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웠다.
내가......내가 디스크라고? 그러나 분명 서류에 기재되었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디스크와 슬관절이상. 그것이 내 군대 면제 사유였다. -분명 아버지든 할아버지든 손을 쓴것이리라.
민형이가 군대를 가면 어떻게 되는걸까. 나는 그를 삼년이나 기다릴 수 있을까. ......당연하다.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 어차피 그가 아니면 나는 살아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이왕이면 민형이가 군대를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슬슬 군대 이야기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여서 어떻게든 조작해볼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자 민형이 약간
곤란한 얼굴로 “나도 면제야.”라고 대답했다.
다행이지만......어디가 아픈건가? 어떻게 면제가 되었지?
“왜?”
일부러 산 에스프레소 기계의 스팀건으로 우유를 데워 핫초코를 만들며 물어보는 말에 민형이 대답이 없었다.
거품을 내고 위에 초코파우더를 뿌려서 건네줄때까지도 민형이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말하기 싫은 일이야?”
그가 원치 않는다면 물어서는 안된다. 하지만......알고 싶다. 참 이상하지. 미국에 있을 때는 그저 곁에 있기만 할 수 있다면,
볼 수만 있다면, 충분했었는데.
“뭐, 별거 아니거든.”
핫초코를 홀짝이면서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말투가 무겁다. 본인도 그 무게를 깨달았는지 불편한 얼굴이었다.
물어봐도 되는 걸까. 알 수가 없다.
“물어보면 안돼?”
흠, 하고 민형이가 왼쪽눈을 찡그렸다. 민형이는 난감할 때 한쪽눈을 찡그리는 버릇이 있다.
-민형이 말에 따르면 나는 본심과 다른 말을 할때나 하기 싫은 말을 할 때 시선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
어느새 버릇까지 알게되는 사이가 된 건가 싶어서 흐믓한 기분이었다.
“폐쇄공포증이야.”
가슴이 뻑적지근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산산조각났다. 나때문이다. ......열살 때, 내가 그렇게 만든것이다.
“뭐,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병이 한두개 있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하지만 핫초코를 든 손이 떨리고 있다. 엎을 것 같은 위험한 순간에 나는 그의 잔을 붙잡았다.
민형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뜨겁잖아. 어서 손 뗴!!”
별로.
“내가, 책임질께.”
내 말에 민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어릴 때 민형이는 내가 자신의 곁에 바리게이트를 치는 것을 싫어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어릴때는 몰래 팼지만 걸렸고, 지금은 걸리지 않도록 수단을 바꿨지만- 이런경우는 당혹감이 앞서고는 한다.
상대가 내가 견제를 하기전에 민형이 앞에 섰을 때 말이다.
“민형오빠.......”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여자애는 기껏해야 윤혜림이 뿐인데 저 귀여운 나머지
목을 확 졸라버리고 싶은 여자애는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일까. 민형이는 정말로 난감한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안되요?”
안되지, 말이라고. 옆에서 윤혜림이가 씩씩대는걸 보니 더 웃겼다. 당장 폭발할 기세로 손톱을 질근질근 씹고 있다.
나중에 보면 민형이가 손톱이 왜 그러냐고 걱정할게 뻔히 보여서 짜증이 났다.
“하지 마.”
내 말에 윤혜림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박지윤보다는 다람쥐같은 인상이라고 생각했다.
“손톱 물어뜯지 말라고. 거기서 더 물어뜯으면 피나잖아.”
그 말에 윤혜림은 손을 내리더니 “오빠, 민형오빠 왜 대답안해요?”라고 샐쭉하게 물었다. 그러게, 왜 대답을 안할까.
당장이라도 정말 목을 조르고 싶어지는 손이 근질근질한데 말야.
“.....안되는데.....”
안타까운 음성에 밑을 보자 윤혜림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왜 안되는데?
나야 당연히 안되지만 네가 안될 이유가 뭐냐. ......또다시 ‘그 다정함에 반했다’ 패턴이냐.
(실제로 고백하는 저 여자애도 그러고 있다.) 민형이가 새빨개진 얼굴로 어버버거리는것에서 내 인내심은 부서졌다.
