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L.
헌책방의 창밖을 문득 응시했다. 7월의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초저녁이었다. 7월…….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를 옮겨서 연 지도 어느덧 석 달째였다.
나는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던졌다. 온갖 말썽을 피운 악동 갑부 소렐 씨가 어제 독일로 떠났다는 요지의 작은 박스 기사였다. 오늘 몇 번이나 이 기사를 읽었는지 셀 수 없었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자기? 언제쯤 우리 아기 보러 올 거예요?
“하하. 미안해요, 소니아. 다다음주 주말이면 갈 수 있을 것 같네요.”
―후후. 그래요. 그 즈음이면 살을 완전히 뺀 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잡담을 나눈 뒤 전화를 끊었다. 다시 한번 신문을 처음부터 한 장씩 넘겼다. 1면은 칼(작위 박탈로 이제는 공작이 아니었다) 관련 기사였다. 석 달 만에 의식을 회복한 칼이, 문병 온 재포니카와 가이거 본부장에게 되레 욕을 퍼부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바보였다. 이리나는 벌써 한 달 전에 그리스 선박왕과 약혼을 발표했다. 그렇건만 칼은 아직도 자신이 서자의 외숙부임을 내세우며 방자하게 굴고 있었다. 완벽한 ‘현대인’으로 탈바꿈하여 시대에 걸맞게 언론용병술을 펼치는 왕과는 천지차이였다.
그래도 칼이 전생만 몰랐다면 저렇게까지 시대착오적인 짓거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지도 몰랐다. 기본적으로는 영리한 사람이었으니까.
칼은 재판에서 12년 금고형과 더불어서 영구 국외추방을 선고받았다. 칼이 의식불명이던 동안 푸셔가 모든 재판을 끝내 버렸다. 이리나는 부당한 재판절차에 항의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기묘했다. 지금 왜 갑자기 오랜 시칠리아 속담이 생각나는 것일까.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Revenge is a dish best served cold.
내가 원한 복수는 아니었다.
왕의 복수일까.
자신을 철저히 속인 부하를 향한……?
나는 헌책방 벽에 걸린 오필리아를 응시했다. 메사라가 은근히 질색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헌책방으로 옮긴 그림이었다. 저 그림을 가져온 날, 메사라와 나눈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아름답지만 죽은 여자 아닙니까.
―그래 봤자 그림일 뿐이잖아요? 진짜 시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메사라는 저런 주제를 싫어하나 봐요. 죽음이나 시체를 다룬 예술작품을 꺼려하는 편?
―그건 아닙니다. 따지고 보니 내가 네크로필리아 운운할 자격이 없긴 하군요.
네크로필리아…….
디아나가 내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이제 제법 성견의 자태를 갖춰서 꽤 무거웠다. 나는 디아나의 포동포동한 목을 긁으며 티 포트를 기울였다.
소렐 씨……. 앞으로는 만나지 못하겠지.
그 아저씨도, 나도, 이제 더는 600년 전의 주검을 좇아, 한곳으로 모이지 않을 테니까.
나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그날을 돌이켰다.
그날, 철장에 갇힌 우리를 구출한 사람은 삭셀라 백작이었다. 권총으로 체인을 끊은 뒤 우리를 구해 냈다. 그를 따라 계단을 죽 올라가니 비밀 문에 연결된 어느 방이 나왔다.
그새 성이 아수라장이었다. 구경꾼과 언론사 취재팀 등으로 북새통이었다. 덕분에 어려움 없이 성 밖까지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를 인솔하는 내내 침묵하던 삭셀라 백작은 마자리니 전철역 앞에 당도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주술사와 따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분이 계신다네. 거기, 그쪽 분들은 식당에 가서 배라도 채우시죠.”
삭셀라 백작이 한곳을 가리켰다. 전철역 앞에 고급 자동차가 서 있었다. 머뭇머뭇 자동차 앞에 서자 문이 열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소렐 씨였다.
“껄껄껄. 많이 놀랐습니까. 공작의 성을 제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순 없어서 저 백작님께 부탁했습니다. 여기 타시죠.”
“그랬군요. 한데 어떻게 제가 갇힌 것을 아셨는지요?”
내가 묻자 소렐 씨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두 분 대화가 심상찮았거든요. 밀실로 사라지는 두 분 뒤를 밟았지요. 공작의 보디가드는 충성심이 낮더군요. 슬쩍 돈을 쥐어주니까 금방 물러서더라고요. 덕분에 공작이 주술사님을 끌고 가는 광경까지 목격했죠.”
“아아.”
“그 잘생긴 공작님이 아동 추행뿐 아니라 감금 조교 취미까지 있었나 봅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처음엔 제 말을 안 믿던 백작님께서 오늘 아침 터진 공작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움직여 주더군요, 허허허.”
