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은...
어제 승준이 말한 것처럼...
질투에 미친 남편의 모습 같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현준이 말한 것처럼, 나 또한 묘한 면에서 둔했다.
짐작은 가능했어도 그 것을 믿지는 않았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나,
그의 화내는 모습에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생각이 맞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를 시험해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결정을 하고 싶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거친 손놀림으로 내 옷을 벗겼다.
끈질기게 속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은 이미 날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왜 알지 못했을까..
이토록 격렬한 손놀림에는 질투가 섞여 있었다는 걸...
승준이 말한 뒤에야 확실히 알게 되다니,
예전의 내가 맞는가 싶었다.
눈을 감고 더욱 신음을 질렀다.
평소보다 더욱 유혹적인 신음에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밀고 들어오는 그는 뜨거웠다.
등에 팔을 감고 상처를 내며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가 나에 대한 감정을 깨닫길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려면 어떤 수를 써야 할 것 같다.
그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확신이 들게 된다면,
그가 나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된다면,
그를 확실히 잡고 놓지 않을 것이다.
연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말 것이다.
D-5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들었다.
받기만 하던 내가 전화를 하자,
놀란 형이 웬일이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큰형에게 인사조차 생략하고 대답조차 하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형 후배 중에 쓸만한 남자 하나만 소개시켜줘.”
“..... 너.. 드, 드디어.. 남자밖에 모르는 녀석이 된 거냐....?
저.. 저기.. 헤어질 때가 오니까... 너가 불안해서 그런 거야.. 아암.......
너무 걱정마라, 현조야... 이 형이..“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27살 정도 된 믿을 만하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 한 명만
빌려달라니까. 쓸 데가 있어.“
“..어, 어디에..? 호, 혹시.. 몸이 필요한거라면....”
“.... 그만하라고 했다... 싫다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고..”
“아니다!!! 소개해 줄께!!!!”
“오늘 점심에 시간 되는지 물어보고, 00로 나오라고 해. 형은 나오지 마.
꼭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 입 무거운 사람으로.“
알았다고 대답하는 형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샤워를 하고, 주방으로 가 아침을 차렸다.
거의 다 차려질 즈음, 방으로 들어가 보니, 그는 아직도 자고 있었다.
엎어진 채 잠이 들어 있어서 그의 벌거벗은 등이 훤히 보였다.
그 등에는 내가 어제 내놓은 상처가 많이 새겨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그의 등을 손가락으로 잠시 쓰다듬고, 어깨를 흔들었다.
피곤한 듯 눈가를 찡그리며 일어난 그에게 물었다.
“꽃집에 나가야 하지 않나?”
“... 아... 나가야 돼..”
“그럼 밥 먹고 나가라. 다 차려놨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를 보며 방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그가 식탁에 앉았고, 그 앞에 밥을 놔주었다.
숟가락을 드는 그를 보다가 그의 앞 의자에 앉았다.
말 없는 식사가 계속되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쳐다보는지 몰라 시선을 올려 쳐다보자,
내 입가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뻗어왔다.
.... 심장이 두근거린다....
입가에 묻은 밥풀을 손가락으로 살짝 떼어간 그는
자신의 입속으로 넣었다.
꼼짝 않고 바라보는 날 흘낏 바라보더니 다시 식사를 계속한다.
놀란 얼굴로 한참 앉아 있다가 나도 다시 밥을 먹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내가 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손을 뻗어 내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간 그의
눈빛은 내가 그 순간 보냈던 눈빛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의 감정을 깨닫게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내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쪽-’
잘 다녀오라며 볼에 키스를 했다.
그러자, 나가던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를 잡아왔다.
날 꼭 끌어안은 그는 내 입술에 진한 키스를 던졌다.
혀까지 들어와 내 안을 샅샅이 훑은 그는 곧 얼굴을 들고 재빨리 집을 나섰다.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타고 떠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심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고, 잠시 서 있었다.
약속했던 장소인 00라는 카페에는 12시 전에 도착했다.
앉아서 잠시 기다리는데, 약속시간이 되자 칼같이 어떤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형에게 주문했던 대로 듬직해 보이는 남자였다.
성실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나름대로 흡족해하고 있는데,
내가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을 들어주자,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가까이에서 보자 더욱 큰 사람이다.
