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M─ (97/101)

17 .M─

새벽 두 시에 급보가 날아왔다. 보트키나 양이 왕과 오찬을 마친 뒤 귀가하던 도중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고 했다. 한창 작품 편집에 몰두하던 와중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직속부하들은 괴한들을 남김없이 잡아 왔다고 전했다. 기사를 마무리한 쿠퍼헤드에게 막판 편집을 맡기고 레오파드와 지하 고문소로 내려갔다. 고문실 천장에 괴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총 셋.

“3류 갱들입니다. 자기들 말로는 부잣집 아가씨 같아서 돈이나 털어 보려 했답니다.”

직속부하의 설명에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터무니없었다. 돈이 목적이면 애꿎은 머리털은 왜 또 정성껏 밀어 버렸단 말인가.

생머리가 매혹적이던 보트키나 양은 오늘부로 반들반들한 까까중으로 탈바꿈했다. 시간 들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유의 사고는 유력 왕비후보들이 흔히 당하는 봉변이었다. 그나마 염산 세례는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탁자를 톡톡 치며 갱들을 노려보았다. 운 나쁜 새끼들이었다. 이틀 가까이 잠 한숨 못 자고 일에만 몰두한 참이었다.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고 졸음은 미치도록 몰려오던 터였다. 딱 걸린 횟감이었다.

나는 손가락을 딱 쳤다.

“부장 레오파드만 남고 모두 나가.”

“네. 본부장님.”

고문실을 나서며 갱들을 흘끗거리는 직속부하들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네놈들은 이제 죽었다, 딱 이거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죽었다. 시간이 촉박할 때는 고수위의 고문부터 스타트를 끊는 것이 원칙이었다.

나는 펜치를 집어 들었다. 레오파드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그걸로 하면 발음이 뭉개질 텐데.”

“괜찮아. 손으로 적게 하면 돼.”

갱들의 면상이 누렇게 떴다. 나는 놈들을 죽 훑어보았다. 필사적으로 앙다무는 놈들의 입을 무자비하게 벌려 최고의 건치를 골랐다. 제일 하얗게 반짝거리는 놈부터 시작했다.

레오파드에게 작자의 턱을 단단히 잡으라고 명령한 다음 앞니 두 개를 뽑았다. 비명으로 목젖이 8도 지진을 만난 양 격렬히 흔들렸다. 발을 동동 구르고 난리였다. 침이 우수수 튀어나왔다. 괜찮았다. 가면이 은 소재라 한 번 슥 닦아 주면 그만이었다.

“빨리 불어.”

“무후우을 마히일미까.”

“네놈을 사주한 새끼 말이야. 얼른 불어. 질문 한 대에 이빨 하나야.”

“모흐을미다.”

아랫니 세 개를 뽑았다.

“얼른 나불거려. 나는 인내심이 길지 않아. 누군지 빨리 말하란 말이야.”

“그헌 거 어흠미댜햐아.”

양쪽 어금니를 뽑아준 뒤 손가락마디도 부러뜨렸다. 작자의 목젖이 9도 지진을 일으켰다.

“빨리 떠들어.”

“모흠미댜햐으으흐.”

줏대가 제법이었다. 상관없었다. 고문을 시작한 지 고작 5분이었다. 실컷 회를 쳐 준 마켈라 경 이후 서류업무에만 몰두하느라 간만에 맛보는 피였다. 암만 바빠도 한 시간 정도는 즐겨 줄 작정이었다.

놈의 불알을 펜치로 가격했다. 바지 앞섶이 피 범벅될 때까지 가격했다. 쥐덫에 걸린 고양이가 내지르는 듯한 비명이 고문실 천장을 찢었다. 빨라졌다가 조금 빨라졌다가 매우 빨라졌다가 몹시 힘차게 빨라졌다. 나는 고전파 교향곡 감상하듯 비명을 음미하며 펜치를 휘둘렀다. 아주 짜릿했다. 쾌감이 이글이글 들끓었다. 작자가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졸도했다. 갱들이 몸서리를 쳤다.

