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M─ (95/101)

15 .M─

운이 좋았다. 토요일 오후, 업무실로 레오파드가 들어왔다.

“본부장님, 희소식이야. 독일에서 대원들이 부인에게 정보를 얻어냈대. 어린 아들이 칼에게 강간당했다고 하더군. 진단서까지 끊어 놓았다고 하니까 증거는 확실하게 확보. 일단 부인은 정보 제공료로 십만 탈란텐을 요구했어.”

나는 보고서를 검토했다. 첨부된 진단서 사본을 검토한 뒤 피해자 사진을 보았다. 일순 오싹해졌다.

“비슷하지?”

레오파드가 흐흐흐, 웃었다.

“주근깨와 매부리코만 빼면 레드폭스와 닮지 않았어? 특히 이 금발.”

“우연이래도 기분 나쁜걸.”

“레드폭스가 워낙 동안이니까. 그때 생각나더군. 기억나? 레드폭스하고 한 첫날밤, 호텔을 나오면서 저 녀석 혹시 미성년 아니야 하며 찝찝해했잖아.”

“그랬던가.”

“이 자식이 또 까먹은 척하기는……. 그랬어. 버진이잖아, 미성년 같아, 하고 내가 말하자 네가 음. 찝찝해. 했다고. 그러곤 둘 다 어깨를 으쓱거리고 치웠잖아. 뭐, 솔직히 지금도 본부장님 부부는 그림만 보면 퍽 수상쩍긴 하지. 혹시 레드폭스와 함께 길 걷다가 경관에게 검문받은 적 없어? 흐흐흐.”

“어쨌든 레이는 미성년이 아니잖아. 그 사람도 내일모레면 서른이야.”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좆같았다. 실은 레오파드가 아픈 데를 긁었다. 빡빡 긁고 소금까지 뿌렸다.

3주 전, 이웃집 바비큐 파티에서 만난 고등학교 동창이 내게 귀띔했다. ‘악동 포우가 미성년을 갓 벗어난 순진한 어린애를 감쪽같이 꼬셔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이 동네에 파다하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생긴 고민이었다. 평소 레이의 행동거지가 워낙 어른스러운 탓에 내 쪽에서는 되레 레이가 나보다 연상으로 느껴질 때가 많았는데, 동네사람들 눈에는 그게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확실한 증거수집으로 작업에 강력모터 엔진은 장착했다.

“칼의 동태는.”

“별거 없어. 아, 이번 마녀파티는 평소보다 훨씬 거창하게 치르려는 모양이래. 그놈 요즘 입지가 불리하잖아. 대중한테 인기를 더 얻어야 자기한테 유리하다고 계산한 모양이야.”

나는 픽픽 웃었다. 아이들과 핫초코 마셨다는 이유로 지탄받은 20세기의 흑인 팝스타가 전 지구적인 수준으로 앨범을 팔아치웠다고 검사들은 말했다. 칼의 앨범 판매량은 현재 7만 장이었다.

마지막이니까 실컷 즐겨 봐라…….

“나가 봐.” 하고는 업무를 재개했다. 다음 주에 신혼여행을 떠나려면 미리 일을 처리해 놓아야 했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들기며 파일을 주시했다.

팍스 신고를 끝낸 뒤 느낀 바가 있어 직속부하에게 정리해 올리라고 한 보고서였다. 왕국의 행정기관 관리실태 자료였다. 훑어보자니 기가 막혔다. 무능력한 하급 문신·무신귀족들이 온갖 행정기관 직위를 88퍼센트나 차지하고 있었다.

재포니카 관할의 행정처부터 청소할 심산을 굳혔다. 나는 무능력자를 증오했다. 피 같은 세금을 밥벌레들 부양비용 따위로 축낼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작위 남발도 근절해 버릴 작정이었다.

파일을 반도 채 훑어보지 못했는데 저녁 7시였다.

“식사 안 해, 스네이크?”

쿠퍼헤드가 업무실로 들어왔다. 코트를 걸치는 내 옆에서 파일을 죽 훑어보다가 “이건 뭐냐.” 하며 박장대소했다. 예의 성폭행 피해아동의 사진이었다.

“음. 닮았지.”

“이거 묘한데……. 기억 나? 마넨이 령의 인상을 모로의 「헤로데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에 빗댔잖아. 비유가 찝찝하더니 지금에야 까닭을 알겠군.”

“찝찝하다니. 뭐가.”

“살로메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세례요한을 죽이기 위해 권력자 헤로데 왕을 유혹하잖아. 무상으로 측근을 자청하는 령에게 마넨은 직감적으로 령의 복수심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울러서 마넨은 어리고 아름다운 령에게 성적욕망을 느끼고 만 거야.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가 제 욕망을 정확하게 깨달을 리 없지. 그 무의식이 「헤로데 왕 앞에서 춤추는 살로메」 비유로 노출되었는지도 몰라.”

“살로메는 복수심에 타오르는 령이고, 헤로데 왕은 권력자 마넨이다?”

