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M─
“아들을 보고 싶으면 법적 형사절차부터 밟는 것이 순서라고 제가 말했을 텐데요?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접근금지 처분명령 청구를 내겠습니다. 팍스에서 인증 받으면 제게도 권리행사권이 생깁니다. 주의해 주십시오.”
리에게 으름장을 놓고 수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뚱땡이만 떠올리면 열이 끓었다. 어제 계속 레이에게 뚱땡이에 대해서 캐물어 본 터였다. 뚱땡이가 다른 남자를 소개시켜 주마, 했다는 말에 나는 격분했다.
진정 엿 같은 부부였다. ‘형사처벌’ 운운한 나를 위험하게 여긴 것이다. 뚱땡이가 병원에서 레이에게 접근한 것도 남편과 상의하고 한 짓이 분명했다. 교묘하게 레이와 나를 떼어놓기 위해.
제 복을 걷어차셨군.
실은 레이에게 부모의 존재를 밝힐까 이따금 갈등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깨끗이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따위 음흉한 부모라면 아무짝에도 필요 없었다. 저쪽에서 먼저 자수하지 않는 한 레이에게 부모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위스키를 잔에 붓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설명하던 레이가 오늘 내내 눈앞에서 가시지 않았다. 기억을 잃은 와중에도 그런 책을 읽는단 말인가.
섬뜩하면서도 납득이 갔다. 아니,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전이라면 눈의 여왕과 관련된 복수심 탓으로만 치부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피가 물보다 진한 셈인가.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레이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소질을 무의식중에 갈고닦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의 모친은 결혼하기 전까지 전도유망한 평민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마넨은 령이 총명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령을 가르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노라고도 했다. 염병이었다. 마라타에게 제자를 갖다 바친 맹몬지 뭔지 하는 새가, 보통 눈썰미 좋은 황새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갈수록 기억을 되찾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최소한 기억을 잃기 전의 레이는 정쟁에 관심을 끊으려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하지 않았던가.
알고 있다. 나는 온갖 음모를 즐기는 주제에 레이만큼은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짓거리가 얼마나 웃기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싫었다. 무조건 싫었다. 딴 건 다 되도 주술과 정쟁만은 절대 안 됐다. 언령이 떠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다. 왕놈이 꾸민 저주사건이긴 하지만, 아무튼 레이가 자신과 동일시하는 눈의 여왕도 주술에 손을 댔기에 정쟁에 휘말려 죽지 않았던가. 레이가 그저 평범한 헌책방 주인으로서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다. 주술과 정쟁이 아니라도 재능을 펼칠 일과 공부는 많았다.
“있어?”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들어왔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음.” 했다.
“뭐냐. 벌써 독일에서 소식이라도 들어온 거야.”
“그건 아니고. 일단 현재는 티파티에 참가한 아이들의 유모들을 매수 중이야. 그런데 칼의 예전 자료를 재검토하다가 재미난 걸 하나 발견해서 말이지. 본부장님 예측이 맞나 봐, 후후후.”
쿠퍼헤드가 보고서 한 부를 툭 던졌다. 나는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포섭한 바르디 공작가의 하인이 증언한 자료였다. 평소 이리나가 오빠의 성벽에 근심이 많았으리라는 내 추측에 못을 박는 내용이었다.
이리나는 평상시 오빠의 티파티를 질색했고, 오바스카 양이 등장하기 직전에는 동양 무당들을 불러들여 야릇한 주술행위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그 주술행위에 칼을 억지로 데려와 마귀를 씻어 주네 어쩌네 쿵딱쿵딱 쿵따라라락 하며 난리를 치다가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바스카 양과 즐겁게 과자를 굽는다, 이 말이지…….
