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pilogue (101/101)

Epilogue

갑자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쿠퍼헤드였다. 나쁜 예감이 몰려왔다. 침대에서 마누라와 아기 만드는 일에나 힘써야 할 놈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싶었다.

“음. 뭐냐.”

―긴급이야. 푸셔가 알토넨의 부정을 모레 조간에 터뜨린대. 그 전에 우리와 협상하고 싶다고 연락이 들어왔어.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염병이었다.

“터뜨리려는 아이템이 뭔데? 섹스? 돈?”

―섹스. 알토넨이 주말마다 가는 성당 수녀와 불륜 관계잖아. 그걸 터뜨리겠대. 그걸 빌미로 우리가 준비한 블록버스터 상영을 포기하라고 할 심산이겠지.

관자놀이에서 핏대가 솟았다.

이 늙은이가…….

나는 냉정을 되찾으려 애쓰며 담배를 깊이 빨아 당겼다.

무려 8개월 전부터 우리는 사법부 비리를 파내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 달 뒤 있을 의원선출 대회를 대비한 작업이었다. 사법부는 문신원로들이 온갖 알짜 직위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죄를 저지른 무신귀족들은 법정에서 사법살인을 당하느니 자살하는 편이 낫다”는 우스개가 나돌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온갖 금전거래와 청탁비리가 난무했다.

프리 프로덕션 작업은 쉽지 않았다. 비리가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쿠퍼헤드가 ‘금광을 캐는 광부가 된 기분’이라고 푸념할 정도였다. 이번 의원선출 대회를 앞둔 시기에 국정감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 국정감사에서 법관들의 부정부패를 통렬히 폭로해 문신원로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줄 계획이었던 것이다. 디데이는 일주일 뒤였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휴지통에 넣었다. 엿같았다.

염병할 늙은이 같으니.

할 수 없지…….

“저녁 9시에 맞춰서 레스토랑을 하나 예약해 놔. 7시까지 본부에 모두 집합하라고 해.”

―역시 그런가……. 그럼 7시에 봐.

쿠퍼헤드가 전화를 끊었다. 언짢은 기색이 완연했다. 이 프로젝트의 팀장이 쿠퍼헤드였다. 1년 가까이 매달려 온 프로젝트가 삽시간에 물거품으로 변하게 되었으니 기분 좋을 리 없었다.

괜찮았다. 이대로 곱게 져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푸셔가 수녀를 장기마로 내세웠으니 이쪽은 신부로 맞대응하기로 했다. 푸셔의 대학교수 아들놈이 성당 신부와 떡 치는 사이였다. 푸셔는 이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스캔들로 터뜨리면 충격으로 피똥을 쌀 것이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물었다.

레이는 뭘 하고 있는지 30분째 탑에서 나올 낌새가 안 보였다. 나보고 기다리라고 한 뒤 탑으로 올라가서는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탑을 훑어보았다.

후졌다. 고딕양식의 검은 돌탑이었다. 망루 하나 뚝 떼어 덜렁 꽂아 넣은 꼬락서니였다. 주변을 둘러싼 광활한 자작나무숲도 스산한 인상을 풍겼다. 글래머 금발 미녀와 전기톱 가면 괴물을 캐스팅해 쫓고 쫓기는 스플래터 호러무비나 찍으면 딱일 듯했다.

하기야, 자신을 눈의 여왕 환생체로 굳게 믿는 레이에겐 감회가 남다르겠다만.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간만에 눈이 그친 일요일이었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왕궁 개방일에 레이와 함께 관광하러 온 참이었다. 두 달 전, 우연하게도 우리 동네로 이사 온 레오파드와 디엘리언(레오파드가 기적같이 구한 애인이었다. 15살에 사고로 머리를 다쳐 상당히 멍청해져 버린 통에 위트 있는 대화가 불가능한 것만 빼면, 레오파드가 나불거린 염치없는 조건들에 들어맞았다)도 불렀는데, 레오파드는 왕궁은 지긋지긋하다며 거절했다. 나 또한 신물 나게 왕궁을 들락거린 터라 별반 감흥이 없었지만, 물경 600년 만에(!) 왕궁을 구경하는 레이는 퍽 들뜬 기색이었다.

오전 10시에 왕궁 정문에 도착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할머니·할아버지 부대에 섞여 티켓을 끊었다. 왕궁을 도는 코스는 총 셋이었다. 첫째는 말을 타고 도는 승마코스, 둘째는 마차코스, 셋째는 가이드의 인솔하에 죽 도는 도보코스였다.

