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56)

한참 안겨있던 그는 차분해진 시선으로 날 보더니 침대로 가서 누웠다. 

그걸 확인하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이젠 확실해졌다.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그 또한 정리가 되었듯. 나도 정리가 되었다. 

그에게 느끼는 이 감정은 평생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내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을 연수에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내가 소유할 수 없었다. 

그가 흔들린다고 해서 기분 좋게 나에게로 이끌 수가 없는 것이다. 

내 기분이 그의 기분이고, 그의 기분이 내 기분이듯이.. 

내가 슬픔을 느끼면 그도 똑같이 슬플 것이다. 

상대는 틀리다 하더라도,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감정을 겪는다는 것 자체가 나는 싫다. 

결코 견딜 수 없다. 

차라리 내가 겪을 것이다. 

그를 바로 잡아 준 뒤, 내가 모두 겪을 것이다. 

“... 저기, 현조야.. 미안하다...” 

“.. 뭐가..?” 

밖으로 나와 물을 마시고 나오자 진우가 다가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왜 그러냐고 하자 머뭇거리더니 카메라를 들었다. 

말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녀석을 데리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현준 또한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보여 물어보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상대편에서 풀죽은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현조야.. 이 형이 주책 맞게 .. 으흐흑.. 미안하다, 현조야..” 

“.. 형은 또 뭐가 미안한데..” 

“오늘 그 세 놈 거기 간 거 다 내 탓이다...” 

“.. 그게 왜 미안하다는 거지?” 

“..... 사실은, 앞치마 얘기를 했더니 저 놈들이 다 보고 싶다지 뭐냐... 

그치만 결국 난 소리만 들었지 앞치마 입은 널 못 봤다는 생각이 들잖아... 

그래서 너 재워놓고 앞치마 입은 모습 찍어오라고 내가 시켰다.. 크윽.. 미안하다, 현조야..“ 

“..... 그랬군... 그래서 카메라가 있었군...” 

“어, 저기.. 지금 당장 사람들 보냈으니까 도청장치 떼어줄 거다, 그럼 끊는다” 

내가 화낼 기미가 보이자 전화를 후다닥 끊는 큰형.. 

지금 저 방에서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모두 들었겠지... 

이마를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세 녀석들을 노려보자 녀석들이 하나같이 겁먹은 듯 몸을 움찔거렸다. 

“.. 됐다.. 사진은 다 찍었냐?” 

카메라를 쳐다보며 묻자 진우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다. 

찍었다고 하면 혼낼까봐 빠르게 내젓는 녀석을 보다가 카메라를 뺏었다. 

열어보니 필름은 빠져 나가고 없었다. 

“.... 없군... 어쨌든 진우 넌 그거 현상해서 큰형 보여줘라.” 

“... 뭐.. 뭐?” 

내 말에 당황한 듯 녀석이 더듬거렸다. 

볼이 퉁퉁 부은 현준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 

“필름은 내가 보관할 거다. 저 자식한테 일부러 맞아 줬더니 뼈가 쑤셔... 

그 보답으로 필름은 내 차지야. 알았냐?“ 

“.... 픽..” 

모든 운동에서 빠지지 않는 현준이 녀석의 주먹에 맞고 널브러질 때까지만 해도 

난 녀석이 그냥 맞아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당황하며 녀석을 부축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주환이 질투하는 모습을 보며 괜히 맞아준 게 분명하다. 

녀석을 보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저 자식은 너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잖아. 더욱 일깨워줄 필요가 있어..” 

“.... 전혀.. 그런 건 필요 없다. 솔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다..” 

냉정히 대꾸해 주자 현준이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 남자의 눈빛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 너가 그렇게 말한다면 난 너 절대 포기 안한다. 

돌아가기로 예정했던 날짜가 지나 버렸어. 원래는 조금만 있다가 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내일 급하게 떠나게 될 것 같다... 저 꼬마와 약속했던 날이 끝나면 또 데리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 어디로 튀지 말고. 알았어?“ 

“... 뭐?! 어딜 간다고?!” 

“.. 무슨 소리야, 현조야..” 

현준의 말에 놀란 듯 옆의 두 녀석이 소리쳤다. 

현준이 내일 떠난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이 생활이 끝나는 날 이 곳을 떠날 것이라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겠지.. 

“나도 현준이 따라 유학이나 가보려고. 

유학은 핑계고. 그냥 놀다 올까 하는 중이다.“ 

“....... 성현조...” 

진우가 그 말에 화가 난 듯 내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렇지만 난 이 곳에 있고 싶지 않다. 

절대 떠나고 말 것이다. 

내 눈빛을 본 진우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외투를 걸치고 일어나는 폼이 가려는 것 같다. 

저 덩치 큰 곰은 삐지기도 잘 삐지는 특이한 놈이었다. 

결국 따라 일어나 녀석을 품에 안아주었다. 

“아직 떠나는 게 아니다.. 며칠 더 있어야 돼. 그 때까지 매일 내 얼굴 보러 와라. 

그리고 누가 평생 여기 안 온다고 했냐?! 자식.. “ 

“누가 니 얼굴 안 보게 되는 게 걱정 되서 그러는 줄 알어?!!! 