나는 픽픽 웃었다. 사치벽만 아니면 눈물 나게 착한 여동생이었다. 참 재미났다. 직속부하는 티파티가 벌어지는 회장 옆에 어린이 전용 놀이방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 놀이방으로 칼이 자주 사라지더라고 덧붙였다. 우리가 이제껏 입수한 비디오자료에서 그 놀이방은 제외되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10세 이하 코흘리개들이 뛰어노는 방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관찰하는 건, 아동심리 연구가들이나 할 짓이었다. 일단 오늘부로 몰카 설치는 끝냈다. 티파티는 다음 주 토요일에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칼이 약혼녀랑 사이가 좋잖아. 실컷 설치해 놨는데 도덕군자처럼 굴면 어쩌지. 뭐, 애들 입장에서야 다행스런 일이지만 우리로선 헛물켜는 셈 아닌가.”
쿠퍼헤드가 담배를 뽑으며 말했다. 나는 채찍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괜찮았다. 칼이 티파티에서 곱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예감이 그랬다. 암만 육체적으로는 어린 소녀일지언정 칼에게 오바스카 양은 대용품일 뿐이었다. 상상력만으로 버티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건 내 경험이었다.
솔직히 레이와 재결합한 초기에는 이놈의 지긋지긋한 사디스트 인생, 꼭 청산해야지, 하고 마음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레이가 선호하는 소박한 섹스에 눈 떠보려 무던히 애썼다. 오럴 섹스의 새로운 매력을 찾아보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소용없었다. 며칠 못 갔다. 내 기억에는 딱 하루 갔나 그랬다. 일생 최초이자 마지막인 내 사랑도, 들끓는 성욕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같은 성적소수자로서 자신했다. 칼이 곱게 애들을 쳐다보고만 있을 리 없다. 반드시 요상한 짓거리를 벌일 것이다.
아니, 칼이 아이의 허벅지에 손만 뻗어도 게임 끝이었다. 내 비디오 날조 편집 실력은 기자들 사이에서 호평이 자자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대중은 시시껄렁한 진실보다는 흥미진진한 거짓을 사랑하는 법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몇 천 년이나 수명을 유지하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하하하.
단단히 망신살이 뻗치도록 해 주지…….
“참, 알토넨에게 칼과 일절 만나지 말라고 지시는 했어? 뭐래?”
레오파드가 말했다. 나는 위스키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질겁하지. 야합 파트너가 소아성애자로 스캔들 터지면 자칫 덩달아서 똥물 뒤집어쓸지도 모르잖아. 뭐, 우리야 칼에게 언제나 시큰둥하게 반응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미리 입장 표명서는 준비해 둬야지. 최대한 신속하게 대응해야 속 편히 파티장을 활보할 수 있을 테니까.”
“파티장이라.”
나는 잔에 위스키를 들이부은 후 녀석들에게 건넸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씨익 웃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쨍, 하고 경쾌한 소리가 났다.
파티장 활보. 바로 그것이었다. 스캔들이 터지면 칼은 파티장 활보가 불가능했다. 도끼눈으로 노려볼 아이 부모들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그리고 왕국 정쟁판에서 파티는 필수요소였다.
즉, 칼의 정치생명은 끝장난 셈이나 진배없었다. 준비는 대강 마쳤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주일간 독일에서 올 연락이나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나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토요일이 왔다. 호랑가시나무를 뒤에 태우고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호랑가시나무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네가 진정 사람이냐”, 하며 연신 고시랑거렸다. 나는 “음.” 하고만 일관했다.
어쩔 수 없었다. 레오파드는 입이 무겁고, 평소 제일 가까이 두는 동료이며, 부장들 중 유일하게 레이에게 호의적이었다. 레오파드가 페이퍼를 흔들며 박장대소했다.
“명감독님답지 않게 인물설정이 졸렬한걸. 일렉스 스파르테, 포우 메사라의 직장 동료. 취미는 시간 나는 틈틈이 연애소설 쓰기. 연애소설 공모전에 몇 번이고 원고를 보냈으나 번번이 탈락. 애인을 간절히 구하나 싱글 생활 3년째. 애인이 없는 까닭은…… 으응? 배포가 너무 커서? 이건 뭔 소리야?”