티켓 판매원은 우리에게 승마나 마차코스를 권했다. 연인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나는 승마코스를 골랐다. 말을 탄 지 꽤 오래라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말이 순한 녀석이라 쉽게 탈 수 있었다.

레이를 앞에 태우고 왕궁을 누비자니 기분이 째졌다. 역사가 900년이나 된 왕궁은 전체 면적이 소도시를 방불케 했다. 왕족이 지금도 사용하는 마라 궁전을 비롯해 갖가지 궁전과 저택이 들어서 있었다. 마라 궁전을 중심으로 늘어선 저택들은 각기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궁정에 거처해야만 귀족의 체면이 살던 19세기까지는 저 수많은 저택에도 사람들이 붐볐겠지만, 지금은 카페나 왕실 소장품 갤러리로 활용될 뿐이었다.

“비싼 산책이나 마찬가지지요. 옛날엔 옷만 잘 갖춰 입으면 평민도 왕궁을 출입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암살을 우려해 왕족과 귀족들이 들락거리는 마라 궁궐과 주요 회관들은 모두 출입금지거든요. 말이 왕궁 개방이지,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거미줄이 쳐진 텅 빈 성들뿐입니다.”

“그래도 관리인들이 다들 지키고 있네요?”

“실내 조각품이나 벽화의 손상을 막기 위해서죠. 흠, 마라 궁전 앞뜰로 가 보죠. 팸플릿을 보니 관광객들을 위한 왕족 퍼레이드가 펼쳐진다고 하네요.”

퍼레이드는 개뿔, 오픈카에 탄 왕과 왕비가 호위병들 몇몇에 둘러싸여 궁전 정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끝이었다. 감기에 걸린 왕은 눈 바로 아래까지 커다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극악무도한 푸셔가 기어코 왕비로 옹립시키고야 만 타샤 스웨인도 연신 기침을 쿨럭거렸다.

타샤 스웨인만 보면 아직도 속이 쓰렸다. 작년 이맘때 푸셔는 혼기가 찬 무신가문 처녀 58명을 포함한 많은 유명 인사들을 TV 생중계 헤어쇼로 초대했다. 그러고는 미용사로 변장한 깡패들을 회장에 난입시켜 전 국민이 지켜보는 앞에서 처녀들의 머리털을 모조리 밀어 버리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질러 우리를 경악케 했다. 공포에 질린 왕은 사흘 뒤 타샤 스웨인과 재혼을 긴급 발표했다.

왕 부부는 20분 만에 궁궐로 들어가 버렸다. 할머니·할아버지 부대부터 레이까지, 모두가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하하하. 최악의 비주얼 앙상블을 자랑하는 왕과 왕비지요. 왕의 본판을 본다면 다시 마스크 써 주기를 간절히 원하게 될걸요.”

“그러게요. 게다가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왜소하군요.”

“몹시 작죠. 테렌스부터 크루거까지 2대 왕을 가까이서 봤는데 하나같이 키가 백칠십 될락 말락 했어요. 그나마 테렌스는 미남이고 풍채도 좋았는데, 크루거는 최악을 달리죠.”

왕의 애첩들이 주로 거처했다는 클룸 궁전에서 도시락도 까먹었다. 관광객들이 주로 점심이나 차 한잔을 즐기는 연회실은 거미줄도 없이 깨끗했다. 로코코 양식이 극치를 이루는 아름다운 궁전이었다. 화려한 테이블에 앉아 챙겨온 점심을 모두 비우고 머핀도 먹었다. 다시 왕궁을 돈 다음, 자작나무숲으로 향했다.

문제의 자작나무숲은 왕성의 서쪽 구석에 있었다. 40분가량 달리자 드넓은 자작나무숲이 펼쳐졌다. 자작나무숲의 가물가물한 끝에 덩그러니 솟은 검은 탑이 보였다. 한 떼의 까마귀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인적 없는 숲에서 머리를 푼 바람이 유령처럼 방황하며 흐느꼈다. 제법 으스스했다. 숲을 통과하는 데만도 한참 걸렸다. 30분 걸려서 탑에 당도했다.

