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3)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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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온다. 

꺄악- 하는 여자애들의 비명소리는 신호탄이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걸어 나오는 너를 확인한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가자." 

교복 바지에 오른손을 구겨넣는다. 

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너에겐 좀 충격일거다. 

앞으로 스무 걸음. 

트웨니, 나인틴, 에잇틴.. 

물론 난, 네쪽은 쳐다보지 않는다. 

네가 나를 발견하지 못할리는 없다. 

너한테는 내 전용 레이다망이 있으니까. 

"김란우!" 

귿 잡, 보이. 

스읍, 하고 들이마시고 

후우, 하고 뱉으면서 고개를 돌린다. 

2년만에 보는 잘난 면상이겠군. 

한 무리의 여자애들을 꼬리처럼 매달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너. 

여전하다.

그리고 웃기다. 

난 누가 뭐라고 해도, 쟤네들이 싫다. 

"오랜만이야." 

내가 넉살좋게 먼저 인사말을 건네는 동안, 

내 주변의 녀석들은 너를 알아보고 저희들끼리 낄낄거린다. 

그 웃음이 거슬리지만, 지금은 어쨌든 같은편이다. 

"너... 너..." 

너는 내가 아니라, 내 손에 들린 담배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눈을 떼질 못한다. 

작전은 대성공이다. 

그러나 왠지 씁쓸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야." 

반태성, 진짜 화났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치켜뜬 두 눈에는 평소에 나를 대하던 안쓰러움같은건 전혀 실려있지 않다. 

나도 슬슬 기분이 더러워진다. 

내 일에 네가 화를 내는건 반칙이다. 

네가 뭔데. 

버렸잖아. 버리고 가버렸잖아.

"아, 뭐, 이거? 

어때서, 넌 나보다 더 어릴때부터 했잖아." 

내 빈정거림에 뒤에 서있던 녀석들이 한차례 더 낄낄거린다. 

녀석들이 너를 두고 비웃는 것도, 내가 너를 웃음거리로 만들고있는 것도, 

그런 내 작전에 휘말리는 너도, 모든게 마음에 안 든다. 

내가 꾸민 연극에 내가 싫증을 내고 만다. 

난 변덕쟁이다. 

어린애 취급 받는건 당연하다. 

"...!!!" 

너는 담배를 낚아채 운동화 바닥으로 짓이겼다. 

내 눈빛은 금새 이글거리며 너를 노려본다. 

결국 난, 이런식으로 유치한 시비를 걸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거다. 

2년만의 감격적인 재회를 이런식으로 구겨버리기 위해서. 친히.

학교에서 가깝다는건 다 핑계다. 

로데오를 지나서 여기까지 내려올 일은 없다. 

"뭐야!" 

"저런 되먹지 못한 놈들이랑 어울려 다니면서, 이런거나 배웠냐?" 

씩씩거리며 대드는 나를 앞에 두고, 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래봤자야, 반태성. 

너는 나 못 이겨. 

왜? 지은 죄가 너무 많거든. 

"너는 하면서, 나는 왜 안돼?" 

내 논리라는건 늘 이런식의 생떼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거지식의 내 유치한 논리에도, 너는 반박할 수 없으니까. 

참고있다는거 안다. 

그 눈도, 손도, 다리도. 온 몸이 말해준다. 

폭발할 것 같은 화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다고. 

그래도 내 심술은 꺼지지 않는다. 

너무 늦었어. 

사람들이 말하는 반태성의 카리스마라는게 이런거다. 

상대의 기를 모조리 빨아 들이고 짓눌러 버리는 우월한 눈빛. 

그 앞에서 나는 말그대로 범 무서운줄 모르고 덤벼드는 하룻강아지. 

뒷꿈치를 들면서 바락바락 대드는 일곱살 짜리. 

일순간, 잔뜩 독이 올라있던 네 눈빛이 스르륵 풀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눈이다. 

