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L. (98/101)

18 ─L.

어둠 속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조금씩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제기랄.”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저 한심했다. 이런 바보가 있을까. 제 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다니.

레비탄인 줄 알았다. 메사라의 높고 넓은 아파트에서 바르디 공작의 발언을 듣는 내내 뒤통수를 후려 맞는 듯했다. 그저 머리만 멍했다.

설화를 잊고 본다면, 역사상에 드러난 자작나무와 레비탄, 데이탄즈의 관계에서 자작나무는 철저한 타인이었다. 자작나무가 왕비가 되기 2년 전부터 레비탄은 데이탄즈의 애인이었으며, 그와 평생을 함께했다. 자작나무는 열렬한 연인들을 저주한 마녀일 뿐이었다. 동화 속 숱한 왕의 어머니, 공주의 계모들처럼 연인들을 저주하다가 죄가 들통나 잔인한 벌을 받아 죽었다.

텔레비전 속 바르디 공작을 보는 내내 두려움이 온몸을 에워쌌다. 무서웠다. 레비탄이 이 시공에서조차 레이 아리사를 밀쳐 버릴 것만 같았다. 600년 전 그때처럼, 레비탄의 연극에 박장대소하며 박수치는 왕을 구석에서 초라하게 넋 놓고 바라볼까 봐 두려웠다.

메사라가 바르디 공작에게 무심할 수 있을까. 전생의 연을 떠나서도 바르디 공작은 매력적인 남자 아닌가. 하물며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야합한 상태였다. 전생에서 부부였던 그들이 어느덧 이런 식으로 이어진 상황이 실로 절묘했다. 이대로 계속 진전되면, 두 사람은 전생에서처럼 깊은 사이로 발전될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공포감이 전신을 장악했다. 그리고…….

“한심하다, 한심해.”

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터무니없는 의심에 눈이 어두워지다니, 불과 몇 시간 전 반지에 대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자신이 한심할 따름이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기억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자, 레이 아리사.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늦게나마 기억을 되찾아서 다행이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상황을 돌이켜 보았다.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공작은 분명히, “스네이크의 연인”이라고 말했다. 대체 어떻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지금껏 있었던 일을 남김없이 되짚어 보았다. 공통점이 하나 나왔다. 만날 때마다 바르디 공작은 내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바로 옷과 목걸이였다.

옷과 목걸이…….

메사라가 사 준 것들이었다. 내가 파티에서 착용한 옷과 목걸이로 바르디 공작은 나와 메사라의 관계를 알아챈 듯했다. 틀림없었다. 그것이 메사라의 소유품임을 그가 어찌 알아차렸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외에는 딱히 세울 만한 가설이 없었다. 이 가설이 아니면 마녀 숍에서 있었던 공작과 나의 세 번째 만남도 설명되지 않았다. 당시 이리나가 한 말만 돌이켜 봐도 그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갤러리 빌딩에서 바르디 공작에게 나는 온갖 궁상을 떨었다. 말도 못하게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차비가 없네, 어쩌네 했다. 그 탓에 공작은 나를 단순한 가난뱅이로만 판단, 어떻게든 목걸이와 옷의 주인을 알아내고자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나를 뒤쫓았던 것이다.

소니아는 일류 매춘부답게 화려한 외모였다. 공작은 내 성의 없는 답변을 간단하게 믿어 버리고는 소니아를…….

온몸의 체온이 가라앉았다. 폭설이 전신을 덮쳐드는 것 같았다.

그럼 소니아는? 죽었단 말인가? 내 무성의한 한마디 때문에?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 버렸다.

“아, 깜짝이야. ……레이? 이제 정신이 들었어요?”

갑자기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독한 어둠으로 한참 뒤에야 앞을 분간했다. 간이 욕실과 침대 하나만 있는 침침한 철창 감옥이었다. 옆에서 철창을 사이에 두고 아름다운 여인이 보였다.

“아…… 소니아?”

“자기 일어났어요?”

소니아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었다.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소니아의 손을 잡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소니아가 내 손을 토닥거렸다.

“후후, 그렇게 좋아요? 그나저나 큰일이네. 그린! 그린! 일어나 봐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문이 없는 밀폐공간이었다. 마자리니성의 지하 감옥이 분명했다. 가까이서 이상한 악취까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뭐죠?”

“시체 썩는 냄새요. 괴로워요, 나도. 여기서 아이를 낳을까 봐 미칠 것 같아요. 자기! 일어나 보라니까요.”

소니아가 오윈 씨를 흔들었다. 의아했다. 저들의 생존은 반가웠지만 바르디 공작이 이들을 살려 두다니 자못 의외였다.