아동 성추행. 푸드 채널에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먹여 주던 바르디 공작의 행복한 면상이 눈앞을 스쳤다. 오싹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은혜는요. 이쪽도 특이한 경험을 해서 재미나던걸요. 공작의 납치 행위를 눈감아 주셨으면 한다고 삭셀라 백작님이 주술사님께 부탁하더군요. 아동 성추행으로 곤궁에 빠졌는데 납치감금죄까지 보태지면 큰일이라고요. 허허, 그 변태 공작나리가 친구 하나는 잘 뒀어요. 아, 그리고 이건 선물입니다.”
소렐 씨가 작고 붉은 케이스를 내게 건넸다. 나는 “네?” 했다.
“선물이라뇨. 이쪽이 도움을 받았는데, 답례는 제가 해야지요.”
“껄껄, 정색하지 마세요. 실은 제 책입니다. 제가 동화작가이기도 하거든요. 사인도 거기에 했으니 꼭 받아 줘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아아. 감사히 받겠습니다.”
역시 괴짜네, 하며 케이스를 받았다. 소렐 씨가 나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저 아저씨, 왜 저럴까…… 하며 민망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소렐 씨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언제나 당신에게 신의 가호를.”
괴짜다운 희한한 인사였다.
소렐 씨에게 인사한 뒤 차에서 내려 식당으로 향했다. 소니아와 오윈 씨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았다. 하룻밤을 넘겨 벌써 저녁 8시였다.
고비는 넘겼으되 머리가 여전히 복잡했다. 일단 메사라에게 소니아 이야기를 해서 보상금부터 준비하고…… 할 찰나, 소니아가 말했다.
“그 상자는 뭐예요, 자기?”
“아, 이거. 선물이에요.”
나는 상자를 풀었다. 고급스런 동화책 한 권과 작은 케이스 하나가 들어 있었다. 별생각 없이 동화책을 펼치던 나는 홀연 온몸으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날카로운 낫으로 가슴을 베인 양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눈앞까지 핑핑 돌았다. 잠깐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책장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거울 왕비 이야기」 ―마가렛 데메테르 作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어느 소녀가 살았습니다. 열두 살 때, 욕심 많은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거대한 성당으로 들어갔어요. 그리고 왕비가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왕은 왕비에게 눈길을 전혀 주지 않았어요. 나랏일을 하느라 매우 바빴고, 전처가 낳은 딸만을 사랑했거든요. 그래서 왕비를 탑에다가 가둬 버렸어요.
심심한 왕비는 매일 거울만 보며 놀았답니다. 거울은 아주 특별해서, 왕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원하는 것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었어요. 왕비는 거울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구경하면서도 딱 한 가지 안 본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왕이었어요. 왕비는 자기를 탑에 가둔 왕을 미워했답니다.
15년 뒤 어느 더운 여름날, 왕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퍼졌어요. 왕비는 거울에게 말했어요.
「거울아, 거울아, 왕의 딸을 보여 주렴.」
거울은 「네, 왕비님!」 하며 왕의 딸을 보여 주었어요. 왕비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어요. 왕의 딸이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을 노닐고 있었거든요. 왕비는 질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왕의 딸을 저주했어요. 그러나 저주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왕의 딸은 왕자님과 난쟁이들이 보호하고 있었거든요.
왕비는 죄가 들통 나 불에 달궈진 무쇠 구두를 신고 두 달이나 춤을 추다가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요술 거울은 압수당해 왕의 서재에 걸리고, 왕비의 결혼 패물들도 왕의 책상 서랍에 들어갔습니다. 왕비의 참혹한 시신은 왕비의 모친이 거두었습니다. 모친은 황무지에 왕비를 묻어 주었어요.
그동안 왕은 뭘 하고 있었을까요? 평소처럼 열심히 일만 했대요. 죽어 가는 왕비에게 일말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요. 왕비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않았답니다.
세월이 물처럼 흐르고 흘러, 왕도 심심해졌습니다. 옛날의 왕비처럼 왕도 요술 거울과 떠들며 놀았어요. 어느 날 왕은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은 내 딸이지?」하고 물었어요.
거울은 「아니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깜짝 놀랐어요. 「그럼 그보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여 다오.」
거울이 그 사람을 보여 줬어요. 왕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이 누구냐?」
거울이 말했습니다. 「바로 전하의 아내이십니다!」
왕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막 사랑에 빠진 저 사람이 옛날에 죽은 왕비라니, 믿을 수 없었답니다. 왕은 비로소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날부터 왕은 매일매일 요술 거울로 왕비를 구경하고, 왕비가 어떤 성격이고 뭘 좋아했는지 공상하고, 왕비의 유품인 패물들도 만지작거리며 나날을 보냈어요. 왕은 병적으로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결혼 패물 중에서 결혼반지만 없었어요. 왕은 혹시 왕비가 반지를 낀 채 무덤에 묻혔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궁금증에 미쳐 버린 왕은 왕비의 모친을 불러 넌지시 물었습니다. 왕비의 시신에 반지가 끼여 있었냐고요. 모친은 대꾸 한마디 않고 떠나 버렸어요.