날 완전 빡돌게하는 슬픈 눈. 

너는 입술이 예뻤다. 

아니, 무엇하나 미운 구석이야 없었지만 

유독 입술이 예뻤고, 난 그 입술을 좋아했다. 

"다시 와." 

네가 내 눈을 피하면서 고개를 돌린다. 

다시 오라고 말한다. 

예전처럼. 

너의 보호아래서, 온 종일 네 시선이 닿는 곳에서. 

눈물이 왈칵 솟구친다. 

좆같다. 너랑 나 사이는, 진짜로 좆같다. 

"미쳤어?" 

내 목소리는 날카롭게 허공을 찌른다. 

길길이 날뛰는건 언제나 내 몫이다. 

반태성, 반태성, 반태성, 반태성. 

이제 지긋지긋해. 

"그때처럼 그러지 않을게. 다시 와. 

너 정말 왜그래? 

2년만에 만나서 보여준다는 꼴이 고작 이런거야?"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너에게 예외적인 사람인지. 

네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뭔가, 네가 아닌 다른 것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그건, 핸드폰이 꺼져 있으면 불안해하고 

네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걸 싫어하고 

갖고싶은 모든걸 사주는 너의 과잉보호때문이 아니였다. 

열일곱의 내 반항기를 부추기는건 따로 있다. 

네가 나에게 아무리 다정하게 굴어도 

나는 끊임없이 네게 목이 말랐다. 

네가 미웠다. 

끝도없이 네가 미웠다. 자꾸만. 

"나, 갈래." 

아무리 멋진 척을 하려고해도, 아무리 쎈 척을 하려고해도 

어릴때부터 너에게 길들여진 나는, 어리광섞인 말투를 버릴수가 없다. 

무녀독남의 귀한 외아들로 자라서가 아니라, 네 옆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김란우 버릇은, 반태성이 다 버려놓았다.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아닌, 옆집 반태성이. 

한번 망가진 버릇은, 2년이 흘러버려도 어떻게 복원이 안되나보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내 등뒤로 너는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달려와서 붙잡지않을 너라는걸 안다. 

그럼 내가 또 잔뜩 신경질을 부릴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네가 붙잡는게 싫은건지, 그건 나도 모른다. 

좋아도 싫다고, 싫어도 싫다고. 

언제부터 이렇게 비뚤어진 아이가 됐는지, 그것도 난 모른다. 

아니, 알 것 같다. 

그건 6년 전부터.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잖아. 

하지 말라고 했잖아. 

입술을 꾹 깨물어봐도 눈물이 주룩 흐른다. 

쪽팔려서 먼저 뛰어가 버렸다. 

녀석들이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지만, 뒤돌아볼리 없다. 

네 목소리에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그깟 놈들따위. 

네 품을 떠나온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달리고 또 달려도, 모퉁이를 돌고 또 돌아도 

내가 멈출 곳은 없다. 

네 옆집에서 태어난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모르겠어, 이젠. 

대답 못할 것 같아. 미안해, 반태성. 

햇빛에 반짝거리는 너의 검은 머리카락.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게 이쁜줄을 알았다. 

손을 뻗어 만지고 싶어했다. 

형아, 형아, 태성이 형아. 

귀찮게 널 따라다녀서, 그래서 지금 벌 받는지도. 

오래된 사진속의 나는 너를 향해 환하게 웃고있다. 

나를 번쩍 안아올린 너도 미소를 짓고있다. 

그때는 적어도, 지금처럼 엉망은 아니였던 것 같은데. 

엄마의 스카프를 가위로 난도질 해놓거나 

멀쩡하게 타고나간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날은 

난 언제나 한걸음에 너의 집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치 그곳에 어떤 공포로부터도 나를 지켜줄 여신이 있는 것처럼. 

"아유- 란우 엄마. 

애들이 크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물론, 여신은 존재했다. 

