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오늘의 그는 이상하다. (5/5)

오늘의 그는 이상하다.

그는 방문앞까지 나와서 내게 잘가라고 말했다. 나를 확실하게 바라보고, 여기저기 살펴보는 그를 나는 처음보는지라 

당혹스러워졌다. 

왜 그래, 정말 아버지 노릇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네 행복을 기원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선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바람피지 마. 민형이가 불쌍하지도 않냐.”

“누구때문이야, 누구?!”

복도고 뭐고 약이 오를대로 올라 소리치자 그가 진지한 얼굴을 했다. 웃음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은 

16살 이후로 처음이다.

“힘을 길러라, 이신우. 어떠한때라도 민형이를 지킬 수 있도록. 굳은 마음을 가져라. 어떠한때라도 민형이의 행복을 

염두해둘 수 있도록.”

“걱정안해도 잘해. 당신만 없으면 말이지.”

오지랖도 넓지.

어차피 이제 이런짓은 끝이다.

그의 눈앞에서 방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로 나왔다. 내 차를 타고 돌아왔고, 다시한번 씻었다. 

이제 끝이다. 이 미친 관계도 이제 끝이다. 이제 해방이다. 속이 후련했다. 

전화기가 울릴때까지 나는 이제 민형이하고 단 둘만 행복하게 지낸다는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작은아버지였다. 또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고 하느니하면, 그냥 끊어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울음섞여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은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니 아버지가 자살했다.

할아버지는 넋을 놓고 울부짖었다.

“네가 나에게 어떤 자식인데.......어떤 자식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다. 내내 상주로서 인사를 건네봐도, 모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아버지의 시체를 확인하고 싶었고, 특히 할아버지는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며 눈에 불을 키셨지만 경찰들은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깨졌어요. 

할아버지의 무릎이 꺾이는 걸 잡은건 작은 아버지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잡았다기 보다는 서로 부둥켜안은 것 같았다. 

막내아버지는 그다지 충격을 받은 얼굴은 아니였지만 담배를 입에 가져가는 손은 떨리고 있었다.

-제가 볼께요. 심장은 튼튼하니까.

내 말에 경찰이 나를 훑어보더니 얼굴을 끄덕였다. 하얀천을 상체가 드러나도록 내리자 목 위에는 아버지의 얼굴이 있었다. 

나와 뒹굴었던 그 남자다. 나를 보고도 자신의 아내로밖에 보지 않았던 남자다.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손을 뻗어 그 뺨을 만지고 놀랐다. 고무같았다. 차갑고 탄력이 없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감촉.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은 비어있었다.

-머리가 깨졌으면.......

-머리부터 떨어진 것 같습니다. 박살나서 뇌가 흘러나왔어요.

그러나 그 얼굴은 차라리 평온해보였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처럼 행동하고 가버리다니, 비열한 당신 다워요.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심장이 아팠다. 숨을 쉬기가 힘들정도로.

-맞더냐?

할아버지가 내게 매달리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예.

-잘 봤어? 정말 맞더냐?

-예.

-정말......영진이란 말이냐? 잘못 본 거 아니냐? 정말로 내 자식이란 말이냐?

-예.

결국 할아버지가 바닥에 주저앉으셨다.

-도데체 왜......그 아이가 뭐가 모잘라서 왜.......

아무도 알 수 없는 대답을, 할아버지는 허공에 대고 물었다. 마치 당신 자식이 거기에 있기라도 하는것마냥.

-뭐든지 해주었는데.......

초점을 잃은 눈은 어디에 있는 아들을 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멀쩡한것일까. 

아니......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그가 나에게 뭘 해주었다고, 그와 내가 뭘 공유했다고 내가 슬퍼한단 말인가. 

“신우야.”

내 옷가지를 들고 달려온 민형이 내 꼴을 보고 한숨섞어 웃었다.

“괜찮아?”

“응.”

“밥은 먹었어?”

“아니.”

