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3)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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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나지마. 

지금의 나, 엉망이라는거 알지만. 그래도 너만큼은 안돼. 

너는 못보내. 

달아나려고 하지도마. 

내가 안보내. 

이기적인거 알아. 알면서 이러는거야. 

그러니까 설득은 필요없어. 

내 옆에 있어. 

그거면 돼. 

작고 부드러웠던 너는, 나의 라푼젤.

높은 성에 너를 가두어놓고 나만 너를 볼거야.

너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나는 알아. 

너는 처음부터 내꺼였어. 

네 모든것을 아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늦봄? 초여름? 

아무튼, 날씨가 정말 좋은 일요일이였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침대에 누워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FM 라디오를 듣고있었다. 

일요일 오후에는 한주간의 팝 차트를 발표하고 

순위곡들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방송됐는데

나는 애청자였다.

재즈와 클래식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을 가까이 접했던 나는 

그 무렵 팝의 매력에 흠뻑 심취해 있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달콤한 발음과 이국적인 멜로디에 빠져 

그저 들리는대로 혼자 흥얼거리기도 했다. 

조숙하다면 조숙한 것일수도 있지만, 

내게 있어 음악은 내 또래에게 있어 만화영화나 컴퓨터 게임처럼 

그저 친숙하고 자연스러운 놀이였다. 

그 주에는, 당시 한창 유행하고있던 R&B 곡들이 순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고 

그 달작지근 하면서도 은근한 유혹에 떠밀려 

기분좋은 졸음속으로 빠져들고 있던 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몸을 일으켰다. 

"언니, 언니! 나 어떡해요! 아아! 

나 아픈거같애! 진통인가봐!" 

만삭의 몸으로 출산 날짜를 받아놓고있던 너의 어머니는 

우리집 현관을 붙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잘 나가는 은행의 상품계발팀장이였던 너의 아버지는 

일요일마저 출근해 있었고, 아직 출산일이 몇일 남아있었던 데다가 첫 출산이였기 때문에 

너의 어머니는 몹시 당황해 있었다.

아버지는 자동차키를 가지고 주차장으로 내려가셨고, 

어머니는 맨발로 너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만약을 대비해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가지고 나오셨다. 

그리고 너의 어머니를 부축한채로 내게 물었다. 

"혼자 있을 수 있지?" 

어렸던 내게는 그런 긴박한 상황이 처음이였다. 

한시한초를 다투는 것같은 치열함. 

나는 거기에 매혹을 느꼈다. 

앞집의 젊은 새댁아줌마의 남산만한 뱃속에 들어있다던 아기가 

드디어 나오려는 것이다. 

"나도 갈래요." 

"그럼 얼른 나와." 

난 재빨리 운동화를 신었다.

그러면 안되는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흥미진진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 가족은 뒤늦게 달려온 너의 아버지와 함께 분만실앞을 지켰다. 

분명히 꽤 긴 시간이였지만, 왠지 나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엄마 그럼, 나 이제 형아예요?" 

혼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옆자리 어머니의 옷깃을 잡아끌며 물었다. 

모르겠다. 

너무도 당연하게 나는, 풍선처럼 부푼 그 뱃속의 아이가 사내아이일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열달내내, 한 순간도 의심한적 없었다. 

여자애는 필요없었다. 

인형놀이나 소꿉놀이를 하자고 조르는 양갈래머리는 귀찮다. 

네 어머니의 배에 가만히 손을 대고, 그 안에 들어있던 너의 발길질을 느꼈을때. 

확실한 느낌이 왔었다. 

이제 곧, 형아가 될 수 있을거라는. 

그렇게 여덟시간의 기다림끝에 드디어 네가 태어났다. 

감격에 겨워하는 어른들 틈에서서, 나는 너를 보았다. 

네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는 말도 안되게 조그만 인형. 

네 부모님들은 첫 아이의 출산에 세상을 얻은듯 들떠있었지만, 

네 어머니가 침대곁에 선 내게 몸을 기울여 너를 자세히 보여주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너는 내꺼였다. 

너는 한 달 늦은 나의 생일선물이였다. 

아기를 낳을거라더니, 천사가 나왔다. 

온종일 네 생각뿐이였다. 

그렇게 작은 아기를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였다. 

십년동안 외아들로 자란탓에 동생이 생긴다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너를 눈앞에 본 후에는 생각이 좀 달라졌다. 

나는 확신했다. 

네가 내것이라고. 

"이게 뭐야?" 

"란우 선물이요." 

라디오에서 녹음해놓은 노래들을 나 나름대로 선곡해

너에게 어울릴만한 곡들만 따로 녹음을 했다.

공테이프 하나에 가득 담았다. 

"어머나- 고마워, 태성아." 

너의 어머니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기는요, 뭘. 

제가 제꺼 챙기는데. 

조그만 너의 모든 행동들이 내게는 경이로웠다. 

조심스럽게 너를 품에 안을때,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향기. 

꽈악 안아서 터뜨려버리고싶은 충동이 들만큼의 사랑스러움. 

날마다 주문을 걸었다. 

빨리빨리 자라라. 

네 향기를 너무 좋아해서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네 어머니가 네 옷가지 하나를 들려서 집으로 보내야 할 정도였다. 

아기냄새라는게 이렇게 기분좋은 거라니. 

너는 하루 종일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지루하지않은 인형이였다. 

빨리빨리 자라서, 형아라고 불러줘. 

너의 첫웃음, 어그적어그적 기어 내 품에 안기던 때의 행복감. 