유리컵을 들고 여자애 앞에 다가갔다. 눈이 마주치길래 웃어주자, 여자애 눈이 휘둥그레 진다.
......네 사지를 부러뜨리지 못하는게 내가 힘이 없어서가 아냐. 내 절대군주가 날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눈앞에서 유리컵에 힘을 줬다. 쨍강, 하고 깨지자 “이신우!”하며 민형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내 손을 살핀다.
그리고 여자애는 비명을 지르며 마치 자신이 맞기라도 한 듯 얼굴을 감쌌다.
꺼져.
이러면 눈으로도 말이 통한다. 여자애가 천천히 뒷걸음치는걸 끝까지 노려봤다.
조금이라도 걸음을 앞으로 걷는다던가, 민형이를 부르면 넌 죽어. 죽여버릴거야. 이민형에게 내가 있다는 걸 모르는 인간은 모두,
알게해주겠어.
여자애의 가슴이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면서 나는 조금 웃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민형이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그다지 만족스런 경험은 되지 못했다.
아프지 않은 나와는 달리, 내 아픔이 모두 전이된 듯이 민형이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다음에는 이 방법을 쓰지 말아야겠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끝에는 윤혜림이 안스러운 얼굴로 나와 민형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칠칠맞게 다쳤냐?”
난 정말 이 인간이 싫다. 일주일에 한번 내가 이 인간을 만난다는 것을 아는 민형이는 아버지한테 잘하라며 응원했지만,
그 응원은 정말 잘못된 방향의 것이다. 도데체 내가 이 인간에게 잘해야 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음부터 늦으면 그냥 갈거야.”
내 말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던 그가 손을 들어 뺨을 톡톡 쳤다.
“뭐야, 삐졌냐.”
“치워.”
싫다, 이런 친한척의 제스츄어따위.
식사가 나오자 그는 먹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조금씩 먹는 그는 썩 배가 고프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일주일에한번씩 보다보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이 가면갈수록 야위고 있다던가, 눈밑이 까맣다던가 하는것들.
그는......죽어가고 있다. 삶을 진행하는 것이라면 결국 두가지의 마음이다. 살아가던가, 죽어가던가. 그는, 살고있지 않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민형이를 잃는다면, 나도 저렇게 되는걸까. 왜 저렇게 살아있어야만 하는걸까. 차라리, 죽어버리면 되잖아.
“내 얼굴이 잘생긴건 알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볼 필요가 있겠니? 아니면 반했냐?”
말을 말아야지.
“일주일동안 뭐하고 지냈냐?”
“학교가고. 집에 있고.”
“아르바이트라도 하지 그래?”
금전적인 지원을 끝는다는 말인가 싶어서 그를 쳐다봤다.
“그렇게 치사하게 굴지 않아. 그리고 나한테 너는 소중해.”
어떤의미의 소중이냐. ......아무래도, 그가 원하는 나의 존재는 [아들]은 아니다. 하지만, 뭘 원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추억을 만들라는 뜻이야. 시간이 흐르면.......현실에 매이게 된다. 그러면 너는 추억을 만들틈도 없게 될거야.”
“그 말인데.”
맞다, 오늘은 반드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 회사일에서 빠지고 싶어. 후계자, 다른 사람으로 정하면 안돼?”
“안돼.”
더 생각해 볼 가치가 없다는 듯이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왜?”
“네가 내 아들이니까.” “작은아버지 아들인 진오라던가......”
“대학도 안나왔잖아.”
“지금부터 가르쳐서 대학보내면 되잖아.”
“안돼.”
“막내아버지 아들인 민하형이나.....”
“안된다고.”
아버지가 드믈게 얼굴을 찌푸리고 선언했다.
“왜?”
“네가 내 아들이니까.”
“당신 별로 회사에 관심없잖아.”
그건 옳은 지적이었다. 그는 회사일에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의무라서 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건 맞지만......아버지는 아니거든.”
그의 아버지는 즉 나의 할아버지가 된다.
“......할아버지가?”