민형이 쇼핑백을 건네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 한참이나 아버지의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영정사진은 대학교 졸업사진이라고 했다. 

사랑은 개나 주라고 생각했다더니, 정말로 차갑고 자신만만한 느낌의 내 또래의 남자가 검은 리본밑에서 모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때는 알지 못했겠지.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잠깐 나가서 밥먹자.”

벌써 마지막 밤이다. 이미 조문객들도 줄어들어서 오늘 밤에는 작은 아버지와 막내아버지 정도다. 

며느리들, 즉 작은 어머니와 막내어머니는 교대로 할아버지의 병실을 지키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쓰러지셨다.

“응.”

대충 코트를 꿰어입고 나가려는데 민형이가 뒤에서 부른다. 돌아보았더니 목도리를 매주었다.

“밖은 추워.”

추위는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따듯하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역시 해장국을 먹어야겠지.”

민형이가 해장국을 먹겠느냐고 물어서 고개를 흔들고 오므라이스를 주문했다. 장례식장에 해장국과 미역국이 있는지라 

그 두개의 음식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오므라이스라니  안 어울려.”

“뭐든 괜찮아.”

가까운 본관까지 가는데도 민형이는 춥다고 이것저것 챙기더니 지금도 물이며 식판을 전부 챙겨주고 있다.  

그제서야 내가 멍하게 앉아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자, 먹자.”

민형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붙잡고 울고 불고 난리를 쳐대고, 

특히 모르는 여자들이 와서 나를 보자마자 혼절하는 기가 막힌 경험들로 가득찬 삼일장 끝에 나타난 민형이는 내게 안정을 주었다.

“맛있다.”

민형이가 웃는 것을 보면서 심장이 아픈것도, 숨이 막히는 것도 조금 가라앉았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문득, 궁금했다. 정신없이 바쁘게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는 꼴을 보여주기 싫어서 조문올거면 마지막 날 옷을 들고 

와달라고 한 것은 나였다. 

민형이는 그동안 뭘하고 지냈을까.

민형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냥 있었지. 학교 가고, 집에 가고.”

가볍게 말하면서 그는 힘차게 또 한숟갈을 퍼서 입에 넣었다. 

그 먹는 모습이 먹음직스러운건 둘째치고 힘내자는 것 같아서 나도 오므라이스를 스푼으로 쪼개어 비비기 시작했다.

민형이와 식장에 돌아왔는데, 식장은 긴장으로 가득차 있었다. 병실에서 요양중이시던 할아버지까지 링겔을 대동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자리를 좀 비운 것 때문에 이러나 싶었다.

그러나 모두가, 내가 아닌 민형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눈길들속에서 민형이는 당황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내 뒤로 숨으려고 까지했다.

“민형아.”

막내어머니의 곤혹스러운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사건이 터졌다는 것은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아버지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고 민형이를 노려보는 걸 보면서,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뭔가가 

생겼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민형씨가 이분이시군요.”

멀쑥하게 생긴 남자가 검은 정장을 입고서 민형이의 눈앞에 섰다.

민형이게 내밀어진 손을 민형이는 잡지 않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슨일인지 몰라 끼어들 수 없다는 것이 한심했다.

“저는 고 이영진씨 변호사 한지민이라고 합니다.”

호감이 가는 미소를 띄고, 남자는 잡지 않은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제서야 민형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 손을 잡았다. 

남자가 환하게 웃었다.

“고인되시는 이영진씨 유산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리 뵈었습니다. 옆에 계시는건 이신우씨 되시나요?”

낵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또 웃었다. ......아버지가 생각났다. 웃는 얼굴을 습관으로 가졌던 남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서 저 웃음에 호감은 들지 않았다. 아니 웃지말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어디에 앉아서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남자는 또 웃었다.

“고인분과는 가까우셨나요?”

변호사는 서류가방을 열며 물었다. 그 말에 민형이는 고개를 흔들었고, 변호사는 눈을 가늘게 했다.

