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L.
화초에 물을 주다가 불현듯 놀랐다. 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라니. 내가 미소를 짓고 있다니.
왜일까. 간만에 눈이 그쳐 따스한 햇볕이 비쳐드는 오전이라서? 아니면, 모후에게 침을 뱉어 준 후련함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마냥 기분이 좋고 행복했다. 분무기를 다시 움직이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나는 부업 이야기를 재차 꺼냈다. 그러자 메사라는 신세진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잘라 말했다.
―동반자로 법적으로도 인정받았잖아요. 그리고 가사를 레이가 분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당연히 경제활동이죠. 현물을 못 만든다고 하여 경제활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입니다.
망설임 끝에 나는 메사라의 낭비벽을 지적했다. 메사라는 잠깐 침묵하더니 앞으로는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연봉이 25만 탈란텐이라며 이 정도면 웬만한 기업의 과장급에 속하는 액수니까 염려 놓으라고 덧붙였다.
새로이 둥지를 틀 가게도 구경했다.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였다. 메사라가 가리키기도 전에 가게를 알아보았다.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낡고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친숙했다. 저기다, 하는 예감이 바로 왔다.
메사라는 원한다면 2주 안으로 가게를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겨울이 한 달 남았지만 레이가 원한다면 빨리 해야죠. 아는 사람이 42번가에 작은 술집을 내려고 하거든요. 그 사람에게 레이의 헌책방을 보여 줬더니 반응이 좋았어요. 가게를 옮기는 일은 수월하게 끝날 것 같습니다.
나는 겨울이 끝날 무렵에 옮기자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작하고 싶었지만, 겨울에는 어디든 장사가 되지 않았다. 한 달간 병 치료와 원고에만 몰두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완치는 불가능하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만 병원을 오가게끔 병세를 호전시킬 요량이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사진도 촬영했다. 쑥스럽기도 하고, 이런 것까지 꼭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메사라는 의견이 달랐다.
―남들 하는 만큼은 형식을 갖춰야죠.
되레 적극적으로 사진가와 의견도 교환하고 액자틀도 고르며 몹시 즐거워했다. 사진은 이번 주 수요일에 나올 예정이었다.
온실을 돌본 뒤 차를 한잔 끓였다. 소파에 앉아 디아나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디아나의 촉촉한 코끝에 내 코를 비비며 눈을 감았다.
―앞으로는 행복하고 즐겁게 지낼 방법에만 몰두해요, 하하하.
메사라가 한 말이었다.
행복하고 즐겁게 지낼 방법이라……. 하도 궁핍하게만 살아온 탓인지 감이 안 잡혔다. 오늘, 아침식사를 하며 메사라는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곧 일이 한가해질 것 같으니 휴가를 내서 남국의 섬에서 놀고 오자며, 싫어도 같이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나도 해외여행은 서너 번이 전부였거든요. 그것도 일 때문에 간 거라서 이번만은 특별히 보내고 싶습니다. 팍스 신고 기념으로 이 정도는 해야죠.
여행 잡지를 넘겼다. 괌, 푸켓, 하와이, 무라노, 시칠리아, 카프리……. 카프리로 가고 싶었다. 하얗고 예쁜 집들과 어우러진 자연 풍광에 눈이 혹했다. 푸르디푸른 지중해도 왕국에서 구경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이곳으로 결정했다. 첫 여행에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밖에서 햇볕이 은은하게 쏟아졌다. 졸음이 몰려왔다. 완벽하진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지…… 하며, 단잠에 빠져들었다.
―그래, 내가 어떡하면 좋겠나.
―엑달은 아직 경에게 큰 위협을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울프삭이니까요. 하지만 3인방 중 경을 위험인물로 평가하는 유일한 인물이긴 합니다. 그래 봤자 소용없죠.
―소용없지, 암. 껄껄껄.
―여부 있나요. 우리의 총알받이는 다름 아닌 그 울프삭 아닙니까. 속이 타들어 갈 겁니다. 후후후.
나는 킥킥 웃으며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뭐……, 뭐지.
나는 천장만 응시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떠오른 이 기억.
마넨 경을 보좌할 때의 기억인가. 엑달에 관하여 토로하는 상황으로 보건대 보좌 초기의 일이었다.
그런데 저 기억 속의 나.
기분이 나빴다.
사악하다고나 할까. 교활하고 잔인한 느낌이었다. 마넨 경과 음모를 논의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전신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으슬으슬했다. 자작나무 가지 때문일까. 갑자기 마녀파티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녀파티.
