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M─ (89/101)

9 .M─

진회색 하늘에서 눈꽃이 힘없이 떨어지는 초저녁이었다. 칼이 뇌물로 보낸 그림을 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위트릴로의 「뒤유의 교회」였다.

안목은 인정해 줄 만한 새끼였다. 원숭이나 엉덩이를 긁으며 기뻐할 현대미술 따위가 아닌, 값어치와 실용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그림이었다. 거실에 걸어 놓기 딱 좋게 사이즈도 작았다.

길이 징그럽게 막혔다.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고 차창을 열었다. 핸들을 톡톡 치며 바깥을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흐흠…….

멀찍이 떨어진 길목에서 붉은 벽돌 벽에 담쟁이덩굴이 가득한 고풍스런 가게가 보였다. 가게 앞에 쓸쓸히 선 가로등이며 외양이 레이의 헌책방과 흡사했다. 무엇보다도 《팝니다.》 푯말.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나와 가게를 훑어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사는 집에서 레이가 출퇴근하기에도 적당할 듯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약속한 동거 기간이 끝나가는 무렵이라 고민하던 참이었다. 이 가게라면 42번가의 헌책방을 팔고 새로 일을 시작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는 푯말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 구입 의사를 밝혔다. 내일 계약하기로 약속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차를 다시 출발시키며 생각에 잠겼다. 집으로 오는 길에 레이의 담당의를 면담한 터였다.

―아리사 씨가 자신을 눈의 여왕으로 믿고 있다면, 이제껏 메사라 씨에게 철저히 숨겨 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털어놓아 봤자 이해받지 못하리라 판단했겠죠. 아리사 씨는 지능이 높으며 매우 이성적인 성격입니다. 이런 타입의 환자는 자기 나름의 완벽한 질서로 구축된 세계관을 갖고 있기 마련이죠.

담당의는 이렇게도 말했다.

―아리사 씨는 자제력이 뛰어나고 문제점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경향도 강해요. 자신의 세계와 외부세계가 어긋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인식했을 테죠. 평탄한 삶을 위해선 외부세계 쪽에 맞춰야 한다고 판단하고, 눈의 여왕을 억누르고자 노력했을 확률도 높아요. 그 노력이 실패한 결과가 지금의 기억장애가 아닌가 싶군요.

담당의의 소견이 맞는 것 같았다. 내 강경한 요구에도 레이는 정신과 치료를 거부해 왔다. 어쩌면 그건 증세를 직접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나마저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감쪽같이 숨기고, 증세를 호전시키려 홀로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도 내겐 말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나뿐인 연인이다. 같이 살을 섞고, 동거까지 하는 사이였다. 내게만은 진실하게 고백했어야 옳았다. 일찌감치 내게 털어놓고 함께 해결하려 했더라면 지금의 상황까지는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묘지에서 있었던 사건만 해도 그랬다. 레이가 자신이 주술사라는 사실만이라도 내게 미리 털어놓았더라면 그런 참극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신중한 내가 령의 얼굴도 확인 안 하고 성급히 방아쇠를 당기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터였다. 그 참극을 뻔히 겪은 사람이, 왜 아직도 내게 뭔가를 숨기는 것일까.

왜. 무슨 이유로?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괴물이라도 되나. 하긴, 처음부터 내게 이름조차 말하지 않던 사람이었지. 쉬운 건 언제나 섹스뿐이었다. 가랑이는 쉽게 벌려 주면서 정작 중요한 건 절대 말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순간 분통이 확 터졌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침착하려 애썼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어쨌거나 지금은 병을 고치려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레이가 치료에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 루이즈의 말을 곱씹으며 울적함을 삭였다.

갈가리 흩어지는 희디흰 눈꽃 속에서 드디어 집이 보였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레이에게 “지금 들어갑니다.” 하고 말했다. 차고가 열렸다. 디아나를 안은 레이가 “어서 와요.” 하며 집에서 나왔다.

