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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M─ (99/101)

19 .M─

디아나가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침실의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순식간에 실내가 환해졌다.

“…….”

한참 뒤 나는 숨을 내쉬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느릿느릿 침대로 걸어가 시트를 끌어내렸다. 찬란한 아마빛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그리고 레이도 함께.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나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지옥과 천국을 초스피드로 왕복한 기분이었다. 침대 바로 밑에 뭉크코트가 널브러져 있었다. 코트를 들어 옷장에 넣었다. 코트가 촉촉이 젖어 있는 것이, 외출했다가 막 들어온 듯했다.

이 밤중에 어디 갔다가 왔을까.

내일 물어보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뒤 침실로 되돌아갔다. 디아나가 고집스런 표정으로 침대 아래에 앉아 있었다. 강아지 침대에 옮기려다가 마음을 바꿔 디아나를 레이 옆에 올려주었다.

나는 침대에 눕다가 레이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평화로워 보였다. 좀 더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피로가 파도처럼 덮쳤다. 디아나가 레이의 머리맡에 몸을 말며 눈을 감았다. 나도 갓전등을 끄고 레이를 끌어안았다.

곧장 잠으로 빠져들었다. 꿈에서 나는 몰아치는 폭풍 속을 달리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노여움과 절망감에 휩싸여 말을 탄 채 내달렸다. 달려도 또 달려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어둠뿐이었다. 한없이 깊디깊은 그것은 무섭도록 공허했다.

그리고 아침, 디아나가 내 뺨을 핥으며 잠을 깨웠다. 눈을 뜬 내 앞에서 레이가 커튼을 열고 있었다. 투명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카프리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KAPRO에서 나온 것으로, 멧돼지라는 의미입니다.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카프리를 방문한 후 그 아름다움에 반해 카프리보다 훨씬 큰 이웃 섬을 포기하면서까지 나폴리에서 사들였다고 하죠.”

카프리의 아르테미시아 호텔에서 만난 허먼 부부가 설명했다. 미국인에, 그것도 텍사스 출신이라기에 온종일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며 ‘미국은 지구의 수호자’ 따위의 헛소리나 떠벌일 줄 알았는데, 몹시 점잖고 지식도 풍부한 좋은 가이드였다.

카프리에 도착한 지 사흘째였다. 따스하고 푸른 섬이었다. 왕국의 봄은 이곳의 가을 날씨에 속하는 듯했다.

불현듯 바람이 심술궂게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레이가 밀짚모자를 잡으며 “와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나는 싱긋이 웃었다.

마리나그랑데 항구에서 관광보트를 탔다. 지중해가 햇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났다. 멀리서 나폴리와 베수비오산이 어렴풋이 보였다. 레이가 보트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바다를 응시했다.

기묘했다. 며칠 전부터 저런 표정이었다. 표현할 수 없이 부드럽고 편안해 보였다. 나는 레이에게 레몬수를 건네며 “요즘 이상한 거 알아요?” 하고 말했다.

“이상하다뇨?”

“뭐…… 나쁜 뜻은 아닙니다. 당신의 표정이 아주 밝아서요. 계속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고.”

“그래요?”

레이가 웃으면서 등을 활짝 폈다.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가로 구불구불한 아마빛 머리카락이 소용돌이쳤다. 나는 잠깐 넋을 잃었다.

사로잡힌다…….

레이를 응시할 때마다 엄습하는 감각이었다. 조금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사로잡힌다는 상상 따위, 29세까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악당 스네이크로만 살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감각이었다. 42번가를 순찰하지 않았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깨우치지 못했으리라.

이 감각에서 파생된 갖가지 감정들을 돌이켜 보았다. 기쁨과 슬픔, 냉기와 온기, 희망과 절망, 그리고 증오와 사랑. 고난하고 숨 가쁜 여행이었다. 아니, 모험에 가까웠다.

괜찮았다. 나쁜 감각은 아니었다. 자연인 포우 메사라로서는 누릴 가치가 충분했다. 그리고 일생을 걸고 한 사람에게 영혼을 사로잡히는 경험이란, 남자로서 얼마든지 시도할 만한 모험이기도 했다.

레이가 이쪽을 돌아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 아닙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레몬맥주를 마셨다.

언제나 레이를 드리우던 검은 베일 같은 어둠이 가셔 버린 지금, 레이는 형용할 수 없이 빛나고 있었다. 어떤 순수탄소의 결정체도 저만큼 눈부실 수는 없을 것이다. 레이도 나처럼 이런 감각을 느낄까.

그럴 리 없지.

나는 혀를 차며 레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저 무신경한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어질어질하고 가슴 저릿해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정말로 그렇다면 내 이름은 FOUR MESSARA가 아니라 FIVE WASTE였다.