“그것 참.....의외군요.”

변호사는 숨기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는 이런저런 서류를 꺼내더니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희가 확인하기로는 이신우씨가 유일한 직계가족이시더군요, 맞습니까?”

“네.”

이제 드디어 고아가 되었군. 어릴 때는 늘 바래 마지않던 일이었다. 고아가 되길, 저 남자가 죽어버리길, 

그러면 민형이 곁으로 갈 수 있을거라는.......그런 희망. 

“여하간, 고 이영진씨께서는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매해 교체되는 유언장에는 ‘마지막으로 지정하는 단 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남긴다.’라고 되어있었죠. 

그리고 호텔에서 짧게 유언장을 쓰셨더군요. 지금 경찰이 증거품으로 들고가서 저희도 열람만 겨우 했을 뿐입니다만......”

변호사는 나를 보면서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다.

“고인은 조카인 이민형씨를 상속인으로 지정하셨습니다.”

[조카 이민형을 상속인으로 지정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에는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 종이는 내가 눈을 떴을 때 그가 덮어버리던 그 종이였다. 

호텔 객실에 비치되어 있던 그 편지지.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주겠다는 선물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말도 안돼요.”

민형이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듯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어댔다.

“저 새끼가 형하고 무슨 사이였어?”

작은 아버지의 말에 민형이가 흠칫하고 몸을 떤다. 

“씨발, 제수씨하고 형하고 바람이라도 났었.......”

쾅-하는 소리와 함께 막내아버지가 주먹을 날렸다. 

작은아버지의 몸이 뒤로 붕 뜨는 것을 보면서 의외로 막내아버지가 싸움에 소질이 있었다는게 그저 놀라웠다. 

선생님,이라는 고지식한 직업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민형이는 상상도 못한 유산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멈추지를 못했다.

“거기서 더 지껄여봐, 작은형.”

“뭣들 하는 짓이냐!!”

할아버지의 노성도 이번만큼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니라면 형이 돌았냐! 멀쩡한 지 자식 두고 왜 조카에게 재산을 남겨?!”

“내가 알아!”

“니 마누라가 아니면 너냐. 아버지가 너한테 재산을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 이러는거냐고! 너랑 형이랑 둘이서 짜고 치는 

고스톱아냐?!”

.......누가 짜고 치는 고스톱에 목숨까지 던져요;

작은아버지의 억지에 웃음이 나올뻔 했다. 심장 한쪽이 싸늘하고, 다른 한켠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작은 어머니가 천천히 나서더니 “죄송합니다, 아버님.”이라며 할아버지에게 생긋 웃고 자신의 남편-즉 작은아버지-의 

뺨을 제대로 갈기셨다.

엄청난 소리에 몸을 떨며 상만 쳐다보던 민형이조차 그쪽을 바라보았다.

“......애들이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게 하지 마.”

내 어머니는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고 들었지만 작은 어머니나 

막내 어머니는 엄청난 박력을 가진 여장부신지라, 막내 아버지가 주먹을 날릴 것 보다 훨씬 충격이 컸다. 

“이 이상 당신이 입을 연다면, 애들과 난 당신과 살 수 없어. 인간하고는 살 수 있어도 쓰레기하고는 살 수 없는 법이니까.”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시선을 맞추고 천천히 한사람 한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의 할아버지, 싸늘한 무표정으로 노여워하는 막내어머니, 

튀어나가기 직전인 민주누나와 그녀의 사지에 매달려 말리는 민형이네 형제들, 

그녀의 몸통을 꽉 잡고 못 나가게 막는 매형, 아예 고개를 돌려버린 진희, 경멸을 노골적으로 써붙인 진오, 

막내어머니의 어깨를 잡고 보호하듯이 서 있는 막내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민형이를 산채로 찢어버릴 것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다가,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말하는 아내를.

“빌어먹을!”