“너희가 감히 건드린 아가씨가 누군지나 알아. 귀하신 왕비 후보야. 여기 잡혀 온 이상 불알이 무사하리라는 기대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

다음 놈을 붙잡고 말했다. 활짝 열린 입안에 펜치를 넣고 열과 성의를 다하여 휘둘렀다. 앞니 두 개를 부러뜨린 다음 어금니 한 개를 뽑고 혀를 두 번 비틀어 준 뒤 아랫니 세 개를 박살냈다. 작자가 똥오줌을 질질 싸며 실신했다. 작자의 불알을 펜치로 세 번 꼬집어 주자 당장 발을 동동 구르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씨익 웃었다.

“얼른 불어.”

“후…… 후…… 후…….”

작자가 괴롭게 신음했다. 나는 놈의 불알을 네 번 더 펜치로 꼬집었다.

“재수 없게 웃지 마. 어디서 감히 시건방이야? 대답이나 빨리 해.”

“후후우우우어…….”

이놈도 텄다. 벌써 오줌을 질질 싸는 다음 타자에게로 가서 이빨을 열 개 뽑았다. 비명이 일진광풍처럼 고문실을 휩쓸었다. 그래도 펜치를 멈추지 않고, 불알을 흠씬 가격했다. 5분간 물세례를 갈겼더니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빨리 떠들어.”

“후우어.”

이번에도 바람 빠진 소리만 나왔다. 이거 독종들이네, 하다가 나는 멈칫했다.

후우어?

놈의 턱을 바짝 치켜세운 뒤 “푸셔?” 하고 물었다. 작자가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파드가 놀란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지금 뭐라는 거야. 푸셔라고?”

나는 가만히 갱들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밥벌이한 지 11년이었다. 참인지 거짓인지 귀신같이 분간했다. 갱들의 말은 참말이었다.

나는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의자에 앉았다. 탁자를 두어 번 톡톡 친 뒤 입을 열었다.

“푸셔에게 직접 사주를 받았나. 아니면 중간책이 있나. 전자면 고개를 옆으로, 후자면 아래위로 흔들어.”

갱들은 일제히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역시…… 하며 나는 지그시 웃었다. 이내 직속부하를 부른 뒤 일어섰다.

“알아서 처리해.”

고문실을 나서는 내게 레오파드가 “칼이지?” 하고 속삭였다.

“푸셔가 저렇게 허술할 리 없잖아. 칼이 푸셔를 빙자하여 갱단을 사주했겠지. 지금 바로 중간책을 잡아서 이번 스캔들과 함께 엮어야 되지 않아?”

“푸셔야.”

나는 잘라 말했다. 레오파드가 “뭐?” 하며 주춤 멈춰 섰다. 잠깐 뒤 다시 급한 걸음으로 내게 따라붙으며 “뭐라고?” 하고 되물었다.

“푸셔 맞아. 이중함정을 판 거지. 자신의 신중함을 우리가 잘 아는 것을 계산하고 수작을 지었어. 푸셔는 손해 볼 게 없지. 왕비 후보의 외모에 흠집을 내는 데 성공하면 그건 그것대로 이득, 실패하면 칼에게 우리가 혐의를 돌려 스캔들과 엮어 나락으로 떨어뜨릴 테니 이 또한 이득. 대단한 늙은이야.”

업무실로 올라가서 빌어먹을 가면을 던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레오파드가 드램비에 얼음을 넣으며 말했다.

“그럼 중간책을 알아내서 푸셔를 엮어야지. 그 로터스께서 왕비 후보를 습격하다니 그럭저럭 스캔들감 아닌가.”

“천만에. 이 정도야 왕비옹립 전쟁에선 흔해 빠진 일인걸. 기껏 까까중으로 만드는 데서 그쳤을 뿐이야. 그리고 푸셔가 중간책을 살려 두었을 리 없어. 뒤져 봤자 우리만 시간낭비야. 이거 재미난걸. 과연 마넨을 뛰어넘는 후기지수야.”

나는 채찍으로 탁자를 짝 후려갈겼다. 엿 같았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갑자기 내선전화가 울렸다. 단말기에 《칼 바르디》가 떴다. 레오파드가 “뭐냐.” 하며 실소했다. 나는 의자에 등을 편안하게 기댔다. 이 오밤중에, 공작 나리께서 직통으로 전화를 걸어오셨다라…….

발등이 홀랑 타 버리셨나 보군.