“여기서 평생 할 오럴섹스는 다 한 것 같아요. 그것 외에는 달리 할 게 있어야죠. 그런데, 자기. 설마 아무 대책도 없이 잡혀오진 않았죠? 자기의 멋쟁이 애인이 실은 스네이크라면서요? 곧 부하들이 와서 우리를 구출해 주겠죠?”

소니아가 울먹거렸다. 낯빛이 지독히도 초췌했다.

“소니아, 일단 상황부터 설명해 줘요.”

“아아…… 그게. 자기하고 나하고 마녀 숍에서 헤어진 날, 웬 해결사가 나를 납치해서 여기로 데려왔어요. 그날 밤에 나를 미끼로 오윈 씨까지 불러들였고요. 이 방에서 해결사가 오윈 씨를 살해하려 했어요. 그런데 오윈 씨가 해결사와 싸움 끝에 그를 살해했죠. 그러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혔어요.”

“바르디 공작이죠?”

“맞아요! 공작이 철창 밖에서, 오윈 씨더러 스네이크냐고 물었어요. 아니라고 대답하자 공작이 비웃었어요. 그건 내일 알 수 있을 테고, 하하핫. 하고는 사라졌어요. 이틀 뒤에 나타나서는 금발 주술사의 주소를 불러. 하고 으르렁거렸어요. 우리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버텼어요. 당신 집 주소를 말하는 순간 공작은 우리를 죽일 것이 뻔하니까요.”

소니아가 잠깐 말을 멈추고 눈물을 닦았다.

“공작은 하루에 한 번씩 음식을 가져왔고, 그때마다 계속 레이의 거처를 물었어요. 며칠간 우리를 굶기고 총으로 협박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데 아까, 공작이 자기를 안고 들어오더니 옆 칸에다가 넣어 버리더군요. 그러고는 ‘너흰 이제 굶어 죽는 거야.’ 하면서 웃었어요…….”

나는 벌떡 일어서서 칸을 빙빙 돌았다.

무서운 작자다…….

내가 바르디 공작을 과소평가했다. 괜히 연극배우가 아니었다. 공작도 스네이크가 자신을 숙청하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 행적을 추적하여 스네이크를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 바르디 공작은 곧 숙청될 처지였다. 다음 일은 뻔했다. 바르디 공작은 나를 미끼로 메사라와 협상을 시도할 터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며칠만 버티면 풀려날 겁니다. 그렇지만 그동안은 계속 굶어야 할 거예요. 괜찮겠어요, 소니아?”

“아아, 괜찮아요. 풀려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지겨웠는데요!”

소니아의 낯이 환하게 빛났다. 나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찬찬히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60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행운의 여신은 메사라 편인 듯했다.

그렇게 왕비자리를 탐내면서도 바르디 공작은 이리나의 동거남을 제거하지 못했다. 메사라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느라 프로 해결사를 고용하지 못한 탓이었으리라. 어설픈 보디가드를 동원해 오윈 씨와 소니아를 납치한 상황만 봐도 뻔했다. 소니아와 오윈 씨는 사창가 바닥에서 구른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메사라에게 행운으로 작용한 셈이다.

내 휴대전화가 마침 부서진 것도 메사라에게 요행으로 작용했다. 안 그랬다면 분명 공작은 메사라에게 전화를 걸어 유인해 살해했을 터였다.

그래도 오싹했다. 갤러리 빌딩에서 바르디 공작과 헤어진 뒤 메사라의 차를 타고 가던 때가 기억났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다. 만약 그때 바르디 공작이 메사라를 목격했더라면…….

왕비의 유산도 이제는 이해했다. 바르디 가문은 대대로 요리로 유명했다. 공작은 왕실 요리사에게 접근하여 ‘죽음의 레시피’를 건넸으리라. 역시 비열한 작자였다. 이내 나는 실소하고 말았다.

자작나무도 임신한 레비탄을 저주하지 않았던가.

입맛이 쓰디썼다. 그년이나 그놈이나 되로 주고 말로 돌려받은 셈인가.

진정한 왕의 정부이자 왕비인 레어티즈라…….

나는 푸훗, 하고 웃어 버렸다. 데이탄즈가 이제 보니 마누라 복이 없는 녀석이었다. 초상화로 본 레어티즈는 곰보자국이 숭숭한 대머리로서, 전형적인 짠돌이 상인 타입의 아저씨였다. 이래서 역사를 ‘남자들의 이야기History’라고 하는가. 미치게 웃겼다.

조금씩 여유가 되돌아왔다. 기억을 잃고 그간 있었던 일을 돌이켜 보았다.

메사라도 퍽 엉뚱하네……?