나는 말에서 레이를 내려 주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의미로는 확실히 카리스마가 넘쳤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치솟은 탑에서 창문이라고는 1층과 맨 꼭대기, 두 개뿐이었다. 출구만 없다면 라푼첼이 기거하는 탑이라 믿어도 좋을 듯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금방 내려올게요.”

레이는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올라가 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나는 탑 앞 휴지통에 담배를 버렸다. 중세에 시공간이 멎은 듯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현대적인 물건이었다.

달리 할 일도 없어서 팸플릿을 꺼내 읽었다. 어째 으스스하다 했더니 명색만 탑이지 감옥으로 사용된 장소였다. 왕의 경계심을 산 이복동생이나 왕족이 주요 대상이었다고 했다. 자작나무도 언급되어 있었다. 저주사건 후 왕은 탑을 폐쇄했고, 이후 내리 비어 있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였다.

팸플릿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시계를 보았다. 벌써 5시였다. 레이의 노스탤지어고 나발이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30분이면 많이 기다려 준 것이다. 7시까지 본부로 가려면 슬슬 이동해야 했다.

나는 탑으로 들어갔다. 꼭대기로 통하는 계단이 외관 못지않게 음산했다. 질식할 것 같은 냉기가 검은 돌벽에서 풍겨 나왔다. 벽에 듬성듬성 난 틈에서 새어 나오는 실팍한 햇살이 어둠을 간신히 밝혔다. 낮인데도 이토록 껌껌한데 밤에는 대체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궁금증에 주변을 살펴보았다.

창문이 난 1층은 부엌이었다. 텅 빈 부엌 가운데 우물이 하나 있었다. 흐흠…… 하며 계속 계단을 올라갔다. 탑에 창문이 둘밖에 없는 까닭을 깨달았다. 1층과 맨 꼭대기를 제외하면 중간이 계단으로만 이어진 돌무더기로 쌓인 탑이었다. 긴 시간 올라가서야 낡은 나무문이 나왔다.

“레…….” 하다가 멈칫했다. 레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니,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 그놈이 남편이라니!”

순간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사이를 두고 잠잠하던 나무문 안쪽에서 다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믿을 수 없어요. 그 녀석이 어떻게 남편일 수 있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두 달 전, 담당의는 레이에게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만 병원으로 와도 좋다고 말했다. 내가 봐도 레이의 증세는 호전되었다. 봄에도 온몸을 꽁꽁 둘러싸고 다니던 습관이 사라졌고, 대인공포증 역시 많이 사라졌다. 자신을 자작나무의 현생체로 믿는 망상만 제외하면 눈에 띄게 나아진 터였다.

그렇건만 갑자기 혼잣말이라니. 여기로, 자작나무의 탑으로 구경 온 것이 실수였을까.

숨을 가다듬고 느릿느릿 문을 밀었다.

“레이.”

레이가 손짓으로 쉿, 하고 시늉했다. 표정이 심각했다. 나는 잠깐 손끝도 움직이지 못했다. 레이가 휴대전화에 대고 “네.” 하고 말했다.

이런 제기랄.

“메사라,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 희소식이에요. 우리가 외출하자마자 디아나가 진통을 시작해서 새끼들을 낳았대요. 캐슬마인 부인이 새끼를 받았다고 전했어요. 전부 네 마리래요.”

레이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는 “네?” 했다.

“아니, 그럼 왜 우리에게 연락을 안 했답니까?”

“암만 강아지라지만 남자들이 어찌 산파 노릇을 할까 싶어서 안 한 거랬어요. 그런데요, 디아나의 남편이 누군지 밝혀졌어요. 바로 밀키예요.”

나는 잠깐 침묵했다. 디아나의 남편.

두 달간 우리를 사로잡은 일급 미스터리였다. 완전한 성견이 된 디아나가 겨울 중순에 드디어 첫 발정을 했다. 중절 수술을 고민하던 우리는 한 번만 새끼를 보자고 결정, 튼실한 신랑을 물색해 합방일을 정했다.

합방을 하루 앞둔 날 아침, 담배를 피우려고 현관문을 연 나는 저 멀리서 안개를 헤치며 집으로 총총히 달려오는 디아나를 발견했다. 딸기무늬 드레스는 온통 구겨져 있었고 만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새 욕정을 못 이겨 현관문 아래에 난 우유병 투입구를 통해 야행을 해 버린 것이다.

이후 디아나의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키는 옆집 수캐였다. 옆집이며, 수캐이고, 디아나와 평소 친했지만, 우리는 놈을 용의자 선상에 단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럴 수밖에.

