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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L. (94/101)

14 ─L.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메사라가 내게 키스한 뒤 차 창문을 올렸다. 자동차가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들어가 식탁을 응시했다.

메사라에게 내놓은 식사가 반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먹보 메사라가 음식을 남기다니. 하물며 내가 해 준 음식은 아무리 맛없어도 절대 남기지 않던 사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식탁을 치웠다. 여러모로 이상했다. 아침식사 내내 메사라는 음식에는 거의 손대지 않고 주스만 연거푸 마셨다. 평소처럼 수다는 떨었지만 어딘지 산만했다. 횡설수설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적확한 표현이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뭔가를 떨쳐내려는 듯했다.

무엇을?

나는 미간을 모았다. 메사라가 뭔가를 떨쳐낸다……? 희한했다. 메사라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문제가 있으면 정면돌파로 해결하는 타입이지 회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왜일까. 혹시 어젯밤 섹스가 불만족스러워서 그런가. 나는 좋았는데.

나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거실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요일에 메사라가 찾아온 기념사진 액자였다. 소박한 흑백사진이었다. 메사라 말로는 일부러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주문했다고 했다.

우리 사진 옆에 메사라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었다. 볼수록 흡사했다. 그러나 메사라는 우리와 부모님 사진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불 위에 티 포트를 올렸다. 심란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담당의에게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다고 말해야 할 듯했다. 띄엄띄엄하지만 분명했다. 월요일에 떠오른 마넨 경과의 기억도 그랬고, 어제도 메사라와 섹스하는 도중 언뜻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결론짓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자작나무를 극복한 시기는 최근 1년 사이의 일이었다.

나는 찻잔으로 포트를 기울였다. 메사라와 병원 온실을 나설 때 떠올랐던 기억을 되살렸다. 거기서 펄펄 나부끼던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어제.

메사라와 몸을 포갠 채 절정으로 치닫는 찰나, 기억이 떠올랐다. 상황이 비슷해서일까. 메사라와 섹스를 하는 기억이었다.

이번에도 장소는 병원이었다. 비슷한 체위로 나는 메사라를 받고 있었다. 메사라는 몹시 기분 좋은 표정으로 신음하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오르가즘에 도달할 때면 으레 짓는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금과 똑같았다.

그러나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점차 600년 전으로 통각이 열리는 것을 느끼며 옴짝달싹도 못했다. 아아, 또…… 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내 반응을 쾌감으로 해석한 듯, 메사라가 좋으냐고 속삭였다. 나는 간신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어릴 적부터 겪었지만, 오르키투니카가 선사하는 기괴한 감각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무시무시했다.

처음에는 바람과도 같은 것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러며 전신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그 후에는 검은 암흑이 잠깐 눈앞을 가렸다가, 갑작스레 걷히는 장막처럼 확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환각.

자작나무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흡사 내팽개쳐지듯 16세기로 떨어졌다. 멀리서 개들이 짖는 소리, 횃불에서 피어오르는 재 냄새, 살갗을 찢어 버릴 듯한 잔인한 바람이 전신을 덮쳤다. 낯설고 두려운 시대였다. 야만과 광기로 가득 찬 시간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자작나무는 뛰어가고 있었다…… 질투에 사로잡혀, 온몸을 감싼 낡은 망토를 펄럭거리며 폭우에 떠밀리듯 달려갔다.

축제가 허물어져 가는 새벽이었다. 가난뱅이 왕비는 길목에서 만난 엉터리 마녀에게 은화 한 닢과 저주주문을 맞바꾸었다. 창백한 달빛만 존재하는 밤이었다. 노란색은 질투와 광기, 그리고 이교도를 상징한다고 하던가. 그 불길하고 미친 아마빛 밤을, 자작나무는 소리 높여 웃으며 달려갔다.

그런 기억이, 떠올랐었다. 나는 혀를 차며 찻잔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담당의는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내 자작나무 취미에 모종의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 듯, 연일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담당의와 종종 면담하는 메사라도 대충은 짐작하는 듯했다. 물론 환생까지는 상상도 못 하겠지만.

