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L.
“그럼 저녁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혹시 늦으면 연락할 테니까 치료 잘 받아요.”
병원 앞에서 메사라가 나를 내려 주며 말했다. 내게 키스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아침부터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뺨에 연거푸 입을 맞추기도 했다.
멀찍이 사라지는 자동차를 응시하다가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도 안 피곤한 기색이네…….
어젯밤 메사라를 상대하느라 진이 빠지는 줄 알았다. 평소에도 격렬한 섹스를 선호하는 사람이었지만 어제는 최고였다. 엄청났다. 죽는 줄 알았다. 어찌나 집요하게 밀어붙이는지 숨이 넘어갈 뻔했다. 내 비명에 놀란 디아나가 문을 긁으며 짖어 댈 정도였다.
그렇건만 저토록 쌩쌩하다니. 심지어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일어나 열광적으로 샌드백을 두들겨댔다.
서른쯤 되면, 그것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장인일 경우에는 정력이 감퇴하는 것이 보통이라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상식에 의심만 갔다. 아니, 저 왕성한 정력은 상식과 상관없었다. 스트레스가 유발한 단순 변태증세도 아니었다.
유전이었다. 틀림없었다. 이직이나 정신과 치료 따위로는 교정이 불가능한, 메사라의 체세포 깊숙이 들끓고 있는 본능이었다. 바로 어제, 거실 벽에 걸린 메사라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다가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버지와 메사라가 판박이였다. 단단한 장신에,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머니는 가냘픈 체격에 긴 금발이었다. 홀연 기시감이 스쳤다.
금세 깨달았다. 지금의 우리와 비슷했던 것이다. 메사라의 왕성한 정력은 유전이 틀림없었다. 메사라가 깨닫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상대방을 고르는 취향과 대담한 섹스까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는지도 몰랐다. 유난히 호사스런 부부 전용욕실을 비롯해 장롱에 가득한 수십 장의 수제 요 커버까지, 예전부터 수상쩍었던 하나하나도 심증에 확실한 못을 박아 주었다.
해결은 하나뿐이었다. 마늘과 호두의 집중적 섭취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섹스에 막 눈을 뜨고 그저 몽롱했던 3주 전을 돌이키자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어제 나도 네 번이나 가 버렸다. 그래도 며칠간 호두를 집중적으로 섭취한 덕인지 하늘이 노랗지는 않았다. 챙겨 온 호두를 가방에서 꺼내 먹으며 걸어갔다.
“저 사람이 남자친구야?”
돌연 옆에서 누군가가 확 튀어나오는 통에 화들짝 놀랐다. 카트린 부인이었다. 나는 “아, 네.” 하며 인사했다. 카트린 부인이 메사라의 차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치즈 바를 우물거렸다.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이제 겨우 여덟 시 반인데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잠이 별로 없어. 그러는 레이는?”
“저야 병원에 오려면 저 사람 출근길을 이용해야 하니까 할 수 없죠.”
“뭐하는 사람이야? 자기 남자친구.”
“그냥 직장인이에요.”
나는 얼버무렸다.
카트린 부인. 만찬회장에서 난동을 부려 가이거에게 체포당한 그 할머니였다. 저번 주 수요일, 폭식증을 치료하고자 이 정신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카트린 부인과 병원 휴게실에서 마주쳤다.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카트린 부인은 나를 보자마자 사과했다. 며칠 전에는 직접 수놓은 사과무늬 식탁보까지 내게 선물했다. 그래도 건장한 가이거 대원들이 카트린 부인을 제압하느라 애먹는 광경을 목격한 나로서는 부인이 겁날 수밖에 없었다.
카트린 부인이 치즈 바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직장인이라…… 어딜 다니는데?”
“작은 무술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쩐지 체격이 좋더라니……. 그런데 인상이 몹시 무섭던데, 용케 사귀네?”
“네? 인상이 몹시 무서워요?”
뜻밖이었다. 최근에는 나도 메사라가 겉보기처럼 마냥 부드러운 성격은 아니라고 판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인상은 친절하고 단정하지 않은가.