빌어먹을, 하며 담배를 홱 던졌다. 쿠퍼헤드가 낄낄거리며 잽싸게 담배를 피했다. 귀가 썩는 해석이었다. 쿠퍼헤드의 말대로라면 마넨은 잠재적 소아성애자 아닌가. 어딘지 오싹했다. 령이 떠나자 마넨이 흡사 연인에게 차인 듯 폭음하던 광경이 눈앞을 스쳤다.

나는 코트를 걸치며 미간을 찡그렸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돌아가며 던진 악담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이거 진짜로 내게 혹여 미성년 취미가 잠재해 있었나, 하고 괜스레 켕길 정도였다.

아니라고 곧 결론지었다. 이건 장미가 장미라서 좋아하느냐, 장미가 붉은 빛깔이라서 좋아하느냐와 비슷한 문제였다.

칼은 아이가 아이라서 좋아하지, 아이가 예쁜 외모라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예쁜 남자를 좋아하지, 예쁜 남자가 영계 같아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포우 메사라는 지극히 건강하고 정상적인 남자였다. 레이와의 관계에서도 괜히 켕겨할 부분은 전혀 없었다.

여기까지 정리한 후,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그날 새벽 2시, 도촬 파일이 도착했다. 귀부인들이 모이는 객실과 아이들 전용의 놀이방, 독서방까지 총 셋, 개당 러닝타임 네 시간의 대작이었다. 부장 회의실에 모두 모여 장장 열두 시간에 걸쳐 샅샅이 검토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내 예측이 적중했다. 놀이방에서 칼은 교묘히 아이들을 주물럭거렸다. 남녀를 안 가렸다. 취향까지 갖추고 있었다. 작자도 금발 마니아였다.

중간에 여러 차례 도끼눈을 한 이리나가 놀이방으로 들어왔다. 그때마다 칼은 재빨리 자세를 고치는 것이, 이리나가 오빠의 성벽을 평소 감시해 온 듯했다.

오후 2시에 검토를 완료했다. 편집실에 도촬 파일을 넘긴 다음 늦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재규어가 혀를 내두르며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놀라운데. 사실 놈이 그쪽 취향이라고 스네이크가 말할 때 설마, 했거든. 지금도 어안이 벙벙해. 그 멀끔하게 생긴 놈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냐고.”

“본부장님의 직감은 무조건 믿는 게 좋아.”

레오파드가 흐흐흐, 웃었다.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더냐. 그 령도 직감 하나만 믿고 밀어붙여 잡아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마지막에 웃는 자는 나였다. 언제나 그랬다.

나는 보드카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기분이 퍽 좋았다. 레이와 한 내기에서도 승리를 거두리라 확신했다. 때가 멀지 않았다. 벌써부터 아주 짜릿했다.

“좋아. 그럼 재규어, 리져드, 팔콘, 스터젼, 개비얼. 너희는 오늘 밤 알토넨이 주재하는 파티에 참가해. 나머지는 본부를 지킨다. 벌쳐와 아트락스는 검사들을 모셔 와. 도촬 파일을 바로 넘겨서 체포작업에 들어가도록 해. 쿠퍼헤드는 이스트에덴 신문쟁이들을 소집시켜서 멋진 문구들을 생각해 봐. 레오파드와 나는 편집실에서 연출 작업을 할 거야.”

“이제 남은 건 푸셔뿐인가.”

쿠퍼헤드가 잔을 들어 올렸다. 나와 부장들은 싱긋 웃으며 다 함께 잔을 부딪쳤다. 쨍―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오후 6시였다. 동영상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대강 솎아낸 뒤 휴식을 취했다. 논스톱으로 41시간 가까이 일에 몰두했더니 슬슬 피로가 몰려왔다.

위스키를 마시며 진행사항을 헤아려 보았다. 새벽 3시까지는 매스컴에 영상을 넘길 수 있을 듯했다. 쿠퍼헤드는 기사 초안이 50퍼센트 가량 진행되었다고 막 보고해 왔다.

큐 사인은 아침 6시에 던질 예정이었다. 경찰과 매스컴을 일개소대 급파시켜 칼의 체포현장을 아침 공중파뉴스에 실시간 중계한다, 빗발치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칼이 경관에게 사지를 붙들린 채 장엄하게 걸어간다…….

이것이 이번에 구상한 내 미장센이었다. 비장미가 뚝뚝 떨어지게끔 반드시 슬로 모션으로 돌려줄 작정이었다. 배경음악으로는 칼의 신곡 《러브 발라드》를 선곡해 놓았다. 일명, ‘마지막 리사이틀’.

기다려라, 시건방진 3류 피아니스트.

나는 지그시 웃었다.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다. 정적을 골로 보낼 때면 으레 엄습해 오는 쾌감이었다. 하여간에 속수무책의 사디스트였다.

머리나 식힐 겸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레이에게 선물할 자전거를 주문했다. 자가용 대용이었다.