“어, 그 노친네는 장남만을 선호하는 한국 노친네가 되셔서 말이다.”
지겨워, 하고 중얼거린 그가 잡채의 당면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말을 이었다.
“절대로 순진이에게 회사를 넘길 양반이 못되.”
순진? 누구야, 그 지나치게 순수한 이름은? 내 얼굴을 흘낏 본 아버지가 혀를 찼다.
“뭐야, 넌 니 작은아버지 본명도 모르냐. 이순진.”
오한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걸 가만히 기다렸다. 작은아버지 이름이 이순진이라고? 누가 지은 이름이야 도데체!
“당신 이름은 혹시 천진이야?”
“푸핫”
아버지가 물 마시다가 말고 상위에 뿜어버렸다. 콜록거리면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은 아버지가 “그럴 리가 있겠냐!”며
소리질렀다.
“난 이영진이지. 넌 니 아버지 이름도 모르냐? 쓰라는데 많이 있지 않아?”
고아,라고 써냈다는 건 아무리 저런 아버지라도 신경질 낼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짜증을 내면서 주인을 호출하고
상을 물렸다.
“식혜같은 건 작은 상으로 좀 바꿔서 가져다줘요.”
작은 상이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아버지는 담배를 물었다. 저 남자의 얼굴은 늘 체념의 빛을 띄우고 있다.
저 남자는 어쩌면 내 미래상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가올 민형이와의 끝에 내가 하는 얼굴은 저 남자와 같겠지.
그건, 나도 그저 살아가는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까.
“작은 아버지는 왜 당신이나 막내아버지와는 틀려?”
둘다 별로 야심이 있지는 않은데 작은 아버지는 자신이 그룹의 회장이 되는 날만을 꿈꾸며 정진하고 또 정진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되는 걸까. 나를 불러서도 자신의 후계자가 되라는 말이나 하고.
그 말에 아버지가 웃으면서-이 남자는 웃는 습관이 배어있다.-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아버지가 하도 장남 장남하니까 비뚤어진거야. 순진이는 이름 그대로 순진한 놈이거든.”
그......순진소리 좀 안하면 안될까.
“그래도 가면갈수록 같은 피가 아닌것만 같군.” “넌 순진이 이름뜻도 당연히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벌써 두개째의 담배를 입에 가져다대었다.
“이영진. 영원할 영. 진실 진. 이순진. 순종할 순. 진실 진. ......이해가냐?”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사실은 길 영. 참 진인데 말이지......”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뱉었다.
여하간 한자의 뜻인 것 같았지만 그가 무슨말을 하는지는 역시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모르겠다는 얼굴이군. 한마디로 순진이라는 이름조차도 진이한테 순종하라-는 의미였던거야.
아버지는 어릴때부터 순진이한테 그걸 가르치셨지. 진이를 보호해라. 네 형을 위해서 살아라.
그렇게 말이야. 애가 당연히 열받는게지. 그래도 그 놈은 나보단 나은 놈이야.”
그는 담배향처럼 씁쓸한 미소를 무의식에서 나온것처럼 띄우면서 한번더 덧붙였다.
“......나보단 훨씬 나은놈이고, 가여운 놈이지. 잘해라.”
한달뒤에는 또다시 그와 섹스해야 한다. 민형이한테 죄를 짓는 기분이라기보다는, 그 행위자체에 구역질이 나올것같고
소름이 돋는다.
한번도 맨정신으로 해본적이 없어서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눈을 뜨면 그가 없고, 나는 섹스 후의 만족감과 나른함을 느끼면서
치를 떤다.
또 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그와 자지 않는다면 모든 경제적인 지원을 포기해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
이번만 하면, 다음부터는 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으로 꽤 돈을 벌어서, 계속 이름을 알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일년정도면 일은 궤도위로 올라갈 것이고 그런 그와 자지 않아도 된다.
빨리 그 날이 오기를.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되.
남창이란 이런 기분인건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것을 위해서 누군가와 잔다는 건 이토록 신물나는 짓이던가.
“Hello."
지금 번역하고 있는 대학원서의 교수다. 미국 교수인데, 까탈스럽기도 이루 말할 수가 없지만 무엇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한다.