벨이 연거푸 울렸다. 나는 픽픽 웃으며 드램비를 마셨다. 칼의 귀에 드디어 소식이 날아간 것이다. 놈이 몸 달아 오줌을 질질 싸대는 꼴이 눈에 환했다. 아주 짜릿했다.

내가 지시한 송고 시간이 2시 반이었다. 지금쯤 한창 신문 인쇄작업 중일 터였다. 이에 발맞춰 타 언론사에도 칼의 아동성추행 건을 좍 뿌려 놓았다. 지금쯤 각 언론사 기자들이 마자리니성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혹여 놈의 도주를 방지하고자 마자리니성 근처에 깔아 놓은 부하들만 일개 소대였다. 본격적인 사냥 시작이었다.

“본부장님, 이만 일어나지. 4시까지는 동영상을 넘겨야 해.”

레오파드가 말했다. 나는 “음.” 하며 드램비를 단번에 비우고 일어섰다. 업무실을 나서는 우리 뒤에서 전화가 또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문을 꽝 닫아 버렸다.

그리고 아침 6시, 마자리니성에서 체포당하는 칼의 모습이 공중파 아침뉴스를 탔다. 다른 유명인사들과 달리 미소 띤 얼굴로 기자들의 요구에 포즈까지 취하는 여유를 보였다. “제 결백은 곧 밝혀질 겁니다.” 하며 반짝거리는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7시에는 이스트에덴 조간이 전국 방방곡곡에 뿌려졌다. 목마 위에서 금발 미소녀를 끌어안고 앉아 함박웃음을 짓는 칼이 1면 탑을 장식하고 있었다. 헤드라인은 ‘성적소수자의 비애.’ 이스트에덴 측에 내가 특별히 요청한 문구였다.

8시 정식뉴스에서는 금발 미소년의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를 한, 칼의 성추행 영상이 일제히 전파를 탔다. 밤새워 흘린 구슬땀이 부끄럽지 않은 절묘한 편집이었다. 더불어서 재포니카는 칼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발표하는 입장문도 표명시켰다.

푸셔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칼 스캔들이 터지자마자 코에서 붕대를 빼 버리고 퇴원해 버렸다. 그러고는 한 시간 만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명예를 사랑하는 문신귀족에서 이러한 부패귀족이 나온 것은 대단히 유감」이라며, 「작위 박탈을 왕에게 건의할 예정」이라는 것이 골자였다.

검사들은 칼의 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내게 귀띔했다. 푸셔가 법조계의 문신원로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전 12시, 칼의 노트북에서 장장 150기가에 달하는 베이비걸3) 자료가 나왔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성인 포르노 자료는 한 편도 없더라고 했다. 칼의 방에서는 삽입이 가능한 어린소녀 섹스인형과 아동용 속옷들까지 발견되었다.

쿠퍼헤드는 티파티에 참석했던 귀족 아이들의 유모들에게서 연락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보답을 한다면 우리 측 증인이 되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2차 자료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오전 내내 업무처리로 정신없이 보냈다. 아침은 거르고 점심은 커피와 샌드위치로 업무실에서 때웠다.

“어, 장난 아닌데. 5분이라도 쉬어야지 참. 이거 또 기자회견장에 알토넨을 호위해서 따라갈 생각을 하니 골이 아파.”

레오파드가 커피를 내밀며 혀를 내둘렀다. 나는 커피를 받아들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칼은 보냈다. 확실하게 끝장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나는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에서 푸셔가 침통한 표정으로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성형수술 망쳤다며 징징거리더니만 염병, 2센티미터는 더 올라간 콧대가 화면을 찢고 튀어나올 기세였다. 주름살도 좍좍 펴져 있었다. 성명서는 또 어찌나 명문이신지 내 심금을 다 울릴 정도였다.

저걸 퇴원한 지 물경 한 시간 만에 다 쓰셨다?

좆같은 늙은이. 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구경하셨군.

나는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어쩔 수 없었다. 푸셔가 법조계 뒤치다꺼리를 맡아 주는 것으로나 위안삼기로 했다. 아무튼 《속, 구레나룻》은 이로써 깨끗이 떨쳐냈다.

이제 신혼여행을 즐기는 일만 남은 셈인가.

기분전환 겸 휴대전화를 들었다. 잠깐만 레이와 통화하고 힘내볼 요량이었다. 부재중 메시지만 돌아왔다.