게다가 꽉 다문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자,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성현식씨 후배분이신가요?”
“..네.. 저.. 근데 무슨 일로..?”
“아, 우선 앉으시죠. 차근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는 그를 보고 주문을 했다.
그리고 궁금한 얼굴로 날 똑바로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에게 잠시 당황했다.
성실함을 넘어서서, 진실함이 넘치는 눈동자였다.
이런 사람에게 부탁해도 되는지, 망설여졌지만, 말을 꺼냈다.
“어디에서 일하시는지?”
“.... 현식이 형이 맡아서 하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몇 살이죠?”
“27살입니다.”
“나 31살인데 말 놔도 되나?”
“..........?!”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그를 보다가, 미소를 띠었다.
그 사이에 종업원이 와서 차를 놓고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아, 초면에 실례지만..”
“무슨 부탁인지에 따라 대답 드리겠습니다.”
“후훗.. 멋진 남자로 골라왔네. 좋아. 이름은 뭐지?”
“........... 유상진입니다.”
“상진군.. 참 성실하게 생겨서 마음에 드는데, ....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어떤 여자에게 대쉬 좀 해주겠나?“
“... 무슨 말입니까?”
“그 여자에게 거짓고백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묻는 거네.“
“...... 그 것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차를 마시며 대답을 미뤘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사랑..때문이랄까..”
“.........”
나와 어울리지 않는 꽤나 로맨틱한 말이었는지, 상대편에서는 말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말했다.
“상진군이 원한다면 얼마를 주든 상관없어.
달라는 대로 주겠네. 정말 내게는 꼭 필요한 일이야. 해주겠나?“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그 여자에게 거짓고백을 한 뒤, 뭘 더 해야 하는 겁니까?”
“... 글쎄... 거짓고백을 한 뒤, 한 번의 데이트랄까....”
“........... 현식이 형이 말할 때는 다른 말이었는데, 다른 부탁이시군요...
사랑 때문이라... 상대가 누군지 참.. ... 흠흠... 아, 해드리겠습니다.“
더듬더듬 말하며 큰소리로 해드리겠다고 말한 그는 곧 내 눈을 직시해왔다.
굉장히 진실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더 말한다면, 안될 듯한 상황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네.”
“.... 그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현식이 형에게 당신에 대한 말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봤을 때 딱 이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었죠.
그래서 해주겠다고 선뜻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도요.“
“고마워. 꽤 괜찮은 사람이군. 상진군은.. 형이 뭐라고 말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쿡쿡.. 그건 아니니까 얼굴 붉히지 말라고.“
“....”
고개를 푹 숙이는 그를 보며 웃음을 짓다가, 다시 말했다.
“그 여자는 얼마 전에 나와 이혼한 사람이야. 이름은 송연수고..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
꽃을 사면서, 그 꽃을 연수에게 주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바로 얼굴을 붉힐 거야.
오래전부터 봐왔다고... 안 받아주시면, 한 번의 데이트라도 좋다고....
꼭 데이트를 받아주겠냐고 물으면 아마도.. 받아줄 거야.
내가 다시 전화를 해서 데이트 장소도 말해줄 테니, 전화번호 좀 주겠나?“
“.... 아,.. 잠시 만요.”
내 얼굴만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듣던 그는 주섬주섬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그 것을 받고 지갑 사이에 끼우는데 그가 말했다.
“그 거짓고백을 언제 해야 하는 건데요?”
“내일.”
“.. 데이트는요?”
“내일 모레.”
“........ 아..”
“다시 한 번 전화를 주겠네.”
말을 마친 뒤 다 식은 차를 모두 마셨다.
그 또한 다 마신 듯 내가 마시는 걸 쳐다보고 있었다.
싱긋 미소지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아, 얼마를 주면될까?”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식이 형한테 빚진 것도 있고.. 그냥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정말 멋진 녀석인걸...회사로 다시 들어가 봐야 하나?”
“네..”
“차는 가지고 왔고?”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회사에 잘 들어가고, 다음에 또 보지.”
그와 악수를 나눈 뒤, 카운터로 가 계산을 마쳤다.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타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그 옆에 세워뒀던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