하긴 언어학 교수고, 자신의 책이 들어가는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왜 모르는 한국어를
배울때마다 나한테 전화하는 거지?
“....No, It is a ship."
오늘 배가 뭐냐는 말이다. 사람의 배와 바다의 배를 구분못하면 대충 넘어갈것이지 비싼 국제전화로 물어보는건 왜란 말인가.
“Excause me, I'm driving now, Can I call you in 1 hour?"
그 말에 잔뜩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Ok.....Ah, Just a moment!"하는 것을 확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기가 울린다. 징한 노인네. 그 많은 국제전화의 전화번호를 이렇게 빨리 누르다니.
“Hello!!"
소리가 거칠어져 거의 악을 지르듯이 전화를 받자 건너편이 침묵했다. 괜히 걸었다 싶지? 자, 빨리 끊어.
“......헬로우? 아아.....디스 이즈.....민형, 아, 음 또.......”
민형이다. 전에 내 친구가 내 전화를 받은 이후로, 그는 영어가 나와도 나라고 생각지않고 이렇게 영어로 말을 한다.
그는 쑥쓰러움이 많아서 영어로 전화를 할때면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보지 못하고 듣자니 억울해진다. 그 빌어먹을
일주일에 한번 약속만 아니어도 같이 있을텐데.
그래도 답답했던 기분을 녹이는 듯한 목소리다.......
“아......아임, 히스 프랜드. 소......소.......아 음, 캔 아이 토크 투 힘?”
쿡쿡거리고 한참을 웃은 끝에 “It's me, darling."라고 하자 잠깐 침묵한 그가 소리지른다.
“뭐야, 이신우 너였어!”
결국 웃음이 성대하게 터져버렸다. 내가 웃자 그는 “웃지 마아아아, 이 자식아, 당장 웃음 안 그쳐! 야아아아!”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차가웠던 차 안이 그의 악소리에 온화하고 따듯하게 풀어져간다.
아아, 정말로 사랑해.
이토록이나.......아름다운 그대.
민형이가 자기를 놀렸다며 목을 조르는 것을 스킨쉽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상한 놈일지도 모른다. 그 가는팔이 좋았다.
아마, 힘주면 부러지겠지. 하지만 그는 부러지더라도 눈을 부라릴 사람이고, 그런 그의 강함이 나의 폭주를 막는
유일한 바리게이트일 것이다.
“나를 놀렸겠다......”
으윽, 으윽, 힘주지 마, 힘주지 마.
“자자, 아버지와 무슨이야기했어, 응?”
말해보라는 식으로, 봐준다는 제스츄어를 취하며 놓아준 민형이가 옆의 일인용쇼파로 가서 앉으며 물었다.
“이쪽으로 와줘.”
내 말에 그는 웃었다. 마치 동생의 땡깡을 받아주는 형같은 미소로 민형이가 내 무릎에 앉아서 편안하게 기대어물었다.
“큰 아버지는 건강하셔?”
그는 죽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야위어 가고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야.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희망조차, 나는 될 수 없다. 자식을 희망으로 삼는 한국 부모들과는 달리 그는 한 여자에게 자신을 전부 내어주고
지금 그 상실로 인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중이다.
결국 출혈과다로 어느날인가 죽어버릴지도 모르지. 심장이 멈추고, 그 육체의 끝이 보일 날이 올지도 모른다.
“왜 그래?”
민형이가 물어서 그를 보자, 그는 어느새 내게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뭐가?”
“왜 안좋은 얼굴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그저 법적 생물학적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했을 뿐이다. ......죽어가는 그가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그를.
“안좋은 얼굴이야?”
내 질문에 “무지.”라고 단호하게 대답한 민형이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뭔지는 모르지만, 마음 편안히 갖어.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넌 어차피 나밖에 보지 않잖아.
내가 네 곁에 있을테니, 천천히 생각해.”
다정한 이민형.
분명 내 피의 상당부분이 민형이에게도 흐르고 있을텐데, 너는 왜 이다지도 다른거냐. 나나 내 아버지라는 그 남자나
할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상냥한 너.
