떻게되도 좋은것이다. 

수영장에 못가도, 할머니를 못봐도, 세상에서 뒤쳐져도. 

"숨막혀어-"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리면, 너의 입술은 더욱 집요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 저음이 고막을 감싸고 간질거리면, 나는 어찌해야할 바를 몰라서 

있는 힘껏 너를 밀어냈다. 

"으으응! 간지러어!"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데리고 도대체 넌 무슨 생각을 했던건지. 

변태가 분명하다, 반태성. 

"일어나야지, 이제. 

오늘, 소집일이잖아." 

맞다. 

그런게 있었지. 

매일 네곁에서,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학교라는 곳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불과 몇주전만해도 매일같이 드나들던 곳이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으윽. 가기 싫어. 

솔직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네곁에서 단 일초도 떨어져있고 싶지 않았다. 

너와 나를 갈라놓으려는 것은, 무엇이든 다 악이였다. 

그러니 학교야말로, 열두살의 김란우에게는 최대의 악이였다. 

너의 교묘함은 그렇다. 

어느새 나는, 네가 가수가 된것이 아니라 

내가 학교에 가야하는 현실을 원망하고 있었다. 

두번째 앨범의 활동은 음악 프로그램을 위주로 진행되었다. 

오락프로에는 전혀라고 할만큼 출현하지 않았다. 

3사 방송국의 가요 프로그램과 케이블의 방송 몇 개. 그리고 라디오. 

간혹 있는 화보촬영이나 인터뷰.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내내 완전히 비워지는 날은 거의 없긴했지만 

숨도 못돌릴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였다. 

하루 여섯시간 정도의 스케줄만 해치우고나면

나머지 시간에는 나 혼자서 너를 독점할 수 있었다. 

게다가 너는 어디를 가든지 내 손을 꼭 붙잡고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메이크업을 받는 짧은 시간에도 시야에 내가 보이지않으면 불안해했다. 

나는 완전히 우쭐해 있었다. 

그 아무리 예쁘다는 여자 연예인앞에서도, 너는 나만 보고 내 이름만 불렀다. 

사람들이 귀엽다며 내 볼을 꼬집고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너는 싫어했다. 

나는 네 옆에만 있어야 했다. 

바보같이 나는, 그걸 기뻐했다. 

그 날은, 저녁에 라디오 게스트 출현이 하나 있었을 뿐이여서 

너는 직접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다. 

운전하는 모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중에 하나였다. 

더 예전에, 기타치는 모습을 좋아했던 것처럼.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너의 모습은 늘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그럴때의 너는 뽀뽀를 해달라고 조를때의 철없는 모습과는 딴판이였다. 

핸들을 돌리고 기어를 바꾸는 너의 커다란 손에는 내게는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너의 운전석 옆자리는, 내 자리였다. 

"갔다와. 형은 차에서 기다릴게." 

너는 학교앞 구석진 골목안쪽에 차를 주차시켰다. 

내가 돌아오면, 인천까지 드라이브를 가서 바다를 보기로 약속했었다. 

아직 학교에 가지도 않았는데 나는 끝마칠 생각뿐이였다. 

"김란우. 학교까지 태워다 줬으니까, 상을 줘야지." 

정말로 너는 농담이 아니라, 뽀뽀광이였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겠지만. 

그때쯤엔 너의 뽀뽀밝힘증에 완전히 두손을 들어버렸다. 

너는 지치지도 않았다. 질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피하는데도 지쳐버렸고, 거절하는데도 질려버렸다. 

두근두근하던 긴장감마저 사라져버릴만큼, 너의 요구는 너무 자주, 너무 빈번했다. 

"됐지?" 

두말않고 네 어깨를 짚고 오른쪽뺨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잠깐. 성의가 없잖아. 

너, 바다 안보고 싶어?" 

비열한 놈. 

어린애를 상대로 그런 협박을 하다니. 

하지만 나는 그 시비에 승산이 없다는걸 알았다. 

조르는 너와 버티는 나의 싸움에 승자는 언제나 반태성이다. 

김란우는 전패다. 전패. 

-쪽 

흐뭇하게 웃는 그 잘난 얼굴을 마구 꼬집어 주고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차에서 내렸다. 

너를 뒤에 남겨놓고 앞서 걸어가는 기분은 늘 묘했다. 

뒷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건 불편한 일이다.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줘야할지 고민만 하다가 결국 코너를 돌아버렸다. 

학교를 향해 달렸다. 

"왜 연락 안했니?" 

맙소사.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피서를 다녀왔는지 검게 그을린 얼굴의 그애는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그러고보니 그 날 이후, 예스다 노다, 문자메시지 하나 보내주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너와 함께 지내느라 핸드폰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않고 있었다. 