왕은 포기하지 않고 몰래 부하를 보내 왕비의 모친에게 커다란 금화주머니를 건넸습니다. 「왕이 왕비의 무덤과 반지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합니다. 당신만이 알고 있으니 꼭 대답해 주십시오.」
모친이 대답했습니다. 「요술 거울을 산산조각내면 대답하겠습니다.」
모친은 요술 거울을 싫어했어요. 요술 거울만 아니면 왕비가 행복한 왕의 딸을 볼 일도, 질투에 사로잡힐 일도 없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왕이 거울로 왕비를 쳐다보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그러나 왕은 그 청만은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요술 거울이 아니면 왕비를 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계속 금화주머니를 부하에게 딸려 보내 왕비의 모친을 설득하려 애썼습니다. 모친은 번번이 거절했어요. 같은 일이 10년 동안 반복되었어요.
그러다가 모친이 병석에 누웠습니다. 왕은 모친을 몰래 찾아갔습니다. 왕비의 무덤만이라도 가르쳐 달라며 흐느꼈어요. 10년 만에 만난 왕의 눈빛은 시체처럼 죽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모친은 왕을 용서할 마음이 추호도 없었답니다.
싸늘하게 왕을 외면하는 모친에게, 문득 창밖에 핀 한 떨기 제비꽃이 보였습니다. 「전하, 당신은 왕비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나요?」
왕이 한참 뒤 대답했습니다. 「없소.」
모친은 죽음의 전령이 날카로운 낫을 들고 찾아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아이는 제비꽃을 사랑했답니다. 제비꽃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종종 말했지요.」
사실은 거짓말이었어요. 왕비는 제비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모친은 왕을 골려준 거였어요.
하지만 왕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저 왕비가 제비꽃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쁘기만 할 뿐이었어요. 왕이「부디 무덤을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친은 말할 기력이 없었습니다. 죽었거든요.
왕은 이후로도 4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왕은 언제나 혼자였어요. 딸은 왕자님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고, 신하들과 백성들은 자신의 가족만 사랑했으니까요.
왕은 제비꽃 궁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외롭게 황무지에 묻혀 죽었습니다.
나는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일사병에 걸린 듯이 눈앞이 어지러웠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소렐 씨의 상상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소니아가 메뉴판으로 내 어깨를 톡 건드렸다.
“자기야, 배 안 고파요? 온종일 굶었잖아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메뉴판을 받아들었다. 음식을 주문한 뒤에도 한참 침묵하다가, 동화책에 동봉된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순간 숨이 막혔다. 첫눈에도 엄청난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멍하니 있던 나는 소니아에게 목걸이를 건넸다.
“소니아, 이거 가져요.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에요.”
“뭐라고요?”
소니아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떡 벌렸다. 오윈 씨도 숨을 삼켰다.
“……저기, 자기. 예의상 한 번만 거절할게요. 두 달간 오럴섹스만 한 대가치고 이건 지나치게 고가 같은데요. 자기, 배포가 너무 심하게 두둑한 거 아녜요? 이 목걸이에 달린 다이아몬드 개수가 지금 몇 개인지 안 보여요?”
“아하하. 그냥 받아 줘요, 소니아. 그리고 공짜 아닙니다. 나와 내 남자친구에 관해 발설하지 말아 달라는 조건이 따라붙는 거예요. 오늘 바로 지방으로 떠나는 것도 더불어서요. 내 남자친구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후후후. 우리를 바보로 아는군요? 여부 있나요. 그나저나 세상에. 이 목걸이면 의상 숍을 다섯 개는 열 수 있겠어요. 참, 자기. 우리가 함께 본 그 수정구 점, 기억나요? 그때 주술사가 말한 무뚝뚝한 성격과 달리 내게 마음이 몹시 깊다던 남편 말이에요. 그게 오윈 씨가 아니라 자기를 가리켰나 봐요.”
“아아. 조만간 부자가 된다고…… 남편에게 목걸이를 받는다고 했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정구 주술사의 점괘가 바르디 공작에게 결정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우연치고는 절묘했다.
왜일까. 갑자기 니체의 말이 떠오르는 이유는. 「모든 일은 반드시 제 길로 돌아간다. 시간은 원형(圓形)을 이루고, 그 원형 안에서 우주와 인생은 영원히 되풀이된다…….」
희뿌연 안개가 깔린 공동묘지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나는 블랙커피를 마시며 숨을 가다듬었다. 싫다…….
정말로 싫다.
