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장님이다 (1/5)

나는 장님이다.

“아, 그러니까, 선배?”

민형이는 벌써 십오분째 통화중이다. 선배, 동아리일, 병아리, 그런것들로 추측해보건대 통화상대는 아마 민우선배일것이다. 

나는 듣지 않는척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민형이의 대화에 귀를 고정하고 있었다.

“선배, 잠깐만요. 그거하고 저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무엇보다 혜림이는-”

혜림? 그게 누구야?

모르는 이름이다. 민형이의 주위를 떠올려보았다. 민형이, 사촌들, 민형이 주변, 민형이 과 친구들, 민형이 선배들. 

아냐, 확실하게 모르는 이름이다. 고교 동창? ......민형이는 남고출신이다. 학원을 같이 다녔나? 

분명 그때는 재수없는 숯검댕이 눈썹과 어울렸었는데. 누구지? 초등학교 동창이나 중학교 동창? 분명 남중출신이었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아니면 달리 알게 된 사람인가? 누구지?

민형이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무슨말인지 들리지 않는다. 뭐지? 분명 나를 의식하고 목소리를 줄였다. 뭘까.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화가 난 목소리로 민형이가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진동으로 울렸다. 

잠깐 그 전화기를 노려보던 민형이는 전화기를 던져버리더니 “다녀올께.”라면서 나갈채비를 서두른다. 

코트, 운동화. 그 모습에 더 다른 곳을 바라보지 못하고 나도 쫓아나왔더니 민형이가 잠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화가 난 얼굴이 천천히 풀어져가고 킥 하고 웃은 민형이가 운동화를 벗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현관에 남겨져서 안나가기로 결정한건지 몰라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내 코트와 목도리를 가져온 민형이 건네주었다.

“그렇게는 추워.”

“별로 춥지 않은데.”

“보는 내가 추워.”

민형이의 말에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자 민형이 가자, 며 손을 내밀었다. 귀여워. 어릴때도 이렇게 손을 내밀었더랬다. 

남자끼리 손을 잡다니 웃기지도 않는데도, 민형이는 별 생각 없이 늘 손을 내민다. 나에게만, 그는 늘 손을 잡아주고 

이끌고 곁에있어준다. 

귀여워, 정말로 귀여워. 웃는 모습도, 샐쪽한 표정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단는 얼굴을 하고도 차마 추울까봐 코트를 

가져오는것도. 정말.......너무나 사랑스럽다. 

역시 별로 춥지 않다. 밖에서는 바람이 세게 불어서 모두들 찌푸린 얼굴로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데 

나는 그다지 춥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병원을 다닐정도로 통각에 무디다는 진단을 받았었다. 결국 통각은 정상이지만, 

심리적으로 아픔에 대해 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져 한동안은 정신과를 다녀보았지만 허사였다. 

자신에 대해 무관심한, 자폐와는 또 다른 정신병자. 그게 나였다.

하지만 그 때의 자신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생각했던 기억은 난다. 타인이 감정도 통각도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진단해도 가볍게 코웃음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민형이가 있었기 때문에. 올해 가장 춥다는 오늘의 기운도, 

따가울정도로 차가운 바람도 느낄 수 없지만 민형이의 손이 온기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잘 느낄 수 있다.

자기애는 생존의 절대조건이라고 의사가 떠들어대도, 나를 보면서 혹시 학대받고 있냐는 헛소리를 복지국 직원들이 지껄여도, 

나는 귀찮을 뿐이었다. 

민형이만 있으면 되. 민형이가 놀라면 달래줘야 한다는 기분이 들고, 민형이가 아프면 슬프고, 민형이가 때리면 아프고,

 민형이가 끼얹는 차가운 물은 피를 얼릴정도로 차가우며, 민형이가 끌어안을때의 온기는 정말 따듯하다. 

나는, 이민형만 있으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민형 옆에 있으면 살 수 있다. 그것이 민형이에게 국한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게 뭐가 어땠다는건가? 

