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56)

D-7 

그대로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뜨자 저녁이었다. 

부산스럽게 일어나 침실 밖으로 나가자 소파 위에 앉아 TV를 보는 그가 보였다. 

“저녁 줄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대답 없이 여전히 TV를 응시하는 그는 내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주방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다듬던 야채를 꺼내어 음식을 만들었다. 

이것저것 만들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거실로 나가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야! 성현조!!! 너 지금 당장 몸 피해야겠다!!!!!” 

“... 진우냐? 무슨 일이야?” 

다급한 목소리로 말하는 녀석은 진우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대답할 겨를도 없다는 듯 거친 숨으로 전화를 끊었다. 

왜 지금 당장 몸을 피하라고 하는지 궁금했기에 진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진우 목소리가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성현조.. 잘 살고 있었냐?” 

“......... 너.. ....” 

“........ 감히.. 남자 따위한테는 몸을 내줄 수 없다고 10년 동안 날 내쳤던 주제에.. 

아니, 날 팼던 주제에.. 이제와서, 뭐?! 남자랑 동거?!!!???!!!!“ 

“..... 김승준... 너, 웬일이냐..?” 

전화기가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녀석은.. 내가 여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10년 

우정을 과감히 버리고 울며 도망갔던 녀석이었다. 

물론 이를 갈며 도망갔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항상 주위에 친구들과 형제들이 많았고, 그 중에 한 녀석이 이 녀석이었다. 

내가 진우를 만났을 때 같이 만나 잘 놀던 녀석.. 

난 어릴 적부터 키가 컸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으뜸으로 키가 클 정도로 말이다. 

그런 내 곁에는 항상 변태들이 꼬였었다.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웬만한 성인 남자의 평균 키인 176이었다. 

그 때부터 변태들을 만났던 것 같다. 

물론 정상적인 여자들도 많이 만났다. 

내가 생긴 게 그렇게 특별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 녀석도 그런 녀석이었다. 

이 녀석을 만났을 때 내 키는 이미 지금만큼 커 있었다. 

그런 내게 아름답다며 치근대던 녀석이었다. 

넉살 좋다고 치부해 버렸지만 그 후부터 내내 친구였던 10년 동안 계속 그런 꼴을 

봐왔기에 그저 그렇거니 했었다. 

물론 많이 패줬지만 말이다. 

내 결혼과 함께 막을 내렸었던 녀석의 치근거림이 또 다시 시작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고 싶었다. 

“지금 막 인도에서 날아왔다. 그런데 너가 이혼하고 남자랑 살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잖아!!! 

열 받아서 그 새끼 죽여 버리려고 준비 중이다. 조사도 다 마쳤고... 

훗.. 지금 갈 테니 기다려라.. 이미 총도 다 준비 해 놨다.“ 

녀석의 대답이 들린다. 

잠시 듣고 있는 중, 선전포고하듯 거창하게 말한 녀석은 전화를 끊었다. 

물론 이 녀석쯤이야 간단하게 넘어뜨릴 수 있었다. 

내 키와 단련된 몸은 절대 관상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좋은 기회일지도.. 

내 전화에 관심이 없는 듯 TV만 보던 주환은 내가 저녁을 먹으라고 하자 

식탁에 와서 앉았다. 

그리고 밥을 먹으며 내게 지나가듯 묻는다. 

“아까 그 전화는 뭐냐?” 

“... 아... 오래된 친구인데.. 진우 녀석과 같이 있나 보더군.. 

지금 올 모양이야...“ 

“........뭐?” 

“널 죽일 총도 갖고 온다더군... 옛날부터 나한테 집적거리던 녀석이거든..” 

“.......” 

입가에 대려던 숟가락을 허공에서 멈췄다. 

그리고 날 죽일 듯이 쏘아본다. 

마주 웃어주었다. 

정말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이렇게 한다면 평생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그를 도발하듯 이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의 시간이 흘렀다. 

귓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가려고 하자, 

반대편에 앉아 있던 주환이 내 손목을 덥썩 잡았다. 

“문 열지 마라..” 

“.. 아.. 그 녀석 소매치기 기술도 배운 녀석이야.. 여기 문 따위 금방 열걸?” 

내 말을 증명하듯 곧 문이 달칵거리는 소리를 낸다. 

