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56)

살짝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보니 거실이 엉망진창..... 

술병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곰 같은 놈이 한 마리 누워서 뭉개고 있다. 

인상을 쓰면서 쳐다보고 있자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속까지 울렁울렁 거려서 욕실로 달려갔다. 

찬물로 입안을 헹구고 주방으로 나와 차가운 물을 마셨다. 

속이 조금 풀려서 거실로 다시 나왔다. 

곰을 툭툭 차니 곰이 부스스하게 일어난다. 

일어나서 날 올려다보더니 멍한 눈으로 날 끌어당긴다. 

놀라울 만큼 강한 힘으로 끌어 당겨져 털썩 눕게 된 나는 속으로 엄청 놀랐지만 겉으로는 

애교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말을 하려는 찰나.. 

“.... 준....” 

“준..?” 

곰의 입에서 애절한 이름 하나가 튀어 나온다. 

놀라서 쳐다보고 있는 날 끌어 당겨 꼭 껴안는 곰... 

“... 어디 갔다 온 거야.. 준... 사랑해..” 

그의 눈물 섞인 말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날 준이라는 사람과 착각하는 것 같다... 

가만히 그러고 있으니 곰이 다시 잠든다. 

꼭 끌어 안겨서 답답함에도 가만히 있었다. 

불쌍한 곰의 얼굴이 무진장 가슴 아프다. 

내가 거울로 내 자신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철컥’ 

잠시 후 곰 건너편으로 현관문이 열린다. 

그리고 주환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 왔어? 아침은 먹었어?” 

"..... 윽..." 

그렇게 말하며 곰에게서 벗어나 일어나려고 했지만... 

곰이 더욱 꽉 끌어안는 바람에 털썩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또 다시 부둥켜안아진 난 헥헥거리며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이 곰탱이 농구 했다더니 힘이 장난 아니게 세다.. 

조금 벗어나려다가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주환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자니 더 힘이 빠져 온다. 

주환을 보고 미소지어주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 방으로 들어간다.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명호는 잠꼬대라도 하는지 사랑한다느니 어쩐다느니 자꾸 중얼대고 있었고, 

주환이도 그 말을 들었음이 분명하건만, 아무렇지도 않게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빠질 상황이다. 

사실 조금 나빠지기도 했다. 그치만 자고 있는 명호에게 화풀이를 할 것인가, 

아무런 죄 없는 주환이에게 화풀이를 해야 할 것인가... 

그 것조차 판가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화난 마음에 자고 있는 명호의 배를 걷어차 주기로 결심... 

무릎으로 굽혀진 곰의 허리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명호가 끅 소리를 내더니 멀찍이 떨어졌고, 그래도 자고 있는 명호를 보며 이를 갈다가 

방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지 내가 들어가는데도 뒤돌아선 모습 그대로 있는 그.. 

매끈한 등에 손톱자국이 무지막지하게 나 있다. 

그와 관계할 때 내가 내었던 것... 

그 것을 즐거운 마음에 관찰하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자 무표정한 얼굴로 날 돌아다본다. 

“밤에 어디서 잤어?” 

“몰라도 돼” 

“... 흠.. 혹시 꽃집은 아니지...?” 

“........ 쿡. 맞다면? 맞다면 어쩔 건데?” 

맞는다고 해도 내가 상관할 수는 없기에 그저 묵묵히 바라만 봤다. 

안 그래도 기분 나쁜 게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지만 욕실로 냉정하게 걸어가는 

주환이를 보니 넘쳐흘러도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 

다시 거실로 나와 주방으로 갔다. 

달그락거리며 밥을 차리고 구석에서 자고 있는 명호를 깨웠다. 

꿈쩍도 안 하고 궁시렁대기만 하는 명호를 질려서 쳐다보다가 발로 또 걷어차 볼까 하는 사이에 

주환이 욕실에서 나왔다. 

결국은 발로 걷어 차 버렸고 등을 맞고 움찔한 명호가 슬쩍 눈을 뜬다. 

그리고 이상한 듯 두리번거리더니 날 발견하고 멍한 웃음을 건네었다. 

“얼른 일어나서 밥 먹어라.. 정말 미련 곰탱이처럼 둔하기 짝이 없구나, 너..” 

“어.. 깨우느라 고생했지..? 내가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는데다 깨워도 안 일어나서 

많이 혼났다.. 밥 했어?“ 

그리고는 등허리를 벅벅 긁으며 반달곰마냥 엉거주춤 일어난다. 

정말 귀여운 행동.. 잠시 웃으며 쳐다보다가 뒤로 돌아보니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재빨리 다가가 그를 잡았지만 냉정히 날 노려본 그는 톡 쏘아붙이듯 말하고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잡지 마. 밥 안 먹어.” 

그의 신경질적인 면을 보게 되었지만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도 않았기에 속이 쓰리다. 

아무 잘못 없이 엉거주춤 서 있는 명호를 돌아보고 가슴 아프게 웃어 보였다. 

명호의 이해 가득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따스해 보여 서였다. 

아까 명호가 날 착각하며 불렀던 그 이름의 사람 또한 명호에게 있어서는 그처럼 

다가갈 수 없는 힘든 존재였을 테니... 

그 이해심 가득한 눈동자가 이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살짝 미소 지어주고 주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말없이 우직하게 밥을 먹는 그는 주환이와 너무도 틀렸지만 그나마 사람과 같이 있음에 

만족하고 밥을 먹었다. 

평소처럼 달지 않은 밥맛은 죽도록 먹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언제부터 사람과 같이 먹는 식사에 연연했었지... 

의문의 감정이 솟아올랐다. 

가슴에 가득 찬 쓸데없는 감정은 여태껏 내가 겪지 않았던 낯선 감정임에 틀림없다. 

10시가 되자 비디오 가게 문을 연다며 나간 명호.. 

난 혼자가 되어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토록이나 외로움이란 것을 느낄 시간이나 있었는지... 

이제야 혼자가 된 외로움이란 것이 느껴져 가슴이 서늘해진다. 

내 인생에서 떠들썩하지 않았던 때란 없었다. 

내가 학생 시절일 때도 내 주위에는 친구가 넘쳐났고, 원하지 않아도 그들은 내 말을 

들어 주었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누구 하나 나의 엘리트 실력에 태클을 걸지 않았고 

도리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왜인지 내 인생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떠들썩했던 것이다. 

아내와 결혼을 하고서도.. 집 안에 아내와 둘이 있으면서도 결코 혼자 남겨졌을 때 

외로움 따위 느끼지 못했었다. 

늘 첩들에게 둘러싸여 정력적으로 사는 아버지가 한달마다 한 번씩 올 때에도 

외로움이란 건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복형제들도 많았고 친구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 해도 어머니가 없어도 그런 감정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옳았다. 

이렇게 감상에 젖어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가 한심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에, 이미 30이 넘은 나이인 내가 이런 궁상맞은 짓을 하고 있다니... 

씁쓸했다.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들고 와 이리저리 전화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그만 두었다. 

이혼 얘기를 했음에도 그저 그래라 라고 대답했던 아버지였고, 

형제들에게는 얘기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숨을 가다듬으며 앉아 있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 베란다로 나갔다. 

탁 트인 공기를 마시다 눈을 감고 가만히 바람을 맞았다. 

속이 진정이 되는 듯 꽃집에 가 있을 주환이 생각도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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