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서 자고 일어나니 허리가 찌뿌듯하다.
손을 뻗어 허리를 조금 주무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꽤나 일찍 일어난 것 같다.
밤에는 잠을 못 이루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욕실로 가 세수와 양치질을 대충 하고 주방으로 가 아침밥을 차렸다.
밥을 다 차리기가 무섭게 방에서 주환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날 노려본 그는 준비를 다 한 상태였다.
밥을 먹으라고 하자 무시한 채 거실을 가로질렀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주환의 뒷모습을 보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점점 더 그와의 사이가 어긋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기에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한 달만 그를 갖는다고 자신에게 약속했지 않은가....
정상적인 삶을 살며 행복할 수 있도록,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살며 행복할 수 있도록,
한 달의 내 욕심이 채워지면 그를 기쁘게 놔줘야만 한다고...
그렇게 내 자신과 약속했었다.
글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지금의 내 상태라면 기쁘게 놔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의 냉정한 모습에 가슴이 아픈 걸 보면, 처음보다 더욱 심해진 것도 같다.
조금 더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다.
‘뚜르르르르-’
전화가 울려 받으니 진우였다.
이 곳으로 올 테니 기다리라고 하는 폼이 꽤나 다급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싶었지만 다시 전화가 울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화를 받으니 이번엔 현준이었다.
현준도 지금 이 곳으로 올 테니 꼼짝 말고 있으라며 전화를 다급히 끊었다.
어리둥절해진 상태에서 전화기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직 10시.....
대체 이 시간에 무슨 볼일이 있기에 저러는 건가 싶었다.
별로 신경 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집안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을 걸레질을 할 때였다.
초인종 소리가 울려서 나가보니 현준과 진우 명호가 현관문에 서 있었다.
“점심 줘.!”
현준이 그렇게 말하자 녀석들이 모두 집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주저앉더니 TV를 틀었다.
다급하게 전화해서 어디도 가지 말라고 하던 녀석들이 점심이나 달라니까
황당해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시장에서 사온 재료들을 꺼내는 녀석들에 의해 서 있을 틈도 없이
주방으로 쫓겼다.
녀석들에게 힘없게 웃어주고 음식을 만들었다.
만들어달라는데 안 만들어 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재료들의 일관성 없음에 감탄하다가 그래도 최대한 응용해서 만들었다.
다 만들고 부르자 녀석들이 개들처럼 달려와 식탁에 앉는다.
“난 현준이가 만든 음식이 제일 맛있더라~”
명호가 한 마디 꺼냈다.
“... 우물.. 응... 응응.. 나도.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지 않냐..?”
진우도 그 말에 거들어 한 마디 꺼냈다.
현준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음식들을 해치울 뿐이었다.
녀석들에게 질려 말없이 앉아 밥을 먹었다.
오늘도 안 먹으려던 생각이었으므로 겨우겨우 넘기고 있었다.
내 죽을상을 보던 현준이 툭 내뱉듯 말했다.
“.... 어이, 밥맛 떨어진다...”
녀석의 말에 짙은 한숨을 내쉬고 수저를 내렸다.
정말 밥 생각이 없었다.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석들은 그래도 마냥 좋은지 헤실 거리며 밥을 먹었다.
밥만 있으면 행복할 녀석들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난 피곤해서 좀더 잘 테니까 늬들이 설거지해라...”
“.. 알았어, 알았어..!!”
녀석들이 잽싸게 대꾸하는 폼이 왠지 미심쩍었지만 정말로 피곤했기에 침실로 들어갔다.
새벽녘에 잤다가 이른 아침부터 깼었기 때문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희뿌연 안개가 낀 듯한 머리를 베개에 묻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몸을 누군가가 어루만진다.
언제 옷을 벗었는지 알몸이 된 듯한 피부 위로 계속적으로 움직이는 손길...
부드럽고도 따뜻한 손길에 점점 몸이 달아올랐다.
웅얼웅얼.. 두런두런...
희뿌연 뇌 속으로 말소리 비슷한 것들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 신경은 몸을 만지는 손길에 이미 흠뻑 빠져 있었다.
기분 좋고 나른한 감각에 빠져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누군가를 패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기분 좋던 손길이 사라졌고, 난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다.
“개새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아직도 뿌연 눈을 감았다 떴다 익숙해지게 만들고 나자 눈앞이 조금씩 트였다.
방구석에 쳐 박히듯 누운 놈이 두 명.. 명호와 진우다.
그리고 침대 가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놈이 두 명...
현준과...... 주환....?
희미해진 눈으로 계속 쳐다봐도 싸우는 한 명은 주환이다.
왜 싸우고 있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섣불리 말리지도 못했다.
거친 욕 소리와 말소리가 들렸다.
현준의 턱을 한 대 갈긴 그는 잽싸게 몸을 피해 현준의 주먹을 피했다.
명치끝에 맞았을 주먹을 피한 뒤 또 다시 내뻗는 현준의 다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현준을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싸우고 있었다.