카트린 부인이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 더 꺼내 포장을 벗겼다.
“해살해살 웃는 얼굴과 달리 성깔은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눈초리가 잘 벼린 단검같이 아주 날카롭더라고. 저치가 그쪽에게 잘해 주긴 해?”
“하하.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아닌 게 아니라 보기와 달리 날카로운 사람이긴 하더군요. 제게는 잘해 줍니다.”
“다른 사람 찾아 봐. 1년이나 사귀었다면서 아직 팍스에 신고도 안 했다니, 뻔하지 않아? 벌이도 시원찮고……. 자동차도 싸구려 기종을 몰고 말이야.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을 하나 알아. 재산도 아주 많고 성격도 좋아. 내가 소개해 줄 테니 시간 내서 한번 만나 보지 그래?”
“……예에?”
어이가 없었다. 타인의 사생활에 이러쿵저러쿵하다니, 큰 결례였다. 캐슬마인 부인이라면 모를까, 카트린 부인은 두어 번 만난 게 전부 아닌가. 팍스 타령을 처음 꺼낸 사람도 카트린 부인이었다.
나는 불쾌감을 억누르며 “말씀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제 남자친구가 무슨 자동차를 타고 얼마나 벌든 부인께서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남자친구 경제력에 기대서 살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저도 곧 일을 할 예정입니다. 그럼 이만.”
카트린 부인을 떨쳐내고 병원 휴게실로 향했다. 오전 진료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구인란을 뒤졌다. 어제, 부업 이야기를 꺼내자 메사라는 질색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의향이 추호도 없었다. 더는 놀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흘 전, 디아나가 입는 《퍼피 엔젤스》 제품 드레스들이 사람 옷값보다 비싼 강아지 명품 브랜드라고 옆집 로렌스 씨가 알려 주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충격 받았는지 모른다. 메사라의 낭비벽을 그날만큼 절절히 실감한 때가 없었다.
카트린 부인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사실 메사라는 외출 전용의 최고급 자동차를 두 대나 갖고 있었다. 나로서는 걱정스럽기만 했다. 부자들의 소비야 미덕이라지만 우리는 소시민 아닌가.
한참 뒤졌지만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다. 한숨을 쉬면서 구인란을 닫았다. 메사라의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기초교육도 받지 못한 문맹인데도 맨주먹 하나로 시작해 지금의 집까지 장만했다고 메사라가 자랑했었다.
성의 없이 검색엔진 화면을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검색어 1위가 가이거였다. 뭘까, 하며 클릭했다. 가이거 공식 홈페이지로(깡패군단에게 공식 홈페이지가 있다니 놀라웠다) 연결됐다. 나는 호두를 먹으며 홈페이지를 살펴보았다.
재미있는 작자네…….
「손자병법」의 작전편(作戰篇)에서는 《지혜로운 장수는 나라에서 군사를 취하고, 군량은 적지에서 취한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스네이크는 지혜로운 장수였다. 스네이크가 추진한다는 보디가드 사업에서 반강제로 확보한 고객에는 문신귀족들도 많았던 것이다.
전문 보좌관을 모집하는 구인작업도 활발했다. 기존의 ‘대원’, ‘대장’ 같은 험악한 명칭들까지 한 달 뒤에는 ‘직원’, ‘사무장’처럼 유한 직함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기존의 깡패조직을 탈피해 본격적인 정치단체로 거듭나려는 시도였다.
예상 밖의 정보도 몇 건 건졌다. 올해 6월부터 평일 근무가 한 시간 단축되고 봉급도 무려 8퍼센트나 인상될 예정이었다. 나는 하마터면 스네이크에게 호감을 품을 뻔했다. 내친 김에 가이거 관련정보도 검색해 보았다.
기사들이 죽 나왔다. 극좌파 언론만 제외하면 대개가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의 내용이었다. 그래도 정쟁구도를 파악하는 데는 썩 어려움이 없었다. 데시벨이 옳았다. 가이거는 현 정쟁판에서 으뜸가는 세력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나는 칼 바르디 공작의 사진을 클릭했다. 단순 피아니스트 귀족이 아니었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여동생 덕에 최근 급부상한 젊은 세도가였다.