이번 주 일요일에 바르디 공작가에서 벌어지는 파티였다. 저번 주 토요일, 병원 휴게실에서 인터넷으로 파티 기사를 읽는 순간 몰려온 흥분감은 표현할 수 없었다. 주술사 코트를 걸친 사람이라면 무조건 출입이 가능했다.
바르디 공작의 인기 때문에 가짜코트를 걸치고 파티에 잠입하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코트 감별사 탓에 대개 헛물을 켠다고 했다. 워낙 특이한 재질이라 위장코트 제작이 어렵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당연했다. 당나귀 가죽이니까.
주술사 코트는 당나귀 가죽에 검은 안료를 들이부어 만들었다. 이 시대에 당나귀 가죽 코트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내 것은 첫눈에도 긴 세월이 드러나는 낡아빠진 코트였다. 파티 잠입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손톱만치도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참아야 했다.
배가 고픈지 디아나가 울었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디아나에게 밥을 주었다. 밥을 먹는 디아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새 제법 자라서 통통했다.
정말 싫다…….
메사라가 내 숨겨진 얼굴을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자작나무를 없애기 위한 계약이었으나, 거기에 치졸한 복수심이 한몫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일찌감치 손 털고 나왔지만, 평생 남을 오점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것만 생각하면 한없이 우울했다. 밥을 먹던 디아나가 커다랗고 까만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사랑스러웠다. 사실 디아나는 못생긴 편에 속했다. 그러나 이토록 사랑스러운 건 눈빛이 맑아서일 것이다.
불현듯 메사라가 지적한 ‘씩’이 생각났다. 성마르고 교활하게 늙어 버린 얼굴을 갖고 싶지는 않았다. 주방 벽에 걸린 거울을 보았다. 평소대로 침울한 표정의 레이 아리사가 보였다.
“스마일.”
나는 거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웃으니까 더 멍청해 보였지만, 침울한 얼굴보다는 나았다. 레이 아리사의 외모에 가장 큰 불만이라면 역시 저 멍청한 눈빛이었다. ‘반항적’ 혹은 ‘날카로운’으로 흔히 수식되는 멋진 남자영화배우들의 눈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임스 딘을 떠올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곧, 자연스럽게 사는 편이 더 낫다고 결론지었다.
“흐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심심하던 참이었다. 이 표정 저 표정 지어 보았다. 이렇게도 웃어 보고 저렇게도 웃어 보았다. 바보 같긴 하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떠랴 싶었다. 이런저런 포즈도 취해 보았다. 웃겼다. 나는 연극 따위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듯했다. 거울로 디아나를 바짝 들이밀었다.
나는 연극조로 외쳤다.
“놀랐느냐, 디아나! 사실 넌 못생겼느니라!”
디아나가 킹킹거리며 눈을 피했다.
“귀여우니까 잡아먹어 주마!”
내가 외치자 디아나가 왈왈 짖었다. 연극놀이도 해 보니까 꽤 재미있었다. 나는 더욱 언성을 높였다.
“목욕을 싫어하는 죄다! 오늘 점심식사로 너를 스튜로 만들어 먹겠노라!”
“왈왈!”
갈수록 재미있었다. 디아나를 내려놓고 다시금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했다. 레비탄이 이 재미에 연극을 했나 싶었다. 아예 옷도 몇 벌 가져와서 본격적으로 1인극을 해 볼까 생각할 때였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화들짝 놀라 거실로 나갔다가 얼어붙었다. 메사라가 2층에서 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메, 메사라? 어, 언제 왔어요? 이 시간엔 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묻자, 메사라가 손에 든 노트북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중요한 파일이 든 노트북을 놔두고 온 것이 기억나서 급히 왔지요. 놀라게 했으면 미안합니다. 노트북을 챙기는 데 정신이 팔려서 레이한테 연락도 못하고 집에 왔네요. 동료들이 기다리니 이만.”
정말 급한 모양이었다. 메사라가 부랴부랴 현관을 나섰다. 나는 식은땀을 훔치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이었다. 메사라가 노트북을 챙기느라 정신이 팔려 이쪽의 원맨쇼를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꼴을 들켰다면 나는 며칠간 얼굴도 들고 다니지 못했을 터였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정말로 보지 못했을까.
보지 못했겠지. 그, 그랬겠지.
왠지 불안했다.
그날 저녁 메사라는 커다란 선물상자를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장자리에 가짜 진주가 가득 박힌 전신거울이었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