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니, 정확히는 12년전.
미국에서 나는 홀로 살아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썩, 아버지라는 작자에게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린아이가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아무도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은 여러모로 절망적인 상황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일이년 버티다보니 영어도 늘었고 요령도 생겼다.
아버지는 온갖 금발들과 즐기고 있었다. 즐기거나 말거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백인에 금발, 늘씬하게 큰 여자들만 상대하는 아버지의 취향이 그 빌어먹을 어머니에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우리는 그저 동거인일 뿐이었다. 열여섯살, 아버지가 술에 쩔어 들어오기전까지는.
육년쯤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보면 같이 살던 따로 살던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어느 장소에 있든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그 쪽을 피해서 나 홀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틀거리며 쓰러질 듯 걸어들어오는 아버지를 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진 것은 정말로 불운한 우연때문이었다.
대부분은 왠지 나가기 싫다 싶어서 나가지 않고 있으면 아버지가 귀가한다던가 하는,
아주 본능적으로 피해다녔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던 탓이었을 것이다.
술취햇으면 곱게 자빠져라. 뭐하는 짓이냐. - 그래도 입을 여는 것 조차 귀찮았다.
열여섯살의 나는 이미 대마초를 피고 있었으므로 술 따위에 헤롱대는 아버지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줄리?
그가 나를 그렇게 부르기 전까지는. 그 여자와 닮은 외모 따위는 이제 사라져갈 시점에서 그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줄리,라고. 어머니 이름이 줄리에뜨라는 것 정도는 알고있었기에 상대도 해주기 싫어졌다.
머그잔을 들고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거센 힘으로 붙잡은 건 그였다.
-줄리......
나를 품에 넣고 내 목덜미를 입술로 훑으며 그가 나를 불렀다, 줄리라고.
아버지라는 혈육의 끈에 의지하여 좋게 이성을 되돌려주기에 우리의 핏줄은 너무나 얇고 혼탁했다.
뒤로 날려줄까, 얼굴을 찍어줄까. 그런 생각을 하던차에 뭔가가 툭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가 애절해서? 천만에, 아버지가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든 나랑은 상관 없었다. 그저 단지.......
누군가를 그렇게 애절하게 부르는 아버지에게 안겨있자니 민형이가 생각나서.
-줄리......
-치워요. 난 그 여자가 아냐.
난 싫다. 난 대용품 따위 필요없어.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면 프랑스로 쫓아가서 끌고 와.
가둬버려. 시간이 있다면......서로 마주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용서든 뭐든 빌 수 있잖아.
-......그렇군, 넌 그녀가 아냐.
정신이 확 든 얼굴로 아버지가 나를 떼어놓았다. 그리고 탐색하는 시선이 이어졌다.
끈적거리는 눈길속에서 이 남자하고는 여러모로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역할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지만, 최소한 친아버지라면 아들한테 욕망어린 눈길을 보내서는 안되지 않은가.
-닮았군.
-역겨우니까 그만하고 가서 자요.
되는대로 지껄이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과연 내 아들답군.
일그러지는 미소가 일품이었다. 가학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고 싶어요?
명백히 섹스라는 의미를 가지고 아버지에게 물어본다. 우리는 이미 부자지간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어떤 추억도
어떤 감정교류도 없는 상태였다.
남보다 못한 존재.
그게 우리둘을 잇는 관계의 전부였다.
-난 게이가 아냐. 더욱이 어린애한테는 관심없다. 아들이라면 더 그렇고.
아버지의 그 사무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라는 그 단어가 어떤 객관적인 단어로 쓰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 태도도.
그 날 이후 아버지의 태도는 기묘하게 변했고, 조금씩 그는 호의어린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는 오토바이에, 대마초에, 게이에, 난교섹스까지. - 제대로 바닥에서 굴렀으므로 그의 그런 반응에 관심도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말리지도 않았고 부추기지도 않은상태로.
그리고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친아버지와 뒹굴었음을 발견했다.