작은 아버지가 식장을 나가자 다시 고요함이 몰려들었다. 변호사가 헛기침을 두 번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여하간, 이민형씨에게 남겨진걸로는 우선 주식이......”

그 울림은 공허했다. 무엇보다도 민형이가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발작적으로 온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내게 미안한걸까? 그러나 왜?

.......아버지를 잃고나서, 불공정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에게 나는 아들이었던 순간이 겨우 몇분이었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가 나의 아버지라고 인식했음을. -그래봐야 부자간의 애틋한 정 따위는 지금도 전혀 없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면서 천천히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했고, 일년에 한번있는 행위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졌음을.

“나가있을께.”

민형이를 달래주고 싶지만 방법이 없다.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애처로운데 지금 여기서 끌어안을만한 힘이 없다. 

할아버지에게 들킨다면.......안돼, 방법이 없다. 할아버지가 마음먹고 우리 둘을 떼어놓는다면, 민형이는 힘들어진다. 

지금은 끌어안기 전에, 키스하기 전에, 물러서야 할 때다.

-힘을 길러라.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을 내게 직접 했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보고 그의 당부를 들었다. 

그건 그의 꼴라진 재산보다 훨씬 값진것이었다. 그가 누구에게 재산을 넘겼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신우야.”

다급한 어조로 부르는 민형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사흘만에 만나는 민형이다. 

사흘간의 피비랜내나는 전쟁터에 내려온 성모마리아는, 병사를 구하느라 피를 뒤집어 쓴 꼴이었다. 

“나가있을께.”

웃어줘야 하는데, 주위의 험악한 시선 때문에 웃어줄 수 없는게 가슴아팠다.

장례식장 건물 옆에 기대서 담배를 두어개 피면서 아버지를 생각했다. 기억에서 끄집어내서 음미해보았다. 

추억이라 이름붙이기에는 회색빛의 대화들을.

무슨생각을 하고 떨어졌을까. 그때도 빌어먹게 웃고 있었을까.

......나는 민형이가 사라지면, 민형이에게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오면......아버지처럼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아버지처럼 죽지 못해 살더라도 사는, 그런 버팀을 얼마나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끝은 늘 같았다.

한순간도 버틸 수 없다, 고.

어리기 때문인걸까? 나이가 들면, 좀 더 세상을 알게되면 버틸 수 있게 될까. 

그렇다면......그렇다면....... 나는 조금 속물적이 되고 대신에 정상인이 되는걸까. 그러면 감정은 조금 옅어질 수 있을까.

“이신우!”

민형이가 달려왔다. 하얘진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나를 찾은 모양이었다. 

내 팔을 양손으로 잡고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나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그를 만난게 너무나 기뻐서 끌어안았다. 

본래는 이런 야외에서라면 바둥거릴 성품인데, 도리어 그는 온몸을 꽉 맞닿으며 목에 팔을 두르고 안겼다.

......아랫도리가 맞닿아있다. -날 죽일 생각인걸까.

“난 아냐. 난 네 것들을 빼앗으려고 한게 아냐."

민형이의 입이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뭐라는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절대로 아냐. 절대로 난 네게서 뭘 뺏거나 그러지 않아. 너에게 다 돌려줄테니까, 그러니까......”

“다 가져도 되.”

그제서야 민형이가 유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는 다시한번 그를 끌어안았다.

“모두 다 가져도 되. 날 버리지만 않는다면, 뭘 가져도 좋아.”

“.......신우야.”

그가 부르는 것이 꼭 용건이 있어서가 아님을 안다.

“내 옆에 있어줘. 나를 돌보고, 나를 이용해줘. 뭐든지 가져도 되. 내것은 아무것도 없어.”

아버지는 이 효과를 원한 것일까. 민형이는 이제 내곁에서 떠날 수 없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는 이상에는, 

민형이 성격이라면 끝까지 내곁에 남을 것이다. 나에게 양도하려 하겠지만 내가 받을 생각이 없으니 그것은 모두 온전히 

민형이의 것이 될테지.