먼 수평선을 응시했다. 역시 몸을 내던질 가치가 있는 모험이었다. 험난한 모험이었다. 때로는 자존심을 내팽개쳐야 했다. 혹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다. 지옥과 천국을 정신없이 오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만족감은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치 깊었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을까. 이 모험에서 나는 힘껏 용기를 내서 저항했으니. 도망가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맨주먹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레이에게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 레이와 함께 저 푸른 바다를 보고 있다.

문득 뚱땡이와 오이가 생각났다. 나는 픽픽 웃었다. 내게 경고전화를 받은 이후 그들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앞으로도 소식이 없을 듯했다. 그들은 지금 내가 누리는 이 기쁨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리라.

먼 바다 끝이 반짝반짝 빛났다. 두렵도록 행복했다. 탈력감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 붉은 가로등 불빛 아래서 정신 나간 레이를 끌어안았던 때 맛보았던, 고단하고 먼 여행에서 간신히 되돌아온 느낌과도 비슷했다.

고단하고 먼 여행이라…….

물론 몸을 내던질 가치는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는 두 번 다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레이와 한곳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조용히, 평화롭게.

불현듯 심연같이 무거운 어둠으로 가로막힌 침실이 떠올랐다. 레이는 그날 밤 산책을 다녀왔다고 나중에 설명했지만, 이상할 만큼 그날 일은 돌이키기도 싫었다. 만약 내 상상대로, 칼이 우리 거처를 파악하여 레이를 납치했다면…….

나는 맥주병을 흔들며 생각에 잠겼다. ‘왜’를 뇌리에 되살렸다. 왜, 신께선 항상 결정적인 부분에 덫을 쳐 놓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나는 그 덫을 깨닫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내달려 버린단 말인가.

이제는 답을 알았다. 확실하게 깨우쳤다. 신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신께서는 누차 경고를 내리셨고 단서들도 던져 주셨다. 그 단서들을 무심히 놓친 내 부주의 탓은 아니었다. 운이 나빠서도 아니었다.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때였다.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단지 부정하고 외면했을 뿐이다.

령을 쏘기 전 한 번만이라도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했다면 그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칼에게 왜 나를 찾느냐고 한마디라도 물어보았다면 집에서 내가 경악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인가.

그건 바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디붉은 욕망의 커튼으로. 불처럼 타오르는 포우 메사라의 야욕이 모든 참극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권력의 정점에 다다른 흥분에 취해, 광적으로 질주한 내 야망이 으뜸가는 원인이었다. 그 추악한 욕망이 진정한 덫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발목 언저리가 지끈거렸다. 흡사 무형의 쥐덫에 끼인 듯이 시큰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만에. 실수는 두 번으로 족했다. 세 번째는 없었다.

이런 의미였을까. ‘이왕 하는 거,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악당이 되는 게 좋을 거예요.’라고 한 말에 내포된 뜻은. 내 욕망에 대한 레이의 경고였을까.

미궁이었다. 기억을 상실한 레이에게 그 말의 속뜻을 묻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턱을 긁었다. 칼이 몸을 회복하면 찾아가서 면담해 보기로 결정했다. 대체 얼마나 훌륭한 예술품이기에 내가 피눈물을 흘리리라 거침없이 장담했는지 한번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 칼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급의 보물을 비장의 카드로 몰래 숨겨 두고 있었던 것이면 나도 펄쩍펄쩍 뛰다 못해 하늘이 노랗게 보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럴 리는 절대 없지.

“메사라, 저기가 푸른 동굴인가 봐요.”

레이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우리가 탄 보트 주변에서 관광객들이 탄 보트가 총총히 한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푸른 동굴Grotta Azzura, 카프리에서 꼭 보아야 할 명소였다. 간조로 물이 빠진 동굴 속 수면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허먼 씨가 경고조로 말했다.

“눕듯이 몸을 숙여야 합니다. 동굴이 굉장히 낮아요. 만조 때는 바다에 잠길 정도랍니다.”

보트가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좁은 동굴에서 감청색과 에메랄드빛이 유리알 유희처럼 펼쳐졌다. 한여름의 벌판처럼 황홀한 광경이었다.

레이…….

나도 모르게 뇌까렸다. 레이의 푸르디푸른 눈동자로 온 전신이 침수하는 듯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약에 취한 기분이었다. 푸른빛에 잠겨, 눈을 가늘게 뜬 채 한동안 숨도 쉬지 못했다.