“응......”
뺨에 닿은 손에 내 손을 겹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이 온기가 나를 구원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순간......
그 남자의 목소리에서, 그 남자의 주박에서, 그 남자의 피에서 나를 구원한다. 혈육이라는건 이다지도 끈질기단 말인가.
벗어나고 싶고, 일절 도움도 되지 않았는데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저주같은 것.
“좋아해.”
민형이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 어둠을 몰아내준다.
“나도.”
그 말에 당연하지, 라며 민형이 웃었다. 그 맑은 웃음에 키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스 끝에 민형이 내 코에
자신의 코를 부비며 웃어서, 나도 따라 웃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생길때마다 이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감정이 거세어진다.
......발단은, 내가 교수에게 잡혀있는 사이 낮술을 먹은 민형이였다. 민형이는 오이알레르기가 있는데, 오이소주였던 모양이다.
얼굴이 시뻘개진 민형이를 보며 과하지만 술을 마셔서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는 민형이의 몸에 두드러기가 돋기 시작하는 걸
발견하고 바로 그를 데리고 집으로 갈셈이었다.
그런데 술에 먹힌 윤혜림이 혼자 집에 간답시고 엎어질 듯 고꾸라질 듯 위태롭게 걷는 걸 보면서 민형이가 자기는 됐으니
그 계집애를 데려다주라는 것이다.
“내가 왜?”
집에가서 약도 먹겠다. 택시타고 가겠다. 그러니 제발 윤혜림을 데려다주라는 애절한 말에 마음이 완전히 상했다.
그러고보면 처음에 ‘예쁘다’고 그녀를 칭찬했던 민형이가 아니던가.
“......쟤가 네말이라면 들을꺼야, 그러니까 제발. 좀 가서 도와줘.”
“싫어. 저런 지 앞가림 못하는 계집애가 죽던가 살던가 내 알바 아냐.”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래!”
결국 민형이는 얼굴이 새빨개진채로 ‘그거......해줄께.’라고 보상을 내걸었다.
그거? 완전히 기분이 상해버린 내가 그게 뭐냐고 할려는 무렵, “펠라.”라고 민형이가 말했다.
.......God.
이 곳이 거리라던가, 그가 알레르기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전부 제쳐두고 그를 바로 눕혀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멀리 봤더니 전부 다 모텔간판이다. ......지금 정녕 저를 성범죄자로 만드실 셈입니까.
“......제기랄. 미치겠다.”
내 말에 민형이가 킥킥대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쓸데없는 짐을 운반한 댓가로 민형이의 펠라라면,
해볼만 하지.
반드시 약을 먹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를 택시태워 보내면서 차번호를 외웠다.
그리고 옆을 보자......한심하기 짝이없는 계집애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넓적하게 벌린채로 가로수에 토악질을 하는 중이었다.
옆에 지나가는 아저씨가 그걸보더니 슬그머니 다가오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죽어.
내 말이 눈으로 통한건지,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윤혜림에게서 멀어져 갔다.
“어이, 윤혜림.”
그 말에 작은등의 여자는 가보라는 듯이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 다시 가로수에 기대어 오바이트를 계속한다.
나오는것도 없는데도 그녀는 속이 안좋은 듯 했다.
“윤혜림.”
“......왜요?”
애교있는 목소리가 완전히 가라앉아서 갈라질려고 한다. 이 여자애 쫓아다니는 남자들 -선두에는 민우형이 있다.-이
들으면 믿지못할정도의 허스키보이스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께.”
“혼자 갈 수 있어요.”
냉랭한 어조에 평소같으면 부디 뜻대로, 하고 물러나겠지만 민형이한테 거짓말을 하기는 싫었다. 가능하면 그 숫자를 줄이고 싶다.
“데려다준다니깐.”
“왜요.”
“뭐가?”
“왜 절 데려다주시냐고요.”
홀쭉해진 얼굴로 윤혜림이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이웃한 가로수까지 엉금엉금 기어가서 기대어 앉았다.
“네가 못 걸으니까.”
“언제부터 저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으셨는데요.”