식사를 마친 후 레스토랑을 나왔다. 눈송이가 총총히 떨어졌다. 그 형상이 갈기갈기 찢겨진 베갯잇에서 흩어진 깃털 같았다. 집으로 향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42번가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오랜만에 들르는 42번가였다. 코냑빛 거리는 사람 하나 없는 새벽처럼 황폐했다. 골목 어귀에 신문지를 덮은 송장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지럽게 낙마하는 흰 눈송이만 지치고 창백한 어둠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서 붉은 가로등 불빛이 손짓했다. 변함없이 담쟁이덩굴로 온몸을 휘감은 채 외롭게 서 있는 헌책방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 앞에 서서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42번가. 마라타에게 구출된 일곱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살아온, 내 고향 같은 곳.
―예, 예전엔 여, 여기가 사창가가 아, 아니었거든요. 그냥 써, 써, 썰렁한 허, 허, 허, 허허벌판이었는데, 그, 그것만 기억하며 왔다가 노, 놀랐지 뭡니까.
소렐 씨의 그 말을, 나는 옹색한 변명으로 치부했었다. 42번가는 19세기부터 명성을 떨친 유명한 사창가였으니까. 그리고 소렐 씨의 필명, 마가렛 데메테르는 자작나무 모친의 이름이었다.
42번가.
이 자작나무의 무덤에서, 나는 21년이나 살았단 말인가…….
잿빛 하늘에서 눈꽃이 춤추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향을 돌렸다. 20분 뒤 스페인풍의 작은 카페가 형체를 드러냈다. 지하로 이어진 출구 어귀에서 흰 네온사인 간판이 반짝거렸다.
스노우 화이트.
하얗게 반짝거리는 간판을 가만히 응시했다. 우울감이 전신을 감쌌다. 스노우 화이트……. 메사라는 이곳에 중독된 듯이 찾아와 남자를 골랐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불과 20분 떨어진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에 웅크리고 앉아, 복수를 향해 내달렸다.
저 두 이름은 길가에 나란히 있었다. 흡사 표지판처럼.
엉뚱하게도 T필드가 생각났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그건 정말이지 망상보다도 더 심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부모가 나를 버리지 않았다면, 나를 구출한 이가 주술사가 아니었다면, 내가 복수의 길을 내달리지 않았다면, 메사라가 42번가로 발길을 향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17세의 레이 아리사가 떠올린 기억대로라면 우리의 첫 시작은 스노우 화이트가 아니라, 11년 전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잿빛 길목이었다.
우연이야. 우연일 뿐이야.
머리카락을 푼 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급히 카페 앞에서 걸음을 돌렸다. 칠흑빛깔 골목을 넘어 드라실강으로 향했다.
끝도 없이 눈이 떨어졌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눈꽃이 날갯짓하며 흩어졌다. 그때와 똑같았다. 메사라를 그리워하며 휘청휘청 여기로 향하던 그날과.
강둑에 앉아 긴 시간 동안 강을 응시했다. 그날처럼, 남김없이 얼어붙은 수면 위로 눈꽃이 숨 막히게 몰아치고 있었다. 힘없이 눈을 뒤집어쓰는 얼음장이 정적에 휩싸인 뒷골목처럼 적적했다.
나는 나직이 뇌까렸다.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소렐 씨의 행적을 되짚어 보았다. 단순한 괴짜 짓으로만 보이던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하나 허물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화책에서 소렐 씨의 각색을 전부 걷어 버리면, 두 개의 사실이 나왔다.
반지와 제비꽃.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데이탄즈는 반지를 애타게 찾았다. 10년간 마가렛은 왕의 청을 거절했다. 데이탄즈는 그녀가 분노한 탓에 자신의 청을 거절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마가렛은 반지의 행방을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녀도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으니까.
―가게 명칭이 특이하게 느껴지더군요.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자작나무가 처음부터 반지를 끼지 않았다는 의미로 보여서 말입니다.
소렐 씨는 헌책방 명칭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황무지에는 반지가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반지를 끼지 않았으니까.
자작나무는 귀금속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것이, 초상화에서 반지만 끼고 있던 진짜 까닭이었다. 그 반지도 스케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낀 것이었다.
그리고 체포를 당한 그날 밤, 갑작스레 탑으로 몰려오는 횃불 행렬에 겁먹은 자작나무는 방을 빙빙 돌다가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중 하나가 반지였다.
희한했다. 데이탄즈가 무덤의 행방을 궁금해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반지라니. 왜? 무슨 이유로? 결혼 예물들 중에서 가장 귀한 보물이라서? 아니면 또 다른 심오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이 무슨 엉뚱한 짓이냐.
허허, 하고 웃다가 미간을 모았다. 갑자기 메사라가 머드팩 어쩌고 하던 때가 생각났다. 돌이켜 보니 그때도 참 엉뚱했다. ‘고등어로 나를 유혹’ 운운한 것이나, 뜬금없이 동화책 낭독을 조른 것,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변태행위를 저지른 것 등등도 마찬가지였다. 멍한 와중에도 실소가 터졌다.