레오파드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다니 역시 이놈은 노총각에서 탈출하려면 한참 멀었다. 나는 “음.” 하고만 조용히 대꾸했다.
병원이 가까워졌다. 휴대전화로 레이에게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십시오.” 하고 말했다. 레이를 태우고 팍스 신고센터로 향했다. 가는 내내 레오파드가 내 험담을 늘어놓았다. “스크루지 본부장이 오늘도 사격장에서 판돈을 모두 갈취하더라”, “과다한 업무로 사무직 대원들 과반수가 허리 디스크로 고통받는다”, 등등 온갖 날조비방을 일삼았다. 엿같았다.
“그나저나 저 녀석,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일이 잘 풀렸으면 레이와 내가 사귈 수도 있었고, 레이에게 마음을 품은 것도 이쪽이 먼저였는데 팍스 신고에 나를 증인으로 부르다뇨. 인면수심이 따로 없지 않습니까.”
“아하하. 그만큼 일렉스를 친근하게 여긴다는 뜻이겠죠. 일렉스도 얼른 애인 만들어요. 얼굴도 잘생겼으니 금방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여부 있습니까, 흐흐흐.”
일흔을 넘겨도 못 만든다는 데에 나는 오천만 탈란텐을 걸었다. 팍스 신고센터에 도착했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캐슬마인 부인과 합류해 센터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전쟁터였다.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한 낯으로 서 있거나 대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동거 커플들이 데려온 아기 울음소리, 꼬마들이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센터 천장을 찢었다.
대기번호표를 뽑았다. 2568번. 네 시간은 걸리리라 본 내 예상이 적중했다. 신고센터 밖 찻집에서 한참 노닥거린 다음 센터로 돌아갔다. 아직도 300여 명이 밀려 있었다. 숫자 하나 차이로 복권 1등에서 탈락해 버린 사람들처럼 모두 눈빛이 황폐했다.
일단 기다렸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서서 기다렸다. 30분이 지나자 신고센터에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픈 충동이 들끓었다. 45분째. 레이가 “디아나에게 아침밥을 평소보다 덜 주고 왔어요.” 하며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50분째. 캐슬마인 부인이 “관절염이 도진 것 같아.” 하며 내 팔뚝을 연거푸 꼬집었다. 55분째. 레오파드가 “갑자기 내일 특별 보너스를 지급받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하며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60분째. 염병할 주술사가 우리의 팍스 신고서류를 볼 일은 평생 없지 않은가, 하는 깨달음이 번개처럼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75분째. 반지로도 우리 애정은 충분히 보증받았건만 법적인 서류 따위에 꼭 목을 맬 필요가 있을까, 하는 갈등이 자꾸만 들었다.
80분째. 험상궂게 생긴 꼬마가 내 구두 앞코를 세게 짓밟고 두다다 뛰어갔다. 사과하기는커녕 저만치서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비열하게 씨익 웃었다.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하고 날아갔다. “당장 돌아갑시……!” 할 찰나, 전광판에서 2568이 탁 떴다.
“거주 증명서 지참해서 서류 내세요. 인증서 받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하급 문신귀족을 뜻하는 국화배지를 단 젊은 센터직원 새끼가 껌을 질겅거리며 말했다. 인증서 한 장 받는 데 15분이 또 하염없이 갔다.
“사인하시고 2층 인터뷰실로 가세요. 인터뷰는 번갈아서 진행됩니다.”
2층에서 또 40분을 서서 기다렸다. 차에 두고 온 권총이 간절하게 그리웠다. 20년간 사용할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에야 대기번호가 호명됐다.