눈가를 찌푸리며 문을 쳐다보던 그는 곧 내 손목을 잡은 채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의 잠금을 풀고 문을 확 열어젖힌다. 

문 앞에 서 있던 녀석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주환은 그런 녀석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다. 

“.... 읏차.. 이 녀석 뭐야...” 

유연한 몸놀림으로 주먹을 피한 승준은 곧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승준의 어깨를 짚고 안으로 들어갔다. 

“............... 성.현.조.!!!!” 

현관문 앞에 서 있던 주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함께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으로 내리친 그는 몸을 돌려 내 옆에 있는 

승준의 멱살을 쥐었다. 

“그만둬. 김주환!!! 내 친구야.. 너가 함부로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라고!!!” 

“제기랄!!!!!!!!!!!!!!! 날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 

“... 오호라.. 너야말로 날 화나게 한 사실을 모르나 보군.. 

역시 어린애다.. 너같은 꼬맹이 뭘 보고 현조가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군.. 

야! 너!! 너가 지금 어떤 녀석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모르나???? 

난 그 사랑을 자그마치 10년이나 얻으려고 발버둥쳤다. 

한낱 너 따위 녀석에게 줘야 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냥 그대로 현조에게서 손떼라. 한 달 지킬 필요도 없으니 얼른 물러나라고. 

현조는 내가 가질 테니 넌 그냥 조용히 물러나면 돼.“ 

승준의 말에 당황한 듯 그가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았다.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날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던 그가 내게 말했다. 

“.. 당신은 정말.. 평생 그렇게 살 팔자인가 보군.. 쿡... 

곁에 있는 남자들이 다들 흑심을 품고 있으니... 내가 없더라도 만족할 수 

있다.. 이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다시 승준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한 달은 채울 거다. 그 뒤에는 당신이 갖든 말든.. 상관 안 할 테니 지금은 나가. 

이 녀석에게 손 끝 하나라도 대면 가만 안 둘 테니까!!!“ 

“.... 어린애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군... 알았다.. 남은 며칠동안 현조를 안 만진다고 해서 

내가 미칠 것도 아니고.. 10년을 참았는데 뭘 더 못하겠나... 

그 뒤에는 내가 만지든 말든 상관 안 한다고 했으니.. 좋아. 그럼 기한이 끝난 뒤 보자.“ 

대답 없이 그는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대신 현조와 몇 년 동안 헤어져있었으니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러 나가야겠다. 

손 끝 하나 안 댈 테니 안심하고.“ 

그렇게 말한 승준은 곧 내 손을 잡아끌었다. 

외투가 입혀지는 즉시 녀석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안에 그대로 서 있는 주환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내 발로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몸이 축 처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벽에 기대듯 서서 숫자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승준을 쳐다보았다. 

“.. 성현조.. 꼴이 말이 아니군... 내가 손 하나 만졌다고 죽어라 패던 녀석 맞냐? 

저 어린 녀석은 또 뭐냐....... 너가 저런 녀석한테 반했다는 사실이 죽을 정도로 분하다..“ 

“.. 말 조심해.. 그의 단면만 보고 판단하는 건 아직 일러. 

그는 ... 지금 아주 혼란스러울 뿐이야...“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내리자마자 녀석은 아무렇게나 주차해뒀던 자신의 차로 나를 이끌었다. 

타자마자 시동을 걸고 아파트를 벗어났다. 

“몇 년 동안 끌지 않았더니 똥차가 되 버렸네.. 쳇...” 

굳은 얼굴로 조수석에 앉아 있는 나를 흘낏 보더니 그냥 얘기나 하자며 

진우의 카페로 차를 몰았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카페에서 진우가 튀듯이 뛰어나왔다. 

“저 자식 총 가졌어!!!!!!!” 

꽤나 놀랐던 듯 승준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던 녀석은 내가 

괜찮다고 하자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카페로 들어가자 손님들이 여럿 보인다. 

구석진 곳에 승준과 둘이 앉았다. 

진우보고 밥이나 해달라고 하자 투덜대면서도 주방으로 간다. 

“..나.. 아직도 그 마음 그대로다.. 너가 결혼하기 전.. 내가 했던 말 기억하냐?” 

“그래.. 너가 했던 행동도 물론 기억하지.” 

“.............. 후우.. 그래.. 너가 여자와 결혼하기 때문에 포기한다고 분명히 말했었다. 