.......아무리 욕설을 뱉고 아니라는 증거를 찾고 싶어도, 너무나 뚜렷했다. 피도, 정액도, 아버지도.
대마초를 피우며 집에서 음악을 들었을 뿐이었는데......정신차리니 말도 안되는 날벼락이 떨어져있었다. 열 여덟살이었다.
-아들한테 강간이라도 당한건가요?
어차피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다. 경찰이 피해자를 추궁하는 어조에 아버지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화간이지.
-당신이 말렸어야 하잖아.
-아아, 늙어서.
알기로 아버지는 분명 노멀이다. 그리고 내가 나와 닮은, 저 근육질 사내를 정말로 좋아서 품었을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대마초를 피우면 취향 따위 가리지 않게 된다는건 이미 알고있었지만.
-미쳤군.
내 비난에 그가 웃었다.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였지.
-혹시 계부라고 말할 셈은 아니지?
그런 삼류 소설을 쓴다면 기필코 사지를 부러뜨려주겠다.
-난 네 친아빠야. 백프로 확실하지. DNA검사라도 원한다면 해서 증거를 들이밀어 줄 수 있어. ......거울만 봐도 되는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만.
담배를 피는 그는 시원한 얼굴이었다.
-미쳤군.
-이민형이 아니라서 실망했나보지?
이민형. 봉인되었던 본능이 풀어진 것처럼 그립고도 사나운 감정이 날뛸 것 같아 그가 내민 담배를 물었다.
그의 침대가 젖어있어서 바닥을 굴러다니는 이불을 침대에 던지고 그 위에 걸터앉아 아버지가 일어났다.
나와 같은 얼굴이 일어나서 옷을 입는 것을 보는 것은 곤욕, 그 자체였다.
-부르더군. 몇시간을 계속. 민형아, 민형아, 하고 말이지. .....잘해봐라, 그 야무진 제수씨가 그 아이를 놓아줄지는 의심스럽다만.
뭘 잘해봐? ......앞으로 육칠년정도라고 생각했다. 대학에 가서 한국 내 기업으로 취직하면 된다.
그러면 아버지하고 볼일도 없이 민형이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할 일이다.
그런 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절뚝거리며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마음에 걸리나?
-뭐가?
그 친근한 제스츄어가 기분나빠져 쳐내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친아버지와 섹스한게.
놀고있네.
-난, 당신이 아버지라는 생각 안해. 아버지 다운 일 해준 적 없잖아.
-그랬지.
그는 쉽게 인정했다. 잘생기긴 했지만 그뿐으로 밥맛 떨어지는 얼굴이 눈앞에서 생각에 잠겨있다가 나를 보고 웃었다.
-뭐, 너라면 문제없을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널 알아봤거든.
-......뭐?
-우린 같은 종자야.
당연한 소리.
-당연하지.
-우린 미친인간들이야. 멀쩡히 살아가는 누군가들과는 틀려서 한번 잘 못 내딛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건 순간이란 말이지.
잡힌 어깨가 아파왔지만 떼어낼 기분은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적의가 아닌 호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 감정이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생선배로서 충고하는데,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마.
-이미 생겨있는데. 그 충고는 너무 늦었군.
아버지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민형이가 인생을 걸 만큼 소중한 사람이냐?
-인생이상이지.
생각해보면 난 왜 아버지하고는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해버리는걸까.
숨기지도 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유일한 상대는 민형이가 아니라 내 아버지였다.
-인생이상이라.....
그렇게까지 아픈지 몰랐는데, 아버지가 손을 떼자 피가 통하면서 어깨가 저려왔다.
-그럼 너도 끝났군.
웃고있는 옆얼굴이 기묘한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너도 이미 끝났구나.
아버지는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조각조각 찢어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마치 도마위의 생선이 된 기분으로 어색해진 공기에 눈을 내리깔고 있는데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올렸다.
-생각이 바뀌었어.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다. 배우같은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게 미소인지 비웃음인지 냉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 나도 같이 입꼬리를 올려줬다.