“으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아했다. 이 시간까지 왜 레이가 전화기를 꺼 놓았을까. 늦잠이라도 자고 있나. 하지만 일요일이라면 모를까, 오늘은 월요일인데.

왠지 께름칙했다. 캐슬마인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레이를 살펴봐 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할 찰나였다. 쿠퍼헤드가 업무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어이, 본부장님. 2차 자료 완료했어. 그런데 칼이 악에 받쳤나 봐. 담당관 질문에 답변은커녕 당장 스네이크를 데려오라고 호통쳤대.”

“음.”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검사가 보낸 영상이야. 한번 보지.”

쿠퍼헤드가 동영상을 플레이했다. 신문을 받는 칼의 영상이었다. 아침뉴스에 나온 여유와는 딴판으로 낯짝이 살기등등했다. 제법 볼만했다.

담당관이 혐의를 인정하느냐고 물었다. 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네이크를 데려와.」

「엉뚱한 이야기 늘어놓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니까. 성적인 의도로 아이들을 건드린 걸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만 대답하라고, 이 씹새끼야.」

「짜고 치는 연극인 거 다 알아. 너희 대장을 불러오라니까. 스네이크를 데려와. 내 제안을 거부하면 놈은 후회할 거야.」

「무슨 개소리야, 이 개새끼야. 자꾸 이러면 네놈에게 더 불리하게 돌아갈 거야. 이만 너도 비싼 변호사에게 모든 근심걱정 푹 떠맡기는 편이 속 편해. 우리 적당히 타협하자고, 이 좆같은 새끼야.」

「스네이크를 불러와. 단독만남을 주선해 줘. 할 말이 있어.」

칼의 눈빛이 퍽 이글거렸다. 부르르 떠는 주먹까지 제법 박진감 넘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잖아도 2차 자료를 넘길 겸해서 오후에 경찰서로 갈 예정이었다. 거기서 겸사겸사 구치소로 이송되는 칼을 구경하며 가볍게 커피 한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후회할 거야. 나를 만나지 않는다면 후회할 거야.」

“저놈이 뭘 믿고 저러나.”

레오파드가 실소를 터뜨렸다. 나도 픽픽 웃었다. 놈이 이쪽으로 건넬 것이라고 해 봐야 명화 몇 점이 전부일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집 거실에 그림을 걸 공간은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본부장님. 이만 나가지. 기자회견장에 늦겠어.”

쿠퍼헤드가 말했다. 나는 “음.” 하고는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벌떡 일어났다. 슬슬 피곤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레이와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차에서도 쉴 짬이 안 났다. 직속부하들에게서 몰려오는 보고전화를 받느라 귀가 멀고 목이 쉴 판이었다. 오후 3시까지 기자회견장에서 알토넨을 호위했다. 갖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기자회견 도중 직속부하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긴급입니다. 푸셔가 철새들에게 단검을 보내고 있답니다.

단번에 온몸의 체온이 내려갔다. ‘단검’. 배신자에게 내리는 문신귀족 특유의 경고 표시였다.

푸셔는 우리 손을 빌려 칼을 치워 버리는 동시에 자신에게 불충한 문신귀족들까지 솎아 낸 것이다. 지금은 부지런히 정리작업 중이었다. 한동안 춘추전국시대를 달려온 정국이 칼 숙청을 계기로 완전한 투 톱 체제를 굳힌 셈이었다. 이 기회만 노리고 병원에서 주름살이나 펴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칼은 푸셔의 철저한 장난감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하하하. 이런…….

깨끗이 한 방 먹었구나.

역시 재미있는 바닥이었다. 한시도 긴장의 고삐를 늦출 수 없었다. 이래서 내가 이 진흙탕을 사랑하는 것이다. 직감했다. 령에 버금가는 강적의 등장이었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다려라, 이 늙은이.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내가 될 테니까…….

기자회견이 끝난 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를 대동하고 경찰청으로 향했다. 검사들을 만나 2차 자료를 넘기고, 두툼한 봉투도 꽂아 주었다.

“증인이 되어 주겠노라고 말한 유모들의 명단 리스틉니다. 티파티에 갔다 온 아이들에게서 수상쩍은 말을 들어 왔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그간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어떻습니까. 듣기로는 그 변태가 수사에 비협조적이라고 하던데요, 하하. 변태가 간절히 찾는 변호사 이름이 꽤 특이하더군요. 뭐더라…… 스네이크?”