아아, 그 남자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민형이의 주식이라면 민형이가 사장자리에 추대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면 당연히 나는 회사일에서 손을 뗄 수가 없게 된다. 

그래......그러면 할아버지가 바라는대로 

내가 회사일을 책임지게 되고 그럼 할아버지는 마음편히 눈감으실 수 있겠지. 기가 막히는 전략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그는 효도와 내리사랑을 해치우듯 던져버린것이다.

-우린 같은 종자야.

그는 언젠가 그런말을 한적이 있었다.

-우린 미친인간들이야. 멀쩡히 살아가는 누군가들과는 틀려서 한번 잘 못 내딛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건 순간이란 말이지. 

.....그는 내게 떨어지지 않도록 난간이라도 만들어준건가? 전혀 고마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처음으로 내게 아버지다운 행동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상대인 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남기고 가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끝까지 자기 멋대로인 남자였군.

“난 아무것도 모르니까.......”

민형이가 나를 끌어안았다. 어둠속의 한줄기 빛처럼, 따듯하고 성스러운 포옹이었다.

“난 이걸로 평생 너를 옭아맬께.”

민형이가 나를 안는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래봐야 느슨하지만, 내가 끌어안으면 된다. 내가 우리 둘 사이에 바람조차 

지나가지 못하도록 끌어안으면 된다.

“부디 그렇게 해줘.”

내 말에 민형이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행복하게 해줄께.”

“응.”

처음부터 아버지는 내게 아버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나는 한 사람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 이제와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난 너만 있다면 언제라도 행복할 수 있어.”

아버지가 있었다는 인식이 과거를 보상해주지 못한다.  그래봐야 인생의 원수가 그저 아버지가 되었을 뿐이다.

“너만 있다면.”

조금.......아니라 사실은 많이, 그가 죽어서 행운이라고 느낀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민형이에게 이런 짐을 남긴 것이 

너무나 다행스럽다. 나는 이제 민형이에게 완전히 종속된다. 민형이가 후에 나에게 질려도 내가 싫어도, 

나 없이는 회사를 운영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 절대적으로 민형이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뻤다. 겨우 아버지라고 느끼게 된 자가 죽어도, 그 댓가로 민형이를 가질 수 있다면 난 살인도 불사했을 테니까.

“언제까지라도 있을께.”

나직한 말이, 내 몸과 영혼을 그저 기쁨만으로 가득히 채웠다.

“아.....저기, 명복을 빕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오다가 윤혜림과 마주쳤다. 그녀는 망설이는 얼굴로 내게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오랫만이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까딱이고 가려다가 잠깐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박지윤과는 별로 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되세요?”

“용건이 뭐냐에 따라서.”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주제에 가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가 물었다.

“저기.....민형선배하고 같이 오셨어요?”

나한테는 오빠와 선배를 혼동해서 부르고는 했지만 민형이에게는 늘 ‘오빠’라며 살갑게 굴던 윤혜림이었다. 

그 말에 흥미가 당겼다. ‘선배’라고?

“아니.”

민형이하고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어디 갈래?”

그러자 윤혜림이 커피숍으로 나를 안내했다. 정문을 나서서 있는 작은 커피숍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가득차 있었다. 

“아이스 커피.”

“밀크티요.”

그녀가 밀크티라고 말해서 다시 민형이 생각이 났다. 밀크티를 좋아하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민형이는 유자차나 율무차외에는 

다른 차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마시는 건 핫초코 정도였는데, 그나마도 추운 날이 아니면 율무차를 고집했다.

“저, 민형선배랑 만났었어요. 선배 아버님 돌아가신 다음날에요.”

음료가 나올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윤혜림은 밀크티를 한모금 마신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녀 말에 따르면 민형이가 그녀를 불렀다고 한다. 사람이 없는 동방에서 둘은 마주보았다. 