이번에는 늙은 국화배지가 하품을 찍찍하며 나를 맞이했다. 3분간 성의 없는 질문을 두서넛 던지더니, 17분간 팍스 세금납부 의무를 어기면 어떤 법적보복이 오는지에 대하여 맹렬히 호통 쳤다. 탁자를 주먹으로 쳐대고 침 세례를 퍼부은 다음에야 나를 내보냈다. 좆같았다. 왕국의 행정기관에 죽치고 있는 무능력한 하급귀족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내가 인간이 아니었다.
센터를 나서니 5시였다. 예약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캐슬마인 씨와 약속한 시간을 두 시간이나 넘겨서 도착했다. 당연히 캐슬마인 씨가 안 보였다. 전화를 걸어 사과하고 레스토랑으로 다시 와 달라고 하자, 캐슬마인 씨는,
「이즈음 끝날 줄 예상하고 집에서 드라마 보고 있었지. 지금 가고 있네.」
하고 답했다. 역시 나이 많은 사람들은 노련미가 넘쳤다. 식사 내내 공무원들 욕으로 분을 풀었다. 적당히 대화를 즐긴 다음, 자리를 털고 나왔다.
잿빛하늘이 희디흰 눈송이로 조금씩 젖어 드는 밤이었다. 레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나는 카 오디오 볼륨을 높이며 말했다.
“피곤하지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꽤 걸릴 테니 레이는 눈이나 붙여요.”
“이거 좋네요. 뭐예요?”
“비발디요. 주고받는 보잉 선율이 익숙하죠? 《두 대의 첼로를 위한 협주곡》입니다.”
레이가 네, 하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나름 대론 특별하고 좋은날인데.
“병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표정이 영 안 좋네요?”
“아? 아, 그건 아니고. 졸려서요. 고작 두어 시간 서 있었다고 이리 졸음이 쏟아지다니. 운동부족이 심했나 봐요. 러닝을 더 늘려야 할까 보네요.”
레이가 웃으면서 답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급작스럽게 운동수위를 높이면 되레 역효과만 나죠. 조만간 헌책방 일을 시작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매일매일 출퇴근하면서 일하는 편이 집에서 한 시간 운동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나는 ‘헌책방’에 강조하며 레이를 흘끗 곁눈질했다. 레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얼른 일을 시작해야죠.” 하고 대답했다. 표정에서 의욕이 넘쳤다.
“사실 궁금해요. 42번가의 내 헌책방을 한 번도 못 봤잖아요. 그러고 보니 헌책방 이름도 안 물어봤네요. 어땠어요, 내 가게는?”
“흐흠. 레이의 헌책방은 그곳의 가난한 예술가들을 상대로 중고화집과 역사전문서적을 파는 곳으로 꽤 유명했어요. 겨울 불경기만 아니면 장사가 꽤 되는 편이라고 레이가 말했죠.”
“아아.”
“그 헌책방과 지금 옮기려는 가게 외양이 흡사합니다. 내일 한번 새 가게 구경하러 가 보죠. 30분 거리에 작은 미술전문대가 있어서 책 팔기에도 그만일 겁니다. 아, 그리고 레이의 헌책방 이름이 특이했습니다.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황무지에는 반지가 없다…….”
“어감이 무슨 고딕 소설에서 따온 문장 같죠. 그 간판도 그대로 가져옵시다. 낡고 이끼가 많이 낀 것이 고풍스런 멋이 넘쳐요. 이사할 때 레이도 42번가로 같이 가죠. 그래도 오랫동안 일하던 곳이니 한 번쯤은 봐 두는 게 좋겠지요.”
레이가 “그래요.”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핸들을 톡톡 쳤다. 차가 더럽게 밀렸다. 저만치서 제비꽃 성당이 보였다. 미사를 보러 성당으로 향하는 차 행렬인 듯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T필드로 돌아서 갈 걸 그랬나.
레이를 건드려 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좋은 날 아닌가. 집에서 정식으로 거창하게 한판 할 작정이었다. 플레이도 모두 구상해두었다. 레이가 평생 잊지 못할 기념비적인 밤을 선사할 각오였다.
