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도 한 통화 없고, 어떻게 살았냐?”
카페로 가자마자 튀어나올 줄 알았던 진우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여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카페 문을 쾅 하고 닫으며 들어가자 저 안 쪽에서 잠깐만요
라고 소리치는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둥지둥 안 쪽에서 달려 나오는 진우는 등에 승준이를 매달고 있었다.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을 듯 진우의 등에 찰싹 붙어 있는 승준이 녀석이 날 힐끗
보더니 곧 눈을 활활 불태우며 내게로 달려왔다.
“오- 이 상처 입은 눈동자 좀 보게. 얼굴이 말이 아니군. 매력적이야. 음음...”
바로 코앞에서 중얼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좀 밀어내고 울상을 짓고 있는 진우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지내냐는 내 물음에 녀석이 더 이상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울상을 짓더니
옆에 서서 다시금 진우의 허리를 꼭 껴안는 승준이 녀석을 손가락질했다.
“여전히 안 떨어져. 장사도 못 하고 나 이제 빌어먹게 생겼어, 현조야.
어떻게 좀 해줘.“
“.................. 무지 잘 어울려. 평생 그렇게 하고 살아라.”
내 말에 진우 녀석이 소리를 질러대며 승준이 녀석의 팔을 풀려고 야단법석이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역시 아직도 녀석은 나의 놀림감이었다.
부축하며 명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온 현준이 카페 의자에 명호를 앉히고 내게
말했다.
“너 집구해야 되잖아. 이렇게 빈둥거려도 되냐?”
“........ 진우 녀석 품에서 조금만 더 놀고 싶은데... 괜찮냐..? 여기서 며칠만 있자..”
“....... 여기가 니들 노는 싸구려 여관방인줄 아냐? 너 오면 저 현준이 녀석도 올 테고
명호도 있을 테고, 장사는 언제 하라는 거냐?! 어?! 이 나쁜 자식들아!!!!!“
“나 내일 모레부터 회사도 출근해야 된단 말이다. 너가 해주는 밥 먹고 싶어, 진우야.
그래도 되지?“
매력적인 웃음까지 지어주자 녀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끄덕거리는 녀석의 표정은 안타까워 보였다.
역시 모성본능이 강한 녀석이다.
“일주일 정도만 있을게.”
“......... 돈 내놔.”
“알았다..”
피식거리며 웃고는 진우의 머리카락을 툭툭 쓰다듬었다.
그러자 진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던 승준이 자신의 머리도 쓱 디밀었다.
녀석의 머리도 툭툭 쓰다듬어 주는데, 옆에 앉아 있던 현준이 녀석도 머리를 쓱 내민다.
그런 현준이 녀석의 머리도 슬쩍 쓰다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 다들 내 강아지 같군.”
농담 섞인 내 말에 녀석들이 하나같이 소리를 치며 떠들어댔다.
소란스러운 녀석들 틈에서 가슴 아픔도 차츰 사라졌다.
나 또한 승준처럼 포근하고 덩치 큰 진우 녀석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기댔다.
이를 빠드득 갈며 벗어나려 하는 녀석을 더욱 꼭 껴안고 등에 얼굴을 기대었다.
편하고 따뜻하다.
승준이 녀석이 왜 녀석의 품에서 벗어나질 않는지 알 것도 같다.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을 텐데도 눈가가 뜨겁다.
“와아, 드디어 오셨군요. 그동안 푹 쉬셨나요?”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쏟아지는 질문들..
그 동안 얼굴이 많이 잊혀진 사람들의 질문에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아 질문하며 가까이 다가와 붙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내 자리로 가 앉았다.
내 표정을 살피던 직원들은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더욱 냉정해진 내 표정에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업무를 보는 속도는 빨랐다.
실수도 전혀 없었다. 머릿속도 깨끗했다.
내 보고서를 보며 한 달 간 쉬더니 더 똑똑해졌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진우의 카페를 출퇴근 마다 다니며 도중에 있는 연수의 꽃집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짓 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 앞에만 가면 속도를 줄이고 가슴 졸이며 쳐다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늘로 진우의 집에서 출퇴근한지 일주일 째...
가끔 연수의 모습만 보일 뿐,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제 내일이면 진우의 카페에서 나와 본가로 들어갈 참이었다.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된 큰형이 계속 전화를 해서 들어오라고 성화였고
현준이 녀석도 내가 들어가면 같이 들어가겠다며 버팅기고 있었다.
집을 구할 시간도 없었고 진우 카페에서 더 이상 머무르기도 힘들었으므로
어제 그저께 큰형한테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이삿짐까지 다 날라준다고 큰형이 말했고, 난 내일 회사가 끝나는 대로 본가로 들어가면
된다.
