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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 가슴에는 온통 너의 손자국이였어.
네가 쥐었다 폈다 할때마다
아직 말랑말랑했던 내 가슴에는, 새빨간 생채기가 남겨져야 했어.
다시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작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내면서 마음을 먹어봐도
그 생채기의 독을 달래줄 수 있는 사람도 너뿐이였기에,
병주고 약주는 쳇바퀴인줄을 알면서도
당근과 채찍을 함께 흔드는 너인줄을 알면서도
10년 남짓한 짧았던 생에 온통 너라는 이름만 가득했던 나는
그저 그게 당연한줄로만 알고...
너무 병신같이, 너를 보니까 또 좋았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을 가진 아파트였다.
너는 무지의 긴팔티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한 팔로 다른 한 팔을 쓸어내리면서 내쪽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6개월만이였다.
겨우겨우 너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던 나를
또 한번 내팽개치고 달아나버린지 반년.
가끔씩했던 전화통화도, 주고 받았던 메일도, 두번인가 보내주었던 동영상도
아니야. 그런건 다 소용없어.
눈을 마주 보고, 손끝에 느끼고, 그 품에 나를 안아줄 수 없다면
그것들은 다 죽은 대화야.
열두살 내가 알았던걸, 어떻게 네가 몰라?
죽도록.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하고 죽도록. 미웠다.
그 날은 토요일.
유리창이 검게 칠해진 번쩍번쩍한 자동차가 우리집 앞으로 나를 데리러 왔었다.
엄마는 전날 사온 새옷을 입혀주면서 얘기했다.
네가 돌아왔다고. 나를 보고싶어한다고.
그리고 너는 이제부터 네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없다고.
그건 달리 말하면, 더이상 내 옆집에 살 수 없다는 얘기였다.
여기서 계속 지내면, 네 부모님과 우리 가족에게 피해를 주게되니까
네가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고 엄마는 내게 설명했다.
피해?
도대체 너는, 피해라는 말의 뜻이나 알고있었던 걸까.
네 옆집에서 살 수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피해수준을 넘어, 폭력이였다.
네가 돌아왔다는 것에 이제는 옆집에 살수도 없다는 얘기까지.
난 완전히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한 상태가 되어
엄마도, 네 어머니도 없이, 혼자서 너를 만나러 갔었다.
처음 보는 아저씨를 따라서.
유리창이 새까만 자동차를 타고.
네 입술이 움직거렸다.
그때까지도 꼼짝없이 현관에 서있기만했던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다시피했다.
한마디도 하지마 한마디도 하지마 한마디도 하지마
아무런 말도 들을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너를 어떻게 대해야할지에 대해서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었다.
뭔가에 홀린것처럼 넋이 반쯤 나간채로
그곳까지 끌려가긴했지만
네 얼굴을 앞에 둔 내 마음은 이유가 불분명한 감정으로 격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한마디도 하지마
"란우야.."
한마디도 하지 말랬잖아!
높은 성안에 갇힌 라푼젤.
너는,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성 꼭대기에 갇혀버린 슬픈 라푼젤.
활동을 접고나면 피신하듯 외국으로 몸을 숨기고
부모님과도 마음 편히 통화할 수 없고
대중음식점에도 갈 수 없고
이제는 내 옆집에서도 살 수 없어진, 너는 가엾은 라푼젤.
그 대가로 얻은 '반태성'이라는 이름의 상업적, 음악적 가치.
음악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천재 반태성.
데이비드 해체 이후의 행로가 더욱 기대되는 반태성.
마케팅을 하는 예술가. 섬세한 완벽주의자.
반태성, 반태성, 반태성.
잘난 반태성.
영원히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도 주지않는.
잔인한 반태성.
이해가 되지않았다.
집으로 가자고 너를 잡아끌고 싶었다.
가수같은거 그만두라고.
그리고 우리, 예전처럼 같이 살자고.
넌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왜냐면, 네 표정과 눈빛이 내게 불행을 호소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가까이 걸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 품이 낯설었다.
