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L.
네겔라인 역 앞 꽃집에서 장미꽃 한 다발을 샀다. 눈발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낮에 올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령은 달을 사랑했다. 큰 힘이 필요한 주술은 반드시 만월의 밤을 택하여 펼치는 것이 령의 전통이었다.
휘몰아치는 눈에도 달빛이 선명한 밤이었다. 바야흐로 축제가 시작되는 초저녁이었다. 시민묘지를 둘러싼 자작나무숲 너머로 북과 피리 소리가 흥겹게 떠돌아다녔다.
재미있네.
나는 웃었다. 기억 속의 마라타는 불과 두 달여 전에 망자의 강을 건넜건만, 실제로는 11년 전의 일이라니.
마라타의 묘지가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냈다. 묘석 위에 가득 낀 이끼가 시간의 흐름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아, 역시…… 하고 나는 뇌까렸다.
“내가 왔어요.”
마라타의 묘지 앞에 서서 말했다. 묘석에 잔뜩 쌓인 눈 때문에 마라타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꽃다발을 내려놓고 눈을 치웠다. 가죽장갑을 꼈는데도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눈을 모두 걷어 낸 뒤 묘석에 꽃다발을 놓았다.
“당신이 살아온 햇수대로 총 서른여덟 송이예요. 왜 그렇게 일찍 갔어요? 11년 전이라니 실감이 안 나네요. 내 기억 속에는 불과 두 달 전에 당신의 장례식을 치렀는데.”
나는 쓰게 웃었다. 마라타의 장례식뿐 아니라 마넨 경과 계약을 맺은 것까지, 모두가 내게는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사랑’을 맺은 곳도 여기였다. 바로 마라타의 무덤 앞에서 마넨 경과 계약을 맺었다. 자작나무 가지를 어디서 꺾었는지도 뚜렷이 기억났다.
마넨 경에게 왜 계약을 청했을까.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일순간의 충동 탓이 컸다. 마라타의 장례식이 끝난 뒤 사흘간 나는 룸에 처박혀 울기만 했다.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았다. 1년 전에 사 놓고 읽지 않았던 소설책이었다. 「그 이야기는 옳지 않아」.
그 책이 화근이었다.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한 대개의 소설이 데이탄즈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그 책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마흔 페이지에 걸친 집요한 고문 묘사부터, 초상화를 보며 데이탄즈가 배꼽을 잡고 웃는 장면까지, 마라타의 죽음조차 잊어버린 채 나는 전율했다.
그리고는 책을 소리 내어 덮었다.
홀린 듯이 주술사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밖에 야만과 광기로 물든 16세기가 펼쳐질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서. 그러나 밖에는 얼음처럼 냉정히 서 있는 22세기뿐이었다. 울창한 자작나무숲도, 왕궁의 뾰족한 회색빛 지붕도 온데간데없었다. 피보다도 더 붉은 네온사인 빛을 울컥울컥 흘리는 사창가만 차가운 보도 위에 펼쳐져 있었다.
잿빛 길목에서는 시위가 격렬히 벌어지고 있었다. 눈만 드러낸 마스크를 쓴 건장한 가이거 대원들이 부랑자들을 추격하고 있었다. 길목에는 쫓고 쫓기는 남자들과 엎어진 차량들, 펄렁펄렁 굴러가는 선전 팸플릿과 찢어진 신문지 조각, 깨진 화염병들, 그리고 자욱한 연기뿐이었다. 그 죽음처럼 황폐한 길목을, 나는 생각에 잠겨 하염없이 걸어갔다…… 그리고…….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뒤엉키는 사내들. 짧게 친 금발의 남자가 부랑자들을 무자비하게 짓뭉개고 있었다.
「하하하!」
웃는 얼굴이 지독한 희열감에 젖어 있었다. 부랑자들을 실컷 밟아 놓고 다시금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어깨를 확 치고 지나갔다. 회색 눈동자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메사라였다.
메사라…….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짧고 얼굴도 앳되지만, 메사라가 분명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사라?
그럴 리 없었다. 핏방울을 점점이 얼굴에 묻힌 채 부랑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기는 메사라? 거리를 질주하며 즐겁게 웃는 메사라? 터무니없었다. 시위현장에서 부랑자들에게 쫓겨 도망만 다녔다고 메사라는 털어놓지 않았던가.
비슷한 사람이겠지. 하긴, 세상에는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확률적으로 세 명은 존재한다는 말도 있으니까.
그런데 정말 닮은 사람이었다. 전신에서 뚝뚝 떨어지는 잔혹한 분위기만 빼면, 그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똑같았다.
장미꽃 위로 하얀 눈이 점점이 얼룩졌다. 나는 다시금 묘석 위를 손으로 쓸었다. 마라타와의 나날이 눈앞을 줄지어 스쳤다. 몸이 약했던 마라타는 후계자 양성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매일 엄청난 과제를 주었고 한 달에 평균 일주일은 단식하며 기도하게 했다.
정말로 마녀 같았지.
킥킥 웃으며 묘석을 쓰다듬다가 멈칫했다. 묘석 한가운데에 미세하게 패인 자국이 있었다. 이건 뭘까. 흡사 총탄자국같이 패인 흠집을 손끝으로 눌러보았다. 나도 모르게 흠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상하리만치 눈길을 잡아끌었다.