곧 같이 산지 이년이 되어간다. 이번해에는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까?

“......어떻게 생각해?”

뭘?

“윤혜림말야.”

나도 궁금해. 그 예쁘장한 이름은 도데체 네 인생 어디에 있는걸까? 

나를 흘끗 쳐다보던 민형의 얼굴이 점차 ‘설마’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어디쯤에서 모른다고 하는게 좋을까,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모른다고 할꺼지?”

“아아.”

내 말에 민형이 됐다,며 손을 흔드는 걸 보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뭐야, 산책까지도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어? 

민형이는 화가 나면 산책한다. 그리고 가능한한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산책에서조차 

그 말다툼을 생각할 정도면......그런데 누굴까?

계속 쳐다보는 눈길을 모르는 척 하던 민형이가 결국은 “새내기야.”라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흠, 새내기?

사실 신입생이든 재학생이든 조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난 민형이랑 어떤 관계인지가 궁금할 뿐인데.

“윤혜림, 이번에 우리 과 신입인데 박지윤 닮았다고해서 초기에 난리났었어. 나도 직접 이야기해본 적은 없지만 

얼굴은 꽤 예쁘더라. 

여하간 걔를 민우선배가 노리고 있는데.......”

말이 흐려지고 있다.

“.....걔가 이상형으로 널 말한 모양이다.”

......네가 아니고?

갑자기 날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걸음을 멈추자, 민형이는 어딘지 복잡한 표정이었다. 좋지 않다. 

민형이는 굉장히 복잡한 사고를 하는지라 저런 식의 표정이 나오면 따라잡을 수 없게 된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이유로 엄두도 못낼 결론을 내고는 하는지라, 솔직히 저 표정은 무섭다.

“난 싫어.”

내 말에 민형이가 눈썹을 살짝 들어올렸다가 피식 웃는다.

“예,예, 넌 누구라도 싫잖아.”

누구라도는 아니지.

“그래, 나 빼고.”

응.

알고있구나. 더 할말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걷게 된 민형이가 작게 나를 불렀다.

“신우야.”

......엇, 그 길로 가면 마트가 멀어지는데. 킴스클럽은 이쪽인데. 

“말해...... 근데 이쪽. 저녁하려면 좀 사야지.”

내 말에 앗, 하고 민형이가 다시 내쪽으로 걸어온다. 

아까 멈춰서서 이야기할때부터 떨어졌던 손이 비어서 허전했지만 마트같은데서 손을 잡으면 민형이는 거의 민망해서 죽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손잡자고 하는 것은 민형이를 난감하게 하는 짓이다.

.....민형이가 내쪽으로 다가오는 것은 언제 있어도 기분좋은 일이다. 

“.....이신우.”

이신우, 이건 진지하게 부르는 것이다. 화가 나거나 혹은 진지해져야 할 때, 민형이는 자신도 모르게 내 이름을 풀네임으로 부른다.

“응.”

주차장을 가로지르면서, 아무래도 차가 올 것 같아 민형이를 구석으로 보내고 대답하는 내게 민형이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일층에 도착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나서야 작게, 민형이 물었다.

“넌 내 어디가 마음에 드냐? .......어릴 때와 지금은 취향이 다를 수도 있는 문제잖아.”

어디가 마음에 드냐면......

“취향이 같을 수도 있지.”

물론, 전부다.

얼굴부터 성격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내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지. 마치 열쇠처럼.

“대부분은 다르잖아.”

“대부분이 전부는 아니잖아.”

내 말에 민형이가 그건 또 그렇네, 하고 웃었다. 아......귀엽다. 쿡쿡거리고 웃는 모습은 어릴 때의 민형이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도 저렇게 웃었지. 혹시.....어릴 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민형이에게 관심이 없을까. -역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난 민형이가 좋았을 것이다. 나만의 주인같은 거랄까. 민형이라는 인간 자체가 나를 움직이는 열쇠같아서, 

나는 민형이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윤혜림이는 어때?”