밀키는 우람한 시베리안 허스키니까.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털 색깔과 귀 모양이 밀키와 판박이래요. 새끼인데도 발이 크댔어요.”

“허허허. 이거 그놈도 참……. 아니, 디아나의 정력이 대단한 건가. 어이가 없네요. 그래서 통화가 길어졌던 겁니까?”

레이가 “네.” 하며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20분은 한 것 같네요.” 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만 내려가죠. 볼 게 하나도 없어요. 전망이야 좋지만.”

레이의 말에 나는 탑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볼 게 하나도 없었다. 검은 돌벽으로 둘러싸인 텅 빈 방이었다.

“이렇게 통화가 길어질 줄 알았으면 간식바구니를 들고 올라오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심심했을 텐데.”

레이가 간식바구니에서 머핀을 꺼내려는 찰나, 또 휴대전화가 울렸다. 급히 휴대전화를 든 레이가 내게 간식바구니를 건네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캐슬마인 부인인 듯했다.

나는 머핀을 먹으며 방을 천천히 거닐었다. 그나마 기분이 풀렸다. 이런 엿 같은 날에 디아나가 새끼들을 낳다니, 신께서 내린 위로금인가.

전망이나 구경하고 떠나기로 했다. 근사했다. 자작나무숲 너머에 신기루처럼 서 있는 궁전이며 푸른 하늘이며 한 폭의 그림이었다. 소년의 마음으로 돌아가 야호를 외치려다가 관뒀다. 여긴 독일 알프스 산간지대가 아니었고 나도 조난자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재차 방을 둘러보았다. 참말로 썰렁했다. 그저 휑했다. 레이의 원룸을 처음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과 거의 흡사했다. 어쩌면 자작나무 관련서적에 나온 이 방 사진을 레이가 흉내 내서 원룸을 그 꼴로 꾸며 놓았는지도 몰랐다.

레이의 망상은 담당의가 혀를 내두를 만큼 완벽했다. 관련세계에 관하여 공부도 무척 많이 했고, 캐릭터를 향한 투영도도 몹시 높으며, 그만큼 ‘이성적인 질서로 단단히 구축된 세계’가 레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담당의의 소견이었다. 배역에 혼연일체가 된 연극배우와 흡사하다고나 할까. 한마디로 손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나마 레이가 현실을 인정(!)하고 눈의 여왕을 극복하고자 노력해서 다행이었다.

거 참…….

나는 쓰게 웃었다. 결국 일명, ‘령 사건’ 파일은 정신병자의 이상행동이 낳은 결과로 마무리되어 내 업무실의 캐비닛 깊숙이 봉인되었다. 촌극이라면 촌극이었다. 끔찍한 촌극이었다.

나는 창턱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레이가 탑에서 총총히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멀리서도 활활 나부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오파드였다.

“음. 뭐냐.”

―뭐기는. 협상장소 예약 완료했다는 거지. 전처럼 교외의 이탈리아 식당. 푸셔에게도 연락해 뒀고. 부채 휘두르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어. 딸년을 대동하고 오겠다더군. 어, 이거 옛날 생각나는데. 기억나? 레드폭스에게 엿 먹고 마넨을 만나러 거기 가던 때 말이야.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뽑아 물었다. 좆같았다.

“푸셔의 반응은.”

―새침한 아가씨처럼 굴더군. 할 일이 태산인데 싸움이나 할 순 없지…… 홍홍홍, 하면서 부채를 휙휙 휘두르던데. 어쩔 거야, 본부장님. 8개월이나 준비한 블록버스터 아닌가. 설마 이대로 관둘 심산은 아니겠지. 쿠퍼헤드 면상이 완전 죽상이야.

“기다려 봐.”

한마디만 하고 통화를 끝냈다. 속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왕비 옹립 실패 후 물경 1년 만에 먹어 보는 대형 엿이었다. 마음 같아선 알토넨의 불알을 펜치로 백 번 갈겨 버리고 싶었다.

담배를 깊이 빨아 당겼다. 푸셔가 ‘할 일이 태산인데 싸움이나……’ 운운했다고 한 레오파드의 말을 곱씹었다. 뭔 뜻인지 훤히 보였다. 왕국에서 개최할 2132년 동계 올림픽이 2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왕국은 오랜 부패정치로 국제적 이미지가 바닥을 쳐 온 탓에 이번 동계 올림픽은 여러모로 기대를 모았다. 적자로 끝나지 않게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기도 했다.