메사라에게 전생을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여행지에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 될 것 같았다. 이제 그는 내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에게 더는 뭔가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의 직업상 마넨 경과의 관계는 무덤까지 지니고 갈 비밀로 숨겨야겠지만.

후련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디아나가 내 가슴 위로 올라왔다. 나는 디아나의 목을 긁으며 다시 헤아렸다.

내 계산에, 16세기를 여는 암흑의 장막이 더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야 맞아떨어졌다. 오랫동안 나를 질기게 괴롭힌 자작나무가 지금은 자취를 싹 감춘 까닭은? 하나뿐이었다.

자작나무는 죽었다. 레이 아리사를 떠난 것이다. 스물일곱 살의 초봄에.

순차적으로 재생되던 기억은, 자작나무의 종말까지 기어코 레이 아리사에게 겪게 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렇게, 10년간 너절한 섹스로나 시름을 달래다가 메사라를 만나며 새로이 출발하지 않았을까. 여기까지가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묘하네…….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인간이란 역시 간사한 존재였다. 여기까지 정리하고 나자 엉뚱한 고민이 들다니. 다름 아닌 성병 검사였다.

메사라가 다음 주에 성병 검사를 포함한 종합검진을 받으러 가자고 한 것이다. 콘돔을 잘 쓰지 않는 대신, 성병 검사를 주기적으로 받는 것이 우리의 섹스 라이프 수칙이었다고 설명했다. 우리끼리만 성관계를 맺는데 웬 성병 검사냐고 경악하자, 메사라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세균 감염 문제가 있으니까요. 이성애자들도 이런 문제로 많이 고통 받습니다. 부부 침실에 전용 욕실이 괜히 딸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섹스 후, 메사라가 반드시 즐기던 거품목욕에 내포된 참뜻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메사라는 서류 한 장을 내며 덧붙였다.

―이것부터 작성해요. 창피하다고 답변을 엉터리로 쓰면 안 됩니다.

서류를 받아드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애널섹스 유무, 일주일 평균 섹스 횟수, 섹스도구 사용 유무, 콘돔 착용 유무, 정액은 삼키는지…….

거시기가 썩는 것보다는 낫긴 하지만, 역시 낯만 달아올랐다. 일주일 평균 섹스 횟수라. 오럴섹스까지 합치면 저번 한 주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하지 않았던가. ‘양기를 빨린다’는 동양식 표현을 실감하는 즈음이었다.

자작나무를 완전히 해결한 지금, 내게 닥친 으뜸과제는 메사라의 왕성한 정력인 듯했다. 요즘에는 크나큰 위기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고민 끝에 루이즈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과도한 성욕도 일종의 공격본능이므로 공포영화 관람이나 스포츠 등으로 대리만족시켜 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메사라에게 공포영화를 슬그머니 보여 주었다.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메사라는 “직장생활이 곧 공포영환데 집에서까지 이런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며 즉각 버섯동자 애니메이션으로 돌려 버렸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정력이 지나치게 좋은 애인 때문에 못살겠다고 담당의에게 하소연하는 것이다. 담당의가 눈치가 있으면 개별 면담 때 메사라에게 뭐라 한마디라도 해 줄 터였다.

디아나를 끌어안고 낮잠으로 빠져들다가 생각났다. 내일이 마라타의 기일이었다.

메사라가 없는 주말은 묘했다. 두 달여 만에 처음으로 맞는 혼자만의 주말이기도 했다. 쉬기는커녕 온종일 바쁘게 보냈다. 캐슬마인 부인에게 과자 만드는 법을 배웠다. 원고를 쓰고 온실의 텃밭도 가꾸었다. 텃밭을 볼 때마다 뿌듯했다. 조금만 지나면 직접 재배한 채소를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메사라가 선물한 진주 거울 앞에 섰다. 지금같이 질질 끄는 빗자루로는 마라타의 무덤 앞에 설 면목이 없었다.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한참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이놈의 머리카락……. 결국 발꿈치에서 15센티까지 자르는 데서 그쳤다. 이 정도나마 자른 것만도 대성공이었다.