“차가 밀려서 늦었군요. 오래 기다렸습니까.”

“그래봤자 여덟 시 전인데요. 얼른 씻고 식사해요.”

씻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앉다가 나는 주춤거렸다.

“흐음? 이 사과무늬 식탁보는 뭡니까. 새로 산 겁니까?”

“아아, 이거. 병원 환자에게 선물 받았어요. 역시 메사라는 눈썰미가 좋네요.”

뜨끔했다. 모른 척하고 “눈썰미가 좋긴요. 하하하.” 하고 얼버무렸다. 양초에 불을 붙이던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썰미 좋은데요? 처음 보는 식탁보라고 알아맞혔잖아요. 그리고 식탁보를 갈 때마다 이건 새로 산 것, 저기서 산 것, 저건 어머니가 직접 만든 것, 말하지 않았어요? 남자들은 보통 식탁보를 갈아도 잘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그런 걸 눈여겨본 당신이 더 눈썰미 좋은 것 같습니다만.”

“아하하, 그런 셈인가요. 아무튼 놀랐어요. 한 번도 빠짐없이 알아맞혀서요. 특히 어머니께서 만든 식탁보는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까지 다 기억하더군요.”

“어머니께서 만들었으니까요. 집에 있는 수예품 대개가 어머니 작품이죠. 나는 어머니가 그것들을 만드는 모습을 자주 봤고. 아, 식사 식겠습니다. 먹죠.”

식사를 하며 대화도 나누었다. 요즘 레이의 최대 관심사는 디아나였다. 침실에서 디아나를 데리고 자면 안 되냐며 내게 넌지시 졸랐다.

“밤마다 문턱을 긁어대면서 우는데. 아직 새끼라서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나는 반댑니다. 버릇 나빠져요. 아직 똥오줌도 못 가리잖아요. 무엇보다도 암만 강아지라지만 생 포르노를 보여 줄 의향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반대. 절대 반대.”

나는 딱 잘라 대꾸했다. 레이가 불만스런 기색으로 과일주스를 홀짝거리다가 “아, 참.” 하고 중얼거렸다.

“텔레비전이 이상해요. 내일쯤 수리를 부를까 봐요.”

나는 와인을 마시다가 멈칫했다.

“……텔레비전이 이상하다니요.”

“공중파가 안 나오더군요. 공중파 말고도 다른 채널도 몇 개 안 나오고. 산 지 두어 달밖에 안 됐다면서요? 처음부터 불량제품이었나 봐요.”

나는 침착하게 웃었다.

“그냥 놔두십시오. 어차피 공중파는 재미없는 뉴스나 나오잖아요. 그리고 텔레비전 문제는 아닐 겁니다. 이곳 주파수가 좀 이상해서 공중파나 몇몇 채널들이 원래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네. 옛날부터 그랬어요. 그러니까 괜히 수리 따위 부르지 말아요.”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하는 기색은 썩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재빠르게 그림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끝내주는 모작인데 제법 볼만하다, 저렴하게 구입했다, 하고 거짓말을 쳤더니 레이가 단박에 흥미를 보였다.

식사를 마친 뒤 차 트렁크에서 그림을 가져와 레이에게 보여 주었다. 이번에도 레이는 옴짝달싹못하고 그림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습니까.”

“멋지네요…….”

“흐흠. 어디 다가 걸까요? 나는 이 작품이 오필리아보다 더 마음에 듭니다만. 텔레비전 위에 걸어 놓으면 근사할 것 같군요.”

그림을 텔레비전 위에 건 뒤 거실을 둘러보았다.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남부럽지 않은 명화 갤러리였다. 레이도 꽤 마음에 들어하는 표정이었다.

차를 끓여 거실 소파에 앉았다. 제법 괜찮은 저녁이었다.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와 아름다운 연인과 함께 여유를 만끽하는 이 시간이 퍽 좋았다.