"아.. 미안해. 좀 바빠서.." 

초등학교 5학년 짜리의 변명치고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겠지만 

그애의 표정은 너그러웠다. 

형광연두색의 탱크탑아래 드러난 양어깨는 조그맣게 허물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좀 더 아래쪽에, 두개의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있었다. 

나는 눈을 돌려버렸다. 

"넌 어디 안갔다 왔어? 얼굴이 여전히 하얗네."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얼굴을 만졌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얼굴을 피해버렸다. 

그러고싶지 않았는데 얼굴이 붉어지는게 느껴졌다. 

그애가 작게 웃었다. 

"지금 대답해줄 수 있어?" 

심장에 귀옆에서 뛰고 있었다. 

고막이 부풀었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이없게도, 네가 보고싶었다. 

"난.. 아직 그런거 모르겠어." 

어쩌자고 그렇게 순진한 대답을 한건지. 

지금 생각해도 갑바가 상한다. 

뭔가 좀 더 멋진 대사는 없었던걸까. 

그애의 표정이 좀 일그러졌다. 

역시 어린애야, 하는 실망감이라고 하면 아마 맞을거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이 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지, 그런 기분이 뭔지 알고 있었다. 

네가 세상 모든 것들을 다 녹여버릴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볼때 

잠든 나를 가만가만히 안아올릴때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나를 짐짓 엄한 표정으로 곁에 부를때 

싫다는 나를 붙잡고 계속해서 뽀뽀를 조를때 

나는 그 기분을 알고있었다. 

그애와 마주 서서 나는 온통 네 생각이였다. 

"그래. 솔직히 말해줘서 고마워.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줄 수 있지?" 

순식간에 그애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사근사근하던 말투와 생글거리던 웃음도 지워졌다. 

오히려 마음편했다. 

대답대신 신중하게 두어번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그애가 자기 패거리들이 뭉쳐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고개를 들고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내 생애 첫번째 프로포즈를 거절한 것이다. 

그런걸 모른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이였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좋아하면 사귄다는 것. 

다른 사람하고는 하면 안되는 일들을 정해놓고 서로 일일이 참견하고 구속한다는 것. 

너는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니

난 다 알고있었다. 

"란우야!" 

차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있던 너는 

내가 코너를 돌아서자 황급히 꽁초를 발로 짓이겼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으면서도, 

너는 절대로 내 앞에서만큼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나름대로 내 교육을 생각한 행동이였겠지만 

열두살 짜리를 여섯살 짜리 취급하는 것도 별로 교육적이지는 못했다.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하는 통에 

너의 담배피우는 모습에 대한 내 환상만 더 커졌으니까 오히려 역효과인 셈이였다. 

"이렇게 나와있어도 돼?"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이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적한 주택가의 구석진 골목에는 지나가는 강아지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란우, 형아 보고싶었지?" 

여섯살 짜리 취급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몇날몇일 못봤던 사람처럼 반갑게 내 얼굴을 감싸쥐는 너의 양손에서 아련하게 담배냄새가 났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타. 운전. 담배.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네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증거들. 

어른처럼 느껴지는 너는, 거리감인 동시에 동경이였다. 

"이제 바다보러 가자." 

어차피 차에서 내리지도 못할 드라이브였지만 

너와 나는 음악을 크게 틀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면서 인천으로 달렸다. 

너는 내가 네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따라부르면 

큰 소리로 기분좋게 웃었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웃음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다 너의 가식이였다. 

나에게 너는 웃을 줄 밖에 모르는 사람이였으니까.

매니저 아저씨나 데이비드의 다른 멤버들이 너를 무섭다고 하는 얘기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에게 너는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사람이였으니까. 

내 버릇을 다 버려놓았을 정도로. 

너는 몇 번이고 트랙을 재생하면서, '반란'을 부르라고 시키고 또 시켰다. 

그건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가사였지만 

너는 내것. 

너는 내것. 하고 반복하는 부분은 왠지 좋았다. 

너에게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내가 써내려간 운명의 분명한 단 한줄은 

너는 내것. 

너는 내것. 

너는 내것이라는, 이 세상의 위대한 시작과 끝. 

그 날, 차안에서 나란히 함께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쓸쓸함이란 것을 느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게 쓸쓸함이구나, 하고. 

네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지만, 어쩐지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 곁에 있는 것도 고통일 수 있다는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 

그때 난, 조금 어른이 된건지도 모른다. 

_20060218_김다윗 

솔직하게 다 말할수는 없어. 

정말 그럴수는 없어.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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