내일 아침 출근할 때에는 속도를 더 떨어뜨리고 달릴 거라는 걸 안다.
미련 갖지 말자고 해놓고 그렇게 할 거라는 걸 안다.
쉽게 잊을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욱 힘들다.
그 날 퇴근을 해 카페로 가니 진우 녀석이 마지막이라며 진수성찬을 차려 놨다.
그 동안 손님도 잘 받지 못하고 들러붙은 우리들 덕에 힘들었을 녀석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식탁을 차렸다.
한참 부산스러운 녀석의 등 뒤로 승준이 녀석과 명호 녀석이 다가왔다.
내 어깨를 툭 치며 가끔 놀러 오라는 녀석들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지어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본가로 가게 되면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 두고 큰형 밑으로 들어가야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에 파묻혀 지내게 되어 시간이 나지도 않을 테고,
녀석들을 만날 시간도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었기에 대충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속 시원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상을 차리던 진우 녀석이 그런 내 머리를 툭 쳤다.
“너 안 놀러오면 죽는다. 또 전에처럼 연락도 하나도 없고,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면
알아서 해라.“
웃음 짓던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뜨리던 녀석이 내가 알겠다고 하자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다 차려놓은 탁자 옆에 날 앉힌다.
“어차피 본가 가면 맛있는 거 실컷 먹을 거지만 맛있게 먹어라.”
“난 진우 너가 해주는 게 제일 맛있다니까.”
“............. 쳇.... 입만 살았어.”
투덜거리면서도 진우 녀석의 얼굴이 미소로 환해진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나 또한 미소를 짓다가 맛있어 보이는, 하지만 입 속에 들어가면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느껴지는 음식을 조금씩 씹어 삼켰다.
아침에 출근을 하는 길에 보이는 꽃집을 조금 더 길게 쳐다보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는지 불도 켜져 있지 않고 어두컴컴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꽃집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변하지 않은 따뜻해 보이는 인테리어를 주시하다가 곧 눈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눈을 한 번 깜빡거리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조용히 흐르듯 출발하는 차 옆으로 다정하게 대화하며 지나가는 그들이 보였다.
좀더 말랐지만 연수를 향해 미소 짓는 주환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주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침 시간 출근길이라 조금 막히던 길이 신호등이 바뀜과 동시에 정지를 했고,
나 또한 주환의 시선에 놀라 차를 급정지 시켰다.
빠른 속도가 아니었는데도 차는 쭉 밀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당황해 운전대를 옆으로 확 꺾었고, 옆에 서 있던 전주에 차를 들이 받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찔한 아픔이 찾아왔다.
눈동자 위로 새빨간 핏물이 뚝뚝 떨어짐과 동시에 앞으로 몸이 쏠리며 정신을 잃었다.
“........ 흐윽... 흐윽.... 으흐흐흑....”
“그만 좀 울어, 고진우.!! 진짜 짜증나서.. 사내자식이 뭘 그렇게 울어제껴?
현조가 죽냐?! 어?!“
낯익은 목소리.
귀찮은 듯한 누군가의 말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슬쩍 손가락만 움직였다.
잘 움직인다.
그러다 눈을 감은 상태로 눈동자만 움직여 보았다.
잘 움직인다.
그에 용기를 내 눈을 뜨며 머리를 움직이다가 욱 소리를 내며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엇, 현조야!!!!! 성현조! 정신 차려봐. 괜찮냐?!”
귀찮다는 듯 익숙한 울음소리를 구박하던 낯익은 목소리가 곧 다급하게 외쳤다.
머리를 움켜쥐려 오른 손을 올리다가 또 다른 통증에 다시금 행동을 멈추었다.
“........ 윽..”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뒤로 벌러덩 눕자 낯익은 목소리가 설명하듯 다급히 말했다.
“머리도 깨지고 팔에도 금 갔어.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 눈만 떠.”
“현조야!!! 나만 두고 죽으면 안돼.. 흐흑...”
조용하게 울음소리를 멈추고 딸꾹질만 요란하게 하던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울어
젖히며 말했다.
결국 눈을 조금 떴다.
정신은 돌아왔지만 아픔이 느껴지는 머리와 팔 때문에 상태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눈을 뜨자 하얀 천장 옆으로 머리 두 개가 보였다.
“나 보이냐..?”
“현조야! 괜찮아?! 괜찮은 거지?!!! 죽는 거 아니지?”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지만 걱정스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 현준이 녀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진우 녀석이 소란스럽게 물었다.