“메사라. 저 성당 구경이나 하러 갈래요?”
레이가 불쑥 말했다. 나는 곡조에 맞춰 핸들을 두들기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제비꽃 성당은 왜요. 피곤하다면서요.”
“그냥…… 특별한 날인데 공무원들의 횡포만 기억하는 건 좀 그래서요. 나중에 이날을 떠올릴 때, 음, 성당에 들러서 성가를 들은 날로 추억하면 좋잖아요.”
레이가 우물거렸다. 나중에 이날을 떠올릴 때, 성당에 들러서 성가를 들은 날로 추억하고 싶다라……. 센스 꽝, 무드 꽝의 황제께서 하실 말씀이 절대 아니었다. 무슨 꿍꿍인지 훤히 보였다.
나 이렇게 잘산다, 이걸 ‘그놈’에게 보여 주고 싶다 이거로군.
집에나 가자고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어이가 없는 한편으로는 웃겼다. 이쪽을 흘끔거리는 레이의 주눅 든 표정까지 폭소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하하하.
뭐, 나쁘진 않지.
괜찮았다. 레이도 딴에는 복수(?)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몽에 끙끙대는 따위보다야 백만 배 진취적인 자세였다. 밀어 줄 가치가 충분했다. 담당의도 레이의 망상을 대놓고 무시하지 말라고 충고한 터였다.
“그러죠. 나도 제비꽃 성당은 한 번도 안 가 봐서 호기심이 생기네요. 뭐, 많은 왕족 무덤들이 그곳에 안치돼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눈의 여왕을 죽인 그 몹쓸 왕놈 가족들도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가는 김에 구경이나 할까요.”
“……네…….”
레이가 입술을 깨물며 눈초리를 세웠다.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기가 막혔으나 역시 폭소감이었다. 이런 것도 개성이라면 대단한 개성이었다.
성당이 인산인해였다. 부유층과 귀족들이 밀집한 33번가에 위치한 성당답게 미사를 보러 온 사람들 대개가 화려한 차림새였다. 낯익은 귀족들도 꽤 보였다.
이름난 성당답게 내부도 화려했다. 높이 치솟은 벽기둥에 이어진 웅장한 천장 벽화에는 나까지 잠깐 넋을 잃고 말았다. 미사를 앞두고 성가대원들이 한창 연습 중이었다. 파이프오르간에 뒤섞인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16세기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어요. 17세기부터는 쟁쟁한 왕족의 무덤들이 대거 이곳으로 옮겨졌고요. 데이탄즈의 부모도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다가 그 무렵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하더군요.”
레이가 설명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며 “레비탄은요?” 하고 물었다.
“그녀도 한때는 여기에 안치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있어요.”
“왜죠?”
“18세기의 명재상 드루레인이 다른 곳으로 옮겨 버렸거든요. 드루레인은 당시 키아라 프루고니 백작과 대립 중이었는데, 키아라는 데이탄즈 사후 18세기까지 번성한 레비탄의 가문 프루고니가(家)의 장남이었어요.”
“숙청작업이었군요.”
“정확하겐 왕정정치를 퇴출시키는 작업이었죠. 드루레인은 의회정치를 확립하고자 입헌군주제를 추진했어요. 39세의 젊은 명재상은 키아라를 숙청한 뒤 온갖 정치선전을 벌였죠. 이곳에서 레비탄의 무덤을 몰아낸 것도 그 정치선전의 일환이었어요.”
“호오, 드루레인이 그때 고작 서른아홉이었습니까? 괜히 명재상이 아니었네요. 그래서 프루고니 가문이 현 귀족가문에 존재하지 않는 거였군요.”
“그런데 지금 막 재미난 게 하나 생각났어요.”
“뭡니까.”
레이가 생각에 잠겼다.
“이거 참 재미있는데……. 드루레인의 풀네임이 드루레인 라스트렐리 푸셔예요. 즉, 현 로터스 푸셔가 바로 드루레인의 후손이죠.”