설마 데이탄즈도 엉뚱한 녀석이었나.
역시 알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놈은 시신의 왼팔을 ‘뚫어지게’ 보았다. 그런데 왜? 왜, 무슨 이유로 자작나무가 반지를 꼈으리라고 믿었을까. 설마 건망증 환자였나. 아니면 혹, 오른손에 반지를 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해서?
미궁이었다. 이제껏 녀석을 많이 안다고 자신했건만, 그것이 완전히 깨진 기분만 들었다.
홀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송장처럼 뻣뻣이 굳은 채 강 건너편을 응시했다.
「전하, 당신은 왕비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나요?」
왕이 한참 뒤 대답했습니다. 「없소.」
그래……. 없었다.
나도 녀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단지 기록을 외우고 있었을 뿐이다. 왜 깨닫지 못했을까. 기록이 묘사한 레비탄과 직접 목격한 그녀의 참모습은 판이하지 않았던가.
제비꽃……. 비올라 성당을 줄곧 제비꽃이라고 부르던 메사라가 눈앞을 스쳤다. 나는 입을 막았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며 몸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놈은 알기나 하고 죽었을까. 제비꽃과 소녀형구의 심해에 숨어있던 진실을.
알아 봤자지.
나는 혀를 찼다. 놈이 알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성당 백만 개 지어 봤자 거기서 거기였다. 자작나무의 죽음에서 근본원인은 어떻게 따지든 놈이었다. 그리고 내 추측이 진실의 과녁을 적중했다면, 놈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다.
나는 무릎을 끌어당겼다. 춥다…….
바르디 공작은 “이야기 아직 안 끝났다”며 도망치려는 나를 잡았다. 놈은 몰랐을 것이다. 이미 그때 17세의 레이 아리사는 진실을 모두 꿰뚫어 보았음을.
레어티즈는 그날 왕이 왕비의 시신을 보고 ‘격분했다’고 말했다. 즉 데이탄즈는 왕비의 시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 진짜로 고문이 행해진 사실을 전혀 몰랐던 셈이다. 자신이 명령한 대로 고문관들이 왕비를 가만히 내버려 둔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왕실이 왕비의 사인을 《고문을 못 이겨 일어난 사고》로 발표한 지 사흘이나 지난 뒤였다. 데이탄즈가 수도로 귀환하고도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레어티즈는 왕비에게 고문을 가한 이유만 간단히 설명하고 처벌을 모면했다.
이 일련의 모순은 무엇을 뜻하는가. 뻔했다. 데이탄즈가 귀환 도중 자작나무의 제거를 명령한 것이다.
굳이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지 않더라도, 수사관들이 주술도구만 찾아내면 자작나무는 화형 신세였다. 데이탄즈는 자작나무가 일찌감치 ‘편안한 죽음’을 요구하리라 짐작했으리라. 그래서 레어티즈에게 “왕비를 고문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저주사건에 쾌재는 불렀으되, 15년간 탑에서 수고(?)한 벌레를 잔인하게 짓이겨 죽일 의향까지는 없었던 듯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폭삭 썩어 버려 해골만 남은 시체를 신하들에게 공개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고 박박 우기며 푸른 수염 행세나 하려 했겠지.
그러나 레어티즈는 저주사건을 왕의 조작극으로 확신했다. 그 탓에 왕의 명령을, ‘놔두었다가 전쟁 뒤 왕비를 보고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볼까’로 해석했다. 그래서 자작나무의 외모를 살펴본 다음 고문관들을 매수했다. 왕비가 지나치게 일찍 죽으면 왕이 ‘편안한 죽음’을 위장한 살인으로 의심하리라고 계산, 죽지 않을 만큼만 고문을 가해 자백 핑계를 댔다.
자작나무를 동정했던 비에노가 결국 태도를 바꾼 이유도 매수를 당한 탓이었다. 세간에 파다한 누명설과 주술도구의 부재도 레어티즈의 완전범죄를 도왔다.
그리고 수도로 귀환하던 도중 데이탄즈는 아직도 왕비가 ‘편안한 죽음’을 거부하고 살아 있음을 보고받았다. 주술도구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보고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놈은 자작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레어티즈에게 ‘왕비를 제거하고, 사인을 《고문을 못 이겨 일어난 사고》로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레어티즈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자작나무에게 소녀형구를 씌워 살해해 버렸다.
그날, 자작나무의 시신은 거적을 쓰고 있었다. 깨끗한 시신으로는 충격효과가 덜하리라 생각한 데이탄즈가 미리 지시를 내린 탓이리라. 귀환 뒤 이틀 동안 자작나무의 시신을 방치하고, 공개 자리에서 신하들을 오래 기다리게 한 것도 마찬가지 까닭이었다. 고문이 가해지지 않았으리라고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공포감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는 뒤늦게 시체를 보고 경악했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그 향기는 변함이 없는 것을…….