더 알아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진료시간 시작이었다.
오전 진료 중에 최면치료를 받았다. 긴장한 탓인지 최면이 쉽게 걸리지 않았다. 담당의도 섣부른 최면은 좋지 않다고 판단한 듯 금방 관두었다.
“역시 컨트롤 능력이 강하네요, 아리사 씨는. 최면이 잘 안 걸립니다. 다음 번 치료에는 마음 편안히 먹고 저를 신뢰해 주십시오.”
점심을 먹고 오후 진료를 받았다. 동물 키우기, 요리, 음악 감상 등으로 보내는 오후 진료는 재미있었다. 문제는 카트린 부인이었다. 온실과 조리실 근처에서 네 번이나 마주쳤다. 갈수록 거북해졌다.
아무리 봐도 카트린 부인은 나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금발만 보면 행패를 부린다’고, 부인의 아들이 했던 말이 떠오르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루이즈가 카트린 부인을 알아보고 안색을 바꿨다.
“조치를 취해야겠어요. 잠깐만.”
하더니, 병원 경비원들을 불러 부인을 끌어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후 진료를 마치고 도서실로 향했다. 딱히 관심 가는 책은 없었다. 기억이 끊기기 직전, 상담을 위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내가 말하자, 마넨 경이 추천했던 책이 기억났다.
―전통적으로 귀족들은 마키아벨리즘으로 무장하고 있지. 적을 알기 위해선 마키아벨리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빌려 도서실을 나왔다. 인터넷으로 부업을 알아보려 휴게실로 향했다. 이번에도 쓸 만한 자리는 찾지 못했다. 몇 군데 메일을 넣은 후 뉴스를 읽다가 칼 바르디를 검색했다.
꽤 영리한 작자네…….
나는 호두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사교계 데뷔부터 지금껏 있어 온 공작의 행보가 흥미로웠다. 그중 주목할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왕비의 유산이었다.
우연일까…… 하다가 멈칫했다.
《바르디 공작, 전생 체험을 고백!》
또 전생타령인가. 텔리니처럼 세간의 주목을 끌고자 귀족이 전생타령을 하는 일이 드물지는 않았지만, 바르디 공작까지 이런 쇼를 벌이다니 의외였다.
실소하며 기사를 클릭했다. 그러나 곧, 일거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럴 수가…….
「바르디 공작은 힌트만 흘릴 뿐, 전생체의 정체를 밝히기는 거부했다」라고 기사에 나왔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상인가문 출신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들어맞았다.
레비탄.
바르디 공작은 레비탄이었다. 데이탄즈에게 난쟁이와 광대들을 바치고, 매일같이 러브레터를 교환한 사람이 레비탄이었다. 왕이 여자관계만은 밝히지 못한 ‘근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연인에게 어찌 여자관계를 털어놓겠는가.
무엇보다도 왕의 서툰 서명. 그러나 정사에는 데이탄즈의 서툰 문재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놈은 자신의 결점이 타인에게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 완벽주의자로 유명했다. 측근에게 편지와 공문서를 작성시키고, 서명 대신 인장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전통상 신부에게 보내는 결혼요구서만은 반드시 그가 연애편지 형식으로 직접 써야 했다. 바르디 공작은 「저 말고 왕의 서명을 본 사람이라면 사실상 왕비뿐」이라고 했다.
레비탄은 데이탄즈의 엉터리 친필 서명을 본 두 왕비 중 한 사람이며, 나머지 한 왕비는 자작나무였다.
소름끼쳤다. 왕의 귀환이 임박한 사실도 모른 채 자작나무는 소녀형구를 쓰고 죽었다. 그 정황에 내포된 참뜻을 알게 된 때는 600년 뒤, 레이 아리사로서 환생하고 나서였다. 레이 아리사가 뒤진 수많은 책에는 자작나무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배후로 데이탄즈를 지목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나는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메사라였다.