그의 말에 잠깐 멍해졌다.

“누군지 모른다고.......”

아까 말했는데.;

그 말에 “아, 맞다.”하고 자신이 아까 기가 막혀했던 것을 떠올린 민형이가 그럼.....라면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

“박지윤은 어때? 가수 박지윤.”

한참만에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성으로 노래부르는 얼굴 예쁜 가수. - 그게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취향은 아니다. 

난 가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내가 말하는건 얼굴이야. 연애대상으로서 말이지.”

“싫어.”

“왜?”

뻔하잖아.

“네가 아니니까.”

그 말에 민형이는 헉, 하고 숨을 들이킨다. 늘 저런 반응이다. 

민형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민형이를 사랑하고, 그때마다 민형이는 부담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멍한 표정으로. - 민형이가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 표정은 색기있어서 왠만해서는 학교에서는 

이런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공공장소에서 흥분한다는 건 꽤 괴로운 일이다.

......삽입하면, 저 표정에서 눈에 물기만 어리면 딱인데.

“나말고 다른 사람을 사귄다면 말야!”

“그런적이 없어서.”

“상상이라도 좀 해봐.”

“......상상?”

왜? 도데체 왜 그런 상상을? 정말 쓸모없는 짓인데.

그러나 민형이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해보기로 했다. 

박지윤....... 민형이가 없어서 같이 노는 사람으로서는......역시 싫다. 민형이랑 닮은데가 없잖아.

“싫어.”

“왜?”

너랑 닮지 않아서.

이 말을 하면 계속 원점일 뿐이다.

“취향이 아냐.”

거짓말은 아니다.

간단하게, 민형이는 그러냐며 냉장고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즘 민형이가 좋아하는 웰치스다. 

그가 좋아하는 딸기맛은 왠만한 커피숍에서도 잘 팔지 않는지라 마트에 와야만 있다.

“그럼 어떤 여자가 취향인데?”

여자면 무조건 안되지.

너랑 신체적 조건조차 틀려진다는 이야기잖아.

“난 게이이니 여자취향은 없어.”

“아, 그래? 그럼 남자 취향은?”

너지.

-라고 하면 오늘 민형이 몸에 손 댈 기회는 사라진다. 최대한, 거짓말이 아니면서 민형이를 자극하지도 않을 말을 찾고 싶다.

“그냥 평범한 사람.”

내 말에 민형이가 눈웃음친다.

“딱 나네.”

아냐, 넌 안 평범해. 어느 평범한 사람이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지냐. 절대로 그렇지 않아. 

하지만, 민형이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어서 나는 되는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는 얼굴을 하고 행복하게 웰치스를 옮기는 민형이를 보면서, 왜 민형이가 

평범하다고 사람들은 말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렇게 예쁜데, 귀여운데, 똑똑한데, 착한데. 

“저것도 사도 되?”

“응.”

이것저것 군것질거리를 고르는 민형이의 뒷모습은 언제봐도 질리지 않는다. 따져보고 고르고 즐거워하는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 “여보세요? 아, 선배. 진짜, 왜 이러세요-!”

전화를 받더니 두세마디만에 정말로 화가 난 듯 완전히 굳어진 얼굴을 하는 민형이는 본 적이 없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마트안에서 소리를 지르려는 민형이도. 결국 민형이의 가느다란 인내심이 끊기는 걸 보기전에 

전화기를 뺏어들었다.

“선배, 신우에요.”

-어라? 민형이 새끼가 널 바꿔줬네? 야, 그 자식 화 많이 났냐? 조용하던 놈이 화나니까 무섭네.

아직 무서운거 반도 구경 못 한 주제에.

-야, 신우야. 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특별히 예의를 따졌던 인간은 아니어도, 후배가 소리지르는 걸 넘길정도로 관용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민우선배는 그냥 넘어갈 듯 했다. 