나는 피식 웃었다. 천만에. 그 두 연인도 끝내 이름을 극복하지 못한 채 동반자살로 막 내리지 않았던가. 이름은 중요한 것이다.
현실이란 이런 것이다. 이름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나만 해도 42번가의 골목을 뒹구는 이름 모를 동사자들에게 무관심했다. 데이탄즈가 격분했다고 해 봤자, 그건 15년간 실컷 이용해 먹은 잡초를 헌신짝처럼 버리며 갖다 붙인 구실이 깨져 버려, 속이 편치 않아서일 뿐일 터였다.
그도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15년 동안 별생각 없이 쌓아 올린 죄악의 악취에. 그날에야 비로소 깨달은, 이름 없고 의미 없는 잡초의 고통에.
뭐, 어쨌거나 한순간은 격분했어도 금세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작고 검은 개를 삼켜 버린 늪처럼.
몇 달 뒤, 그 잡초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장미꽃으로 화해 아름다운 향기를 뿜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나는 턱을 긁었다. 이러나저러나 시시했다. 스물여덟 살의 레이 아리사가 골몰한 문제는 설마 놈이 진짜로 자작나무를 그렇게까지 사랑했으랴, 하는 것이었다. 누가 소녀형구를 씌웠느냐는 아니었다. 작년 이맘때, 자작나무와 함께 수난의 시기를 마감하며 레비탄을 본 순간 소녀형구의 비밀은 거의 풀린 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둘의 부부관계가 시원찮았으니 나름대로 벌을 받은 것이려니, 하고 이후 신경도 안 썼다.
거울 왕비라…….
스노우 화이트의 계모 이야기였다. 입맛이 썼다. 역시 타인의 눈에 자작나무는 마녀일 뿐인 것이다. 심지어 모친에게조차도. 어쩌면 전형적인 16세기 사람, 데이탄즈도 자작나무가 마녀로서 죽은 것에 괴로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게서 주술과 정쟁을 어떻게든 빼앗으려는 어떤 사람이 생각나 버렸다. 포우 메사라는 레이 아리사의 왕자님이 되고 싶은 것일까. 그는 내게, 죽음의 황무지가 아닌, 크레타의 풍요로운 평원Mesara이 되고 싶은 것일까. 그래서 끈질기게 찾아와 내 방문을 노크하고, 내게 매일매일 선물을 안기고, 머리를 빗겨 주었을까.
그의 눈에는 레이 아리사가 사악한 주술사가 아닌, 마녀 마라타가 다락방에 가둬 버린 가엾은 고아로만 보였던 걸까.
거듭 웃음이 나왔다. 섹스 때 내 허리를 졸라 대는 그의 습관까지 생각나 미치게 웃겼다. 왕자님이라니. 메사라야말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독사과를 내게 먹인 진정한 마녀인 것을.
메사라…….
메사라는 나를 사랑했다. 지금 그는 죽는 그날까지 나와 함께할 태세였다. 그는 정말로, 온몸과 온 영혼을 다 바쳐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메사라는 내가 없으면 못살 사람이었다.
만약, 데이탄즈가 메사라만큼 자작나무를 사랑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허영과 가식에 찬 구경꾼들에게 둘러싸여, 아픔을 조금도 내색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고, 춤추고, 환호성을 질러야 했던 그의 기분은.
메사라만큼 사랑이 깊었다면 지옥에 갇힌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장 나가 버리라고 내가 고함친 순간 생기가 꺼져 버리던 메사라처럼, 그도 주검으로서 50년을 버텨야 했을 것이다. 생생히 넘치던 활력이 부서진 채 내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던 메사라처럼, 빈껍데기로서 50년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그러나, 진실로 그랬다고 하여…….
내가 네놈을 동정할 줄 아느냐……?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웃기지 마라.
정신적으로 어떠했든 네 녀석은 잘 먹고 잘살았다. 자작나무보다 몇 만 배의 사치를 누렸다. 따뜻한 곳에서, 비단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맛있는 음식을 맘껏 먹으며 살았다. 네 말 한마디에 모든 이가 웃고 울었다. 네가 겪은 고통은 자작나무의 복수도, 아무것도 아니다. 네 손아귀에 움켜쥔 어마어마한 권력의 대가였을 뿐이다. 내가, 너 대신 메사라를 네메시스 앞에 세우고 나서야 복수에 바친 10년의 고독한 세월이 덧없는 낭비였음을 깨우쳤듯, 너도 권력의 크기에 걸맞은 대가를 치른 것뿐이다.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둠 속으로 음표처럼 흩어지는 웃음소리를 깨달은 때는 잠시 뒤였다.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강둑을 벗어났다. 웃음이 거듭 새어 나왔다.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웃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끔거렸지만, 아랑곳 않고 웃었다. 웃었다. 웃고 웃고 또 웃었다.