늘 내 얼굴이 네 가슴아래에 묻히곤 했는데, 이마에 너의 쇄골이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자랄 동안에 너는 날 지켜주지않은 것이다.
"내가 없는데도 혼자서 이렇게 많이 자란거야?"
그럼 나는, 네가 없는동안 박제라도 되어있을줄 알았던가.
"형아 안보고 싶었어?"
대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너는 내게 그런걸 물어서는 안됐다.
그런걸 물을 자격이 없었다.
그 집에 들어간후로 그때까지 나는 한마디도 하지않고 있었다.
조그만 일에도 숨이 넘어갈 듯 웃어제끼던 김란우는 이미 없었다.
그 6개월동안에 죽어버리고 없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장난꾸러기였던 김란우는 누구의 말에도 시큰둥한 내성적인 아이가 되버렸다.
그게 너때문이라는건, 아마 동네 슈퍼아줌마도 알고 있었을거다.
"거짓말쟁이."
그게 나의 첫마디였다.
너무나 정확하고 명확하고 핵심적이면서도 함축적인 한마디.
반태성은 거짓말쟁이였다.
겨우 그 한마디 꺼냈을뿐인데, 금방 눈동자에 더운 기운이 확 끼쳐올라와 나를 분하게했다.
울면 지는거야. 울면 지는거야.
어금니를 깨물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울음을 참는데
너의 어깨가 먼저 들썩거렸다.
온 몸의 떨림과 흐느낌이 내 몸을 두드려댔다.
눈물작전이라니.
"란우야.."
네 눈물이 내 이마위로 흘러내렸다.
그건 묘한 기분이였다.
난 네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순진한건지 멍청한건지, 나는 그 뻔한 눈물작전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쨌거나 6개월만에 본 네 얼굴이였고,
너는 야위어 있었고,
늘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던 모습과 다르게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용서해줘.."
만화영화에서처럼 커다란 망치가 머리를 내려치는 기분.
너는 내 어깨를 붙잡고 무너져내렸다.
내 영웅이 두 무릎을 꺾고 힘없이 허물어졌다.
용서해줘
그 한마디가, 백번을 그렇게 빌어도 시원찮았을 그 한마디가
귀를 틀어막고 싶을만큼 듣기 싫었다.
주워담을 수 있는거라면, 얼른 그 입속으로 도로 집어넣고 싶을만큼.
나는 내 영웅의 비참함을 볼 수 있을만큼 모질지 못했다.
그때까지는.
용서했다.
용서할 수 밖에 없었다.
반태성이 열두살 짜리 앞에서 울면서 무너지는데, 용서를 비는데
내가 뭐라고 그 앞에서 차가울 수 있었을까.
그때까지 첫사랑도 겪어보지 못했던 내가,
엄마없이 햄버거를 먹으러 가본적도 없었던 내가,
혼자서 지하철을 타본적도 없었던, 어린이에 불과했던 내가
너말고 다른 무엇을 택할 수 있었을까.
그때까지도 나에게는 너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랑죠도 끝나버렸고, 슈퍼마리오따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우리반에는 내 눈에 차는 여자애가 없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멍청하게, 내 앞에서 눈물작전까지 쓰면서 용서를 구했다.
정말이지 그 말은, 너무 싫었다.
"왜 이렇게 어른스러워진거야, 응?
뽀뽀해달란 말도 못하겠잖아."
뽀뽀해달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초등학교 5학년.
나도 그때쯤 알건 다 알았다.
여자애들이 한달에 한번 마술에 걸린다는 것도 알았고
남자랑 여자가 좋아하면 서로 사귄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반에도 공식 커플이 세 커플이나 있었다.
나에게도 은근히 마음을 전해준 여자애들이 몇명인가 있었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였다.
"란우야- 형아 용서해준다는 의미로, 뽀뽀."
너는 아무튼 나만 보면 뽀뽀타령이였다.
내가 뭐, 영영 여섯살 코흘리개인가.
그때까지도 엄마아빠에게 잠자리 인사로 뽀뽀를 하는 애는 아마 우리반에 나밖에 없었을거다.
