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56)

“명호야” 

“..아, 왔어?” 

진심어린 미소... 

손님들에게는 지어주지 않을 미소를 지으며 명호가 날 반겨주었다. 

심심하던 차에 비디오가게에 가서 명호한테 준이란 놈에 대해 묻자는 생각에 외출을 했고 

외출이라고 해봤자 바로 앞 비디오 가게였지만 두꺼운 코트를 입고 나온 참이었다. 

요새 부쩍 추워지는 날씨가 이번 겨울도 몹시 추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조폭같던 인상이 많이 누그러진 명호 옆에 앉아 이것저것 신간 프로를 뒤적거리다가 

손님을 상대하는 명호를 보다가 비디오를 꽂는 명호를 보다가 컴퓨터를 달칵거리는 명호를 

보다가, 하릴없이 멍청히 있는 날 보고 명호가 한 마디 했다. 

“너 오늘 멍청하다” 

결국 쿡 하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농담식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준이라는 녀석은 뭐냐?” 

“.... 어? 너가 그 녀석은 어떻게.. 아냐...?” 

놀란 듯 말을 더듬거리며 하던 녀석은 금새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난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너가 자다가 날 껴안더라고.. 너무 격렬해서 놀랐다니까...?” 

“........그..그랬냐..? 미안..” 

얼굴이 붉어져 주춤주춤 거리더니 머리를 긁적인다. 

부끄러워하는 곰이 저렇게 말하는데 더 놀려줘야지 하며 말했다. 

“응..괜찮아.. 뭐.. 날 보고 준이라고 부르고, 그 장면을 주환이가 봤지만... 

너가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해야겠지.. 휴우...“ 

“........... 어...어... 미..미안하다....” 

아까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리는 명호는 조금 불쌍해 보인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서 눈물어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곰이 연상되어 동물애호가인 

내 맘에 조용한 슬픔을 준다. 

그럼에도 너무 귀여워서 그의 붉어진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그 사람 첫사랑이냐?” 

“................. 어...? 어... 그..그냥.... 너랑 닮은 놈인데.... 

날 매정하게 차버린 놈이지.. 하하핫... 생각 안 하고 살았는데 널 보자마자 생각났어.. 

어쨌든 그런 짓해서 미안하다... 난 잠자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하더니.... 

진짜 왜 이렇게 미친 짓만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책하는 곰... 

내가 볼을 두드리는 줄도 모르고 넋두리를 하듯 중얼중얼 거린다. 

“.. 그 놈 이름이 준이냐?” 

“..어? 어...... 그..그냥 내가 그렇게.. 부르는 거야.. 사실은 그렇게 불러서 맨날 욕만 

억수로 얻어먹었지...쥐어 터지기도 엄청 쥐어 터지고....“ 

난 좀 놀라 버렸다. 

조폭같은 인상을 가진 험악한 그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도 처음엔 엄청 쫄았지 않은가... 

“.. 쯧쯧... 그런 놈한테는 사랑을 줄 가치도 없어... 

다음에도 또 놀러 와.. 진우 없어도.. 알았지?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 응.. 고맙다..” 

또 다시 진심어린 미소를 짓는다. 

그의 미소는 믿음 가는 딱 그 것이었고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인생에서 진우 말고 친구 한 명이 더 있는 것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호와 노닥거리며 놀다가 아파트로 돌아와 시트를 빨았다. 

그리고 청소를 하고 밥을 차렸다. 

완벽한 주부의 모습... 

익숙해지는 밤생활처럼 주부노릇도 익숙해지는 것 같다. 

청소를 하다 보니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와 있었다. 

핸드폰 플립을 열고 살펴보니 처음 보는 번호... 

별 신경쓰지 않고 놓고는 주환이 올 때까지 TV를 보자는 생각에 TV를 켰다. 

느긋이 앉아 보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린다. 

아까 봤던 전화번호... 

좀 쳐다만 보다가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끈질기게 울어대는 휴대폰을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 쿡쿡.. 여보세요? 누구세요?? 너가 언제부터 그렇게 상냥해졌냐??” 

“.......................”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 

내가 치를 떨 만큼 악마 같은 목소리... 

나도 가히 악마 같은 성격이라 칭해지지만 이 녀석은 못 따라간다. 

이 목소리를 들은 것도 시간이 꽤 흘렀지만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잠시 말없이 듣고 있었다. 

대답해주면 분명 또 걸고 넘어질 것이다. 

어떻게 전화번호를 알았던 무슨 말을 하건 그냥 잠잠히 듣고 있을 참이다. 

이 녀석이 대체 왜 전화를 한 거지...? 

“잘 지냈냐? 말 없는 걸 보니 내가 전화해서 감동한 모양이군..그렇다면 잘 됐네.. 

내가 이번에 한국 가게 되었거든. 너 이혼하고 혼자 산다며? 

거기서 신세 지자. 한국 가면 무슨 재미로 있나 했더니 너가 생각나잖아...“ 

“......... 안돼..” 

“왜!” 

“이혼하고 다른 사람이랑 살고 있다,왜! 너가 왜 여기를 와!!!!” 

“역시.. 넌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이번 내기에서 또 돈을 벌겠군.... 

너가 불륜 때문에 이혼을 했다에 100걸었거든.. 다행이네, 한 500은 꽁돈이 들어오겠군..“ 

“...젠장!!! 또 날 갖고 내기를 한 거야??!!!!” 

“.......... 그럼 우리끼리 무슨 재미로 사냐?” 

“성.현.준!!!!!!!!!!!!!!!!!!” 

“어쨌든 그 남자 보기 위해서라도 너네 집에 갈 테니 기다려라. 

이미 사전 조사는 다 마쳤고, 니가 남자랑 산다는 것도 다 알고 있으니.. 쿡쿡... 

내가 남자랑 뒹군다고 뭐라고 지랄하더니 결국 남자냐? 

내일쯤에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끊는다. 참고로, 나 버섯전골 좋아한다. 

오랜만에 니가 해주는 맛있는 버섯전골을 맛 보겠구나“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려다가 전화가 끊겨 맥없이 전화를 끊었다. 

성현준.. 재수 옴 붙은 새끼.... 

어디서 저런 새끼가 나온 건지 심히 의심스럽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다가 이마를 손으로 꼭 잡았다. 

두통이 밀려온다. 

나와 똑같은 얼굴에 키는 난쟁이 똥자루만한 녀석... 

게다가 성격은 악마보다 더한 녀석.... 

그 자식 생각하면 치가 떨려온다. 

그 새끼가 내 동생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이 터질 것처럼 열이 올랐다. 

그럼에도 내일 버섯전골을 끓일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만큼 난 녀석에게 꼼짝 못했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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