메사라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분명, 체셔 고양이 같다며 놀려댈 테니까.
거기까지가, 이상한 나라 모험기의 마지막 장이었다.
나는 신문을 접어 휴지통에 넣었다. 벌써 다섯 시였다. 가게를 정리한 후 디아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디아나가 즐겁게 뛰어갔다.
무르익은 봄의 초저녁이었다. 아직은 하늘이 파랬다.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 옆을 지나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헌책방부터 집까지 가는 길은 가로수가 죽 늘어선 산책로였다. 바닥에는 잔디와 작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고, 반듯하게 나눠진 구역마다 정원이 딸린 저택들이 줄지어 서 있는 한산한 거리였다. 집집마다 창문에 색색빛깔의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내일 또 어떻게 견디지…….
수요일이면 으레 하는 고민이었다. 한 달 전, 캐슬마인 부인이 “봉사활동을 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내게 말했다. 동네사람들이 돌아가며 돌봐 주는 일흔 살 먹은 하반신 불구 독거노인인데, 개를 산책시키고 할아버지를 목욕시켜 준 다음 저녁식사를 짓는 일이라며, “일주일에 하루만, 네 시간만 할애하면 끝”이라고 했다. 사는 것도 넉넉해졌으니 불우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은 당연하다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산책시켜야 할 개가 송아지만 한 셰퍼드 잡종이며, 목욕시켜야 할 할아버지는 40년간 외국의 온갖 전장을 누빈 전직 용병이자, 격렬한 호모포비아라는 사실까지 미리 알았다면, 절대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욕시켜 줄 때마다 “염병할 호모가 나를 성폭행하는구나!” 소리로 귀가 따가웠다. 개를 산책시켜 줄 때는 몇 번이나 물릴 뻔했다.
문제의 독거노인은 봉사원들을 서른네 명이나 갈아 치운 악명 자자한 할아버지였다. 캐슬마인 부인도 1년이나 견딘 끝에 결국 나를 속여 고행을 떠안겨 버린 거였다. 지금은 나도 동네 꽃집 주인아저씨를 유심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갔다. 목줄을 풀어 주자마자 디아나가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귀와 꼬리가 훌훌 녹아 버터가 되리만치 뛰어다녔다. 집으로 들어오면 5분간은 반드시 저랬다.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디아나만의 심오한 습관이었다.
디아나가 뛰어노는 동안 요리책을 뒤적거리며 저녁 식단을 골랐다. 칵테일새우가 잔뜩 들어간 해물스파게티로 정했다. 요리를 배우면서부터 스파게티를 발명한 이탈리아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조리가 쉬우면서도 맛있고 예쁘기까지 했다. 평일에는 내가, 주말에는 메사라가 요리를 맡았는데 아직 메사라의 요리솜씨를 능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손질한 해물을 팬에 넣고 볶았다.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온실로 가서 식탁에 장식할 흰 장미꽃들도 꺾었다. 이런 건 전부 메사라의 취향이었다. 그는 양초와 화려한 꽃으로 식탁을 가득 장식하길 좋아했다.
―꽃으로 식탁을 장식하고 양초에 불을 붙이는 데는 시간이 별반 걸리지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만족감은 매우 깊잖습니까. 이왕이면 형식을 차리는 편이 좋죠.
역시 희한한 사람이었다. 괴상한 착각을 잘할뿐더러 형식 차리기도 좋아하는 남자였다. 올리브 나무숲에서 나는 기억이 돌아왔다고 털어놓은 뒤, 메사라에게 “동화책 낭독은 대체 왜 시켰냐”고 물어보았다. 메사라는 잠깐 침묵하다가 “연인끼리는 으레 그러면서 논다기에 한번 시도해 봤다”고 대답했다.
그런가…… 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화책 낭독이 연인끼리 하는 일반적인 놀이에 속하는 것이던가? 몹시 미심쩍었지만, 그냥 믿어 주기로 했다.
변태 짓을 하며 늘어놓은 거짓말에 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뭐, 뻔했다. 쌓이고 쌓인 변태욕구가 만만한 17세의 레이 아리사를 상대로 뻥 폭발했겠지. 그러고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마조히스트로 길들이려 시도한 것이다.