익숙했던 목소리에 조금 안심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가 울리며 무척 아팠던 것이다.
그저 입술만 조금 올려 미소지어주자 진우 녀석이 더욱 울어 젖혔다.
“이게 웬 날벼락이냔 말이야... 어허헝... 멀쩡하게 출근한다고 가던 녀석이
교통사고 나서 죽는다고 연락이나 오고.. 흑.... 며칠 동안 깨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 줄 알아...? 으이씨.. 역시 재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그 동안
그렇게 걱정을 끼치더니 열라 더러운 미소만 짓고....흐으으윽....“
“......... 괜찮아....”
콧물까지 흘리며 우는 진우 녀석이 안쓰러워 열리지 않는 입으로 겨우 말을 해주자
녀석이 더욱 울며 소리를 질러댔다.
옆에 서 있던 현준이 녀석이 그런 진우 녀석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내게 말했다.
“깨어나서 다행이다. 난 너가 죽지 않을 줄 알고 있었어.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세 대나 박으면서 니 차가 찌부러졌는데 그 속에서 죽지 않고 산 것도 대단한 거다..
진우 녀석 데리고 나갈 테니까 더 자. 나중에 또 올께.“
여전히 울고 있는 진우를 데리고 병실을 나가는 녀석의 등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조용해진 병실에서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데, 또 다시 병실의 문이 열렸다.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한 명 들어오는 게 보여 살짝 감았던 눈을 떴다.
“..............”
“.........?”
홀쭉한 볼, 더욱 마른 듯 보이는 몸, 유일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한참 쳐다보다가 물었다.
“............ 누구세요... 전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병실 잘못 들어오셨나 봅니다.”
정중한 내 말이 병실에 가득 울리며 퍼졌다.
미간 사이가 일그러지며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더욱 냉정하게 열리지 않는 입으로 말했다.
“모르는 분이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당장 나가주십시오.”
“.............. ..... 당신을 살려준 은인이라고 하면 괜찮겠지?”
“.. 은인이라... 왜 살렸는지 물어도 될까요..?”
“무고한 생명이 하나 죽는 걸 보는 건 안타깝기 때문이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는 듯 아픈 머리를 슬쩍 돌렸다.
모른 척 하며 잠을 청하려 하는데, 침대 옆으로 그가 다가와 섰다.
뒤에서 비치는 햇빛에 의해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아니, 솔직히 말할께.”
“..........”
점점 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꼭 살려야 되기 때문에,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구했어.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도 없이 무조건 달려가서 당신을 구했어.
찢어진 차 사이로 피로 울긋불긋한 당신을 보는 순간, 꼭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당신이기 때문에 꼭 살려야했어.“
“........ 왜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물어도 됩니까...”
“......................... ....... 틀려. 연수와 당신은 틀려.”
나직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읊듯이 말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이 일초도 지나기 전에 당신이
전주에 들이 받았어. 그리고 그 뒤로 몇 대의 차가 연달아 충돌했지. 그와 함께
당신이 탄 차는 점점 더 찌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어. 뭔가 아찔했어.
당신과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에도 마지막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그 순간에는 달랐어.
영원히 볼 수 없을 거라는, 이 세상에 당신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어. 이대로 보지 못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에 만류하는 사람들 틈으로
달려가서 널 구했어. 연수가 옆에서 내 팔을 잡는데 그것도 모르고 달려가서 널
구했어.“
“.............”
“말했었지. 당신만 보면 성욕이 생긴다고. 연수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데
당신한테는 시도 때도 없이 반응한다고... 그것 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고, 미칠 뻔한
적도 많아. 그리고 당신이 의식을 차리지 못한 며칠 사이에 계속 생각했어.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대로 이 세상에서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계속 생각했어. 결국 못 참겠어서 이렇게 당신을 찾아왔어. 들어오는 순간, 눈 뜨고 날
쳐다보는 당신을 보면서 꼭 껴안고 키스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어. 다정하게, 오래도록
키스해주고 싶었어..... 성욕 때문이 아니라, 내 심장이 하라고 시켜. 부드럽게 안아주라고
시키고 있어.“
“............ 글쎄.. 넌 지금도 똑같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 항상 그렇게 느끼다가도 어느새 도망가는 너였으니..
사라져 버려. 더 이상 기대 같은 것 품기 싫으니 애매한 말만 하지
말고 사라져 버려.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이대로 죽어도 괜찮은 목숨이니까 상관 말고
사라져. 이젠 싫다.. 너무 지쳐서 피곤해.. 제발... 저리 가라.... .......“
목구멍이 타는 것 같다.