아줌마 사랑해요. 영원히. 

"무슨 일이에요?" 

방문을 열고 나온 너는 네 어머니의 치마뒤에 숨어있는 나를 쳐다본다. 

나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형아!" 

단번에 네 품속으로 달려가 안기면, 그걸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끝이났다. 

"제가 잘 타이를게요." 

열여섯살 짜리 반태성의 근엄함에는, 우리 엄마도 무릎을 꿇고 

나를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네 품에 안겨, 내 영원한 도피처인 네 방으로 들어가면서 

난 엄마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다. 

이따 두고보자, 는 표정으로 엄마는 나를 겁주었지만 

한시간만 지나면 화가 다 풀려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네 무릎위에 앉아, 만화영화나 보면 그만이다. 

빙글빙글. 

언제봐도 정신없는 방. 

"란우야, 사고 좀 치지마라, 제발." 

나를 무릎에 앉히고 어딘가에서 꺼내온 막대사탕을 물려준다. 

나의 곱슬머리를 쓰다듬는 너의 손은, 크고 단단했다. 

나는 그 손 아래서 안도했다. 

그 손은 나를 지키기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단 한번도 의심한적 없었다. 

세상물정 몰랐던 어린 꼬마의 대단한 착각. 

어쩔 수 없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랑죠와 슈퍼마리오가 전부였으니까. 

내가 아는 사람중엔 네가 가장 강하고 아름다웠으니까. 

애초부터 나에겐 선택권같은건 없었다. 

넌 학교도 다니고, 예쁜 여자애들도 만났겠지만 

나에게는 우리가 살던 빌라가 온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불공평했다. 

이런건 무효다. 

"나, 행버거 먹을래." 

아홉살 차이는 별것 아닌듯, 어른 흉내를 내며 항상 너에게 대들던 나였지만 

내 어리광의 절정 역시도, 매번 너에게서 팡파레를 터뜨렸다. 

"그래, 가자." 

참고서 갈피 어딘가에 숨겨 두었던 비상금을 꺼내들고 

너는 내 손을 찾아 쥐었다. 

엄마에게 쫓기느라 풀이 죽어버린 나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너는 무엇이라도 했을 것이다. 

"저녁 먹을 때 다됐는데 어디 가니?" 

"란우 데리고 햄버거 먹으러요." 

"그런거 자꾸 먹이면 안 좋아." 

"가끔은 괜찮아요. 갔다 올게요." 

네 손을 잡고 보도블럭위를 팔짝팔짝 뛰면서 

내 기분은, 하늘로 가는 계단을 밟고 올랐다. 

"김란우, 너 이 세상에서 누가 최고야?" 

약삭빠른 너는 그런 때를 놓치지않고 내게 일순위를 묻곤했다. 

하지만 어떠랴. 

햄버거를 먹으러가는 일곱살 난 내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당연히 형아지이-!" 

시원스런 내 대답에 만족스러워하는 너의 얼굴.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면서 걸어갔던 오후의 그 골목길. 

목을 덮는 긴 곱슬머리에 반바지와 운동화. 

아톰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온 동네를 누비던 일곱살의 나에게 

함께 게임을 해주고, 그네를 밀어주고, 딱지와 햄버거를 사주는 너는 

절대적인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엄마도 아빠도 필요없었다. 난 너밖에 몰랐다. 

기억이 시작되는 맨 처음부터 그랬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너의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구불구불 웨이브진 나의 곱슬머리. 

기분좋은 콧노래와 내 손을 다 감싸던 너의 커다란 손. 

누구도 부럽지 않았던 그 순간은. 영원. 

_20060207_김다윗 

언제쯤이면 능숙해질까.

진동하는 풋내기냄새.

언젠가부터, 모든 이야기는 너를 향한 러브송이 되어버렸지.

나도 내가, 이렇게 순정파인줄은 몰랐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손해보는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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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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