“푸하! 그랬습니까? 현 로터스께서 부정축재에도 관심 없을 만큼 돈이 썩어 넘치는 명문가 출신이란 이야긴 들었습니다. 드루레인의 후손이란 분께서 성형수술하다가 전신마비에나 걸리고…… 재미있긴 하네요, 하하하.”
배꼽을 잡는 내게 레이가 조용히 웃었다.
“푸셔는 겉보기처럼 물렁한 양반이 아니에요. 전신마비를 빙자해서 드러누워 있는 것도 실은 정교한 계산속으로 벌이는 짓일지도 모르죠. 이를테면 이이제이(以夷制夷)라든가.”
“하하. 하하하, 네. ……이이제이?”
나는 웃음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식당에서 레이와 마주보고 앉아 “한 시간 공부해서 일등…….”을 듣던 때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레이가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푸셔가 드루레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했는데……. 섣부른 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푸셔는 나이가 많은 만큼 눈썰미도 빼어날 거예요. 그런 자가 바르디 공작을 어떻게 보겠어요. 내 생각엔, 왕비의 유산 때 푸셔는 바르디 공작이 보통 욕심꾸러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아요.”
“…….”
“왕비의 유산은 절대 우연일 리 없거든요. 푸셔는 바르디 공작이 박쥐짓을 해대는 것도 눈여겨보았겠지요. 그러나 왕의 정부인 여동생에, 젊은 문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바르디 공작을 숙청하자니 애로점이 많았겠죠. 그래서 갖은 핑계로 병원에 길게 들어앉아서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며 바르디 공작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었어요.”
지금, 꿀 먹은 벙어리의 다른 이름은 스네이크였다.
“푸셔는 바르디 공작이 스네이크에게 스스로 달라붙게끔 교묘히 조종한 셈이죠. 공작은 푸셔의 입원이 절호의 기회다 싶어서 맘껏 날뛰었지만, 실상 그것은 되레 스네이크의 눈 밖에 나버린 결과를 초래했을 거예요. 스네이크는 왕의 정부 따위에나 기댈 남자가 아니에요. 왕비를 무신귀족 측에서 추대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죠.”
“…….”
“게다가 스네이크는 바르디 공작 제거에 한눈을 파느라 왕비옹립 문제에는 방심하겠죠. 그걸 계산한 푸셔는 스네이크에게 바르디 공작의 제거를 맡겨 버리고, 왕비옹립 작업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을 겁니다. 벌써 왕실주재 파티에서 미녀를 왕에게 접근시켰을지도 모르죠. 가만히 앉아서 실리를 취하는 셈입니다. 내 예측대로라면 푸셔는 대단한 능구렁이예요.”
동백나무숲.
전신으로 한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제야 깨달았다. 정답이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 마니아인 ‘로터스’ 드루레인. 일본식 부채가 트레이드마크인 ‘로터스’ 푸셔. 그리고 동백나무Japonica. 바로 ‘일본’이었다.
시대는 다르되 일본 취미만은 동일한 두 ‘로터스’의 공통점. 내가 마냥 무심하게 넘겼던 그 공통점을, 내 무의식이 동백나무숲을 앞세워 일깨운 것이다. 왜일까. 어쩌면 파티장을 어슬렁거리던 도중 언뜻 푸셔가 드루레인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주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잊어버린 거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쿠퍼헤드가 드루레인을 언급한 뒤에야 어렴풋이 기억해 낸 모양이다. 동백나무숲에서 기묘한 느낌이 든 때가 언제였던가. 왕비옹립 전쟁이 시작되면 푸셔도 외모고 뭐고 다 내팽개칠 것이다, 생각하며 차창 밖의 동백나무숲을 쳐다보던, 바로 그 순간 아니던가. 나는 은연중에 푸셔와 드루레인의 혈연관계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좆같았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단 말인가. 마누라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렸던 데이탄즈가 따로 없었다.