너의 첫걸음, 내 검지손가락을 꽉 쥐던 가느다란 다섯 손가락. 

그리고 드디어 

"혀아!" 

힘차게 외친 너의 불완전한 첫번째 형아. 

난 완전히 쓰러졌다. 

맹세했다. 

너를 평생 아무에게도 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나는, 너의 모든 순간에 함께였다. 

첫 돌 잔치에도. 그 다음 생일에도, 그 다음다음 생일에도. 

숙제로 해놓은 내 그림위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도, 나는 화내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으로 수학여행을 가서도 

2박 3일동안 나는 네 걱정뿐이였다. 

너역시도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말을 하고,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너는 누구보다 나를 좋아했다. 

중학생이 되어 귀가가 약간 늦어졌어도, 주말이나 방학에는 

항상 시간을 내서 너와 놀아주었다. 

중학교 수학여행을 갈때는 네가 너무 떼를 쓰고 울면서 못가게 하는 통에 

무척이나 마음고생을 했었다. 

경주에 도착하자마자 집에 전화를 해보니, 

네가 울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는 말에 가슴이 찡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오는 날 너는, 

내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학교 운동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집에서 마중을 나온 아이는 아무도 없었고, 

한창 사춘기였던 녀석들은 그런 나를 비웃는 눈치였지만 

난 아무 상관없었다. 

"형아!!"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너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삶의 모든 기쁨이 한꺼번에 내게로 밀려오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듯 와락 내 품에 안기는 너를 번쩍 안아들고 

쏟아지는 너의 뽀뽀세례를 받으면서, 한없이 만족스러웠다. 

이런 결말이라면 좀 자주 수학여행을 가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우리 란우. 

형아 보고싶었어?" 

"응!" 

우렁찬 대답과 함께 너는 고개가 떨어져 나가라고 열심히 끄덕거렸다. 

얼만큼 보고싶었냐는 내 물음에, 너는 그 조그만 손으로 내 왼쪽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때쯤의 너와 나의 암호였다. 

마음만큼. 

가슴만큼. 

그 안에 꽉 찰만큼 많이. 라는. 

그렇게 예뻤던 너를 내가 어떻게 밀어내. 

너는 기억 못하는 것들까지도, 내 안에서는 너무 생생한데. 

교복을 입은 소년이 되었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젖내나는 입술을 뺨에 부비던 꼬맹이인데. 

그 애틋함을 어떻게 내가 내 품에서 떠나보내. 

우리 란우는, 아니야. 나 없으면 안돼. 

고등학교 3년 내내 힘들었던 트레이닝 기간. 

네가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고지식한 성격에 그 모든 아니꼬운 대접과 

상식이하의 추잡한 연예계 생리를 알게 되면서 고민하고 방황했을 때 

너의 백점짜리 받아쓰기가 없었다면 

내 침대에서 나를 기다리다 잠든 네가 없었다면 

너의 입술뽀뽀가 없었다면 

태성이 형아, 하는 너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내 품을 파고드는 너의 부드러운 곱슬머리가 없었다면. 

생각도 할 수 없어. 

나는 무너졌을거야. 

밤거리를 방황하면서 세상이나 원망하는 시시한 놈이 되었겠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가는 것에 대해서 

네가 서운해하는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잠시잠깐일 뿐, 네가 더 자라게되면 

다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고.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였던가.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했던 너는, 그런 먼 미래의 약속을 믿고 

현재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것을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던가. 

아직 어렸던 네가 나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소년이 될때까지, 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질 위험은 없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막말로 하자면, 

너를 가두어 놓고, 어디도 가지 못하게 네 발을 묶어두고 

나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도록 눈을 가려버리고 

그리고 나는, 할 짓 다하고 다닌것이다. 

악랄한 반태성. 

그러면서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네가 조금 더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철이 좀 들게되면, 

지금 내가 쌓아놓은 것들을 다 너에게 돌려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너도 나를 미워하지 않을거라고. 

날 다 이해할거라고. 

그러니까 지금은 

날 미워해도 상관없으니까, 내 옆에 있기만 하라고. 

이것밖에 안되는 나를 네가 버리면 안돼. 

6개월만에 마주한 네가 훌쩍 자라있었을 때, 난 조금 당황했다. 

몸도, 눈빛도, 말투도. 더이상 철모르던 아기가 아니였다.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날도 얼마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더디기만했던 그 시간이. 

뺨에 하는건 뽀뽀고, 입술에 하는건 키스라던 네가 

마지못해 내 입술에 네 입술을 갖다 대었을 때 

나는 알았다. 

난 아직 그토록 기다렸던 그 시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답답하도록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심술맞게도 그 날이후로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막다른 골목으로 나를 몰아붙여갔다. 

절벽끝으로 서서히 나를 밀어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가는 너의 모습. 

그 자체가 내게 고통일수도 있다는 새로움. 

아직 준비되지않은 시간속으로 뛰어들어야했던 나의 더 큰 실수. 

_20060213_김다윗 

시간도 시선도 겁내지말고 

신과 맞서게 되더라도 

너는 절대로 나를 포기해서는 안돼 baby 

세상에 태어나 맛볼 수 잇는 최상의 황홀함이란 

언제나 금기시 되어있는 것 

귓속말같은 것 

간질간질한 나비의 날개짓같은 것 

나를 봐. 

시간도, 사람들의 시선도, 신의 엄격함도 

내가 다 잊게 해줄게. 

내 뺨을 한 번 만져봐. 

내가 너를 데려갈거야.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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