-긴 말 안할께.

민형이답지 않은 서두에 살짝 놀랐다. 그녀는 그저 차가운 어조라고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 민형이의 그런 말투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민형이는 꽤 사람을 신경쓰는 타입이라서 본론으로 들어가는 법이 별로 없었던 아이였다.

-신우랑 내 사이 안다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랑 사귀고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윤혜림은 억울해 팔짝 뛰겠더라고 내게 말했다. 자신은 억울했다고. 

당신은 사촌이고, 당신은 연인이고, 게다가 이신우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나를 좋아해주지도 않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자신을 불러서 지금 과시하냐는, 못되먹은 생각이 들었다며 그녀는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넌 다른사람을 좋아해.

화가 났었다고 한다. 당신이 뭔데 자신에게 다른 사람을 좋아하라고 말하냐고 소리라도 칠려는 찰나에 민형이가 곤란하게 웃었다.

-신우는 내가 아니면 안돼.

-그건 선배의 자만이죠.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고 온 마음이 외쳐대서 그녀는 빈정거렸다.

-응, 자만 맞아.

민형이가 쉽게 인정해서 놀라버렸다며, 그녀는 그 순간 별 생각을 다했다고 한다. 

이대로 밀고나가서 끝장내버리는건 어떨까. 게다가 민형이가 자신의 앞에 온게 자신이 했던 

그 거짓말 -민형이가 나와 그녀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는-로 인해 둘이 오해하거나 다퉈서일거라는 추측이 더욱 

그 마음을 현실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민형이가 말했다.

-......신우가 아니면 안되는건 나일뿐일지도 몰라. 그녀석은 내가 없으면 다른 녀석에게 지금처럼 달라붙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나는.

민형이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었다고, 혜림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민형이의 그런 웃음을 본적이 없다.

-신우가 내가 아니면 안되도록 만들거야. 그러니 넌 빠져.

-제가 왜요?!

눈물날 정도로 억울해서 소리지르는데 민형이가 작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속삭이는 듯한 말투로.

-어차피 너에게 기회는 없어. 내가 주지 않을거거든.

-선배가 주는 기회 따위 필요 없......

-미래에 다른 녀석을 좋아하든 어쩌든 지금 신우는 나뿐이야. 굉장히 간단한거야.

목소리는 좀 더 낮아졌다.

-“윤혜림을 죽여줘.”라는 말에 신우는 망설이지 않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너는 신우를 몰라.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 그 녀석을 잘 알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말이지.

그 말은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고 윤혜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널 위해서라는 말은 하지 않겠지만, 네 행동은 신우를 도발할 뿐이야. 

도발되는 쪽은 애정이 아니라 폭력쪽이라고. 나는 신우와 평온하고 보통의 사랑을 하고 싶어.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제 신우에게는 아버지조차 없어. 이제 신우는 고아란 말이야. 나는 그를 지켜주고 싶어. 그러니까 제발.

민형이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 되었다고 했다. 그게 가장 무서웠다고.

-빠져줘. 어차피 그 남자는 나밖에 없어. 너에게는 가지 않아.

무서웠다고 했다.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나와 사겨주지 않아도 좋아요.”

밀크컵이 든 머그잔을 감싼 두손이 떨리고 있다. 나는 내심 민형이의 그 강렬한 애정고백이랄까, 

독점욕에 놀랍고 기뻤을 뿐이었지만 윤혜림은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민형선배는 이상해요. 미친 사람 같았다고요!”

신선한 의견에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담배를 들고 흔들어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담배 연기가 폐에 닿는 것 같자, 민형이가 보고싶어졌다. 그 입술을 빨고 싶다.

젠장할 담배. 이민형이라면 벌써.......

“선배!!”

“뭐 민형이는 정상이야. 너한테 그런 소리 한걸로 보아 걔가 얼마나 마음 단단히 먹었는지 알겠지만.”