레이의 지적이 족족 들어맞았다. 칼이 우리에게 손을 내민 결정적인 계기가 푸셔의 애매한 태도 때문이었다. 대중에게 공개된 로터스의 근황 자료는 푸셔 측에서 제공한 영상들뿐이었다. 푸셔의 병실은 마누라와 딸, 담당의, 전속 간호사 한 사람만 출입이 가능했다.
즉, 그들을 제외하면 ‘전신이 마비된 로터스’를 목격한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조차 포섭한 병원 간호사를 통해 자투리 정보나 얻어낸 것이 전부였다. 모두 연극이었던 것이다. 염병할 연극이었다.
이 늙은이, 감히 내 손을 빌리려 들어?
꽉 쥔 주먹에서 핏대가 솟았다. 이런 치욕은 령 이후 처음이었다. 괜찮았다. 왕실주재 파티는 지금껏 고작 세 번 열렸다. 근 3주간 푸셔의 딸과 접촉한 인사들부터 훑어보기로 결심했다.
“메사라? 왜 그렇게 성가대원들을 노려봐요?”
레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별거 아닙니다. 성가대원들의 입이 굉장히 커서 놀라고 있었습니다. 먼 곳에서도 뻘건 목젖이 다 보이네요, 하하하. 그런데 레이가 정치에 확실히 관심이 많긴 하군요. 이런…… 휴게실에서 뉴스나 찾아보고 그랬던 겁니까?”
레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이번만은 후하게 웃었다.
“레이가 그렇게 재미있어하니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놀랍습니다. 견해가 꽤 재미나네요. 날카롭기도 하고요.”
“드루레인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걸음마를 뗄 때부터 정치를 배우면서 자라지 않았겠어요. 그런 양반이 요즘 같은 시국에 움츠러들어 있다니 상당히 수상쩍죠. 아무튼 그 할아버지, 연기력이 대단한 것 같아요. 드루레인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나도 여기까진 추측하지 못했을 거예요.”
마넨도 비슷한 타입이었지…….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누가 왕비로 선출될지 기대되는데요. 하하하. 내기합시다. 나는 내 직장상사에게 걸 테니까, 레이는 로터스에게 걸어 봐요.”
“그럴까요?”
레이는 그저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속으로는, 미안하지만 이 내기는 당신이 졌어…… 하면서 지그시 웃었다.
성가대원들의 연습이 끝나갈 무렵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당 지하의 왕족 묘소로 향했다. 묘소에서 상당수의 헌화객이 총총히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오늘 무슨 날입니까. 헌화객들이 많군요.”
“위령미사를 보러 온 사람들일 거예요. 오늘이 데이탄즈의 기일이거든요.”
“네?”
의외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렇지만 여긴 그놈이 없잖습니까. 자작나무숲에 묻혔잖아요? 아…… 그럼 부모의 무덤에 헌화를 대신한 건가.”
“정답의 반은 맞췄어요. 저길 봐요. 저 묘석 위에 뭐가 있는지.”
나는 멀뚱히 대리석 묘석 위를 쳐다보았다. 한 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노부부와 흑발의 젊은 사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첫눈에 알아보았다.
저 새끼로군…….
레이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완벽한 세계’를 존중한다면, 나름대로 레이의 첫(?)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몸 주고 마음까지 줬는데 잔인무도하게 차 버린 좆같은 새끼였다. 얼마나 잘났는지 두 눈 최대한 부릅뜨고 봐 주기로 했다.
재수 없게 생겨 먹었다. 눈 찌익 찢어지고 영화에서 흔히 묘사되던 대로 어깨까지 닿는 장발이었다. 찬찬히 뜯어본 후, 놈보다는 내가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얼굴부터 포우 메사라의 압승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레이의 복수(?)를 도와주러 온 자리 아닌가. 특별한 날이랍시고 옷에 신경 쓴 것도 호재였다. 이만하면 옛 남자에게 보란 듯이 자랑해도 나무랄 데 없는, 괜찮은 남자 아닐까 싶었다.