나도 니 얼굴 안 보면서 살고 싶다고, 새끼야!!!!!!! 우씨.... 재수 없는 자식....“ 

거칠게 말한 녀석은 내게서 벗어나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런 뒤로 현준과 명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호의 어색한 웃음에 마주 웃어주고 외투를 입고 가려는 녀석들을 배웅했다. 

“.. 내일 마중 나가야 되냐?” 

나가기 전 현준에게 묻자 녀석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소리쳤다. 

명호는 현준의 감정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 그런 현준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내일 나가겠다고 말해준 뒤 명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내일 보자.” 

이해한다는 듯 눈빛으로 웃어준 뒤 현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현관문을 닫고 들어와 소파에 다시 앉았다. 

다시금 멍해진 시선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가슴이 계속 누군가가 움켜쥐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이젠 확실히 다듬어진 마음... 

난.. 주환이가 행복해지길 바랬다. 

그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항상 생각해온 그 말을 다시금 결론으로 내려 버렸다. 

이불을 펴서 소파에 누웠다. 

까실한 눈을 겨우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 밤도..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매일 꽃집에 나가서 도와줄 생각이냐?“ 

“.. 그래. 혼자 고생하는 거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가서 일해야겠어. 됐냐? 

그만 신경 꺼.“ 

“.... 휴우.. 우리 같이 생활할 날 얼마 안 남은 거 알고 있지..?” 

“...... 처음에 너가 조건을 걸 때.. 같이 살면서 섹스를 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너와 시간을 같이 보내달라는 조건이 아니었어. 기억나냐?“ 

“쿡.. 그래. 어차피 오늘은 나도 시간 없어. 그냥 물어본 것뿐이다.” 

말을 끝내고 얼른 뒤돌아서 주방에서 나왔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고, 최대한 그의 말대로 신경을 끊고 싶었기에 

무시하는 척 그 곳에서 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날 스쳐 지나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지나가는 순간 싸늘한 바람이 불은 것만 같아 얼핏 웃음 지었다. 

그가 옷을 입고 나가든 말든 난 욕실로 들어갔다. 

물을 최대한으로 틀고 문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한 뒤 샤워를 했다. 

샤워를 다 한 뒤 방으로 들어와 옷을 입었다. 

현준이 11시 비행기라고 했으므로 호텔로 녀석을 데리러 가야 할 것 같았다. 

가는 길에 명호를 태우고 갈 생각을 하고 저번에 받아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명호에게 간단히 지금 현준에게 가니까 나와서 기다리라고 한 뒤 끊었다. 

진우에게도 전화를 할까 하다가 녀석이 삐진 게 풀리면 알아서 전화하겠지 하고 

그냥 집을 나섰다. 

바깥 날씨는 한결 추워져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뒀던 차를 끌고 나와 비디오가게 앞에 세웠다. 

문 앞에 서 있는 명호를 부르고 차에 타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진우는 전화 왔어?” 

“아니. 아마도 조금 있어야 전화 할 거야. 쿡. 그 녀석은 삐진 거 혼자 풀어야 돼.” 

“진우 녀석은 그런 면이 있지.. 그나저나 유학 갈 생각은 언제 한 거야..?” 

“유학이 아니라 놀러 가는 거다. 가서 몇 년 죽치고 놀다가 올 생각이야..” 

“그래.. 그 것도 좋은 방법 같긴 하다.. 그런데 준이는..” 

앞쪽만 바라보며 계속 밝게 얘기하던 명호는 말을 끊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운전하느라 앞만 보면서도 옆으로 흘낏흘낏 눈을 돌렸던 난 눈이 마주치자 

왜 그러냐는 듯 눈썹을 조금 치켜떴다. 

그러자 입 모양 만으로 웃음을 짓고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준이는 너한테 기대하는 모양이더군.. 연인 사이가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 아..” 

잠시 차 속에 침묵이 흘렀다. 

운전에 몰두하는 척 하다가 명호를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어색하게 미소 짓고 대답을 했다. 

“... 틀린 말도 아니지. 녀석과 하는 키스는 나쁘지 않다는 말도 해줬거든... 쿡.. 

그 곳에 가면 그 녀석과 섹스하게 될 지도 몰라. 형제끼리.. 말이다...“ 

“형제란 말은 빼. 준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고 있거든. 

너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준과 행복해졌음 좋겠다..“ 

명호의 진심 어린 미소... 

또 한 번 보게 된 미소에 마음이 놓이는 나였다. 

“명호 너 .. 넌 현준이 잡고 싶은 마음 없는 거냐..?” 

“나? 난 이미 준에 대한 마음 접은 거 옛날이다. 그리고 난 주환이 너도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준이 널 갖는다는 게 더 안타까울 뿐이다.“ 

녀석의 말에 소리 내어 웃었다. 

명호는 날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금새 차갑던 심장이 따뜻하게 녹는 듯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내 웃음소리에 그런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는 명호를 향해 진심으로 웃어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아졌다. 

명호의 말에 대꾸해 주고 하는 사이, 호텔에 도착했다. 

녀석이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현준이 나왔다. 

우리 둘을 보는 녀석은 이미 준비를 끝낸 듯 옷을 잘 차려입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짐 가방 두 개가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준비가 다 됐으면 가자고 하니 대꾸 없이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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