설마 진짜 총탄자국일 리는 없을 텐데…….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엄습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하나, 둘…… 하나, 둘……. 누군가의 속삭임이 귓가를 울렸다. 얼마 전 최면치료를 받을 때 담당의가 속삭이던 말이었다. 갑자기 이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숨을 골랐다. 침착해. 침착해, 레이 아리사.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담당의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부재중 메시지만 돌아왔다. 미칠 것 같았다. 어지럼증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았다. 손에서 휴대전화가 툭 떨어졌다. 금속음과 함께 휴대전화 액정이 나가 버렸다. 공포감이 온몸을 치달았다.
쓰러지다시피 묘석에 엎드렸다. 눈앞으로 붉은 장막이 성큼 다가왔다. 몇 개의 형상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것이 점차 뚜렷한 형체를 갖추었다. 펄럭펄럭 떨어지는 빨간 꽃. 내게로 향하는 총구.
이건 도대체…….
주변으로 워커소리가 저벅저벅 몰려왔다. 홀연 누군가가 내 허리를 확 끌어안았다. 죽음의 신이었다. 내 가슴에 총구를 겨누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경악 속에서도 나는 깨달았다. 선명하게 보였다.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사신의 눈매가, 웃고 있었다. 이쪽을 응시하는 회색 동공에 부드러운 미소가 서려 있었다. 몹시 즐겁게 웃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리도 기쁘게 웃는단 말인가. 그 웃고 있는 회색 눈동자에 어느 누군가가 겹쳤다. 검은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었다. 그도 웃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입매가, 웃고 있었다.
아…….
어느 틈엔가 못 자국이 듬성듬성 난 자작나무의 손이 돌 바닥을 뒹굴었다. 붉디붉은 선혈이 거미줄같이 퍼져나갔다.
놀랍군…….
미친 자작나무가 뇌까렸다.
아직도 흘릴 피가 남아 있었다니. 왕은 대체 어느 만큼이나 내 피를 쥐어짜려고 하는 걸까.
자작나무는 왕의 눈빛과 몸짓과 언어를 떠올렸다. 횃불이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수없이 떠올린 모습이었다. 데이탄즈……. 당신은 나를 《빨간 꽃 아가씨》라고 불렀지. 내게 영혼마저 사로잡힌 눈빛으로 그렇게 불렀어. 하지만 나는 빨간 꽃 아가씨가 아닌 자작나무였어.
당신의 눈빛과 몸짓과 언어가 진심이었기를 바란다. 그래야, 초상화에 덧칠된 빙석보다 차디찬 진실에 당신이 조금이라도 상처받을 테니까.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어. 단지 맑은 햇빛이 비치는 왕궁의 정원을 당신과 함께 거닐고 싶었을 뿐이야.
선혈이 실처럼 흐트러지며 바닥 저편으로 뻗어 나갔다. 그 끝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이상한 소리도 들렸다.
「히히히.」
자작나무는 의아함을 느꼈다. 누군가가 낄낄거리고 있었다. 몹시 즐겁게.
「히히히히.」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자작나무는 그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애썼다. 레비탄이었다.
그리고 자작나무의 숨이 끊겼다.
레이 아리사의 비명이 눈발에 섞였다. 미친 바람과 잔인한 눈꽃이 몰아쳤다. 나는 주먹으로 묘석을 내리쳤다. 장갑이 피로 물들었다.
레비탄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잔악한 고문을, 코미디 쇼 관람하듯 낄낄거리며 쳐다보았다.
“그만 둬! 그만두란 말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 그래. 상관없는 일이야. 어차피 짐작하지 않았던가. 단지 부정했을 뿐이다. 설마 놈이 그렇게까지는 안 했으리라고, 애써 나를 속였을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냉정을 차려라, 레이 아리사.
600년 전의 일이었다. 암만 분노해 봤자 그들이 벌 받을 리는 없었다.
“상관없는 일이야.”
입술을 깨물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액정이 완전히 깨진 상태였다.
시민묘지를 떠나 거리로 나갔다. 커피숍에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따뜻한 곳에서 커피를 마시자 이성이 차츰 돌아왔다. 나는 눈을 감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침착하자.
자작나무는 자작나무고, 레이 아리사는 레이 아리사다.
커피를 한 잔 더 시켜 마셨다. 뒤늦은 의문이 몰려왔다. 그 환영들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향해 몰려오던 워커 소리들. 그리고 죽음의 신. 가슴을 관통하던 총탄. 회색 눈동자에 떠오르던 즐거운 웃음. 거기에 레비탄의 미소가 겹쳤다.
강도에게 당한 트라우마가 레비탄에게 겹친 것일까. 머리가 복잡했다. 자꾸만 자작나무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단지 맑은 햇빛이 비치는 왕궁의 정원을 당신과 함께 거닐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레비탄……. 소름끼쳤다. 역사에 기록된 레비탄은 ‘발랄하고 착한 평민출신 왕비’였다. 그런데 ‘히히히’라니. 어쩌면 자작나무의 죽음은 레비탄이 독단으로 저지른 짓일 수도 있었다. 왕비가 되고자 17년이나 기다린 여자 아닌가.