나는 미간을 모았다. 이제 보니 메사라도 꽤 엉뚱했다. 왜 그랬을까. 스네이크라고 정체를 밝힐 수야 없었겠지만, 섹스할 때 늘어놓은 거짓말에는 황당무계해질 뿐이었다. 기억을 잃으면서 내 지능지수도 나란히 퇴화했으려니, 단정했나. 동화책 낭독은 대체 왜 시켰을까. 그 유치찬란한 앞치마 취미는 또 무엇인가.

나도 웃겼다. 메사라가 과소비하나 싶어 혼자 안달복달했다. 호두에 관해서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열일곱 살의 레이 아리사에게 기가 막혔다. 호두나 깨 먹느니 메사라에게 잠자리를 줄이자고 요구하는 쪽이 훨씬 간편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인 것을 왜 몰랐단 말인가. 띨띨한 17세의 레이 탓에 내 체력만 잔뜩 축나 버렸다. 나는 노여움을 삭이며 눈을 감았다.

어쨌건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메사라는 내가 곧잘 정신을 놓고 멍해 있더라고 이웃이 말했다며 누차 우려했다. 나는 그 증상을 오르키투니카의 여파로만 가볍게 넘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병을 알리는 징후였던 것이다.

털어놓는 편이 좋을까.

계획대로 여행지에서 메사라에게 고백하는 편이 좋을까. 그가 데이탄즈였다는 사실만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메사라는 내 이야기를 믿지도 않을 듯했다. 믿지 않을 것이다. 메사라는 상식을 신봉했다. 타고난 잔인한 성품을 고려하면 의외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한심하다, 한심해. 정말 한심해.”

나는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썼다. 메사라는 언제쯤에나 올까. 내 예상에는 하루 이틀 사이에 바르디 공작이 나락으로 떨어질 듯했다. 어쩌면 벌써 메사라에게 당했을지도 몰랐다.

…….

이런 멍청이.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푸셔를 계산하지 않았다. 내가 푸셔라면 최대한 빨리 칼을 제거할 터였다. 대외적으로는 가이거가 한 짓으로 보이게끔 처리하는 동시에, 배신자들의 우두머리를 처단해 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푸셔가 벌써 행동으로 옮겼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아사 신세였다. 굶어 죽는 것이다.

나는 칸을 빙빙 돌아다녔다. 입술이 말라붙었다. 간이 욕실 세면대에서 찬물을 받아 마셨다.

냉정해라, 레이 아리사.

일단 철창의 자물쇠부터 살펴보았다. 총 셋, 각기 체인으로 연결된 구식 자물쇠였다. 열쇠구멍에 날카로운 것을 맞춰 보면 열릴지도 몰랐다. 소니아가 “뭐해요?” 하고 물었다. 나는 말없이 변기통 뚜껑을 열었다.

“소용없어요, 자기. 우리가 다 해 본 짓이에요. 괜히 기운 낭비하지 마요.”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공작에게 구타당한 머리가 아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이마를 짚을 찰나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 구둣발 소리가 났다. 소니아와 오윈 씨도 움찔했다. 나는 급히 일어섰다. 메사라인가. 바르디 공작이 메사라와 협상에 성공한 것인가.

곧 한기를 느꼈다. 저 구두소리.

메사라가 아니었다. 메사라는 직업상 반드시 워커를 신고 다녔다. 바닥을 밟는 저 날카로운 음색은 고급 정장구두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뿐이었다. 바르디 공작이었다.

숙청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나를 미끼로 메사라를 어떻게든 압박하려는 심산으로 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뒤로 물러섰다.

침착해라, 레이 아리사.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조금씩 형체를 잡아갔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곧 깨달았다. 권총이었다. 나는 불안하게 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구두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철창에서 새어 나오는 백열등으로 그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났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백열등 아래로 하얗게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머리가 멍했다. 삭셀라 백작이었다.

저 사람이 여긴 왜…… 하다가, 퍼뜩 깨달았다.

마자리니 성 앞뜰에서 백작을 만난 첫 순간, 낯익은 인상을 받았다. 마넨 경의 먼 친척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전에도 백작과 나는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소렐 씨의 가면무도회에서.

전율이 온몸을 들끓었다. 그 사람이었다. 나와 합석한 귀족 사내들 중에서, 바르디 공작에게 유난히 반색하며 일어나서, 앉으라고 자리까지 권하던 바로 그 검정머리 사내였다. 삭셀라 백작과 바르디 공작은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총구가 이쪽으로 향했다. 피할 틈도 없었다. 삭셀라 백작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어둠을 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어떤 이름을 불렀다.

메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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