나는 말을 고를 생각이 없었다. 윤혜림이 상처입거나 말거나, 내게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민형이 말은 전부 옳아.”

“선배.......”

“민형이가 너를 죽이라고 말한다면 난 너를 죽여. 당연하잖아. 이민형은 나의 생명줄이니까.”

자신을 살해한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는 타인을 보면서 윤혜림은 분노와 공포로 눈이 커지고 있었다.

“빠지는 게 낫다는건 전적으로 널 위해서 한말일꺼야. 그렇지않아도 나는 그 깜찍한 거짓말 때문에 너를 어떻게 

가죽채로 벗겨버릴까 생각중이었거든.”

시선이 마주쳐 웃어줬다.

“미친건 내쪽이야.”

손을 들고 손바닥을 펼쳐 공중에서 그녀의 목을 잡는 시늉을 해보자 그녀가 몸을 뒤로 확 뺐다.

“네가 민형이와 밀실에서 이야기했다는 것만으로도 널 죽이고 싶어. 나를 좋아하든 말든은 네 마음이야. 

네 말대로 그건 네 자유이니 뭐라 하지 않아. 하지만, 날 귀찮게 하거나 민형이와 단둘이 있지는 마.” 

“.......선배.......”

“이만 간다.”

일어서는 내 뒤에서 윤혜림이 뭔가 말하려는 듯 했다. 하지만 바로 나와버렸다. 햇살을 따사로웠고, 기분은 좋았다. 

민형이가 보고싶어서 그냥 택시를 잡았다.

“왔어?”

회사관련 서류들을 보느라 초췌해진 민형이가 나를 맞았다. 

할아버지는 갑자기 ‘신우 니는 민형이를 끝까지 도와라’라고 하면서 민형이에게 후계자 수업을 받으라고 하셨다. 

‘영진이의 가는 길 부탁을 이 애비가 어떻게 모르는 척 하겠느냐’면서.

덕분에 민형이는 그 많은 서류들을 보면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오늘은 뭐야?”

“작년 재무재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밤참해줄까?”

“비빔국수가 좋아. 되?”

“물론이지.”

내가 일어나자 민형이가 매달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와서 텔레비전 좀 보다가 내가 비빔국수 다 하면 같이 먹고, 들어와서 같이 보자. 아는 거라면 설명해줄께.”

의외로 민형이는 좋은 보스가 될지도 모른다. 솔직하고, 의견규합에 뛰어나며, 타인의 능력에 도움을 받는데 주저가 

없다는 면이 그렇다. 민형이는 거의 살았다는 얼굴로 나를 쫓아나와서 최근 유행하는 코메디 프로를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을 맞추고 웃기 시작했다.

윤혜림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귀엽다.

사실은 민형이는 조금 더 나를 좋아하게 된건지도 모른다. 그가 전에 말한 것처럼 그는 나를 좀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도 그때보다 민형이가 훨씬 좋으므로 결국 격차는 벌어지고만 있다.

“맛있다!”

웃으면서 먹는 너를 보고 행복해진다. 너는 나의 연인이고, 아이이고, 부모이고, 나의 전부인 사람. 나는 어둠속에서 

유일한 빛을 본다.

“사랑해.”

아무렇지도 않은 그 말을 하고 얼굴을 숙여 먹는 민형이의 귀가 조금 빨갰다. 굳이 지적할 마음은 없어 나도 진심으로 

대답을 들려줬다.

“응, 정말로 사랑해.”

나는 장님이다. 어둠에 갇혀서 너라는 빛에만 의존하는 가여운 사람이다. 너를 무엇이로든 옭아매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나를 슬쩍 올려다보고 쑥스럽게 웃는 그를 오늘은 반드시 안고싶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이별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부디, 떠날때는 어둠에 영원히 묻혀 고통스러워할 나를 위해서 

나를 죽이고 떠나줘, 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비빔국수를 다 먹고 내 국수를 쳐다보는 그에게 나의 것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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