디아나에게 새 드레스를 입혀 보기도 하고, 말도 가르쳐 주며 즐겁게 놀았다. 탁자에 호두 껍데기들과 수학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요사이 레이는 호두와 수학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특히 호두를 좋아했다. 내가 먹을세라 부지런히 먹어치웠다.

사실 오늘 본의 아니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분명히 아침에 챙겨 온 줄 알았던 서류가 정작 본부에 도착하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집에 놔두고 왔나 싶어 부랴부랴 감시화상을 켰다. 문제의 서류에는 레이가 봐서는 안 될 업무내용이 가득했다.

집에 서류가 있다면 얼른 캐슬마인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레이를 데리고 외출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레이는 주방 식탁에서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에 잡힌 실내 어디에도 서류는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서류를 자동차 뒷좌석에 던져 버리고 출발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치매인가, 하며 감시화상을 끄려는 찰나였다. 수상쩍은 광경을 목격했다. 레이가 먹고 남은 호두들을 챙겨 항아리에 넣더니, 싱크대 깊숙이 넣은 것이다. 한눈에도 호두를 숨기는 태가 분명했다. 엊그제 밤에 내가 호두들을 간식으로 모두 먹어 버렸더니 화가 난 듯했다. 조금 섭섭했다. 어쨌든 서류는 자동차에서 다시 챙겨왔다.

호두는 그렇다고 치고. 수학공부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할까.

소파 테이블에 널브러진 수학책을 들어 훑어보았다. 2층 서재에 있던 내 고등학교 수학교과서였다. 기분이 야릇해졌다. 중등수학도 아닌 고등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한단 말인가.

그럼, 점수나 한번 매겨 볼까…… 하며 빨간 색연필을 슥 들려는 순간, 레이가 섬광같이 책을 빼앗았다.

“색연필은 왜 들어요.”

레이가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어깨만 으쓱 올렸다. 레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새 가게 이야기도 슬쩍 꺼냈다. 근처에 괜찮은 건물이 저렴한 가격에 매물로 나온 것을 봤는데, 42번가 같은 슬럼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느니 이곳으로 옮기는 편이 어떠냐, 하고 슬쩍 운을 뗐다. 레이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겨울이 끝나면 이쪽으로 옮기죠. 당신은 몸이 불편하니까 가게 옮기는 일은 내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맞벌이가 생활에 훨씬 도움이 되겠죠. 사실 병원비며 생활비며 많이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서른 살부터는 세금도 많이 부과되잖아요. 메사라가 혼자 버는 돈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는데. 집에서 간단한 부업이라도 할까 고려하던 참이었어요. 봉투 붙이기라든가 조화 만들기라든가.”

또 궁상.

어안이 벙벙했다. 공중에서 눈사태가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쥐도 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업을 고려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봉투 붙이기나 조화 만들기를 하려고 했다?!

진정 빌어먹을이었다. 내가 참으로 절묘한 시기에 가게 이야기를 꺼낸 셈이었다. 안 그랬다면 또 레이가 집 안 가득 발 디딜 틈도 없이 봉투며 조화상자를 쌓아 두고서 얼른 거들라고 내게 호령했을지도 몰랐다.

“그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절로 실룩이는 입매를 필사적으로 관리하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부모님 유산이 넉넉하니까요. 그리고 봉투 붙이기나 조화 만들기 뭐, 그런 것들 돈 별로 벌지도 못합니다. 괜한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벌어 오는 돈 팍팍 부담 없이 쓰면서 원고 집필에만 열중해요.”

“그래도.”

“쓸데없이 부업이나 하면 스트레스만 받고 병에 안 좋은 영향만 끼칩니다. 병을 떨쳐내는 게 우선입니다. 그게 병원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죠.”

레이는 불만스런 표정이었으나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혀를 차며 커피를 마셨다. 정말이지 궁상이다, 궁상…….