“그러더군요.”

담당검사가 키들키들 웃었다.

“지금껏 내리 변호사만 찾더군요. 뭐, 고관대작 나리들이야 여기 한번 납시면 하나같이 앵무새로 탈바꿈하죠. 나는 모른다, 모함이다, 변호사 불러라. 본청에서도 화끈하다고 소문난 검사를 붙였는데, 공작 나리가 어찌나 버티시는지 그 담당관이 그로기 상태지 뭡니까.”

“흐흠. 얼굴이나 좀 보고 싶군요.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얼굴을 맞댄 사이인데 안타깝기도 하고.”

“어렵지 않죠. 따라오십시오.”

검사를 따라 조사실로 갔다. 방음장치가 되어 있는 방 하나가 매직미러(한쪽에선 볼 수 없는 특수유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매직미러를 사이로 한쪽에서 조사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반대편에서는 경찰 관계자들이 조사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인기스타의 조사 현장답게 구경하러 모인 양반들이 총경을 위시해 다들 화려했다. 총경이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한 달 만에 뵙네요, 본부장님. 그간 너무 적조하지 않았습니까? 가이거 본부가 여기서 25분 거린데 섭섭합니다.”

“귀족의 하인들이야 언제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요. 하하하.”

나는 의자에 앉아 손을 깍지 꼈다. 즐겁게 그림을 감상했다.

제법 볼만했다. 작품의 스릴감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희끄무레한 백열등 아래에서 근육질 담당관이 탁자를 쾅 치며 미남 공작을 몰아세웠다. 공작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배우들이 교환하는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런 것을 ‘화학 작용’이라고 해도 좋을까. 배우들의 열연이 감독의 기대를 능가했다.

“이봐, 지금이 몇 신지나 알아. 오후 4시야. 이만 우리 개운하게 끝내자니까. 여기 산더미 같은 증거 안 보여? 독일 성추행 건부터 동영상 증거물과 섹스인형, 유모들의 증언까지, 네가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어, 이 개새끼야.”

“스네이크를 데려와.”

“아까부터 가이거 본부장님은 왜 자꾸 찾는 거야? 헛소리하지 말고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니까, 이 좆같은 새끼야.”

“스네이크에게 전해. 나를 만나지 않으면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하, 참.”

담당관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이를 갈았다. 나는 혀를 찼다. 저렇게 칠칠맞게 구니까 푸셔에게 이용이나 당하는 것이다. 얼른 미치광이 흉내를 내서 조금이라도 형을 덜 궁리나 하는 게 칼의 유일한 살길이었다.

“나를 만나지 않으면 스네이크의 눈에서 피눈물 날 줄 알아.”

칼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총경이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뭣이라. 누구 눈에서 뭐가 나?

이쯤 되면 완전히 폭소감이었다. 미치게 웃겼다. 총경이 내선 마이크를 들어 담당관에게 말했다.

“지금 본부장님이 건너편에 계신다.”

이어폰으로 총경의 말을 전해들은 담당관이 슬쩍 눈초리를 세웠다. 잠깐 뒤 담배를 한 대 뽑아 불을 붙여 물었다. 한 개비 더 꺼내 칼에게도 권했다.

“좋아. 좀 쉬지. 나도 지쳤어, 이 좆같은 새끼야. 독한 새끼……. 분명히 말하는데, 너는 이미 끝났어. 모두가 네놈에게서 등을 돌렸다고, 이 멍청아.”

“…….”

“가이거가 어떤 집단인지 잘 알잖아. 네놈 집까지도 다 뚫어서 촬영해 간 양반들이라고. 변호사와 네 대화도 족족 도청해서 법정에 증거물로 내놓을걸. 법? 법에 기댈 생각은 않는 게 좋아. 경찰은 가이거의 마누라거든. 그것도 26년이나 금슬 좋게 산 부부지.”

“…….”

“이봐, 미남씹할공작님. 이건 네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잘생겨서도 하는 소리가 아니야. 단지 궁금해서 묻는 것뿐이야. 대체 뭐 때문에 본부장님을 찾는 거야. 힌트라도 주지?”

