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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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의 맨 첫장부터, 너는 교복을 입고있다. 

내가 아직 유치원도 들어가지 않았을 때부터, 너는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였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큰 형이 있다는게 늘 자랑스러웠다. 

비록, 피가 섞인 진짜 형제는 아니였지만 

그때 당시에는 같은 엄마 배에서 나와야 진짜 형제가 되는건지도 몰랐다, 난. 

그저 형이라고 부르니까 내 형인줄로만 알았을 뿐.

내가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됐을 때 

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복을 입게 되었다. 

거기서부터는 기억이 제대로 난다. 

바짝 깎은 머리에 체크무늬 교복을 입은 너보다는 

남색 재킷에 덥수룩하게 머리를 기른 네가 어린 내 눈에도 훨씬 멋져 보였다. 

드디어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잠시잠깐, 

이번에는 어서 빨리 교복을 입고 싶었다. 

나에게 그 교복이라는건, 너와 동등해진다는 상징과도 같았다. 

겨우 1학년에 입학한 꼬맹이는 

벌써부터 졸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건 교과내용이 너무 시시해서도 아니였고, 아이들이 수준에 안 맞아서도 아니였다. 

오로지, 너와 같아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였다. 

"다녀왔습니다아-" 

"우리 란우 왔구나. 오늘도 공부 잘했고?" 

신발을 내팽개치듯 벗어두고 뛰어들어오면, 

엄마와 함께 차를 마시고 계시던 네 어머니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네! 받아쓰기 백점 받았어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책가방에서 당장 공책을 꺼내 

네 어머니앞에 자랑스레 내밀었다. 

입학전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터라, 

부모님은 내가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하셨지만 

난 뭐든지 곧잘 백점을 받아오곤 했다. 

"아니, 이렇게 착한 애기가-" 

엄마가 내 점심을 차리는동안, 

네 어머니는 뺨을 부비면서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네 어머니의 얼굴을 뵙고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되버린 네 얼굴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어른들의 대화속에서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싶어 한다고 했다. 

정신없는 네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반과 기타, 

알 수 없는 영어로 노래하는 사람들의 비디오 테잎은 너의 보물이였고 

너는 아무리 나라고해도 그것들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것들이 싫었다. 

당연히, 가수도 싫었다. 

나 외에, 너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모두 싫었다. 

만화영화외에는 텔레비전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부모님때문에 

사실 그때의 나는 가수가 뭘 하는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네가 춤과 노래 연습을 하느라 집에 늦게 온다는 얘기에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할 뿐이였다. 

하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아직 가수가 되지도 않았는데 그걸 연습한다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는걸보니 

별로 좋은 일은 아닌것 같았다. 

"아줌마, 오늘 형아 방에서 자도 돼요?" 

"안돼." 

난 분명 네 어머니에게 물었지만, 난데없이 엄마가 대답을 하고 나섰다. 

"그래,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형아 방에서 자고가도돼." 

그러나 네 어머니는 내게 한없이 너그러웠고, 

엄마는 띠동갑인 네 어머니에게 감히 적수가 되지 못했다. 

혼자서 슈퍼마리오 게임을 하고 

(그때쯤엔 막판까지 깨는건 일도 아니였다 

이제 슈퍼마리오따윈 시시했지만, 

부모님은 당시 한창 유행하던 파이트 게임을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사주지 않으셨다) 

동화책을 두어권 읽고, 저녁을 먹고, 그리고 깨끗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받아쓰기 공책을 챙겨 너의 집으로 건너갔다. 

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9시 뉴스를 보고있다보면 슬슬 졸음이 몰려온다. 

아직 엄마아빠와 떨어져, 내방에서 자는것도 익숙치않은 꼬맹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네방에서만큼은 혼자서 잠드는게 어렵지 않았다. 

너의 체취가 흠뻑 묻어나는 침대에 누우면 

마치 너에게 안겨있는듯 포근하고 나른해졌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너를 기다리다가 스르륵 잠이 든다. 

머리맡에는 백점을 받은 받아쓰기 공책을 펼쳐놓은채로. 

그러다 형광등 불빛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다. 

아직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지만, 방안의 인기척이 너라는건 분명하다. 

"형아야?" 

허공위로 양팔을 뻗으면, 네가 나를 가볍게 안아들었다. 

그러면 나는 네 어깨에다 무지막지하게 눈을 비벼댔다. 

"받아쓰기 백점 맞았어?" 

난 자랑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떠서 네 얼굴을 보고싶은데, 여덟살 짜리는 그렇게 쉽게 잠을 떨칠수가 없다.

"그래도 제법 하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는 받아쓰기 공책의 페이지를 뒤적거렸다. 

"자고 있어. 형아 씻고 올게." 

너는 나를 침대에 다시 눕히려고 했지만, 

나는 네 목에 감은 팔을 놓으려 들지 않았다. 

"란우 착하지-" 

다정하게 달래던 목소리. 

등을 다독이며 얼르던 따스함. 

몇 일만에 만나도, 분명 예전과 달라진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네가 나보다 훨씬 먼저 어른이 되어간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복잡한 세계속에 속해있고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자꾸만 가려고 한다는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네가 전부인데, 너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괴로운 사실. 

어린 나는 막연하게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네 목에 두른 팔을 놔주고싶지 않았나보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네가 씻고 돌아오는 인기척에 설핏 잠이 깨던 나는 

옆에 누운 너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내 작은 팔다리가 너의 단단한 몸을 휘감으면 

너는 가만가만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형아 나, 해피엔딩이 뭔지 배웠어." 