―곧 병원에 도착합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요.
“네…….”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통화를 끝냈다. 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옛날 일이다. 이제 더는 레이 아리사와 상관없었다. 관계없다고, 전용병실로 돌아가는 내내 뇌까렸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 고개를 쳐드는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그라지기는커녕 갈수록 격렬해졌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자작나무를 그렇게 죽인 장본인이 진실로 데이탄즈인지, 꼭 알고 싶었다. 알고 있을 것이다. 50년이나 데이탄즈의 후처로 살았던 레비탄이 진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곧 나는 웃고 말았다. 알 수 있는 길이 요원하지 않은가.
하늘의 별이었다. 할리우드 스타였다. 바르디 공작에게 일개 평민 따위가 접근하기는 불가능했다. 편지를 써 봤자 수만 통의 팬레터에 묻힐 터였다.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실소를 흘리며 코트를 걸쳤다. 자작나무의 마녀 짓이 데이탄즈의 음모로 엉뚱하게 오해받고 있는 것으로나 쾌거(?)로 삼기로 했다. 하등 쓸모없는 쾌거였다. 기껏 발견한 왕궁의 개구멍으로 평민축제에나 놀러가다니. 탑을 탈출해 순진하고 성실한 농부를 꼬셔 새로 시집갈 궁리나 했었어야지.
기사에서 바르디 공작은 말했다. 다시 태어난 자신처럼 왕도 환생했다면,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600년이 지난 뒤에도 데이탄즈가 몹시 그리운 모양이었다.
옛 남편 찾아서 잘 놀아 보시지…….
나는 투덜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자동차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는 메사라가 저만치서 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막 도착했습니다.”
메사라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나는 차에 타려다가 흠칫했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카트린 부인이 보였다. 내 시선을 좇던 메사라도 카트린 부인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저 할망구가? ……혹시 아는 사입니까?”
“카트린 부인이라고 병원 환자인데 좀 으스스해요. 괜히 말을 걸고 달라붙는데 꺼림칙하긴 하더군요.”
“……카트린이라.”
메사라가 웃었다.
“흐흠. 언제부터 레이에게 달라붙었습니까. 계속 심하게 굴면 접근금지 처분 신청이라도 해야겠군요.”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요. 좀 이상한 분이긴 한데, 정신병원 환자잖아요.”
“네…….”
메사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순간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움찔할 만큼 섬뜩했다. 카트린 부인이 늘어놓은 메사라의 인상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나에 관해서라면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니까, 애써 생각하며 안전벨트를 찼다.
“힘없는 노부인이잖아요. 이만 가요.”
“그래도 의사에게 언질을 줘야겠습니다. 전화를 해야겠군요.”
메사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차창 밖만 응시했다. 기분이 안 좋았다.
내 알 바 아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분이나 전환할 겸,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꺼내 한 장씩 넘겼다. 내용이 익숙했다. 분실한 세월 속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던 것이 분명했다.
메사라가 이쪽을 흘끔거렸다.
“흐흠? 레이가 차에서 독서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데요.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봅니까? 꽤 재미있나 보지요?”
“음…… 막 읽어서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마키아벨리예요.”
“마키아벨리?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탐정소설갑니까?”
나는 웃음을 참았다. 비올라 성당 명칭을 물어볼 때부터 깨달았지만, 메사라는 역사나 인문학적 지식이 몹시 부족한 듯했다. 아니, 지식을 떠나서도 마키아벨리는 상식에 속했다. 이런 메사라의 면모가 되레 재미나고 엉뚱했다.
“아하하.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메사라는 퍽 극단적이네요.”
“호오. 극단적이라? 그렇게 보였습니까? 하하하. 뭐…… 부정할 순 없군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알긴요. 탐정소설에는 해박하면서 역사에는 매우 어둡잖아요. 관심 있는 분야는 준전문가 수준이지만 관심 없는 분야는 상식으로 통용되는 지식도 모르더군요. 솔직히 말해 봐요. 학교 다닐 때 역사 점수 얼마였어요?”
