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빌려다 볼까? 오랜만에 집에서 노는데 할 일이 없네...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심심하기만 하고.. “
“아차, 내가 한 달간 휴가 낸 것 알고 있나? 편하게 쉬어야 하는데.. 음....”
“주환이 너, 한 가지 말할 게 있는데, 이제부터는 꽃집 가지 마라.. 내 아내가 있는 곳은
나와의 한 달이 끝난 후부터 가도록 해.. 한 달간은 나와 생활하는 데만 전념해야 돼..“
“이 멍청아!!!! 그만 종알거리지 못해?!!! 시끄러워서 책을 못 읽겠잖아!!!!!!!!!!!”
내가 한참을 떠들어댄 후에야 버럭 화를 내는 그의 손에는 두꺼운 책이 한 권 들려 있었다.
그의 짐 정리는 오전에 모두 끝나 버렸고, 점심까지 먹은 상태였다.
그 후로 난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고, 심심하기에 그에게 말을 걸었을 뿐인데,
이 나이에 삐진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 조금 상한다. [더 기분이 상해야 할 부분에서는
화도 안 내더니, 이상한 부분에서만 기분이 상하는군.. 바보같애..=_=; -작가의 끼어들기]
에로영화라도 빌려다가 서로의 사이를 돈독하게 하고 싶었건만..
그는 일절 무시한 채 책만 읽고 있다. 내가 말을 안 걸자 또 다시 독서삼매경이다.
젠장..!!!!
“야!! 비디오 빌려다 보자고!!!!!!!!!!!!!!!!!!!!!!!!!!!!!!!!!!1”
“니가 빌려와”
이젠 나를 당신도 아닌, 너라고 불러대는 녀석...
아까 내가 녀석의 페니스를 갖고 논 것을 시점으로 녀석의 호칭이 바뀌었다.
한숨을 푹 내쉬자 녀석이 무시하듯 콧방귀를 뀌더니 소파에 누워 책을 본다.
엄청나게 섹시한 포즈다...
가슴에 무리가 갈 만큼.. 아까 한 번 자위를 해버렸으면서도 스멀스멀 욕망이란 놈이
튀어나온다. 그를 볼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내가 그의 말대로 미친놈이라서
일까..?
녀석에게 다가가 소파에 기대 듯 앉고 허리선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신경 쓰지 않는 듯 책을 파고 있는 그는 날 무시하려는 기색이다.
조금 화가 난다. 나는 이렇게나 그에게 신경을 쏟고 있는데... 그는 나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다니....
“알았어, 그럼 나 비디오 빌리러 갔다 올게.. 책 잘 보고 있어라”
늦가을은 조금 쌀쌀하기에 츄리닝 바지에 코트를 하나 주워 입고는[엄청나게 안 어울리는
옷차림이다 -작가의 끼어들기] 녀석의 뒤통수를 한 번 노려봐 준 뒤 현관문을 나섰다.
방안과는 다르게 싸늘한 복도를 나서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아파트 단지 내의 상가에 비디오 가게가 있는 걸 미리 봐두었고,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다야 낫겠지 싶어 이렇게 혼자 터덜거리며 나오는 것이었다.
오늘 밤 그는 날 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되게 했으니까 날 안을 것이다.
아침에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나 기분이 나쁜 건지 모르겠다.
혼자 우울하게 생각을 하면서 비디오 가게에 도착했다.
비디오 가게에 들어가자 엄청나게 생긴 조폭 같은 남자가 하나 앉아 있다.
그 사람이 주인인 듯싶어 조금 시선을 돌리고 놀란 표정을 감추었다.
마땅히 볼 만한 게 없어서 그에게 물어봐야겠다 싶어 그를 돌아보니 바로 뒤에 그가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버렸다.
“... 아, 저..저기..”
평소엔 안 하던 말 더듬기까지 해버렸다.
그만큼이나 당황한 적이 드물다는 것인데, 이 남자의 행동은 지금 나를 무척이나 당황하게
만들었다. 조금 중얼거리며 그의 험상궂게 생긴 인상을 올려다보다가 [헉. 그가 나보다 훨씬 크다]나보다 큰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극히 드물다고 생각했는데...
이로서 그 외의 사람을 또 한 명 만나게 된 듯 하다.
조금 올려다보자니 그 보다 더 큰 사람이다.
“뭐 필요하신 거라도?”
“신간 중에 재미있는 것 있습니까?”
“아, 네.. 잠시 만요”
목소리는 예상외로 부드럽다. 상당히 허스키하지만,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다.
말을 꺼낸 후 조용히 서 있던 움직임 그대로 아무런 소리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뭔가를 찾는다. 그리고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있던 비디오 하나를 손에 들고
날 향해 번쩍 치켜든다.
“액션 영화인데요, 블록버스터라서 인기 많거든요, 한 번 보시겠어요?”
말투가 너무나 정중해서 부담이 간다.
조금 망설이다가 그가 들은 비디오를 들고 제목도 확인 안한 채 빌린다고 했다.
"그러면 성명을 말씀해 주세요, 여기 처음 오시죠?“
“네.. 이사 온지 얼마 안 됐거든요.. 이름은 성현조 구요”
“주소는요?”
“이 아파트 104동 804호에요”
“네, 전화번호는요?”
“아직 전화 없는데, 휴대폰 전화 가르쳐 드려도 됩니까?”
“물론 되죠, 몇 번이죠?”
“011-0000-0000이요”
“됐습니다, 이건 신간이라서 1000원이구요, 내일 까지 갖다 주셔야 합니다."
컴퓨터에 다 입력시킨 그가 비디오의 숫자를 입력하고 테입을 건네준다.
그걸 받아들고는 천 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비디오가게 문을 나섰다.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린다.
“많이 들러주세요~!”
굉장히 무서운 인상임에도 말투는 꽤나 정중하다.
게다가 그 거대한 몸집이라니.. 조폭이 어울릴 것 같은 외모인데도 비디오 가게를 하고 있다.
그것도 이런 조그만 아파트단지의 상가 내에서...
쿡쿡.. 인생이란 건 정말 특이한 것 같다.
비디오를 덜렁덜렁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책을 넘기고 있는 그가 보인다.
“나 비디오 볼 거니까 안 보려면 침실에 들어가던가 해..”
내 말에 또 인상을 팍 쓰며 날 노려보던 그가 침실문 안으로 들어간다.
두꺼운 책을 손에 들은 채로...
비디오를 틀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광고 화면이 뜬다.
아무 생각 없이 TV의 화면을 지켜보았다.
뭔가 싸우는 소리와 엄청난 음향효과가 귓속을 때리건만..
딴 생각 속을 헤매는 내 눈은 그 것을 보기만 할 뿐,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렇기에 ‘그림만 본다‘라는 일을 해버린 나였다.
내 머리는 침실의 침대에 누워있을 그를 그리느냐고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