아니, 놈이 한평생 자식을 하나밖에 두지 못한 것으로도 승부는 이미 끝났다. 내 판단에 정부의 똥오줌 비린내는 잠자리를 피하기 위한 졸렬한 핑계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뻔했다. 고자였다.
암만 권세를 떵떵 떨치면 뭐 해…….
나는 픽픽 웃었다. 만약 우리가 헤테로이고 레이가 여자였으면, 나는 최소 다섯 번은 레이를 임신시켰을 것이다. 최대 축구단 규모의 메사라들을 낳아 길렀다. 자신 있었다. 벌써 하나 낳고 지금쯤 둘째아이로 레이의 배가 불러 있을 터였다.
자고로 집에서 유능한 남자가 사회에서도 유능한 법이다. 돈 코를레오네만 해도 뛰어난 사업가이기 전에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 아니던가. 막말로 은수저 물고 태어나면 뭔 권세를 못 떨칠까. 이모저모 따져도 맨주먹 하나로 시작해 권력의 정점까지 올라오고, 성기능도 우수한 포우 메사라가 수백 배 나았다. 레이는 두 번째 애인 정말 괜찮은 남자로 고른 거였다.
하여간에 엿 같은 새끼였다. 보석이 덕지덕지 붙은 왕관부터가 염병이었다. 나는 코웃음 치며 레이를 곁눈질했다.
레이는 무덤을 물끄러미 응시하고만 있었다. 레이의 안색에 서린 비감에 갑자기 가슴이 싸해졌다. 이쪽이야 웃기기만 할 뿐이지만, 레이는 진심인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주범들 중 한 사람의 으리으리한 묏자리를 지켜보는 시간이었다.
무덤 위에 왕 부부의 조상(彫像)이 누워 있었다. 모후는 남편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래에는 《Requiescat cum Sancits tuis in aeternum당신의 성인들과 함께 영원히 잠드소서》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만 나가죠.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군요.”
내가 말했다. 그때 레이가 무덤으로 침을 탁 뱉었다. 침이 모후의 뺨에 떨어져 선명한 얼룩을 남겼다. 나는 무심결에도 멈칫했다.
레이가 몸을 확 돌려 지하 묘소를 빠져나갔다. 나는 잠깐 뒤에야 황급히 움직였다. 레이를 뒤따라 성당 밖으로 나가는 내내 기분이 묘했다. 레이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충격이었다.
불시에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매섭게 따귀를 얻어맞은 것 같기도 했다. 평소 레이에게서 상상도 못해 본 모습이라서 그런가.
대체 어느 만큼이나 증오가 사무쳤기에…….
씁쓸했다. 가슴 한구석으로 심연보다 무거운 바위가 가라앉는 듯했다. 저 깊디깊은 슬픔과 분노는 레이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파생된 결과물이지만, 그 고통은 뼛속 깊이 사무치고 있는 것이다. 레이의 작은 전신을 무자비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아픔을 느낀다면, 제아무리 슬픔과 분노의 원인이 망상일 뿐이라도 소용없었다.
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암흑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처럼 선명한 저 환상을 어떡하면 거둘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막막했다. 죽음의 신이 내 전신을 낫으로 할퀴어버리는 듯한 절망감이 전신을 내달렸다.
나는 레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이것 외에는 달리 해 줄 수 있는 위로가 없었다. 레이는 내게 몸을 맡긴 채 침묵했다. 총총히 흩어지는 눈꽃들로 흑단빛깔 하늘이 하얗게 질려 가는 밤이었다.
나는 레이를 품속 깊숙이 끌어안으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괜찮아…….
내가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집으로 가지요.”
나는 레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홀연, 한줄기 바람이 내 목덜미를 스쳤다. 문득 기분이 아주 나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