-......일주일에 한번 나와 만나. 뭘하든 좋아. 그리고 일년에 한번, 그래 오늘...... 나랑 자는거다.
싫다.
-싫어.
-왜?
-취향문제.
아버지든 동생이든 그런건 알 바 아니다. 어차피 타인보다 미약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왕 안는 거라면 최대한
이민형과 닮은 사람을 선택하고 싶다.
취향문제,라는 말에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자존심이 상하는군. 역시 늙었어. ......하지만 난 말이야, 반드시 해야겠어.
-난 절대로 싫어.
내 말에 그가 눈을 가늘게떴다.
-세상에, 절대로는 없어.
-있어. 난 당신 싫어. 가족이든 단지 잠자리 상대든.
아버지는 담배를 물었다. 내게도 권해서 망설임없이 입에 물자 불을 붙여주며 얼굴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그래?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 반대급부가 있다 하더라도 바뀌지 않을 절대따위, 너한테는 없잖아?
처음으로 이 남자가 내 아버지라고 절감했다. .....내 머릿속을 궤뚫는 존재는 이 세상에 이 남자 하나일테지.
같은 피로 이어져 같이 미쳐있는 이 남자만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좋아.
민형이가 보고싶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내내 민형이만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굳이 같이 살 마음은 없다면서 자신은 오피스텔로 짐을 옮기고
내게 집을 사주었다.
민형이가 좋아할만한 가구를 사려다가 열 살때의 민형이는 가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대충 골라버렸다.
그리고 밤을 새면서 그 날을 기다렸다.
처음보는 순간 끌어안아버릴 것 같아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 얼굴이......변해버렸는데, 상상과는 전혀 틀렸는데도 보는 그 순간 그가 민형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당황스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작은 어머니를 향해 항의의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고 귀엽다고 생각했다.
옆모습. 머리카락. 코. 눈. 입. 뺨. 목덜미. 산채로 씸어먹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민형이?
내 눈앞에 민형이가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게 허공에 대고 물어봤다. 정말로, 너인가 싶어서.
정말로 내가 그리워하던 네가 내 눈앞에 있는가 싶어서. 이렇게 부르면 넌 또 사라져버릴까.
나는 지금 그 지긋지긋한 대마초의 환상앞에서 다시 목이 메이고 있는가.
하지만 유혹하며 옷을 벗던 환상과는 달리 못마땅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자 현실감이 느껴졌다.
갑자기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 같이 온몸이 차가워지고 바로 뜨거워졌다. 어떻게 할 것 같아.
소리를 지른다던가 혹은......그에게 키스라도 해버릴 것 같은 흉폭한 심정을 잠재우며 그를 가능한한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불을 켤 생각도 못하고 문을 닫고 손바닥으로 심장을 눌렀다.
뛰지 마. 뛰지 마. 진정해야 해. 진정을, 진정을!
그 때 노크소리가 들렸었다. 그때는......다시는 예전처럼 빠져나갈 구석이 있는 허술한 짓거리 따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그물을 영혼을 실로 만들어서라도 촘촘히 짜리라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고,
민형이는 갈팡질팡하다가 나에게 질려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2년전.
그는 말했다. 자기에게 잘하라고. 부모와 형제에게 나와 같이 산다는 선언을 한다는 것은 얼마만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그가 뭔가를 희생하고 내게 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애틋해져서 고했다.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사랑을 좀 줄여. 난 사랑을 좀 키울께.
그런 소리를 하면서 민형이는 내게로 왔다. 내게 너는 사랑이 아님을, 그런 흔한 말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것임을, 너는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좋아. 동정이든 사랑이든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아. 난 너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제발......
내 마음이 부족하다 말하지 마. 나는 이것이 전부라서 이게 부족하면 줄 것이 없어.
“신우야.”
왜 안들어오냐는 얼굴로 민형이 어느새 현관문을 열고 재촉하고 있다. 이상한 것은, 그가 있는 곳은 어디든 전부
따듯해보인다는 것이다.
다가가 끌어안자 태양에 말린 이불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