아무튼 일주일에 세 번만 섹스를 하고, 나머지는 가벼운 페팅을 하기로 메사라와 합의했다. 메사라의 왕성한 정력에는 마늘과 호두의 집중적 섭취 따위로는 어림도 없었다. 양기를 쭉쭉 빨려 삽시간에 해골이 될 터였다. 앞치마는 계속 둘러 주기로 했다. 유치찬란하긴 했지만, 매일 저녁 침실에서 메사라가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며 내게 처량한 눈빛을 던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좋은 건 있었다. 메사라가 예전과는 딴판으로 내 헌책방 일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함께 가게를 지키며 책을 팔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심지어 헌책방을 새로 옮긴 기념선물이라며, 고풍스런 축음기를 선물하기까지 했다. 보존이 아주 잘된 레코드도 스무 장이나 함께 받았는데, 바늘이 긁히며 돌아가는 소리가 일품이었다. 웬일일까. 어쨌든 반가운 변화였다.
이따금 42번가에서 이곳으로 헌책방을 옮기던 때가 생각났다. 600년의 해묵은 증오가 단 8분 만에 끝났듯, 21년간 둥지를 튼 그곳을 정리하는 시간도 6시간 만에 끝나 버렸다. 메사라는 내가 헌책방의 간판을 버리려고 하자 매우 아쉬워했다. 풍치도 있고, 우리의 추억이 서린 헌책방의 간판인데 왜 버리냐며 펄펄 뛰었다. 기어코 고집을 부려 서재로 갖다 놓고는 “괜찮은 소품”이라며 흡족해했다. 지금 내 헌책방의 명칭은 《디아나의 숲》이었다.
나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거실 벽을 응시했다. 메사라 부모님의 젊은 시절과 우리 사진 액자를 번갈아서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흡사했다.
영겁회귀라……. 나는 중얼거렸다.
글쎄. 니체는 훌륭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번성한 19세기 사람이었다. 그리고 20세기는 양자역학이 대두된 시대였다. 19세기 고전역학과 달리, 양자역학은 모든 일이 정해져 있지는 않으며, 단지 일어날 확률만이 결정되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니체의 영겁회귀 이론에는 오차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저 사진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메사라는 시험관 아기였다. 불임이던 메사라의 어머니는 서른아홉 살에야 임신에 성공하여 아이를 낳았다. 귀하게 얻은 외동아들인 메사라는 사랑을 흠뻑 받고 자랐다. 그만큼 메사라도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아버지를 바람직한 역할모델로 삼고 무의식중에 따라하는 것이 당연했다. 메사라가 레이 아리사의 긴 금발에 집착하는 것은, 그러한 따라하기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메사라는 여전히 저 사진들의 흡사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으면서도 엉뚱한 부분에서는 역시 둔감했다.
그러나 메사라 못지않게 눈썰미 좋은 레이 아리사 또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스물여덟 살의 레이 아리사는 알지 못했다. 그 흡사함을 재빠르게 깨달은 것은 열일곱 살의 레이 아리사였다. 메사라 안에 잠든 왕의 영혼을 알지 못한, 소년 레이 아리사였다. 선입견의 스크린을 거치지 않은 채 메사라 자체를 응시한 소년 레이 아리사는, 메사라의 머리카락 집착증에 내포된 본질을 단박에 꿰뚫어 본 것이다.
역시 그와 나의 만남은 우연의 소산일까.
나는 웃었다.
갑자기 디아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까지 흔들기 시작했다. 메사라의 차가 집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표현이었다. 신기하네…… 나는 디아나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아는 것일까. 아무리 개의 후각이 뛰어나다지만 족히 2, 3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서 차를 몰고 오는 메사라를 어쩌면 저렇게 감쪽같이 알아차릴까.
동물의 저러한 제6감은 인간이 신봉하는 어설픈 이성을 가뿐히 뛰어넘는 듯했다. 사실 인간에게도 제6감은 잠재해 있었다. 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오르키투니카도 제6감에 속하는 능력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진 액자를 쳐다보았다.
우연.
우연이라.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메사라는 모를 것이다. 지금 내 전신을 치닫는 이 감각을. 이 감각이 우리의 만남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마법의 주문처럼 속삭이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런 것 따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르키투니카……. 물론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처럼, 어질어질해지며 뭔가가 다가오는 듯한 이 감각은, 오르키투니카와 너무도 흡사했다. 통각이 예민하게 열렸다. 숨 막히는 바람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 언젠가 집요히 귀를 두들기던 노크와 구두소리, 내 전신을 생생히 감싸던 활력도 함께. 나는 나직이 뇌까렸다. 그가 오고 있다…….
레이 아리사가 사랑하는, 포우 메사라가 오고 있다.
우리의 유리정원으로 오고 있다.
차고로 통하는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디아나가 총알같이 달려갔다. 문을 갉작갉작 긁어대며 나를 연신 쳐다보았다. 나는 일부러 느릿느릿 문으로 걸어갔다. 펄쩍펄쩍 뛰며 초조해하는 디아나의 반응이 재미났다.
문밖에서 차 시동이 꺼지는 기척이 났다. 묵직한 구두 소리가 잇따랐다. 그리고 노크소리. 나는 문을 열었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서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