낮게 중얼거리는 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 퉷.. 더러운 자식.. 저 놈은 니 형이다!!!! 대체 왜 그따위 짓을 하는 거냐?!”
“내가 현조에게 무슨 짓을 하든, 니가 무슨 상관이지, 꼬마야?”
자신의 배 위에 올라타 한 대 더 때리려는 주환을 향해 도발적으로 묻는 현준...
그런 현준에게 더욱 화가 난 건지 주환이 거칠게 내뱉었다.
“저 자식에게 저걸 입혀놓고 몸을 연인인 것 마냥 쓰다듬는 걸 봤는데!!!!!!!
내가 왜 상관이 없지?! 난 저 자식과 한 침대를 쓰는 사이다. 내가 저 놈과 한 침대를
쓰는 이상 누군가가 몸에 손대는 건 볼 수가 없단 말이다.!!!!!!!!!!!!“
“... 왜 볼 수가 없다는 건가...? 넌 연수씨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며칠 후면 침대를 같이 쓰는 사이도 아니게 될 사람인데.. 왜 신경을 쓰는 거냐...?
지금 니가 현조를 대하는 태도는.. 상대를 상처 입히려고 방법을 고르고 골라
그 중 제일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를 파멸시키는 태도다... 그건 알고 있나?“
“.. 그따위 말 지껄이지 마라. 너가 대체 저 놈과 나 사이의 일을 얼마나 안다고 떠벌리는
거지?! 언제 끝나든 지금은 내가 안는 몸이다. 함부로 건들이지 마.“
“... 쿡.. 웃기는군. 야, 성현조.. 지금 말 들었냐?”
물론 다 듣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쳐다보자 주환이 날 올려다보았다.
내가 보고 있었다는 걸 모른 듯 눈을 크게 떴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보였다.
내 웃음에 눈가를 살짝 일그러뜨린 그는 주먹을 움켜쥐며 현준에게서 벗어났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현준은 쿡쿡거리며 내게 다가와 침대 위에 앉았다.
내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는 다른 손으로 앞치마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주환이 보라는 듯 한참 애무하던 현준은 내가 신음하자 유두를 살짝 문질렀다.
눈만은 주환을 고정한 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할짝거리며 핥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도전..
현준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주환이 천천히 다가왔다.
위협적으로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가까워짐에 따라 현준의 애무는 더 농도 짙어졌다.
“.. 건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위인이 아니었다, 현준은.
나 또한 거부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냥 둔 채 묵묵히 지금 상황을 관찰만 했다.
주환의 화난 얼굴... 그 얼굴에 지금 짜릿한 감정이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더욱 달콤하게 신음하자 주환이 사나워진 눈동자를 내게 고정시켰다.
눈동자 속에서 저렇게 불타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내게 증오 섞인 시선을 보내며 주먹을 움켜쥐는 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왜 나를 건들이지 말라고 하는 걸까...
현준의 멱살이 쥐어졌다.
거칠게 자신의 얼굴 높이까지 현준을 들어올린 그는 이 사이로 내뱉듯 말했다.
“....... 저 자식은 절.대. 건들이지 마라. 니가 형제든 뭐든.. 그딴 식으로 저 자식을
쓰다듬는 걸 참을 수 없으니까.. 절대.. 절대 건들이지 마....!!!!!!!!!!!!“
바닥에서 현준의 발이 떨어졌다.
엄청난 힘으로 현준을 들어올렸던 그는 바닥으로 힘껏 현준을 내던졌다.
그제야 싸울 맘이 생긴 건지 현준이 나 조차도 오싹할 정도의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빠르게 몸을 일으킨 현준은 그가 막기도 전에 오른쪽 턱을 한 방 갈겼다.
욱 소리와 함께 그의 고개가 돌아갔고, 현준은 쉬지 않은 채 다른 쪽 턱도 갈겼다.
마지막으로 명치를 향해 꽂히는 주먹...
주환이 정신을 차린 듯 주먹을 피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갑작스럽게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그가 맞고 있는 걸 보는 마음은 타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기점으로 그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현준 또한 질 생각이 없는지 주먹을 내뻗는 걸 멈추지 않았고,
주환은 그걸 어렵게 피하며 현준에게 발을 날렸다.
결국 그 것에 맞게 된 현준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 마지막으로 분노를 담은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눈살을 찌푸리고 현준이 바닥에 주저앉는 걸 쳐다보았다.
멍한 몸을 일으켜 현준에게 다가가 앉자 현준이 내 몸에 안겨왔다.
숨을 몰아쉬는 현준을 살펴보려고 할 때
내 목덜미를 잽싸게 채는 손길이 느껴졌다.
급하게 돌아가는 고개는 삐끗하는 소리가 났고,
아픔에 숨을 멈추자 그가 내게서 현준을 떼어냈다.
저 멀리 다시 던져진 현준이 신음소리를 냈다.
얼른 다가가 살피려고 하자 목덜미를 더욱 세게 움켜잡는다.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일으킨 그는 내 몸이 일어서자 거친 숨으로 날 흔들었다.