“거짓말을 못하겠군요. 언제나 에프였지요. 아니, 그런데 내가 역사에 어둡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전에 비올라 성당의 명칭 유래를 질문할 때 알았죠. 그 성당 명칭이 왕의 모후 이름이라는 사실은 유명한데 메사라는 제비꽃이라고 말했잖아요.”
“흐흠? 모후 이름이었군요. 하하하, 이거 그놈도 참……. 꼴에 효자였나 보네요. 그럼, 마키아벨리도 상식에 속하는가 보지요? 이 기회에 알아 두는 편이 좋겠군요. 어디 가서 상식이 부족하다고 핀잔 듣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메사라가 즐겁게 웃었다. 덕분에 우울한 기분이 그나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책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요.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이론가로서, 정치는 도덕에서 분리된 고유의 영역이며 군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 책은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이 된 그의 대표작이에요.”
“그렇군요…….”
메사라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잠깐 스치다시피 했지만 틀림없었다. 왜 저럴까, 생각하는 동안 메사라는 금방 미소를 머금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한데 레이는 환경이나 미술 쪽에 관심이 많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정치 관련서적이라니, 무슨 이유라도?”
“이유요? 글쎄……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재미라.”
메사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덧붙여 말했다.
“관심사에 꼭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그도 그렇지요. 한데 나는 레이가 정치 관련 서적을 읽는 게 썩 달갑진 않군요, 하하. 물론 지나친 참견입니다만. 이유가 궁금하진 않습니까?”
“뭔데요?”
메사라가 사이를 두고 침묵했다. 나도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메사라가 내 취미 생활에 지금같이 노골적인 거부감을 표시한 적은 처음이었다.
한동안 핸들만 톡톡 치던 메사라가 입을 열었다.
“내 직장이 바로 가이거 아닙니까. 온갖 추악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죠. 거기서 오랫동안 일하며 얻은 유일한 교훈이, 정쟁판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이가 그쪽엔 되도록 관심을 주지 않았으면 해서요.”
“…….”
“그 책만 해도 정치는 도덕에서 분리된 고유의 영역 운운하지 않습니까. 눈의 여왕에게 관심이 많은 레이도 잘 알 텐데요. 그 왕놈이 마누라를 어떻게 죽였는지 말이죠. 지금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네…….”
나는 낮게 대답했다. 책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예전에 읽은 것이 분명했기에 더 잡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메사라가 이렇게까지 질색할 줄은 몰랐다. 가이거를 매일 들락거리는 사람에게는 체감이 달라서 그런가.
그렇지만 지나친 염려 아닐까.
내가 정쟁에 뛰어들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책을 읽는 것뿐인데 저리 정색하다니. 메사라는 나를 아끼는 정도를 넘어서서 과보호하는 듯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대개가 교양서로 일독하는 책이었다. 물론 왕국의 정쟁에서 포퓰리즘과 흑색선전, 암살이 판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전부는 아니었다.
메사라가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괜히 딱딱한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하하하. 레이의 관심사에 내가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는 없는데 말입니다.”
“아니에요. 차에서 읽으려니 머리가 어지럽기도 해서.”
“흠……. 어쨌든 팍스 신고 말인데요. 모레 토요일에 진료가 끝나면 신고처로 갈 겁니다. 아, 보험혜택을 노리고 가짜 등록하는 사기꾼들을 방지하기 위한 증인제도가 있어요. 나와 레이 양쪽에 증인이 한 명씩 필요한데, 캐슬마인 부인과 일렉스를 불렀습니다. 캐슬마인 부인은 레이, 일렉스는 나를 증언해 줄 겁니다.”
“그들과 함께 가야겠네요.”
“그렇죠. 인터뷰는 증인과 신고자의 인적사항이나 성격 등을 묻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부인의 인적사항들을 정리해서 내가 페이퍼로 만들었으니 외워 둬요. 팍스 신고가 끝나면 캐슬마인 부부와 일렉스와 함께 저녁을 먹죠. 꽤 바쁠 겁니다. 하하하.”