어둠속에서 잠에 취한채로 

네 어깨에 코를 박고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이야- 우리 란우, 그런것도 알아?" 

너는 견딜 수 없이 귀엽다는 듯, 내 볼에 네 볼을 마주 갖다대었다. 

"응. 학교에서 별거별거 다 가르쳐줘." 

이번에는 내 볼을 살짝 꼬집는다. 

"형아." 

너를 따라잡을 수 있을만큼만, 그만큼만.

시간이 멈춰준다면.

"나, 해피엔딩이 좋아." 

좋은 시절은 모두 끝나버렸다는 것을, 

막연히 느낄 수 있었다. 

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는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이불을 바로 덮어 주었다. 

"괜찮아. 다 해피엔딩으로 끝날거야." 

너는 거짓말을 했지만. 괜찮다. 

믿지 않았으니, 속은 것도 아니므로. 

"싫어. 싫어어!" 

초등학교 4학년이였다. 

가수가 뭘 하는건지, 이미 다 알아버렸다. 

그때쯤 벌써, 일주일에 두어번 얼굴 보기도 힘들어진 네가 

그날은 아침부터 종일 나와 놀아주고 

저녁엔 내 방에서 같이 자기로해서 기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너는 엄마 몰래 침대위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해주더니 

이제 자기는 가수가 될거라고 했다. 

나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으면서,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게임 몇 번 같이 해주고, 피자를 사주고, 

침대위에서 아이스크림 먹게 해준 것 정도로 

내 마음을 돌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니. 

난 반대편 벽으로 스푼을 냅다 집어 던졌다. 

"안돼! 절대로 안돼!" 

막무가내로 발을 굴러댔다. 

너는 나를 안아주려 애썼지만, 내 발길질에 무참히 채일 뿐이였다.

"란우야- 

형아 티비에도 나오고, 

란우가 좋아하는 형아누나들 싸인도 받아다 줄 수 있는대?" 

너는 초등학교 4학년이 얼마나 조숙한지 

몰라도 한참 몰랐다. 

그런 사탕발림에 응!, 하고 마음을 바꿀 내가 아니였다. 

"필요없어! 하지마! 안돼!" 

나는 악을 쓰면서 울어댔다. 

결국 엄마가 들어와서 나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난 알고 있었다. 

다 끝장이라는걸. 

네가 가수가 되고나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너라는 것은 

콩알 하나만큼밖에 안될거라는걸. 

어쩌면, 완전히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걸. 

난 아직 중학생도 못됐는데, 넌 어느새 고등학교도 졸업해 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단식투쟁을 펼쳐봤지만, 기어이 네 앨범은 나오고야 말았다. 

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였고 

내 생일을 일주일 앞둔 늦봄과 초여름 사이의 어느 토요일이였다. 

"란우야, 태성이형이야. 전화 받아봐." 

너는 첫 방송을 앞두고 내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너를 용서해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애초부터 내 의견따위 고려해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모든게 다 결정된뒤에 잘 달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면서. 

"싫어." 

엄마가 내미는 전화기를 손으로 탁 쳐버렸다. 

"너, 이놈. 어디서 못된것만 배워가지고. 

얼른 형아한테 잘하라고 얘기해줘!" 

나를 감싸줄 네가 없으니, 엄마에게 더 대들어봤자 승산이 없었다. 

나는 입술을 비쭉 내밀고 마지못해 전화기를 귀에 갖다대었다. 

"란우야, 란우야. 태성이 형이야." 

전화기 너머는 몹시 소란스러웠다. 

첫방송을 앞둔 긴장된 순간에 너는 내게 전화를 걸었다. 

잘하라는 말을 듣고싶은 변변한 여자친구도 하나 없었던 모양이다.

네 인생도 참.

"란우, 집에서 형아 하는거 보고있을거지?" 

"안봐!" 

내가 아픈만큼 너도 아파야했다. 

그렇게 쉽게, 이미 결정된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듯이 포기해 버릴수가 없었다. 

너 아니면 안되는 나를, 네가 이렇게 쉽게 버릴수는 없었다. 

"형아, 잘해- 라고 못해, 너?" 

엄마가 옆구리를 찌르며 협박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쳐냈다. 

내 갑작스런 눈물에는 엄마도 깜짝 놀랐는지, 더이상 나를 채근하지 않았다.

"안봐, 절대로 안볼거야. 

다시는 형아 안봐!" 

그리고 네가 속한 삼인조 남성 그룹은 대박이 나버렸다. 

넌 완전히 떠버렸다. 

겨우겨우 유지되고있던 내 평화로운 유년시절도 덩달아 박살이 나버렸다. 

모든 비극의 시작. 

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였는데 

너는 내게서 텔레비전까지 빼앗아 가버렸다. 

어느 채널을 켜도 네 얼굴과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난 텔레비전도 보지않게 되었으니까. 

아직도 나에게는 네가 세상의 전부였는데 

너는 자꾸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네가 되려고 했다. 

어렸던 내 순정을 몰라준 너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거라던 너의 뻔한 거짓말과 

믿지 않았으면서도 억울해했던 나의 모순. 

절대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던 잔인한 시간. 

좋아, 나도 이제 비뚤어질거야. 

_20060209_김다윗 

너는, 하늘색 우산을 받쳐들고 안개사이를 걸어 

좁고 어두운 회색 교실 깊숙한 곳까지 봄을 이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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