한 달간 열심히 운전을 연습한 레이가 며칠 전, 마침내 시험 삼아 나를 태우고 집 근처를 돌았다. 한 시간에 걸쳐 5킬로미터를 주행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레이에게서 자동차 키를 빼앗아 버렸다. 내 험상궂은 표정에 레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빨간색 자전거를 주문한 다음 노트북 화상 채널을 열었다. 24시간 이상 떨어져 있었더니 레이 얼굴이 보고 싶었다. 초기화면은 총 여덟 개의 분할 화상으로 나왔다. 욕실 둘과 온실과 차고를 비롯해 방 넷이 한꺼번에 떴다.

혹여 알몸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레이는 옷을 잘 걸치고 있었다. 주방에서 한창 케이크를 굽는 중이었다.

그새 레오파드가 이쪽으로 다가서며 가재미눈을 떴다.

“이건 또 뭐야? 애도 없으면서 웬 실내 감시카메라?”

“보안회사 영업에 넘어갔어. 뭐, 꼭 애가 아니라도 강도를 생각하면 설치할 만하지.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혹시 강도가 들었나 해서 잠깐 열어 봤어.”

레오파드는 내 변명에 속지 않았다.

“강도는 얼어 죽을……. 레드폭스 얼굴이 그리워서 열어 봤으면서, 흥. 그나저나 저기가 본부장님과 레드폭스의 스위트홈인가. 갑부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한 거 아니야. 치와와도 있네? 이거 참, 금발부부 아니랄까 봐…… 흐흐흐.”

“금발이 치와와를 좋아한다는 건 편견이야. 나는 슈나우저를 원했어.”

화면 속에서 레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어딘가 이상했다. 화면을 살펴보다가 금세 깨달았다. 레이의 머리카락이 조금 짧았다.

레오파드가 책상을 땅땅 두들겼다.

“본부장님, 일이 산더미야.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음.”

나는 노트북을 닫고 일어섰다. 레이의 짧아진 머리카락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갑자기 왜 머리카락을 잘랐을까. 레이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는데.

코트를 입다가 멈칫했다. 급히 휴대전화를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역시…….

곧바로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있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나 없는데 심심하진 않아요? 외출이라도 하지 그래요?”

내 유도신문에 레이는 바로 걸려들었다.

“아, 그렇잖아도 축제라서 디아나를 데리고 잠깐 놀러 나갈까 했어요. 마침 외출준비 중이었죠.”

“그랬군요.”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인기피증이 심한 사람이 혼자 축제를 구경하러 간다? 그것도 하필 오늘?

내 짐작이 들어맞았다. 오늘은 마라타의 기일이었다. 레이는 마라타의 묘지로 장미꽃을 바치러 나가려고 준비 중인 것이다. 뒤통수가 당겨 올 찰나였다. 레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축제도 축제지만, 마라타라고, 저를 매우 아껴 준 분의 기일이 오늘이거든요. 그분 묘지를 찾아서 간소하게나마 장미꽃을 바치려고요.”

“네…….”

나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하루만 늦추면 안 됩니까. 내일 밤에 나와 같이 가죠. 레이는 몸이 불편하잖아요.”

“음…… 메사라는 이틀이나 일하고 올 텐데 내일은 푹 쉬어야 하잖아요? 금방 나갔다가 올 테니까 걱정 마요.”

레이의 목소리가 밝았다. 나는 잠깐 머리를 굴리다가 “알겠습니다.” 했다.

“어쩔 수 없죠. 혹시 모르니까 휴대전화는 꼭 갖고 나가요. 그럼 축제 즐기다가 조심해서 들어와요.”

전화를 끊었다. 레오파드와 본부를 나서며 곰곰이 헤아렸다.

레이가 내게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긍정적인 현상일까. 이제껏 주술이며 마넨과의 연계며 모든 것을 숨겨 오던 레이가 처음으로 내게 뭔가를 털어놓았다. 그래서 나도 레이의 부탁에 응해 주었다. 기쁜 마음도 들었다. 레이가 나를 완전히 신뢰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나는 레이를 알았다. 마넨의 모사로서 우리에게 취조 받을 때 레이가 보인 태도를 지금도 기억했다. 가망 없다고 판단한 듯 순순히 자백할 뿐 아니라 마넨의 생사조차 묻지 않았다. 레이의 상관이자 정치적 스승인 점을 고려해, 마넨을 고통 없이 보내고 비밀리에 시골의 작은 성당에 무덤을 안치해 주기까지 한 내가 되레 허무해질 정도였다.

레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와 동류였다. 냉혈한이었다.

내일 퇴근하면 다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까.

궁금한 게 많았다. 물론 레이가 당장에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을 터였다. 차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묘한 감흥도 몰려왔다. 벌써 1년인가. 그 끔찍한 사건 뒤 어느새 훌쩍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하늘을 응시했다. 눈꽃이 갈기갈기 흩어지고 있었다. 새까만 먹장구름이 굶주린 까마귀 떼처럼 어지럽게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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