문득 가이거에 비상이 걸렸다던 메사라의 말이 기억났다. 실소가 나왔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레비탄의 환생체, 바르디 공작의 명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고소하네.
나는 커피숍 창문으로 눈길을 주었다. 낡은 코트후드를 푹 눌러쓴 어느 남루한 주술사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불현듯 이상한 충동이 들끓었다. 한번 물어볼까.
그렇게 죽어 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이, 즐겁던가요?……
창밖에서 축제 퍼레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우습게도 자작나무와 데이탄즈 분장을 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나는 킥킥거리며 커피를 마셨다. 상자를 앞에 둔 판도라의 마음이 절절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지금뿐이다.
바르디 공작은 곧 감방으로 들어간다. 그에게 600년 전의 수수께끼를 직접 물어볼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마녀파티.
커피숍 시계를 쳐다보았다. 8시였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계산을 치르고 커피숍을 나섰다. 자작나무 한 그루가 커피숍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왼손을 뻗어 자작나무 가지를 꺾었다.
마자리니 전철역에서 25분 걷자 전나무 숲이 펼쳐졌다. 그 너머에서 바르디 공작가 저택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마자리니성. 전철역의 명칭은 바르디 공작가의 성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높다랗게 치솟은 철문 앞에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건장한 보디가드들, 입장객을 단속하는 코트 감별사, 티켓을 지참한 일반 손님과 위장 주술사들까지 인산인해였다. 코트감별사에게 당도할 때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코트감별사가 내 옷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모았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인데……. 어디서 이 코트를 구했어요?”
“물려받은 옷입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저는 42번가의 유명 주술사는 다 알아요. 이만큼 낡은 코트는 한 번도 보지 못한걸요.”
코트 감별사는 군말 없이 나를 입장시켰다. 나는 킥킥 웃었다. 내가 넘겨짚었다는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다니 훌륭한 마녀가 되긴 튼 여자였다. 그녀의 손톱은 몹시 짧았다. 그건 몰약을 주로 제조하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먹장구름을 날렵하게 가르며 환한 달이 형체를 드러냈다. 령의 수호신, 디아나였다. 희디흰 눈에 잠긴 정원 곳곳에 달빛이 남김없이 뿌려졌다.
정원 한구석을 차지한 화려한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원 분수대에서는 물줄기가 춤을 추었다. 불꽃이 꼬리를 그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난쟁이와 광대들이 어지럽게 춤추었다. 마자리니성 자체가 바쿠스의 숲이었다.
이런…….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갔다. 사람이 이렇게 많아서야 공작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성으로 들어가 볼까, 하다가 관둬 버렸다. 헛수고로 끝날 듯했다. 잔뜩 차려진 음식이나 먹고 나가기로 했다.
아무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바르디 공작의 식량이나 축내서 복수할 겸 열심히, 많이많이 먹었다.
“거기, 점 좀 봐줄 수 있겠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움찔했다. 돌아보니 흑발의 젊은 귀족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주술사도 엄연한 전문직이자 서비스 업종이었다. 정직과 성실은 고객을 대하는 기본자세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운 터였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돌팔입니다.”
정직하게 말하고 다시 음식을 먹었다.
“그럴 리 없잖아. 주술사 코트를 걸친 사람들은 일급 주술사에 속한다고 하던데.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어. 가르쳐 줘.”
태도가 완강했다. 할 수 없이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왼손에 고쳐 쥐었다.
“무엇을 원하시는가요, 손님.”
“음……. 내 미래가 보고 싶다.”
이럴 줄 알았지. 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오밤중에 돌팔이 주술사나 붙잡고 자신의 미래를 묻는 남자귀족이란 거기서 거기일 터…… 하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었다.
금방 기억해냈다. 마넨 경의 먼 친척, 유하 삭셀라 백작이었다.
나는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미래는 신만이 아십니다. 주술사는 고객의 고민을 들어 주는 상담원일 뿐입니다. 일단 고민을 말씀해 보십시오.”
“출세에 관해서.”
삭셀라 백작이 확고한 투로 말했다.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느릿느릿 흔들었다.
“출세…… 관운을 말씀하시는군요. 백작님께서 관운을 타시려면, 능숙한 파도타기 선수 같아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주술사처럼 미약을 사 먹으라느니, 흑미사를 하라느니, 따위의 말은 하지 않습니다. 백작님께 방향만 제시해 줄 겁니다. 미래를 바꾸는 것은 현재입니다. 백작님께서 미래를 바꾸고 싶으시면 저쪽 자작나무 아래로 혼자서 10분 뒤에 오십시오. 저는 비밀상담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럼.”
10분 뒤 자작나무로 삭셀라 백작이 왔다. 할 일 없는 작자 같았다.
“뭘 믿고 오셨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비꼬자 삭셀라 백작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전치기 아닌가? 자네가 다른 주술사와는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했고. 그래, 파도타기라는 뜻은?”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백작님께선 푸셔나 스네이크와 달리 파도를 움직일 에너지와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고작해야 파도를 타는 서퍼나 가능하죠. 백작님께서도 이미 깨닫고 계실 텐데요.”