그 철저한 준비를, 울프삭 경과 마넨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경기장 건설을 빌미로 건설업체들에게서 뇌물만 신나게 받아 챙겼다. 그래놓고 편안하게 골로 가 버렸다. 8개월 전, 푸셔가 로터스 관할 올림픽 준비부서를 시찰한 뒤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들어왔다. 순간, 짚이는 것이 있어서 나도 황급히 올림픽 준비 관련 보고서를 검토했다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겪었다.

울프삭 경이 똥을 싸질러 놓았다는 사실을 모르던 바는 아니었으나, 설마 준비를 ‘하나도’ 안 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울프삭 경이 내 배신을 예감하고 미리 저지른 복수인 듯했다. 염병할 복수였다.

푸셔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할 일이 태산인데 싸움에 몰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노여움이 치밀었다. 전신의 피가 발끝부터 거꾸로 핑그르르 돌아갔다.

이 영감탱이, 나를 또 엿 먹여? 그것도 모자라서 훈계까지 해?

발끝을 세워 벽을 걷어찼다. 퍼억 하고 육중한 소리가 났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걷어찼다. 귀한 왕실재산에 흠집을 잔뜩 남긴 뒤에야 발길질을 그쳤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담배를 비벼 껐다.

진정하자…….

일단 레이와 저녁을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간식바구니를 들려는 찰나였다. 벽에서 굉음이 터졌다. 설마 발차기 몇 번으로 이 견고한 돌탑이 무너지려는 건 아닐 테고, 하며 벽을 응시했다.

소리가 나는 곳은 내 허리께에 위치한 벽이었다. 끼긱끼긱 하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귀를 긁었다. 조금씩 떨리며 움직이던 벽이 서랍처럼 앞으로 툭 빠져나왔다.

이건 뭐냐…….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벽이 열린 곳을 들여다보았다.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벽으로 가장한 교묘한 비밀 문이었다. 내가 걷어찬 곳은 스위치에 속한 듯했다. 옛날 사람들 취미가 괴이쩍다는 사실은 어드벤처 영화를 보며 익히 깨달았지만, 설마 내가 이런 모험을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게 혹, 말로만 듣던 패닉룸(중세시대 성의 비밀 방)인가.

문과 벽 사이로 소형금고만 한 틈이 나 있었고, 그곳에 자그마한 상자가 있었다. 상자를 꺼내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차갑고 밀폐된 공간에 있은 덕인지 보존 상태는 좋았다. 상자를 연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뾰족한 빛 무덤이 마법의 불꽃처럼 홀연히 피어올랐다. 장막 같은 어둠을 단숨에 베어 버리며 형체가 드러났다. 찬란한 빛깔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보석들이었다. 사파이어 반지, 루비 팔찌, 다이아몬드 목걸이, 진주 귀고리, 에메랄드 머리핀, 오팔 펜던트…….

색색의 빛깔이, 냉기와 어둠에 칼자국을 그으며 난폭하게 흩어졌다. 마치 낡은 다락방을 밝히는 촛불 같았다. 긴 시간 끝에 나는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기적인가.

기적이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급히 냉정을 되찾았다. 보석 취미가로서 다년간 갈고닦은 실력을 살려 한 점씩 꼼꼼히 훑어보았다. 총 여섯 점에 하나같이 훌륭했다. 보통 보물이 아니었다. 특히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부르는 것이 값일 듯했다. 눈어림만으로도 목걸이에 사용된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가 수백여 개, 대략 4,000캐럿을 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필적할 만했다.

다른 보석들도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못지않았다. 잡금속은 전혀 쓰지 않은 채, 보석 하나하나의 질이 최상등품이었다. 세공 양식으로 보건대 매우 오래된 보물들이 분명함에도, 세월에 조금도 마모되지 않은 까닭이 이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하마터면 실신할 뻔했다.

“하.”

이 어인 횡재인가. 강아지들도 모자라 보물들까지, 신께서 포우 메사라에게 베푸신 위로금이 심하게 후하신 것 아닌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끝내는 상자를 든 채 팔을 활짝 펴 들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동굴을 발견한 알리바바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주 짜릿했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이였다.

―메사라? 안 내려 와요?

“아, 네. 지금 갑니다.”