말이 되는가. 손꼽히는 기업가까지는 아니지만 명색이 가이거 본부장이다. 은행 비밀금고에 갖가지 보석과 예술품, 현찰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은 재력가 포우 메사라의 연인이, 집에서 봉투를 붙여 먹는다? 기가 찼다.

아무래도 저 궁상은 가난의 부산물 따위가 아닌, 레이의 천성인 듯했다. 실은 온실에 텃밭을 가꿀 때부터 알아보았다. 내가 재력가임을 뻔히 알던 때도 그랬으니 내 정체를 모르는 지금은 오죽하랴 싶었다. 어쨌거나 세금 이야기는 잘 꺼냈다.

나는 잔을 기울이며 레이를 곁눈질했다.

“그렇잖아도 말을 꺼내려고 했습니다. 슬슬 팍스에 동거인 신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파, 팍스요?”

레이가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싱긋 웃으며 “네. 팍스요.” 하고 말했다.

“오는 토요일에 신고하러 가죠. 서류는 내가 전부 준비해 두었습니다. 동의서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 신고하면 레이는 법적으로 승인받은 내 동거인으로서 사회복지권 및 상속권, 보험혜택 등의 다양한 권리를 누릴 수 있어요. 세금혜택도 대폭 누릴 수 있고요.”

‘세금혜택’을 강하게 발음했다. 레이가 고개를 숙이더니 낮게 말했다.

“……그래요.”

레이의 뺨이 벌겠다. 벌게질 수밖에. 팍스는 몹시 보수적인 이 왕국이 동성애자들의 법적권리를 유일하게 보장해 주는 제도였다. 결혼 다음가는 법적 제도장치이기도 했다. 즉, 레이의 승낙은 나와 함께 오래오래 살겠노라, 이 뜻이었다. 법적으로도 인정받는 ‘가족’이 되는 것이다.

깊은 만족감이 전신을 감쌌다. 세상을 한 손아귀에 움켜쥔 기분이었다. 나는 레이의 뺨에 키스하며 미소 지었다.

하하하.

이거 정말 근사한걸.

텔레비전을 적당히 본 다음 화끈하게 잠자리를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레이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채널을 돌렸다. 볼만한 프로가 썩 없었다.

레이가 포크로 푸딩을 긁으며 말했다.

“우연의 일치지만 재미있네요. 그렇잖아도 이 식탁보를 선물한 분이 팍스에 언제 신고하냐고 묻기에, 거기까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거든요.”

“흐흠…… 식탁보를 선물한 분이 그런 것까지 캐물었습니까. 레이에게 관심이 많은가 보군요. 혹, 친한 사람?”

남자인가, 하는 반사적인 의심이 들었다. 하여간에 불치의 의처증 환자였다.

“친하진 않아요. 아무한테나 참견이 심한 할머니예요.”

“하하하. 할머니들이 다 그렇죠. 캐슬마인 부인을 봐요, 얼마나 참견이 심합니까. 우리 집에 후추가 몇 통 있는지까지 일일이 간섭하잖아요.”

문득, 팍스 신고를 안 했다고 내가 말하자마자 언제쯤 신고할 거냐고 되묻던 영감이 떠올랐다. 꼴에 자식 걱정을 했나. 나는 코웃음 치며 채널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푸드 채널에서 칼의 티파티가 나오고 있었다. 눈이 팍 썩었다.

당장 돌려 버리려다가 마음을 바꾸고 화면을 주시했다. 재포니카 당선 축하파티 때 느낀 기묘한 감각이 기억났다.

대체 뭐였을까, 그건.

“저 피아니스트가 귀족이었군요. 그런데 메사란 저 사람의 팬인가 봐요?”

레이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네. 뭐.”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화면만 쳐다보았다. 별반 특이한 점은 없었다. 바르디 가문에만 전수되는 치즈와 쿠키, 달콤한 차가 훌륭하다느니 어쩌니 설명이 이어졌다.

이리나가 등장해 음식을 소개했다.