그런데.. 남자와.. 그 것도 저런 ... 말도 안 되는 새끼한테 반해 버렸다고..? 

절대로 인정할 수 없어... 넌 내 첫사랑이야.“ 

“쿡.. 내가 남자에게 반한 사실이 다들 못마땅한가 보군..” 

“당연하지!!!!!! 게다가 그런 자식이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또 얻어맞고 싶은가 보지?” 

냉정하게 쳐다보자 녀석이 곧 입을 다문다. 

그러다가 다시 내게 물었다. 

“..너.. 정말 그 자식이 좋은 거야...?” 

“.. 그래.. ” 

“너 유학 간다며.. 현준이랑...” 

“이 한 달 끝나면 가기로 했다.” 

“현준이가 너한테 고백..했...나..?” 

“너도 알고 있었군..” 

진우가 주방 쪽에서 걸어 나왔다. 

쟁반에 한 아름 뭔가를 들고 오더니 탁자 위에 차린다. 

고맙다고 하자 얼굴을 붉히며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우야. 너 생각은 어떠냐? 그 바보 같은 자식...” 

“내 생각도 너랑 똑같다.. 현조도 바보지만 그 어린 녀석도 바보더군.” 

두 녀석이 날 사이에 둔 채 말을 주고받다가 다시금 승준이 내게 물었다. 

“그 자식이 너 좋아하는 것 넌 못 느끼겠냐?” 

“.......... 그저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야. 두려워서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지. 

하지만.. 아까 결심했다... 그런 것 다 버리고, 내 짐작만 따라 보자고..“ 

“.... 내 생각엔 절대로 그 놈이 너한테 놀아날 것 같다... 

아까도 내게 대하던 걸 봐서는.. 질투하는 남편 같더군.. 

바보처럼 한 달이 끝나면 그 감정이 사라질 거라고 믿는 눈치고... 

후우.. 그래서 널 그 녀석에게 주기 싫다는 거다...“ 

“너가 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내가 결정하는 거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저지르고 보려는 중이야. 

주환이 어떻게 나올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나는 그렇다 치고.. 현준이는...? 지금 기다리고 있을 텐데.. 

잔뜩 기대하게 해놓고, ...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고 물 컵만 만지작거리자 녀석이 다시 다그쳤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난 어떻게 해도 그 녀석이 동생으로밖에 안 보인다. 넌 친구로밖에 안 보이고. 

어떠한 짓을 해도 동생으로서, 친구로서 둘 모두가 용서 되는 거지. 

지금은 아직 어떠한 것도 알 수가 없어. 무책임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나 자신이 

상처입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밖에는 못 해.“ 

말을 맺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듯 밥을 먹었다. 

승준도 그 행동을 알아차린 듯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도 내일쯤 다시 따지려 들 테지만 말이다. 

지금은 내 말에 수긍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기적이라는 건 잘 안다. 

내 감정만 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본능일 뿐이다. 

딸각거리는 식기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승준이 집까지 태워다 준다며 차를 몰았다.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는 녀석을 거절하자 갑자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보다 작긴 하지만 차 시트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는 어깨를 잡아 끌어안기가 쉬웠다. 

잠깐 놀라는 사이 목덜미에 녀석의 입술이 닿았다. 

살짝 자국을 남기듯 핥는 녀석을 주먹으로 패주었다. 

아파하는 녀석을 보다가 다시 녀석의 얼굴을 내 목덜미에 묻었다. 

“더 진하게 남겨 봐.” 

“... 뭐, 뭐?!” 

“주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거든.” 

“............................ 읍..!” 

당황하는 녀석을 더욱 꼭 끌어안고 남기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아까 당황했던 걸 모두 잊은 듯 게걸스럽게 목덜미를 핥았다. 

여러 군데에 남기는 듯 아픔이 곳곳에 느껴졌고, 

그 후에야 녀석의 얼굴을 밀쳤다. 

입술이 굉장히 붉어져 있었다. 

싱긋 웃어주며 볼을 톡톡 쳐주자 얼굴을 붉히며 내 손을 쳐내었다. 

“약아빠진 자식.. 잘해 봐라. 난 이만 갈란다.” 

항상 이런 패턴이었으므로 녀석은 툴툴거리며 날 차에서 밀어내었다. 

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차를 출발시킨다. 

목덜미를 만지며 차를 쳐다보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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