“대체 넌 생각이 있는 놈이냐, 없는 놈이냐!!!!!!!!
왜 자꾸 내 속을 태우는 거야, 너는!!!!!!!!!!!!!!!!!!!!!!!!!! 왜 자꾸 날 혼란스럽게 해.....
너 따위 싫다는데 증오스럽다는데 왜 자꾸 날 혼란스럽게 해....“
날 죽일 듯이 흔들어대며 목덜미를 움켜잡는 그에 의해 눈을 꼭 감았다.
왠지 날 정말로 죽이고 싶다는 듯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가...
보고 싶지 않아 눈을 감았다.
숨을 멈추고 몸에 힘을 뺐다.
‘퍽-’
타격 음이 들렸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진 난 신음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진우가 카메라 비슷한 걸로 그의 뒷머리를 가격한 것이었다.
놀라서 쳐다보자 그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격렬하게 뛰는 가슴으로 얼른 그에게 기어 다가갔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진우를 쳐다보았다.
“.. 널 어떻게 할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살살 쳤으니까 괜찮겠지...“
“.. 휴우.. ..... 같이 침대로 옮기자.”
정신을 잃은 그를 옮겨 머리를 다시 살펴보았다.
살살 쳤다는 진우의 말처럼 외상은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는 걸 보니 별다른 상처가 아닌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날 쳐다보는 눈길에 나 또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굉장히 많은 감정이 떠도는 눈동자가 보였다.
“.... 놔. 현준이 많이 다쳤으니까 치료해야 돼.”
겨우 냉정히 말했다.
그의 감정이 다시 싸늘해지기를 기다리며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얼른 돌아서서 노려보는 시선을 피해 진우와 같이 현준을 부축했다.
소파로 데리고 나와 현준을 앉히고 땀이 흐르는 이마를 훑었다.
그의 시선에 이토록 긴장한 건 처음이었다.
진우에게 구급약통을 부탁하고 현준을 치료했다.
입술이 많이 찢어져 있었다.
“.. 저기.. 현조야.. 너 그거 벗는 게 좋겠다..”
“.....?”
치료를 다 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데 옆에서 명호가 조용히 말했다.
명호 또한 자신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나서지 않았으므로
현준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었다.
잠시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보자 명호가 손가락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 그거. 앞치마.. 얼른 벗어라..”
“.... 아.. 그렇군..”
“.... 그거 앞으로 절대 입지 마라.. 살인나겠다...”
명호의 농담 섞인 말에 웃어줄 수 없어 그저 미소만 짓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라도 하고 옷을 입을 참이었다.
앞치마를 벗어 옆에 구겨놓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다 하고 수건으로 닦은 뒤 하체를 둘렀다.
방과 통하는 욕실 문을 열고 나오자 주환이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침대를 스쳐 지나가 옷장 문을 열고 옷을 꺼내 입었다.
다 입고 방을 나가려고 하는데 주환이 문 앞을 가로 막았다.
몸으로 문 입구를 막은 채 서 있던 주환은 내가 다가가자 얼른 내 어깨를 잡았다.
“... 성현조... 다시 한 번 말해봐.”
“... 뭘 말하라는 거냐....?”
“....... 날.. 날 사랑한다고 다시 한 번만 말해달란 말이다...”
“........ 왜..?”
“듣고 싶다.. 너무 혼란스러워.. 내가 무슨 생각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막연히..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만 들어.... 다시 한 번만 말해봐.. 어서..!!!“
눈동자에 또 다시 혼란스런 감정이 드러났다.
정말로 해답을 원한다는 듯 간절한 마음이다.
결국.. 내 욕심으로 그에게 말했다.
“..... 사랑한다..”
“..................... 으윽..... 젠장........”
“사랑해, 김주환.. 널 사랑한다.”
웃음을 지었다.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마지막 사형선고라도 되듯 머릿속에 새겼다.
“... 성현조... 난... 연수 누나를 사랑해...
날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너 따위 정말 싫다....
... 윽... 너 따위 정말 싫단 말이다!!!!!“
“.. 그래.. 알았어.. 넌 날 싫어하는 거다... 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넌 날 싫어하는 거야..
그러니까 혼란스러워 할 필요도 없는 거다....
넌 연수를 사랑해.. 그거면 된 거야...“
조용히 속삭여준 뒤 그의 머리를 끌어 내렸다.
내 어깨에 내려 머리카락을 조금씩 쓰다듬어 주었다.
조용히 조용히..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연수를 사랑하고, 날 싫어한다.
앞으로도 그건 변함없어야 한다.
아까 질투를 보인 건 결코 나에게 어떠한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싫증난 장난감이라도 누군가가 갖게 되는 건 싫듯이..
그는 그러한 감정을 느낀 것일 뿐이다.
자꾸만 되새겼다.
가슴 속으로 되새기고 계속 되새겼다.
그가 지금 내 어깨에 안겨 생각할 것들을 나도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