―어머니가 생존해 계셨다면 훨씬 뛰어난 과자와 케이크를 선보일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제가 만드는데 어머니 같은 맛은 안 나오네요. 노력해야죠.

―귀족 영양께서 이 많은 과자와 케이크를 직접 굽는단 말입니까?

―가업이니까요. 우리 가문에서 처음 작위를 받으신 코벨 바르디 백작께서는 원래 궁정 요리사셨습니다. 척박한 15세기 왕실요리에 이탈리아 음식과 식기, 포크와 나이프를 처음 도입하셨죠. 저희 후손들은 어릴 때부터 전문 요리사 수준의 수련을 받습니다.

―그럼, 칼 바르디 공작께서도 요리 솜씨가 뛰어나겠군요?

이리나가 빙긋 웃었다.

―물론이죠. 전문 요리사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피아노와 연기뿐 아니라 요리까지, 매우 다재다능하신 분이로군요. 이러다가 약혼녀께서 주눅 드는 거 아닙니까?

―그렇잖아도 제가 직접 오바스카 양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업을 전수해야죠. 오바스카 양의 감각이 좋아서 가르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후후후. 다음 번 티파티 때는 오바스카 양과 함께 과자와 케이크를 구워 볼까 해요.

리포터가 「네…….」 하며 어물거렸다. 나도 내심 놀라 버렸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화려한 이리나로서는 외모가 변변찮은 올케가 몹시 창피하리라 짐작했다. 한데 이리나가 직접 오바스카 양에게 요리를 가르치고 있다? 이건 오바스카 양을 당당한 바르디 공작부인으로 환영하고 있다는 의미 아닌가.

다시 칼이 등장했다. 화면 하단에 [다음 방송 : 신비로운 동양음식의 세계]가 떴다. 프로가 끝나 간다는 뜻이었다. 갑갑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담뱃갑을 꺼내려다가 손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수확 없이 끝나는가…….

어차피 상관없었다. 화면에서 즐겁게 떠들고 있는 칼은 추호도 모를 것이다. 오늘이 칼의 데드라인이었다.

데시벨의 돼지 캐리커처가 결정타였다. 더는 미적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칼 암살 작업에 들어가기로 부장들과 결정한 참이었다. 살고 싶으면 지금 꼬리를 드러내는 편이 좋았다.

너도 좋고 나도 좋으려면 말이지…….

픽픽 웃을 찰나, 화면에 콧물을 질질 흘리는 아동들이 등장했다. 까악까아아악 소리가 악마의 날갯짓처럼 힘차게 울려 퍼졌다. 나는 황급히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볼륨을 낮췄다. 레이가 “저 귀족님, 좋은 사람이군요.” 하고 말했다.

“오늘 낮에 이웃집 부인의 부탁으로 한 시간 가량 아이를 돌봤거든요. 어찌나 시끄럽고 난폭한지 열 시간은 중노동한 기분이었어요. 아이를 정말 좋아하나 봐요, 저 사람.”

“그러게 말입니다. 직접 푸딩을 굽고 차까지 끓여서 아이들을 대접하다니, 훌륭한 아빠가 될 것 같긴 합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화면이 바뀌며 십 대 귀족들이 등장했다. 정신 사납던 화면에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 아동들에 비해서는 그나마 덜 떠들었다.

칼이 소년소녀들에게 둘러싸여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 잔을 들다가 멈칫했다.

이거다.

재포니카 당선 축하파티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바로 그 광경이었다. 나는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여기서 뭔가를 얻어 낼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예감이 그렇게 소리쳤다.

카메라가 칼과 소년소녀들을 연거푸 번갈아서 보여 주었다. 소년소녀들 사이에서 문득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집중한 와중에도 나는 실소를 흘렸다. 오바스카 양이었다.