삼켜지지 않는 침을 겨우 삼키며 말을 했다.
등 뒤에 서 있는 주환은 보지 않은 채,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거칠고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전히 나직하고 안타까운 그의 목소리...
“........ 연수는 누나야.. 누나일 뿐이었어. 엄마 같은 존재였어. 느꼈던 건
호텔방에서 연수 누나가 날 유혹했을 때야. 그 뒤로도 많이 느꼈지만 당신에 대한
감정을 막기 위해 방패로 사용했어. 난 연수 누나를 사랑한다고. 그러니 파렴치한
당신 같은 녀석한테 절대로 마음 줄 수 없다고. 계속 생각했었어. 마지막 날까지
질투를 하면서도, 당신 동생의 아니꼬운 비꼼을 들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인정할게. 당신한테 반한 것 같아.“
“.............. 쿡쿡..... 아아, 고백 같은데...”
“같은 게 아니라 진심이다.”
“.. 저런... 이젠 내가 너 싫은데 어쩌냐.. 다시 보니까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고..
항상 날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녀석에게 왜 목 매었나 싶기도 하고, 못 갖는 거라서
더 갖고 싶었던 것도 같고 말이야. 이젠 싫증나 버렸어. 그런 고백 못 들은 걸로 할 테니
다시 연수에게 가라. 널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이미 싹 사라졌으니.“
“.........................”
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감돌았다.
뒤 쪽에서 느껴지는 거친 숨소리는 여전히 그가 그 곳에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그림자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 그럼 나도 제안하지. 날 줄 테니 평생 같이 살아줘.”
“................ 별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닌걸. 갖고 싶지도 않은 것 때문에 평생을
왜 바쳐야 하지...?“
“... 몸 돌려서 내 눈 보고 말해. 내가 애걸하게 만들 생각인가 본데, 얼굴 마주보고
듣고 싶어.“
주환의 낮은 목소리에 얼굴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슬쩍 몸을 돌렸다.
아픔이 느껴져 찡그린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홀쭉해진 얼굴이 보인다.
내가 먼저 물었다.
“나와 행복할 수 있나?”
“연수와 사는 것보다 더 행복했었어. 연수와 살면서도 당신 생각뿐이었어.
이거면 대답이 됐어?“
“.......... 아니.. 내가 하던 식으로 나한테 엉덩이 대줄 수 있나?”
“................... 대체 또 무슨 꿍꿍이 속이지......?”
“.... 연수에게는 무슨 말을 했지...?”
“누나로서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더 이상 같이 못 살게 되어 미안하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똑똑히 말해봐.“
“........ 싫다. 제안 받아들이기 싫군. 그만 가봐.”
주환이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를 갈았다.
한숨과 함께 거친 욕을 내뱉던 주환이 거칠게 소리쳤다.
“당신 없인 못 살 것 같다고!!! 당신이 날 싫어해도 할 수 없어! 당신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해줄 테니까 기다려. 병원에서 퇴원하는 순간부터
당신 동생이고 친구들이고 모두 못 만나게 집에다 묶어놓을 테니.
내가 당신에게 반했듯이 당신도 다시 나한테 반하게 만들 거야.“
“싫은데.. 내가 말했지 않나..? 현준이가 소매치기 기술도 배웠다고.... 열쇠 따는 건
선수인 녀석이지. 난 내가 싫어하는 일에 대해서는 절대로 하지 않는 성격이다.
도망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어.“
“......... 대체 뭘 원하는 거지...? 그렇게 금새 변할 사랑이면 왜 처음부터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한 거냐. 내가 내 감정을 깨닫고 이제야 절실히 당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데
왜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거냐고..!!!!“
아프던 몸이 낫는 것 같다.
조금 풀어진 입술을 살짝 구부려 미소 지었다.
오만하다 싶은 미소를 짓는 날 보며 그는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런 그를 보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사랑하니까 같이 살아 주십시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발 같이 살아 주세요.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 라고 말해.“
한참 대답 없이 날 내려다보는 그...
다시 한 번 미소 짓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해준 뒤 눈을 감았다.
잠을 잘 것처럼 눈을 감고 몸을 틀자 그가 신음소리를 냈다.
“..............사... 사....”
더듬거리는 목소리.
분명히 붉어져 있을 그의 얼굴과 귓불...
머릿속으로 즐겁게 상상하며 스르르 잠에 빠져 들었다.
아프던 머리는 차츰 나아지고 있었고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인하여 아프던
가슴마저도 깨끗이 치유되었다.
여전히 더듬거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언젠가는 듣겠지...
라는 생각으로 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