갑자기 기묘한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은 갈구와도 비슷했다. 만월의 빛에 휩싸여 레이와 함께 춤을 추던 때가 눈앞으로 피어났다. 그때와 똑같은, 형용할 수 없이 어질어질한 감각이 전신을 치달았다. 나는 충동적으로 레이의 왼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사파이어가 바다에 부딪쳐 눈부신 빛을 뿌렸다. 그 파란 결정체에, 나는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나폴리에 도착하여 페리를 타고 카프리로 돌아갔다. 나폴리는 명성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야경은 끝내준다고 들었지만 낮에 보는 나폴리는 그저 그런 어촌에 불과했다. 허먼 부부는 왕국에 한 번도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페리에서 점심을 먹으며 왕국의 겨울을 설명하자 그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럼 제설작업과 에너지 자원 문제가 심각하겠는데요.”

“물론이죠. 그래도 눈을 이용한 에너지 자원과 상품들이 속속들이 실용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에, 몇 년 안에는 상황이 훨씬 좋아지리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제설작업은 이미 10년 전부터 눈을 제거하는 변이 미생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왕국에서 독점으로 따낸 특허상품이라 여기서 거두는 수출수익도 엄청나지요.”

카프리섬의 작은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실망을 금치 못했다. 하얀 모래밭은 온데간데없이, 자갈과 바위뿐이었다. 레이와 함께 맨발로 모래해변을 걷고자 한 내 야심 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맨발 산보는커녕 자갈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걷는 내내 슬리퍼 밑창에 구멍이 날까 조바심만 났다.

“이것 참…… 기껏 구입한 수영복이 쓸모가 없어졌네요. 다음에는 하와이나 괌으로 가죠.”

“바다 구경만으로도 즐거운데요, 뭐.”

“그도 그렇지만 여행의 최고 보람은 하얀 수영팬티 자국 아닙니까. 꼭 보고 싶었거든요. 수영팬티 자국만 빼고 구릿빛으로 거슬린 레이를요.”

“아하하. 메사라에게야 어울리겠지만 내가 구릿빛으로 태우면 더 바보 같아 보일걸요.”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럴까요.” 하고 말했다. 하긴, 저 외모에 갈색 피부까지 합쳐진다면 진정한 금발 백치미인으로 거듭날 터였다.

어느새 오후가 깊어졌다. 차를 타고 움베르토 광장에 도착하니 5시였다. 섬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치가 절묘했다. 카프리 특산의 레모네이드를 사서 한 잔씩 들고 골목골목을 누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붐볐다.

문득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푸른 하늘을 거두며 어슴푸레한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내일이면 여행도 끝인가…….

아쉬웠다. 내일 오후에는 왕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5박 6일의 시간이 이토록 빠를 줄이야. 마음 같아선 열흘 정도는 쉬고 싶었지만, 푸셔의 발광과 칼의 동태를 감안하면 이만큼 휴가를 낸 것도 사실상 욕심을 부린 셈이었다.

“이만 호텔로 돌아가지요. 내일 아침 아우구스투스 정원에 가려면 일찍 자야 하니까요.”

“네…….”

레이가 대답하다가 한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골목 위 절벽에 솟은 풍성한 올리브 나무숲이었다. 레이가 “올리브 나무…….” 하고 중얼거렸다.

“저기 가 봐요, 우리.”

“올리브 나무숲이요? 저긴 갑자기 왜요? 하하하. 혹시, 월계수 관이라도 만들어서 내게 씌워 주려고요?”

“아하하. 그건 아니고. 그냥 구경하고 싶어서요. ……메사라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하고.”

흐흠……?

곧바로 감이 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레이의 낌새가 야릇하다고 느낀 터였다. 마라타의 존재를 털어놓은 것을 시작해, 그간 숨겨 오던 비밀을 지금 이 자리에서 털어놓으려는 듯했다.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좋습니다. 레모네이드나 한잔 더 사서 올라가죠. 흐흠. 저쪽 절벽으로 이어진 계단이 보이는군요.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게, 운치 만점인데요.”

레모네이드를 사서 절벽계단을 타고 올리브 나무숲으로 갔다. 깊고 넓은 숲에서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레이는 한동안 조용히 올리브 나무숲을 걷기만 했다.

“올리브라…….”

레이가 낮게 혼잣말했다. 그러다가 어느 곳에 멈춰 서서 올리브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로마인들은 유피테르와 미네르바에게 올리브 나무를 바쳤대요. 그 이유를 알아요?”

“아뇨. 하하…… 내가 알 리 없죠. 그쪽은 레이 전공이잖습니까.”

“나중에 한번 찾아봐요. 그나저나 아쉽네요. 가을에 왔으면 황록색 올리브 열매를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다음 여행 때도 여기로 와야 합니까. 하긴, 이만한 섬이면 백번 와도 아깝지 않긴 하지요.”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레이는 올리브 나뭇가지만 잠자코 응시했다. 침묵이 길게 지나갔다. 괜찮았다. 나는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다.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꼭 들어야 했다. 레이의 치료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애초 추측한 대로, 어떤 개새끼가 친구들을 동원해 레이를 윤간한 것이면, 반드시 놈을 잡아 응징해 줄 작정이었다. 좆 뿌리를 뽑아 생으로 잘근잘근 씹어 삼킬 작정이었다. 산사나무 가시 꿈만 생각하면 피가 들끓었다.