“스네이크를 데려와. 놈은 내 제안을 절대 거절하지 못해. 내 말을 안 들으면 평생 후회한다고 놈에게 당장 전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소아성애자 주제에 감히 시칠리아 마피아 대부 행세를 하다니, 역시 주제파악을 못하는 새끼였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칼은 내게 감지덕지해야 마땅했다. 울프삭 경이었다면 이리나까지 살해해 버리라고 옛날에 명령했다.

나는 총경에게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구치소에 얼른 보내십시오. 담당관님 고생이 심하십니다.”

“그래야죠. 실은 본부장님께 조사현장을 보여 드리려고 일부러 시간을 끌었을 뿐입니다.”

총경이 마이크로 “이만하고 나와.” 하고 담당관에게 지시했다. 담당관이 “어, 독한 새끼.” 하며 조사실을 나왔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건너편을 응시했다. 백열등 아래 오도카니 앉은 칼의 면상이 창백했다. 깊은 심상에 빠진 얼굴 같기도 하고 한 대 얻어맞은 얼굴 같기도 했다.

“후회할 거야. 오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칼이 연거푸 중얼거렸다. 레오파드가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대고 빙빙 돌리더니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나도 레오파드의 의견에 동의했다. 경관들이 조사실로 들어가 칼을 끌어냈다.

총경이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시죠. 뭐, 본부장님이니까 터놓고 말하지만, 이런 구경이야말로 귀족 밑에서 일하는 천민들의 보람 아닙니까.”

“음, 그렇지요.”

서 뒷마당에 구치소 이송버스가 서 있었다. 2층 복도에서 경찰 관계자들과 죽 늘어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경이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밖에서도 인기스타이던 만큼 형무소에서도 인기폭발일 겁니다. 저만한 면상이면 근육질 어깨에게 보호받으며 평탄한 수형생활을 누릴 수 있죠. 수형생활 동안 아동 탐닉 취미도 씻은 듯이 교화되리라 확신합니다.”

“그래야죠.”

나는 싱긋 웃었다. 포승에 꽁꽁 묶인 칼이 범죄자들과 함께 버스를 탔다. 문이 닫혔다. 버스가 천천히 유턴하더니 속도를 내며 뒷마당을 벗어났다. 버스가 훌쩍 떠났다.

그 빈자리에 매캐한 매연만 남았다. 새까만 연기 위로 흰 눈이 솜털처럼 떨어졌다. 하늘에서 달이 창백한 맨 얼굴을 드러내며 발돋움했다. 냉혹하고 무자비한 눈의 여왕이 어둠을 이끌고 도착한 초저녁이었다. 한낮의 태양이 떨어뜨린 일광이 여왕의 차가운 입김에 얼어붙고 있었다.

잿빛 어둠이 희미하게 깔렸다. 초라한 퇴장이었다. 칼은 철새들을 주동해 푸셔의 골치를 썩인 주범이자, 왕의 서자의 외숙부였다. 푸셔는 절대 칼을 곱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끝났다.

어딘지 기분이 묘했다. 시원한 한편으로는 비로소 뭔가를 제대로 끝낸 느낌이 들었다. 당연한가. 더는 연회장에서 놈의 리사이틀을 관람할 일이 없으니.

“이만 가지.”

나는 말했다.

본부로 돌아가서도 쉼 없이 일했다. 상황이 일사천리였다. 오바스카 후작은 파혼을 발표했다. 이리나는 가이거를 도촬 혐의로 맞고소하겠다고 밝혔다. 실컷 해 보라고 했다. 도촬 덕에 아이들 여러 명이 구제받았다. 이쪽이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대강 정리한 시각이 밤 11시였다. 여론이 슬슬 판가름 나는 시간이었다. 부장 회의실에서 여론조사 자료를 훑어보았다. 인터넷에서 칼은 이미 화형식을 당하고 있었다. 그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기업들은 벌써 소송준비에 들어갔다고 했다.

쿠퍼헤드가 편안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남은 것은 판사나리의 망치소리를 들을 일뿐인가.”

“음.”

내가 웃을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며 재규어가 들어왔다.

“긴급이야. 구치소에서 칼이 쓰러져서 병원으로 호송 중이라는군. 전신마비를 일으켰다고 해. 최소 열흘간은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될 전망이라고 의사가 말했대. 독살 시도로 추정된다고.”

부장 회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바로 감이 왔다. 푸셔가 칼에게 손을 쓴 것이다.