삭셀라 백작의 낯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으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군.”
삭셀라 백작이 턱을 문질렀다.
“과연 보통 주술사는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자신을 돌팔이라고 칭할 때부터 특이하다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방금 푸셔와 스네이크만 언급했지? 어째서 바르디 공작이 빠졌는가? 지금 다소 불리하긴 하네만, 바르디 공작은 곧 왕의 서자의 외숙부가 될 몸 아닌가.”
“동양에서는 대통령을 뽑을 때 대통령 후보들의 대운을 점쳐 봅니다. 대통령 직위에 임할 동안의 운명을 살펴보지요. 국가를 통치하는 자의 운명은 곧 국가의 운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요. 점성술에 따르면, 푸셔는 향후 20년간 영화를 누릴 운명입니다. 이제껏 정적은 반드시 살해하거나 나락에 떨어뜨렸던 스네이크의 전력을 고려하면, 이런 괘는 꽤 의미심장하죠.”
“푸셔가? 설마 그 소심한 분이?”
삭셀라 백작은 의심스런 표정이었다.
“푸셔를 과소평가하는군요. 푸셔는 오랫동안 역량을 숨겨 온 잠룡입니다. 치부도 전혀 없기 때문에 스네이크가 푸셔를 숙청하기에는 애로가 많을 겁니다. 둘은 향후 20년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왕국을 함께 통치하리라 봅니다. 이 나라에서 권력을 잡으려면 극단적이어야 합니다. 푸셔처럼 철저히 유하거나 스네이크처럼 철저히 잔혹하거나. 그러나 바르디 공작은 이도저도 아닙니다.”
“하긴, 마넨 경도 몹시 유한 분이셨지…….”
삭셀라 백작이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었네. 얼마를 원하는가. 그리고 이름을 가르쳐 다오. 종종 상담을 받고 싶다.”
“아까 말했다시피 저는 돌팔이이므로 더는 상담해 드릴 수 없습니다. 백작님께선 영리한 분이니 이번 상담만으로도 처신에는 무리 없을 겁니다. 돈도 받지 않겠습니다. 단, 백작님께서 자비롭다면 제 부탁 하나를 들어 주십시오.”
“부탁이라?”
“바르디 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흐흠.”
삭셀라 백작이 웃었다.
“바르디 공작의 팬인가 보군. 알겠네. 한번 애써 보지. 일단 성에 같이 들어가지. 공작은 성에서 벌어지는 무도회에서 놀고 있다네.”
“감사합니다.”
삭셀라 백작을 뒤따라 성으로 향했다. 가슴이 조금씩 뛰었다. 나는 소리 없이 뇌까렸다. 침착해라, 레이 아리사. 너는 여기에 역사의 수수께끼를 탐구하러 온 돌팔이 주술사일 뿐이야.
돌팔이 주술사일 뿐이야.
성의 거대한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프랑스식 장식이 극치를 이루는 실내가 펼쳐졌다. 낮은 현관, 이중 계단, 살롱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시퀀스를 빚어냈다. 장식 패널이 만나는 구불구불한 공간에는 수많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곳곳에서 주술사들과 귀족들, 일반 손님들이 엉켜 춤추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게. 공작을 데려올 때까지 시간이 걸릴 테니까.”
삭셀라 백작이 살롱의 구석진 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는 의자에 앉았다. 숨이 막혔다. 적사병 가면이 침입한 프로스페로왕의 무도회가 이러했을까. 쾌락과 열정이 웃음과 섞여 소용돌이치는 공간이었다.
문득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흡사했다. 스케치를 하러 온 궁정화가 소렐의 앞에 선 그때처럼, 사파이어 반지를 낀 채 자작나무 가지를 들고 있었다.
소렐…….
핫 칠리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돌이킬수록 섬뜩했다. 내가 그때 완전히 미쳤구나 싶었다. 일렉스가 장미꽃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나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애꿎은 텔리니의 머리 가죽을 나이프로 잔인하게 벗기며 으하하하하하 웃었을 터였다.
그리고 손목에 수갑이 철컹.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메사라를 등지고 감옥에 들어가 옥살이를…….
그러니까 침착해, 레이 아리사.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삭셀라 백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르디 공작과 만남이 무산되더라도 백작을 탓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허탕 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어느새 10시였다. 나는 어라, 하며 멈칫했다.
저만치서 낯익은 남녀가 보였다. 소렐 씨 부부였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텔리니의 부친과 잘 합의한 모양이었다. 소렐 씨의 표정이 매우 좋았다. 멋진 연미복 차림으로 부인과 함께 즐겁게 춤추고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아저씨네…….
소렐 부부가 빙글빙글 돌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무리. 소렐 부부에게 박수가 빗발쳤다. 나는 망설이다가 일어서서 소렐 부부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흐음? 누구시죠?”
소렐 씨가 이쪽을 아연하게 응시했다. 나는 코트 후드를 살짝 젖혀 얼굴을 드러냈다. 소렐 씨가 “오.” 하며 반색했다.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껄껄. 남자친구는 어딜 가고?”
“혼자 왔습니다. 한데 여기서 뵙다니 재미난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이거 원,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그런데 헌책방 주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주술사도 하고 있었네요?”