애절한 얼굴을 보면서도 썩 마음에 닿지 않는 것은 윤혜림이의 감정을 절절하게 느끼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미친놈이기 때문일것이다.
내 자신의 감정이 너무나 지독할정도로 강해서, 저런 정상적인 마음 따위는 와닿을 수 없는 것이다.
“별로 관심없어.”
관심도 없는 여자애의 칭얼거림 따위 봐주고 싶지 않다. 안되면 기절시켜서 끌고라도 가면 될 일이다.
민형이가 내게 요구한건 그녀를 바래다주는것,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왜요.”
“민형이가 널 바래다주라고 해서.”
“제가 민형오빠한테 선배가 잘 바래다줬다고 말씀드릴께요. 가세요.”
“......안돼.”
내 말에 그녀가 나를 쏘아보면서 소리쳤다.
“못믿으시는건가요?”
“당연하지, 내가 널 왜 믿어?”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파래진다.
“선배, 정말 재수없어요.”
“동감이야. 하지만 오늘은 동행하자고.” “꺼져요......”
그녀를 일으키려고 다가가자 그녀가 나를 쳐내려는 것처럼 손을 휘둘렀다.
“야, 윤혜림. 확 줘패서 끌고가기 전에 얌전히 있어.”
협박이 소용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모든 언행을 멈추고 인형처럼 늘어져버렸다. 그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자꾸 넘어지는지라 결국 안아올릴 수 밖에 없었다.
가슴에 뺨을 기댄 그녀는 말이 없었다. 택시에 타고 내 부축을 받으며 집앞에서 내릴때까지도.
“나, 선배 좋아했었어요.”
“말하지 마.”
“정말로 좋아했었어요.”
“시끄러!”
술에 취한걸까, 취한척하는걸까.
“학기초부터......선배가 민형오빠랑 다니는거 봤어요. 친척이라면서요. 어릴때부터......의, 친척이라서,
선배가 그렇게 잘해주는거라는거, 들었어요.”
“야.”
“하지만, 민형오빠는 남자에요. 그리고, 언젠가는 가정을 꾸려서 둘이 헤어질거잖아요.”
......나는 아냐. 하지만, 민형이는......민형이는....... 내가 끌어들이고 있는걸까, 내 광기속으로, 그를.......
“......그 언젠가가 불확실해도 좋아요. 저......기다릴 수 있어요.”
울먹이는 그녀가 내게 안겨왔다. 불쌍하다고 생각했지만 단지 그뿐이다. 마음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다.
나는 이민형이 아니면 안돼.
아주 어릴때부터의 구속구가, 피부에 달라붙어있다. 민형이가 아니면 안된다. 그가 아니면 나는 살아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벌레같은 인생을 살게 되.
.....이미, 인생을 포기한 것 같은 남자가 떠올라서, 그녀를 밀쳐냈다.
“난 이민형 사랑해. 게이거든.”
그녀는 그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은 그 감정도 흔들리겠죠. 언제가 한번쯤은 여자를 안아보고 싶어질 날이 오겠죠. 그때......라도 기다리면 안되요?”
-연습한 것 같은 말투였다. 아마 그녀는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거울앞에서 수십번, 수백번 이 말을 뱉어봤을지도 모른다.
아무리봐도 그냥 신입생. 섹스니 키스니 하는 것들과 멀리있는 전형적인 신입생이다.
“여자 안아봤어. 넌 내 취향이 아냐.”
귀찮아졌다. 윤혜림이 그 말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여자라면, 누나쪽이 좋아. 풍만한 몸매,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는 과거. - 처녀를 안는 악취미는 없단 말이다.
진심인 상대가 아니라면, 진심으로 부딪치는 상대 따위 부담감만 더해.”
눈을 내리깔고 견디듯이 내 말을 끝까지 들은 그녀가 웃었다. 눈물젖은 눈의 냉소는 인상적이기는 했어도 위력은 없었다.
“선배가 사랑한다는 민형오빠한테 부탁했어요. 선배한테 고백하고 싶다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잔인한 말들이 허공을 채웠다.
“이 자리, 민형오빠 주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