내일 저녁 혼자서 살살 마라타의 무덤에 가서 꽃을 바치고 오면 될 듯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축제였다. 디아나에게 축제 구경이라도 시켜 줄까.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디아나가 코를 비비며 킁킁거렸다.

“먹는 거 아니야.”

디아나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디아나가 깨갱, 울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버린 뒤 디아나를 안고 욕실로 갔다. 목욕을 싫어하는 디아나였지만, 우습게도 수영은 무척 좋아했다.

빅토리안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 몸을 담갔다. 디아나가 즐겁게 퐁당퐁당 물장구를 쳤다. 귀여웠다.

나는 킥킥 웃다가 욕조 옆의 휴대전화를 쳐다보았다. 메사라가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보통은 하루에 두세 번은 연락하던 사람이 오늘은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런데 비상이면 무슨 일일까.

지금 시국에서 가이거에 비상이 걸릴 일이라면 하나뿐이었다. 바르디 공작 관련일 터였다. 그를 숙청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그 작자도 끝났군.

나는 혀를 차며 욕조에 등을 기댔다. 여동생 덕에 죽음은 면하겠지만 호되게 곤욕을 치를 터였다. 스네이크는 바르디 공작이 다시는 날갯짓하지 못하게끔 철저히 짓밟을 것이다. 그렇게 스네이크와 바르디 공작이 서로 물어뜯는 동안 푸셔는 조용히 실리를 취하겠지.

인류역사상 자기가 제일 잘생겼다는 망상에 빠져 있긴 하지만, 푸셔는 기본적으로 무척 영리하고 배포도 큰 드문 귀족이었다. 마넨 경을 통해 살펴본 여러 귀족 중 내가 매료된 유일한 자가 푸셔였다. 11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훨씬 원숙해졌을 터였다.

내 짐작에 푸셔의 미래구상은 왕국을 오랫동안 좀먹어온 외척을 척결하고 의회정치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외척을 노리고 딸을 왕족의 배필로만 훈육하는 일반적인 귀족과 달리, 푸셔는 일찌감치 딸 로즈먼드를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 성장시켰다. 그가 왕비옹위에 심혈을 기울이는 근본 까닭은 외척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무신귀족들이 외척으로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리라.

스네이크가 젊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다면 그는 분명 장성한 자식들을 왕족과 혼인시켜 외척으로서 날뛰었을 테니까.

지금껏 행보만 보면, 스네이크는 평민들의 가려운 곳을 시원히 긁어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포상을 베풀어 절대적인 충성을 획득했다. 낭비를 싫어하고 진취적인 타입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변칙의 명수이며 살인과 음모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이야 평민의원단과의 야합 탓에 성깔을 억누르고 있지만, 견제세력이 사라지면 제멋대로 질주하고도 남을 양반이었다. 오랫동안 울프삭을 상관으로 섬긴 것도 마이너스가 되었을 것이다. 독불장군 울프삭은 올바른 정치적 스승은커녕 스네이크의 잔인성에 기름만 들이부으며 악영향을 끼쳤을 터였다.

무엇보다도 스네이크는 지나치게 젊었다. 실질적인 재포니카가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라니. 그 나이면 야망에 불타올라 물불을 안 가릴 때 아닌가. 데이탄즈가 치세의 기반을 닦겠답시고 자작나무를 극단적인 수법으로 살해해 버린 때가 바로 스물아홉 살 때였다.

스네이크는 천천히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잔인성을 희석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푸셔는 스네이크에게 훌륭한 견제세력이자 정치적 스승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세를 평평히 겨루는 편이 정국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았다. 어쩌면 19세기 중반부터 지금껏 부패의 길만 달려온 왕국 정치사가 새 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나는 하품했다. 이만 자자…….

디아나의 털을 말려 준 뒤 잠자리에 들었다. 꿈에서 나는 체셔 고양이가 되어 이상한 나라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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