소렐 씨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네.” 하며 대충 얼버무렸다.
전생의 인연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렐 씨의 선조는 자작나무의 초상화를 그린 장본인 아니던가.
“소렐 씨는 군주제 폐지론자 아니셨습니까? 한데 귀족의 파티에는 왜?”
“아아, 별것 아닙니다. 공작이 제게 그림을 구입하면서 파티 티켓을 주더군요. 사실 저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아내가 공작의 광팬이라서요, 껄껄.”
“아…… 그랬군요.”
“그런데 그 자작나무 가지. 껄껄껄. 자작나무 팬이라서 일부러 들고 왔나요?”
“아닙니다. 이건 그냥 제 주술도구예요.”
“호오, 특이하군요. 구슬이나 지팡이는 흔하게 봤지만, 나뭇가지를 주술도구로 쓰는 주술사는 처음 봅니다.”
소렐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들어 보였다.
“옛 마녀들이 마법의 빗자루를 만들 때 주로 사용한 나무가 자작나무니까요. 자작나무는 샤머니즘 세계의 나무입니다. 알타이 무속의 영향을 받은 동양 무당들은 성전에서 종이를 자작나무 형상으로 오려 주술을 펼치지요. 그 점을 감안하면 자작나무의 파멸도 꽤 의미심장하죠. 그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딸에게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흐음, 재미있군요.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아리사 씨.”
“네?”
“16세기 당시 왕국에서 자작나무는 구애의 표시이자 호감의 상징으로도 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작나무 아래에서 청혼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지요.”
“그랬나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접하는 사실이었다.
“「쥴리엣 허먼의 여행기」라는 책에 나옵니다. 영국 여성이 쓴 책이라 이 왕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죠. 사실 내용도 재미없지만, 귀족 여인들마저 거의 문맹이던 16세기에 여성이 여행기를 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요.”
소렐 씨가 빙긋 웃었다.
“어쩌면 왕도 제 딴에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자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로 자작나무 가지를 놔두었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좋아서 입이 귀까지 찢어졌을지도요.”
“그러네요.”
나는 고소를 숨기며 차를 마셨다. 좋아서 입이 귀까지 찢어져? 데이탄즈가?
이제 보니 소렐 씨는 데이탄즈가 자작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터무니없었다. 놈에게 검은 머리 여인은 하룻밤 노리개에 불과했다. 자작나무 가지를 발견하고도 별다른 감흥은 없었을 것이다. 까치집이 된 머리나 자작나무 가지로 뻑뻑 긁고 홱 던졌겠지.
벌써 10시 반이었다. 이상기후 탓에 지하철은 24시간 운영했지만, 바르디 공작 따위를 기다리며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만 집으로 돌아갈까 고민할 때였다. 삭셀라 백작이 다가왔다.
“어이, 주술사. 아무래도 자리가 성사되긴 힘들 것 같아.”
“역시 그런가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나도 접근하기가 힘들더라고. 그래도 곧 있으면 이쪽으로 다가와서 사람들과 죽 악수를 나눈대. 그때 가까이서 얼굴이라도 보게나.”
“어쩔 수 없지요. 제 부탁을 들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잘 차려입고 올 걸 그랬을까. 나도 이렇게 잘 먹고 잘산다! 하고 온몸으로 외칠 수 있게.
끔찍하게 유치했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에 온 것 자체가 유치한 짓거리였다.
“그런데 그 금발 말입니다, 아리사 씨. 그만큼 기르려면 시간이 꽤 걸렸을 것 같은데요.”
소렐 씨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거의 자른 적이 없었죠.”
“부모님이 화 안 내던가요? 그렇게까지 긴 머리는 썩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상관없어요. 저는 고아거든요. 일곱 살 때 버림받았습니다.”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소렐 씨가 민망한 기색으로 머리를 긁었다. 삭셀라 백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머리를 거의 자르지 않았다고? 그럼 대체 길이가 어느 정도 된다는 거지?”
“후후후. 백작님도 아리사 씨의 금발을 보면 놀라실 겁니다. 거의 바닥까지 닿아요. 더러운 당나귀 가죽 아래에 모습을 숨긴 어떤 이처럼 아리사 씨도 무척 아름다운 분이랍니다. 저 반지만 루비 반지였으면 정말 똑같았을 텐데.”
소렐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망할 놈의 머리카락. 이놈의 머리카락을 무릎까지라도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이 내 소원임을 안다면 저런 말은 못할 것이다.
“바닥까지 닿는 금발이라……. 바르디 공작에게 한번 보여 주지 그래. 혹시 아는가. 그 머리카락에 바르디 공작이 조금이나마 더 자네 앞에 머무를지.”
나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나를 똑똑히 보여 줄 참이었다. 벌레같이 짓밟혀 죽어 가는 어떤 사람을, 빙그레 웃으며 쳐다본 그에게 나를 뚜렷이 드러낼 작정이었다. 건강하게 숨 쉬며, 잘사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알고 있었다.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러나 옛일을 감안하면 이 정도 시위를 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공작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어느 틈엔가 저 부근이 떠들썩했다. 바르디 공작이었다.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살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저 작자인가.