레오파드가 가면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칼 녀석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혹여 있을 독살 시도에 바짝 긴장하고 일주일은 단식했어야지, 멍청한 새끼! 이거 우리한테 의혹이 쏠리겠는데.”

“……그렇지.”

나는 보드카를 잔에 따라 부었다. 칼이 그렇게 허술한 녀석일 리 없었다. 푸셔가 사주한 수감자들이 강제로 칼에게 독을 먹인 것이다.

내 실수였다. 푸셔가 이렇게까지 빨리 손을 쓰리라고는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 대담할 때는 제대로 대담하신 양반이었다. 심혈을 기울인 준비 끝에 유명 피아니스트를 초빙하여 콘서트를 열었더니, 정작 티켓 수익은 엉뚱한 놈이 가로채 간 꼴이었다. 령이 왜 푸셔를 유난스레 좋아했는지 이유를 알았다. 둘의 음모 취향이 매우 흡사했다.

빌어먹을 영감…….

나는 내선전화 수화기를 들어 직속부하를 호출했다.

“칼의 담당의를 최대한 빨리 포섭해. 우리는 이번 사건과 관련 없다는 성명서도 내일 아침까지 준비하고.”

부장들은 대노한 기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지금 이쪽에서 취할 만한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내일은 오후 2시까지 출근하라고 지시한 뒤 퇴근했다.

운전하는 도중 두 번이나 졸았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흩날리던 눈송이가 조금씩 빗줄기로 변해 차창을 두들겼다. 모닥불 타듯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집의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주차를 한 뒤 집으로 들어갔다. 디아나가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달려왔다. 디아나를 들어 입을 맞춘 뒤 내려놓았다. 갈증이 났다. 식당으로 가서 물을 마셨다.

이상한 직감이 든 때는 물 잔을 내려놓은 직후였다. 식탁 위에 저녁식사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늦어도 식탁에 저녁식사는 반드시 차려놓던 레이였다. 렌지에 스튜 냄비를 올려놓거나, 데워먹을 수 있는 음식을 놓아두고는 했는데 오늘은 식탁이 텅 비어 있었다.

순간 아주 기분 나쁜 감각이 목덜미를 덮쳤다.

―후회할 거야.

―내 제안을 거부하면 놈은 후회할 거야.

칼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오싹한 한기가 전신을 내달렸다. 설마…….

뒤이어 스치는 기억. 오늘 낮에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부재중 메시지만 돌아왔었다.

무서운 상상이 치달았다. 곧바로 부정했다. 그럴 리 없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칼이 어찌 우리의 거처를 안단 말인가. 그 자식이 어떻게 레이의 존재를 알아내, 납치한단 말인가. 그러나 직감은 한 과녁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급한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나는 얼어붙은 양 동작을 정지했다. 단지 적막했다. 감옥에서 흘러나온 듯한 어둠만 깔려있었다. 그것은 빙석처럼 차갑고 두터우며 무거웠다.

그토록 견고하고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채, 나는 뻣뻣이 서 있었다. 앞을 헤치고 나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텅 비어 있을 것 같았다. 죽음같이 절대적인 어둠만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저 어둠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왜일까. 갑자기 그날, 묘지에서 레이를 끌어안으며 무릎을 서서히 꿇던 악몽이 눈앞을 스치는 이유는. 심장이 욱죄어 왔다. 영혼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로, 레이가 칼에게 납치되었다면…….

머리가 멍했다. 오랜만의 의문이 뇌리에 떠올랐다. ‘왜?’였다. 왜, 어째서 상황이 또 이런 식으로 내달렸단 말인가. 칼이 이상하리만치 절박하게 나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생각 없이 픽픽 웃기만 했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레이의 행방을 아는 자는 칼뿐이었다. 그러나 칼은 독으로 최소 열흘간은 의식불명이었다.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 나는 싸늘하고 딱딱한 묘석 같은 시간에 갇혀, 송장처럼 얼어붙어 있어야 했다. 신의 변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무력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폭우소리가 난폭하게 흩어졌다. 벼락이 터졌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하얀 빛도 저 광막한 어둠을 거두지는 못했다. 또 한 번 뇌우가 치며, 홀연 환해졌다. 그리고 곧, 죽음처럼 모든 것이 어둠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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