간식바구니에 보석을 옮겨 넣었다. 상자째 도둑질하고 싶었지만 크기가 바구니에 맞지 않았다. 어느 양반이 이런 고마운 짓을 했을까. 왕에게 밉보여 탑에 갇힌 어느 운수 나쁜 왕족의 비상금 아닐까 싶었다.

보석을 전부 옮긴 뒤 바구니를 닫다가 멈칫했다. 보석상자 밑바닥에 양피지가 접혀 있었다. 펴서 읽어 보았다. 알아먹기 힘들었다. 옛날 말로 적혀 있어서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 없을 뿐더러, 필체까지 개판이었다. ‘사랑하오……’ 운운만 간신히 알아보았다. 이게 혹, 러브레터랍시고 쓴 거면 장담컨대 반드시 퇴짜였다.

양피지를 접어 보석상자에 다시 넣고 닫았다. 틈새에 보석상자를 되돌려 놓은 뒤 벽을 연거푸 발길질했다. 귀를 긁는 소리와 함께 돌문이 닫혔다.

하하하.

역시 옛날 사람들은 낭만적이라니까…….

간식바구니를 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미치게 즐거웠다. 웃음이 계속 흘러나왔다. 웃을 수밖에. 이 어찌 웃지 않고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날아가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 탑 밖으로 나갔다. 레이는 말라붙은 잡초를 말 주둥이에 들이밀며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혹시 나한테 앙갚음한 거예요? 30분이나 기다렸다고요.”

“별것 아닙니다. 이만 나가죠. 갑자기 본부에서 일이 생겼다고 부르는군요.”

“그래요? 일요일에 일을 나갈 정도면 심각한 것 같은데…… 그런데 왜 그렇게 웃어요?”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간식바구니를 레이에게 내밀었다. 레이가 “왜 이렇게 무겁지.” 하고 중얼거리며 간식바구니 뚜껑을 열려고 했다. 나는 급히 레이를 말에 태웠다.

“괜히 열지 말아요. 탑을 방문한 기념으로 돌멩이 몇 개를 주워서 넣었거든요.”

“……돌멩이요? 기념으로 돌멩이를 주워서 넣었다고요?”

레이가 황당해하는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모른 척하며 안장에 훌쩍 올라탔다. 탑을 천천히 벗어났다. 말이 오솔길을 느릿느릿 달려갔다.

나는 채찍으로 말을 몰아세웠다. 높이 치솟은 자작나무들이 옆을 휙휙 지나쳤다. 레이가 고삐를 꽉 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간식바구니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꽉 끌어안아요! 중요한 겁니다!”

나는 소리치며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후려쳤다. 말이 거세게 달려 나갔다. 말발굽에서 흙이 튀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이 화라락 날아갔다. 비명과 함께 허리를 숙이는 레이의 뒤에서 나는 웃었다.

이거 진짜 근사한걸.

보석 중 몇 점은 레이에게도 어울려 보였다. 협상을 마친 뒤 집에서 레이에게 보석을 한번 걸어 볼까 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바로 처분하기로 했다. 이거 하나만 팔아도 가이거 운용자금 20년치에 육박할 금액이 굴러들어올 터였다.

아니지, 신께서 하사한 선물인 만큼 악당 짓에만 쓰지 말고 간만에 뜻깊게, 의미 있게 쓰는 것도 좋을 듯했다. 따듯한 남국의 섬에 아담한 오두막집이나 한 채 장만할까. 우리가 사는 집도 증축해 볼까. 레이에게 작은 출판사를 하나 차려 주는 건 어떨까. 자선단체에도 후하게 꽂아 주고…….

그렇게 팡팡 써도, 부대자루 삼백 개는 가득 채울 돈이 남을 터였다. 왕국의 갑부 랭킹에서 지각변동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즐거워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비명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레이를 꽉 끌어안았다. 충동적으로 레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어느새 노란 보름달이 걸리고 있었다. 눈꽃도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희디흰 자작나무숲이 홍조를 띠며 젖어갔다. 바람이 팔레트 위로 번지는 물감처럼 축축이 퍼져 들었다.

나는 박차를 가했다. 말을 재촉하며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눈을 헤치고 바람도 뚫었다. 달빛까지 단번에 베어 버리며 달려갔다. 자작나무숲을 가로질렀다. 레이의 손을 잡고 달려갔다.

[유리정원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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