다행이다. 민형이는 조금 뒤에는 미안해할테니까.

“말씀하세요.”

-윤혜림, 관심있냐?

“없습니다.”

즉답만으로도 부족하다.

나는 관심없다. 당신이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에게 뭘 하든, 나는 빼달라. -물론 민형이도.

남자란 존재는 슬픈 동물이다. 하나같이 이토록 여자에게 목매달 수 있는 걸까. 

여자들도 그런가...... 그러고보면 나는 민형이라는 존재에 좌지우지되고, 남자는 여자라는 성에 흔들거리니, 결국 다 비슷한건가.

-나, 대쉬한다?

“저랑은 상관없으니 마음대로 하세요.”

-......그럼 말이다, 신우야. 이 선배 좀 도와줘야겠다.

이게 무슨 불길한 소리?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날 보더니 민형이가 한숨을 내쉰다.

“......싫은데요.”

-이 자식, 윤혜림이에게 관심 없다매?!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뺏길 수는 없습니다. 바쁘거든요.”

-.....뭐가 그렇게 바쁜데?

“집안일이요.”

그 말에 선배가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아프다.

-그딴건 민형이한테 하라고 해.

“비능률적이잖아요.”

-비능률? 이 새끼야, 그건 민형이도 할 수 있지만 이건 너밖에 못 해주는거란 말이다.

이상한 논리.

“제가 왜요?”

-뭐? 날 도울 수 있는게 너밖에 없다니깐!

“......그러니까 제가 왜 선배를 도와드려야 하는데요.”

민형이의 눈이 커지는게 보였다.

민형이가 무슨 소리할지는 나도 알지만, 그래도 이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처음부터 도울 생각도 없었고 

애매모호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너 말 다했냐.

“네.”

말 다했냐는 말이 한국에서는 싸움 직전의 대사라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 당연히 도울거라고 생각하는걸까? 나랑 무슨 의리가 있어서. 내가 당연히 돕는 상대는 세상에 하나뿐이다.

민형이가 안절부절하더니 급기야는 내게서 핸드폰을 빼앗으려고 든다. 

재빨리 민형이의 손을 피해서 폴더를 닫아버리고 건전지를 빼자, 민형이가 뭐하는 짓이냐는 얼굴을 하고 있다.

“난 싫어. 신입생을 발라먹든 찢어먹든 그 선배가 알아서 할 일이잖아.”

“그래도 어디 그게 쉽냐;”

처음에 화내놓고선 그런게 아니라고 말하는 민형이는 정말 귀엽다. 선배를 걱정한다기보다는 내 입지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안다. 

“정말로 내가 이상형이라면 걘 취향 이상한 애야. 상대하지 않는게 좋다고.”

잠깐 무슨 말을 하려던 민형이가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내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그는 웃어버렸다.

“그래, 이상한 취향가져서 미안하다.”

그리고 바로 앞으로 나가버리는 민형이를 따라잡으려다가 카트로 왠 할머니를 칠뻔했다. 

“Sorry."하고나선 앞에서 고꾸라질 듯이 웃는 민형이 때문에 민망해졌다.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그런데 

당황하면 바로 이렇게 되어버려서.....

성대하게 웃어제끼는 민형이가 진정하기를 기다려서 물어봤다.

“내가 네 취향이야?”

그렇게 묻자 민형이는 또 웃는다. 왜 자꾸 웃는건데. 많이 웃어도 좋으니 대답만 해다오.

“뭐, 반정도는.”

그건 반칙이야. 그 대답은 안하느니만 못하다고!

원래 잠이 없는 편이었다. 어릴때부터 그러했고 지금도 자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내 힘으로 컨트롤되지 않는 악몽 따위를 보기 위해 열몇시간을 엎어져 있어야 한다니, 인간의 몸이란 어쩌면 

이렇게 자학적인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단 말인가.