실물로 보니 느끼함이 덜했다. 갈색머리의 화려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옆에 있는 미녀는 여동생 이리나였다. 백조처럼 긴 목에 반짝거리는 다이아 목걸이를 걸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실로 눈부신 남매였다. 낡은 당나귀 가죽코트를 걸친 이쪽과는 천지차이였다.
나는 쓰게 웃었다. 이래서 내가 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르디 남매에게 사람들이 손끝 하나라도 닿아 보고자 난리쳤다. 보디가드들이 사람들을 막아도 막무가내였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바르디 공작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귀족들에게 말을 던지기도 하고, 팬들과는 악수를 나누며 느긋이 시가를 피웠다.
저 광경에 기분이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묘해졌다. 자작나무가 차가운 탑에 갇혀 사는 동안,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지금과 똑같이, 비단과 보석으로 온몸을 둘둘 감고 즐겁게 웃었을 것이다. 저것이었을까. 저 사치와 즐거움이, 한 사람을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한 이유였을까.
바르디 공작이 목전까지 다가왔다. 그가 소렐 씨와 악수를 나누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화제가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코트 후드를 뒤로 젖혔다. 머리카락이 출렁, 아래로 떨어졌다. 삭셀라 백작이 눈을 크게 뜨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르디 공작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소렐 씨에게서 손을 뗀 바르디 공작의 눈길이 내게서 멎었다. 나도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기분이 묘했다. 표현할 수 없이 기묘한 느낌이었다. 착각일까. 침묵이 주변을 지배하는 듯한 이 분위기는.
바르디 공작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시가를 천천히 빨며 눈매를 가늘게 뜨더니 말했다.
“우리, 몇 번 만난 적 있지 않습니까?”
이 웬 엉뚱한 소리냐…… 싶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잠자코 침묵했다. 이쪽을 훑어보던 바르디 공작의 눈길이 내 손에 잠깐 머물렀다.
“호오…… 자작나무 가지라. 역시.”
나는 웃었다.
“나리께서 지켜본 어떤 이의 죽음이 연상되나 보죠.”
“뭐?”
바르디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나는 거듭 웃었다. 짧은 적막 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이리나가 눈초리를 세우며 말했다.
“무슨 소리죠? 죽음 운운이라니. 지금 제 오빠를 모함하는 겁니까?”
나는 대답 대신 바르디 공작에게 다가섰다. 분노가 점차 들끓었다.
나를 제대로 봐……. 똑똑히 보란 말이야. 당신이 낄낄거리면서 지켜보았던, 그 죽어 가던 사람이야. 그렇게 즐겁더냐.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백오십 개의 못 자국에서 선지피를 철철 뿌리며 죽어 가던 사람이, 그토록 웃기더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어차피 얼마 못 갈 목숨이었다. 불에 탄 발바닥에서는 뼈가 드러나 있었고, 쇳물이 부어진 무릎은 거의 녹아 있었다. 씻지 않아서 똥오줌 냄새를 풍기던 너보다 더욱 심한 악취를 풍기며 차가운 돌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편히 보내 줄 아량마저 베풀기 싫었더냐.
레이 아리사가 소녀형구 고문에 집착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그렇게 미웠을까. 마지막조차도 조용히 보내 주기 싫었을 만큼, 자작나무가 미웠을까. 왜. 대체 왜? 그 증오의 원천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바르디 공작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당신은 먼발치에서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온몸에 난 백오십여 개의 못 자국에서 피를 철철 쏟으며 죽어 가던 어떤 사람을요.”
바르디 공작의 안색이 확 변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사람을 쳐다보던 당신은 웃고 있었죠. 아주 만족스럽게 말입니다.”
한동안 무표정하던 바르디 공작이 비로소 웃음을 지었다.
“……흥미로운 주술사로군.”
그렇게 말하고는 손뼉을 짝짝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오늘은 저에게 행운의 밤인가 봅니다. 이 아름다운 금발의 주술사께서 내게 멋진 점을 쳐 주겠다고 하는군요. 여러분은 각기 밤을 즐기십시오. 자, 주술사는 나를 따라오시죠, 하하핫.”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바르디 공작이 내게 손짓하며 저쪽 복도로 걸어갔다. 망설이는 나에게 소렐 씨가 “따라가 보지요.” 하며 옆구리를 툭 쳤다.
“흔한 기회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바르디 공작의 뒤를 따라갔다. 길디긴 복도를 걸어간 그가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두침침한 방이었다.
“이거 재미있군.”
바르디 공작이 시가를 뽑아 물었다. 흥분에 찬 표정이었다.
“그림이 제법 그럴싸한데!”
바르디 공작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탄성을 터뜨렸다.
“초상화와 똑같은 포즈 아닌가. 왼손엔 자작나무를 들고 비스듬히 서 있어. 게다가 길디긴 머리카락. 머리카락 색깔과 검은 당나귀 코트를 걸친 음산한 주술사라는 것만 다를 뿐! 하하핫!”
그 모습에 나는 고소를 삼켰다.
잘도 웃는구나. 하기야 승자는 패자의 슬픔 따위 모르지.
바르디 공작이 와인 잔을 내게 건넸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이유라면?”