메사라가 건네는 서류봉투를 받았다. 가슴이 설레는 한편으로, 넓고 높은 성당을 걸어가던 자작나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보다는 팔자가 좋아진 셈인가.
좋아졌지.
사실 이 정도면 아주 좋아진 거였다. 지금의 나는 연인과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바르디 공작이 얼마나 떵떵거리며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품는 행복감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믿었다.
나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공작의 정체에 경악한 아까보다는 차츰 머리가 식어 오는 것을 느꼈다.
메사라의 말대로 정쟁은 진흙탕이었다. 600년 전, 24세의 레비탄과 13세의 소년 왕은 왕궁 곳곳에서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며 사랑에 빠졌다. 그로부터 48년 뒤, 오랫동안 왕실재산을 빼돌린 죄로 왕실 시종장이 체포되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두 연인의 마술적인 만남도 맨얼굴을 드러냈다.
왕실 시종장의 장부에는 왕과의 우연한 만남을 주선하는 대가로 레비탄의 모친에게서 받은 거액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따위 어설픈 수법으로는 권력을 잡기 어려웠다. 시대가 변했다. 상식과 철학, 제도 그리고 사람들이 바뀌었다. 마키아벨리가 현 시대에 태어나 군주론을 집필한다면, 언론 용병술에 엄청난 페이지를 할애할 것이다.
나는 웃었다. 바르디 공작 관련기사들을 뇌리에 되살렸다. 공작의 속내가 단숨에 파악됐다. 퍽 영리했다. 왕비의 유산은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공작의 짓이었다. 분명했다. 아울러서 이번의 임신 발표까지, 바르디 공작은 여동생을 왕비로 옹위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그 자신이 왕비에 올라 권력을 움켜쥐고 영화를 누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절대 쉽지 않을걸…….
내 판단에 바르디 공작은 소심했다. 모험이랍시고 저지른 짓거리도 모두 치밀한 안전제일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게다가 막 귀국한 탓에 바르디 공작 주변에는 음모와 살인에 서투른 젊은 한량들뿐이었다. 공작이 문신과 무신의 야합을 추진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사에 실린 공작의 활짝 핀 표정을 보면, 스네이크를 폰Pawn으로 부려먹을 꿈에나 부풀어 있는 듯했다.
글쎄. 그게 과연 가능할까.
독불장군 울프삭마저 골로 보내 버린 저 잔혹한 스네이크가, 애송이 공작과 과연 손을 잡을까. 아니라고 보았다. 스네이크는 어둠 속의 하데스지만, 바르디 공작은 스포트라이트 아래의 피아니스트였다. 스네이크는 대중에게 두려움 받기를 원하고, 공작은 사랑받기를 원했다. 이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마키아벨리는 주창했다. 인간은 이해타산적인 존재이기에 이익을 취할 기회가 오면 사랑 따위 언제나 내팽개쳐 버린다. 반면,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므로 항상 효과적이다.
스네이크는 이것을 잘 꿰뚫고 있는 남자였다. 하물며 바르디 공작은 문신원로 푸셔를 여러 차례 배신했다. 정치에서 사랑은 언제든지 배신으로 직결될 수 있음을 몸소 시연해 보인 셈이다.
확신했다. 스네이크가 바르디 공작을 파트너로 선택할 리 없다. 빠른 시일 내에 바르디 공작을 숙청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르디 공작은 근본을 놓치고 있었다. 여동생을 왕비로 옹립시키면 권력쟁취 끝이라고 판단한 모양인데, 이런 오판이 없었다. 현대의 왕은 황금전쟁에 미쳐 날뛰는 귀족들의 체스말일 뿐이었다.
맘껏 까불어 봐라.
두 눈 똑똑히 뜨고 네놈의 파멸을 지켜봐 줄 테니…….
“으음? 갑자기 왜 그렇게 웃죠?”
메사라가 이쪽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레이답지 않은 웃음인데요. 아주 희한했어요. 처음 봅니다. 하하하.”
“어, 어땠기에 희한했다는 거죠.”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음모에 몰두하다가 지은 웃음이었다. 혹시 음흉하게 보이기라도 했나.