하지만 민형이와 같이 자는 건 좋다. 그를 끌어안고 잠들면 악몽을 꾸지 않게 된다. 혹 꾸더라고 그가 옆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진정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잘자.......”

응, 너도.

좋은 꿈 꾸고.

눈을 감아도 나를 잊지 말아줘.

“너도.”

민형이가 안겨오는 것을 힘주어 안으면서, 오늘은 몇시간이나 눈을 감고 버텨야 할까, 라고 생각했다. 

잠이 극도로 없는 나는 하루에 다섯시간도 채 자지 않지만 민형이는 열시간도 잘 잔다. 

그러므로 나는 꽤 오랫동안 -거의 서너시간을- 눈을 감고 민형이를 안은채로 매일 밤 그저 누워있는 것이다. 

잠이 올때까지....... 시간을 버리는 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 몸을 품에 넣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행복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아, 혜림아.”

뭐냐,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은.

“여기는 이민형. 그리고 민형이 사촌사이이기도 한 이신우다.”

선배......제가 분명히 그 때 말 다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이게 지금 뭐하자는 상황입니까? 

바로 진흙탕 소리가 나가려는 걸 민형이가 막고 해사하게 웃는다. 왜 그렇게 웃지? 

나는 화가 났고, 이용당했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방자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왜 너는 웃는거야.

“이민형이야, 잘 부탁해.”

그러나 신입생은 민형이의 인사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나만을 쳐다보고 있다.

“.....야. 너 선배가 인사하는거 안보이냐.”

나는 이민형이 무시당하는 것이 싫다. 이민형을 무시한다면, 나도 무시해야 할 것이다. 

나를 보기 위해서 민형이를 무시하는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행위 중 하나다. 

욕설이 터져나갈 것 같지만 민형이가 욕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눈으로 보내고 있었고, 

동방 분위기도 좋은데 굳이 깰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우선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선배를 보느라요.”

애교떨지마, 재수없어.

“죄송해요, 오빠.”

민형이에게 그렇게 웃어보이는 그녀에게 더 화가 났다. 민형이한테 웃지 마!

“아냐, 괜찮아.”

너도 웃지 마! 웃어주지 마!

“윤혜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해놓고 30분뒤에 일이 있나며 나가버린 이 겁대가리 상실한 신입생에게 

나는 온갖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마음 따위는 모르는 민형이가 예뻐서 얼굴값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고 말한다. 

뭐가 의외야! 충분히 얼굴값 하고 있잖아.

“근데 선배. 신우랑 붙여놔봐야 역효과 아니에요?”

민형이의 지적에 민우선배가 검지손가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건 범인의 생각일뿐!”라고 말하는 걸 보고 

저 자식을 확 죽여버리고 살인범이 되버릴까!-라는 험악한 생각까지 들었다.

“신우녀석의 차가움을 느끼고 상처입은 그녀에게 다정한 선배로 살짝 다가가는거지.”

오호라......

“신우야 도와줄꺼지?”

“네.”

오호라...... 그거다, 이거지. 그런식으로 사람을 이용하려고 불러놓고 이런 만남을 주선하셨다, 이거지? 

상처입히는거야 어렵지 않은데, 다정한 선배라고. 다정따위로는 되지 않을정도로 아주 묵사발을 내주지.

[다정한 선배]?

......왠지 좀 불안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다정한 선배라...... 후배애들이 늘 말하는 너무나 다정한 이민형-이 

생각나서 살짝 오한이 들었지만

 뭐, 저 자식이 착 달라붙어 가드할 것 같으니 괜찮겠지.

“도와드리죠.”

웃어보이자 선배의 얼굴이 굳었다.

“야, 작작해야되, 살살, 알지?”

옆에서 민형이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충고하는 것이 더욱더 거슬렸다. 작작이 뭔데? 

내가 왜 그 여자애 사정을 봐줘야 되는데? 하지만 민형이가 올려다보는 얼굴은 애처로울정도로 예뻐서......