바르디 공작이 의자에 다시 앉았다.
“궁금하더군요. 가만히 놔둬도 죽을 사람에게 가해진 그 소녀형구 고문 말입니다. 당신의 단독 결정인지 아니면 왕의 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는지.”
“흐흠.”
바르디 공작이 턱을 문지르다가 말했다.
“그것뿐입니까? 단지 그것뿐?”
“네.”
“그럼 나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바르디 공작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뭐가요?”
“자작나무와 왕의 연애는 사실이었습니까?”
“네?”
나는 눈만 껌벅거렸다. 황당무계한 질문이었다. 왕과 50년을 함께 산 후처가 그걸 모른다니 말이 되는가?
“웬 엉뚱한 질문이죠?”
내 반문에 바르디 공작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여자문제만큼은 왕도 나에게 털어놓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설화를 헛소문으로 단정했어요. 자작나무가 재판에서 늘어놓은 사랑고백은 어디까지나 미쳐서 횡설수설한 소리였으니까요.”
바르디 공작이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했다.
“기록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하나 하죠. 왕의 수족은 로쉬라고 따로 있었습니다. 왕에게 편지와 공문서류를 읽어 주고, 가장 은밀한 일은 반드시 그의 몫이었죠. 나는 자작나무의 저주사건도 왕과 로쉬가 꾸민 누명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31년 뒤, 왕실 시종장 사건으로 의문이 들었어요. 신문에서 놈은 탑이 왕비가 살기에는 매우 불편하더라고 거짓으로 보고해, 왕에게 상당액의 예산을 받아내 가로챘다고 실토했죠. 왕은 극도로 분노했습니다.”
“…….”
“기록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 하나 더. 왕은 화형집행인들에게 땔감을 조금만 써서 시종장을 천천히 태워죽이라고 비밀리에 지시했습니다. 시종장은 두 시간이나 산 채로 불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었죠. 그 광경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왕에게 얼마나 모골이 송연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설화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죠.”
“…….”
침묵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꼭 해야 한다면 예, 입니다. 그런 일이 있긴 했죠, 짜증나게도. 저주사건도 마찬가지고요.”
바르디 공작은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11시 반이었다. 바르디 공작의 능글맞은 태도 때문일까. 놀랍게도 더는 분노가 들끓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맥이 빠졌다.
“가야겠네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즐겁게 웃더군요, 당신은. 당신에겐 벌레였겠지만 그 사람에겐 하나뿐인 목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옛날 일이죠.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릴 찰나, 바르디 공작이 “잠깐만요.” 했다.
“정말 용무가 그것뿐입니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흐흠.”
바르디 공작이 시가를 빨며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멈칫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의 표정에 설핏 떠오른 안도감이 어딘지 불길했다. 안도감……. 안도감이라니. 무엇에?
바르디 공작이 말했다.
“내가 왕비의 죽음을 지켜본 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뭡니까?”
“뭐긴요. 상인집안 출신에, 왕의 서명이 맨 뒤 철자를 빼먹은 엉터리임을 알고 있는 사람. 당신의 인터뷰 기사에 모든 답이 나와 있던데요.”
“그렇군요. 나는 왕만이 힌트를 알아맞히리라 생각했습니다. 자작나무가 왕의 엉터리 서명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시대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자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것을 까맣게 간과했군요.”
“자작나무에 관한 기록은 몇 줄도 안 되니까요. 당신이 그 사람에 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건 당연하죠.”
“뭐, 그런 것도 있고.”
바르디 공작이 야릇하게 웃었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우선 그 소녀형구 고문 말입니다.”
바르디 공작이 입을 열었다.
“뭐, 소녀형구를 떠나 고문 자체가 무척 가혹했죠. 그건 당신이 더 잘 알겠지요.”
“……그래서요?”
“실은, 내가 남동생들과 함께 감옥 창문으로 왕비를 훔쳐본 적 있어요. 추녀라던 소문과 달리 젊고 아름다운 왕비에게 되레 큰 충격을 받았죠. 외모부터 출산기능까지 40세의 중년이던 이쪽은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어요. 전쟁이 끝난 뒤 왕이 왕비를 보고 마음이 바뀌어 저주사건을 무마해 주고 후사를 보려 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꽉 움켜쥐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공작이 느긋이 와인을 마셨다.
“뭐, 우리는 왕비에게 악감정은 없었어요. 어쨌든 운이 좋았죠. 마침 왕이 전쟁으로 왕궁을 떠나 버렸거든요. 전쟁을 틈타서 우리는, 후일 왕이 왕비를 볼 사태를 대비해 왕비의 젊은 육체를 철저히 망가뜨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치솟는 구토를 참았다.
“뭐, 그러니까 왕에게 너무 섭섭한 감정 품지 말아요. 왕도 왕비의 시신 상태에 격분했으니까. 그렇게 왕이 내게 분노한 때는 시신 공개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그날 밤 파티가 끝나자마자 나와 남동생들, 고문관들을 불러서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더군요.”