“뭐랄까…….”
메사라가 미간을 모았다.
“아, 그래. 그거 있잖습니까. 체셔 고양이. 체셔 고양이처럼 웃더군요.”
“……내가 방금 귀가 찢어질 정도로 크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단 말인가요.”
“하하, 귀가 찢어질 정도까진 아니었습니다만. 레이는 보통, 눈매를 반달 모양으로 접으면서 보일락 말락 웃는데, 지금은 살짝 이빨이 드러나게 웃더군요. 입꼬리도 귀 쪽으로 올라가고. 의성어로 표현하면 ‘씩’이랄까.”
씩.
내가 ‘씩’ 웃었단 말인가. 낭패였다. 그런 음침한 웃음을 메사라에게 들키다니,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싶었다.
“퍽 신선하긴 하더군요. 보일락 말락 미소도 좋지만 가끔은 그런 표정도 재미나지요. 그런데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씩, 웃었습니까.”
메사라가 짓궂게 ‘씩’에 강조하며 물었다. 나는 허겁지겁 페이퍼를 꺼내며 “디아나 생각이요.” 하고 둘러댔다. 메사라가 박장대소했다.
“디아나를 골려 줄 궁리라도 하고 있던 겁니까. 혹시, 똥오줌의 복수?”
“디아나가 목욕을 몹시 싫어해요. 욕실 문만 열어도 소파 밑으로 숨어 버려요. 웃기게도 내가 욕실에 오랫동안 있으면 디아나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문 앞에서 서성거려요. 나한테도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욕실을 고문실로 착각하는 것 같았어요.”
“호오. 그 조그만 아이가 주인을 그렇게 깊이 걱정해 주다니 대견한데요. 디아나가 셰퍼드였다면 굉장했겠습니다. 그래도 그런 미소는 습관이 되면 안 좋을 것 같군요. 왜, 그런 말 있잖습니까. 나이 든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고요.”
“……그러게요.”
나는 페이퍼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습관이 되면 안 좋을 것 같다니. 오죽 괴상하게 웃었으면 메사라가 저런 말을 다 할까. 그렇잖아도 침울한 레이 아리사의 얼굴에 음흉함까지 더해지면 큰일이었다. 나는 페이퍼를 넘기며 한숨 쉬었다.
이성을 찾자…….
한심했다. 시대가 변했음을 모른다며 바르디 공작이나 비웃을 자격이 없었다. 과거에 얽매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시대가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16세기 사람들에게는 삶이 곧 전쟁이었다. 전염병이 판쳤고, 대중의 으뜸가는 오락은 화형식 구경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열광적으로 종교에 빠져 있었다. 1536년 5월 19일, 영국 왕비 앤 볼린은 아들을 못 낳는 죄로 목이 잘렸다. 1572년 8월 24일,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대학살’로 14,000명의 신교도들이 구교도들에게 무차별 학살당했다. 게다가 몹시 더러웠다. 용변을 보고도 절대 손을 씻지 않던 시대였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좋은 시대지…….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도로가 정체될 기미였다. 벌써 메사라는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나도 드물게 성욕을 느꼈다. 정력이 왕성한 메사라 탓에 내가 먼저 성욕을 느끼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었는데, 오늘은 왜 이런지 알 수 없었다.
무심결에 메사라의 탄탄한 허벅지로 시선을 보냈다. 메사라가 눈치 빠르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단단히 발기한 물건이 손에 잡혔다. 메사라가 내 손을 이끌어 딱딱하고 굵은 페니스를 한동안 더듬게 하더니 더욱 아래로 당겼다. 탄력 있는 불알을 주무르게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창피했다. 메사라가 내게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몸이 녹는 것 같았다. 16세기에는 엄두도 못 냈을 행위였다. 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십자가 아래서 머리를 쿵쿵 찍어대며 울부짖거나, 혹 들켜서 화형당할까 봐 항시 오들오들 떨며 살았을 것이다.
아아…… 역시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생각하며, 나는 메사라에게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