“명심할께.”

라고 대답하는 수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일주일만에 윤혜림은 내 반경 10m안에도 들어오지 않으려했다. 다시 말해 내가 있는 한 동방에도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다는 뜻이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나도 그녀에 대해서 신경을 끄게 되었고 근 한달만에 보는 윤혜림은 완전히 주눅이 들어서 

내게 인사를 살짝 건넨게 전부였다.

민우형은 그녀에게 달라붙어 잘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왜인지 그녀쪽에서 민우형을 어려워해서 곤경에 빠져있었다. 샘통이다.

“민우형, 불쌍하더라.”

착한 민형이는 버스에서 내리면서 연민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동정했다. 불쌍할게 얼어죽었다. 

애초에 후배를 발판삼아 여자를 낚겠다는 그 심보부터 글러먹은 거 아닌가.

“넌 꽤 차가워.”

꽤 오랜 침묵끝에 민형이가 말했다. 그 얼굴에는 분명 웃음이 서려있었는데도, 표정은 불안정했다. .......왜? 

저 얼굴에 잠겨있는 것은 비난인가, 슬픔인가. 아무리 사랑해도, 타인의 표정을 읽는 것은 어렵다. 

사랑의 한계인걸까. 다른 이가 네 마음을 네 표정을 읽을 때마다 질투심과 모욕감에 얼굴이 뜨거워지려고 한다. 

“......정말로, 넌 차가워.”

한국어는 어렵지만 ‘꽤’와 ‘정말로’는 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내가 차갑다는 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에게?”

내 말에 민형이가 온화하게 웃는다.

“글쎄.”

왜 글쎄,인데. 내가 너한테 차갑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왜 아니라고 하지 않아? 왜 당황한 듯 난처한 듯 웃기만 해? 왜.

“내가 너한테 차갑게 굴어?”

“......글쎄.”

“확실히 말해.”

표정이 굳어졌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도 풀 수가 없었다. 왜, 내가 너한테 차갑다고 해? 

“넌 나한테 차갑게 굴지는 않아. 하지만......넌 차가워.”

목도리 안으로 얼굴을 묻으면서 웅얼거리던 민형이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알고 사귀었으니까.”

무슨말이야. 내가 너한테 차갑게 굴지는 않았는데 내가 왜 차가워? 너는 왜 대답을 망설여? 

정확히 말하라고 추궁할 수 없었던것은......민형이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 좋아해.”

목 안쪽으로 응어리지는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떤 라벨을 붙여야 되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딱딱하게 말하자 민형이의 머리가 움직인다. 끄덕끄덕. 그건 ‘알았다’는 걸까. 

그저......‘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어’일까. 나는 그런건 필요없다. 내가 필요한건 민형이가 왜 내가 차갑다고 생각하는지, 

내가 민형이에게 차갑게 군 적이 있는건지, 나는 그런 말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듣고 싶을 뿐이다.

"나는 널 정말로 사랑해.“

그런데도 왜냐고 묻지 못하고 나는 바보같이 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 내내 그런말만 했다. 

네가 껄끄럽다고 해서 멀쩡한 차를 두고 버스를 탈만큼,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입맛에 맞지도 않은 한식만 차릴만큼, 

네가......네가 옆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늘 행복할 수 있을만큼.

나는 뭐가 두려운 것일까.

민형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두려워. 

네가 나를 버릴까봐, 그런데도 그냥 버려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두려워.

“나도 널 사랑해.”

엘리베이터앞에서, 민형이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말했다.

그 뒤에 뭔가 이어질 말을 민형이가 삼켰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민형이는 믿으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믿을 것이다. 

민형이는 나를 사랑한다.

거기에는 어떤 거짓도 없다.

현관문에 열쇠를 끼우면서 곁눈질로 본 민형이는 어딘가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한다기 보다는 추억하는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그에게 들어가자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던 것은......

왠지 2년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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