바르디 공작이 즐거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잽싸게 선수를 쳤죠. ‘단지 세간의 누명설을 잠재우려 했을 뿐입니다. 주술도구가 탑에서 나오지 않아, 전하의 결백을 증명하려면 어떻게든 마녀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극조로 외친 공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일생을 건 명연기였습니다. 그날 어찌나 뜨끔했는지, 하하핫! 왕비의 횡설수설 재판기록도 우리를 도와주었죠. 고문관들이 로렌 추기경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자살한 것도 행운이었고요.”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까부터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왜 당신은 남동생들하고만 음모를 꾸몄습니까. 왕이 당신과 남동생들, 고문관들만 불러내 분노한 이유가 뭐죠?”
“아아. 참, 그걸 설명 안 했군요.”
바르디 공작이 시가를 빨았다.
“흐음……. 아름다운 주술사님. 당신은 보기와 달리 꽤 영리한 것 같습니다. 16세기 여인으로서는 드물게 글을 읽을 줄 알았던 자작나무의 현신다워요.”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계속 말을 빙빙 돌리는 바르디 공작에게 불쾌감이 들 지경이었다.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홀연 온몸의 체온이 내려앉았다.
이, 이럴 수가…….
공작의 말이 귓전을 스쳤다. 「자작나무가 왕의 엉터리 서명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 시대에는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여자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것을 까맣게 간과했군요.」
이런 멍청이…….
내가 왜 이걸 놓쳤을까!
바르디 공작은 애당초 자작나무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에게 왕비는 단 한 사람, 레비탄뿐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왕의 서명에 관해 「저 말고 또 본 이라면 사실상 왕비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공작은 여기서, “나는 왕만이 힌트를 알아맞히리라 생각했습니다.”라고 했다.
퍼즐들이 삽시간에 하나의 그림을 이루었다. 16세기에는 귀족 여인들마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물며 씻기를 몹시 싫어하고 성적으로도 자유분방한, ‘전형적인 16세기의 평민여인’ 레비탄이 어찌 글을 읽고 쓸 줄 알겠는가!
왕의 서명을 보기만 했을 뿐, 철자가 몇 개 빠졌는지 전혀 몰랐을 거야!
바르디 공작은 레비탄이 아니었다. 레비탄의 친인척이었다. 레비탄을 앞세워 난쟁이와 광대들을 바치고, 러브레터 명목으로 왕과 음모편지를 교환한 자. 왕의 결혼요구서를 볼 만큼 레비탄과 가까운 자. 레비탄의 남동생들을 이끌고 왕실을 관리한 자. 레비탄이 어떤 일이든 제일 먼저 상의한 자.
“이제 아신 것 같군요. 역시, 영리한 주술사님.”
바르디 공작이 하얗게 웃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바르디 공작이 내 팔목을 확 움켜쥐었다.
“이야기 아직 안 끝났습니다. 왕비를 구경한 것은 사실 왕 때문이었어요. 왕이 전쟁터로 떠나기 직전, 왕비를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고문관들에게 전하라고 내게 지시했거든요.”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나는 왕비를 구경한 다음, 고문관들을 불러 금화주머니를 안겼죠. ‘죽지 않을 만큼만 고문해서 얼굴을 완전히 망가뜨려라. 편안한 죽음을 요구해도 절대 들어주지 마라’ 하고는 떠나 버렸습니다, 하하핫! 왕비의 마지막 자리에도 레비탄 뒤에 내가 서 있었죠. 어둠에 가려져 당신 눈에 보이지 않았나 보군요.”
레비탄의 오빠, 레어티즈였다.
메사라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뭐, 그러니까 레이도 왕이 정부를 둔 건 말 잘 듣는 평민머슴들을 끌어들여 골치 아픈 문신, 무신들이나 다스리는 데 부려먹고자 한 심산이었으려니, 하고 속 편히 생각해 버려요.
진실의 알몸이 드러났다. 13세에 즉위한 소년왕은 정부 레비탄을 명목 삼아 프루고니 가문사람들을 끌어들였다. 프루고니가의 장남 레어티즈는 왕에게만 철저히 충성, 결과적으로는 문신·무신 쌍방을 견제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는 한 축이 되었다. 레비탄은 레어티즈의 가면이었다. 레어티즈야말로 진정한 왕의 정부이자 왕비였던 것이다.
“알았으니까 놔주십시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참 안타까웠어요. 왕비는 정말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었거든요. 왕에게 아이도 많이 안겨 줬을 겁니다. 만난 지 두 번 만에 왕이 왕비에게 육체관계를 원했다면서요? 현재도 옛날 못지않게 아름답군요. 만약 왕도 환생해서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예전처럼 육체관계를 몹시 빨리 원할 것 같습니다, 하하핫!”
공작이 웃으면서 내 손목에 힘을 더욱 가했다. 마치 창녀를 쳐다보는 듯한 눈초리였다. 지금 바로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공작의 손을 확 뿌리쳤다.
“가겠습니다.”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당신의 이야기 따위, 이제 필요 없습니다.”
공작을 밀쳐 버리고 문으로 달려갔다. 한시바삐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걸음도 뛰어가지 못했다. 뒤통수에서 육중한 충격이 내달렸다. 무릎이 꺾이며 의식이 멀어졌다.
“이대로 보낼 수야 없지…… 스네이크의 연인.”
가물거리는 귓가를 스친 음성이었다.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