너무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무릎을 꿇었던건 금방 다 잊어버리고
아직 마음이 다 풀리지도 않은 나를 앉혀놓고
뽀뽀타령이나 하고있던 너도, 스스로 창피한줄 알아야 했다.
"형아 용서해준다며. 그럼 증거를 보여줘야지.
안그럼 어떻게 믿어."
억지도 그런 억지를.
아무래도 너는 처음부터 중학생이였기 때문에,
초등학교 5학년이 그렇게까지 어린애는 아니라는걸 모르는 것 같았다.
"한번만, 응? 한번이면 돼."
불쌍해서 해준다.
고개를 들어서 너를 쳐다보았다.
그 집에 들어선 이후, 가까이에서 처음으로 제대로보는 얼굴이였다.
야위었다.
그리고 더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정말 다 자란 남자였다.
난 아직 포경수술도 하지않은 풋내기였는데.
반듯한 이목구비가 기대감에 가득차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상대를 찌를듯이 날렵한 콧날이 늘 부러웠다.
남자답지못한 버선코가 나에게는 컴플렉스였으니까.
나의 곱슬머리와 결이 가느다란 너의 생머리.
나의 통통한 볼살과 여자들이 다 쓰러진다는 너의 황금턱선.
내 갈색눈동자와 너의 검은 눈동자.
김란우와 반태성은 열두살과 스물한살.
시간은 정말 내게서는 지겹도록 느리고, 너에게서는 무섭도록 빨랐다.
"여기."
너는 긴 검지손가락으로 네 입술을 가리켰다.
나도 초등학교 5학년인데.
"안돼, 거긴."
난 단호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도 이제 알거 다 안다고.
"왜?"
너는 내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왜냐니. 그건 너무 뻔한거 아닌가.
"입술에 하는건 키스잖아."
"......"
스탑. 일순간 모든게 정지.
내 팔을 잡고 흔들던 너의 손이 멈춰버렸다.
반응이 이상해 너를 쳐다봤더니, 넌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굳어있었다.
"하하하하하!"
그러더니 몇 초후,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난 좀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내가 그런것도 모를줄 알았던거야?
네 웃음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노려보는걸 눈치채고나서야 억지로 웃음을 가라앉혔다.
"하하하.. 아, 미안.. 미안..
근데 란우야."
네 입술은 웃고있었지만, 눈동자는 진지했다.
"진짜 키스는 형이 나중에 알려줄테니까, 아직은 몰라도 돼.
그러니까 지금은, 자, 뽀뽀."
진짜 키스라니?
네가 나를 놀리고있는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너를 붙잡고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것 같아
이번 한번만 눈감아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츕
예전처럼 쪽. 하는 소리가 나도록 하지는 않았다.
그건 어린애들이나 하는거니까.
그냥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얼른 네 입술에 내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다.
"......"
너는 또 정지상태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얼굴이 붉어졌다.
"혀, 형이.. 아, 아이스크림 가져올게."
갑자기 더워져서 아이스크림이 먹고싶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생각하면 쪽팔려서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얘기.
볼에 하는건 뽀뽀고, 입술에 하는건 키스인줄 알았던 초등학교 5학년에게
그건 첫키스나 다름없는 의미였다는걸, 너는 알기나 했을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 행여나 네가 내 첫키스라고 생각하진 마라, 반태성.
네가 안 가르쳐줬어도, 나도 이젠 진짜 키스가 뭔지 안다고.
아직 실습을 못해봤을 뿐이지.
_20060212_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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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돌아서 와도 돼.
가고싶은 곳. 하고싶은 것.
마음 닿는대로 어디든 가고, 무엇이든 해봐.
지금은 아직, 모르는척 해도 봐줄게.
영원처럼 긴 시간
머리와 가슴처럼 먼 거리
-아니. 나는 앞질러 가있을거야.
순간인 것처럼.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괜찮아. 얼마든지 돌고 돌아서 와.
어차피 넌 내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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