레이가 올리브 나무 아래에 앉았다. 나도 옆에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올리브 나무숲을 관통했다. 올리브 나무 그림자 아래에 파묻히듯 앉은 레이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레이의 가느다란 입매가 조금씩 떨렸다. 나는…… 하고, 입술이 열렸다.

이야기는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야만과 광기로 가득 찬 검은 궁전에서, 그는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길디긴 시간이 흐른 뒤, 가난뱅이 주술사로 환생한 그 사람은 17세의 외로운 겨울에 어느 묘지로 탐욕스런 권력가를 불러냈다. 그렇게, 냉기와 어둠에 10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바쳐가면서까지, 복수라는 덧없는 신기루를 좇아 내달린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듣는 내내 심장이 저릿했다. 미로의 끝에서 다시 미로를 맞부딪친 기분이었다. 레이의 이야기는 이론상으로는 완벽했다. 티끌 하나 찾아볼 수 없이 미끈했다. 알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아마빛 머리카락은 심술궂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스승에게 학대당하고, 연인에게 총을 맞았다. 미친 바람이 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이야기가 레이의 머릿속에서 완벽한 질서를 구축한 채 그를 지배하고 있다면,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납득하지는 못해도 수용은 해야 했다. 나는 레이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왜일까. 갑자기 엉뚱하게도 안데르센의 동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눈의 여왕…….

케이는 추위 때문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눈의 여왕이 입맞춤으로 마법을 걸어 버려서, 케이는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호수의 얼음 조각을 퍼즐처럼 맞추며 놀고 있었다. 이따금 단어를 만들기도 했는데, 만들지 못하는 단어가 딱 하나 있었다.

눈의 여왕이 케이에게 말했다.

「네가 그 단어를 맞춰낸다면, 그때는 네가 너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마침내 게르다가 케이를 찾아,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케이의 가슴에 닿았다. 눈물은 얼음장을 녹이고, 심장에 박힌 거울 파편도 녹여냈다. 깨어난 소년과 기쁨에 찬 소녀는 즐겁게 춤추다가 힘이 빠지자, 이제껏 만들지 못한 단어를 함께 짜 맞추었다.

“……그랬군요. 그래도 이렇게 내게 털어놔 줘서 고맙군요. 앞으론 함께 고민해야죠.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포옹했다. 눈부시게 흰 여인에게 사로잡혀, 눈과 심장에 거울 파편이 박혀 버린 어떤 사람을. 그리고는 게르다가 했듯이 레이의 뺨에 입맞춤했다.

“사랑합니다.”

어느 혹독한 겨울날, 기습처럼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레이였다. 흰 드레스를 입은 냉정한 여왕같이, 입매에 비웃음을 띠고 나를 잔인하게 얼려 버렸던 레이였다. 그랬던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내 앞에서 꺼지라는 명령도 진심이 아니었노라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의 고백은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처럼 내 몸에 방울방울 떨어져 닿았다. 온기와 숨결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나는 되살아났다. 깨어났다. 숨을 쉬었다. 레이는 게르다가 되어 내 심장과 눈에 박힌 거울 파편을 녹였다.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푸른 동굴이 올리브 나무숲 사이로 펼쳐졌다. 저 때 나는 무엇을 갈구했던가. 이 바다에서 레이와 함께하기를 바랐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원형의 시간이 멈춰 버리길 갈망했다.

헛된 소망이었다. 보트는 동굴을 곧 빠져나가고 만조는 저 순수한 푸른빛을 무자비하게 삼켜 버릴 것이다. 우리는 돌아가야 했다. 희디흰 눈꽃이 갈가리 흩어지는 싸늘한 죽음의 정원으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여왕이 지배하는 잔인한 겨울왕국으로.

그러나 하나만은 확신했다. 이것만은 변색되지 않을 것이라고. 이 감정만큼은 어떠한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도 굴하지 않으리라고. 우리를 둘러싼 이 풍요로운 올리브 나무숲이, 지금 당장 핏빛 황무지로 변할지라도.

나는 레이를 다시금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 번 더 말했다.

“사랑합니다.”

일생에서 단 한 번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깨어난 소년과 기쁨에 찬 소녀는 즐겁게 춤추다가 힘이 빠지자, 이제껏 만들지 못한 단어를 함께 짜 맞추었다…….

케이와 게르다가 함께 짜 맞춘 단어.

그것은 ‘영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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