어쩐지 카메라가 칼과 아이들을 유난히 번갈아서 비춰 준다 싶더니, 오바스카 양 때문이었다. 나름대로는 약혼커플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주려는 연출이었던 것이다. 의도는 가상하지만 카메라 감독은 헛수고만 했다. 어찌나 체구가 작은지 오바스카 양과 아이들 사이에서 위화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가 인정한 눈썰미의 황제인 내가 오바스카 양과 아이들을 한참 뒤에야 분간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할 터였다.

…….

목덜미로 한기가 확 쏠렸다. 나는 무심결에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버렸다. 레이가 이쪽을 쳐다보며 “웬 담배?” 하고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잠깐 자리를 피해요. 담배연기는 레이에게 안 좋으니까.”

“가끔은 괜찮은데요. 여기 재떨이.”

레이가 테이블 아래에서 재떨이를 꺼내 이쪽으로 밀었다. 나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전율이 온몸을 들끓었다.

일련의 그림들이 눈앞을 줄지어 스쳤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칼 앞에서 조카와 함께 걸어가던 오바스카 양. 소년소녀들에게 둘러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던 칼. 그 시점에 야릇한 기시감이…….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가 “메사라?” 하며 미간을 모았다.

“직장에서 못 다한 일을 가져왔거든요.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레이는 텔레비전 보면서 놀고 있어요. 자.”

나는 디아나를 레이의 품에 던지다시피 덥석 안겼다. 재떨이를 챙겨 2층 서재로 올라가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꺼내고는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았다.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과녁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처음부터 내 직감이 옳았다. 파편처럼 흩어져 떠돌아다니던 숱한 단서들을, 눈앞에서 놓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국은 상식이 들어맞았다. 왕국 귀족사회에서 티끌 없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상식이 적중한 것이다. 그래도 경솔한 단정은 금물이었다. 명제를 연역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순서였다.

메모용지를 꺼내 아무렇게나 끼적거렸다. 직감이 정답으로 인도했듯, 검증도 무의식에 맡겨 버릴 작정이었다. 레이 못지않은 엉망진창의 솜씨이되 손은 빠르게 그리고 명확히 하나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였다.

역시…….

나는 차갑게 웃었다. 재포니카 당선축하 파티에서 나를 덮친 기시감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건 바로 루이즈의 발언이었다.

루이즈가 언젠가 언급한 루이스 캐럴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모든 힌트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캐럴은 앨리스뿐 아니라 여러 소녀들을 귀여워했대요. 소녀들을 위한 장난감과 놀이기구, 심지어 소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 옷을 걷어 올릴 수 있도록 옷핀까지 항시 가방 안에 구비하고 다니고, 마술쇼와 티파티도 자주 열었다나요.

어린 소녀. 그리고 티파티.

루이스 캐럴의 티파티가, 소년소녀들에게 둘러싸여 피아노를 연주하는 칼에게 겹쳐 든 것이다.

하하하.

광소를 터뜨리고 싶었다. 희열과 황당함과 신기함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기세가 폭풍 같았다. 역시 신께서는 포우 메사라의 편이셨다. 이번에도 생각지도 않은 단서를 툭툭 던져 이 악당을 성공적인 음모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순리를 거스른 사랑’의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리는 순간이었다.

순리를 거스른 사랑. 답은 간단했다.

칼은 소아성애자였다.

착착 들어맞았다. 칼이 숱한 귀부인과 게이 귀족들의 유혹을 마다한 이유. 가이거의 집요한 감시하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티파티를 열어 귀부인과 아이들을 초대한 진짜 속셈.

그리고 숱한 미녀들을 내팽개치고 오바스카 양을 선택한 까닭까지.

오바스카 양은 동안에 체구도 몹시 왜소했다. 어린 조카와 체구에서 별반 차이가 없었다. 푸드 채널에서도 소년소녀들과 구분이 안 갈 만큼 동안이었다. 생물학적 나이를 깨끗이 잊고 겉만 보고 판단한다면, 오바스카 양은 어린 소녀나 다름없었다.

상상력과 관점의 문제였다. 오바스카 양은 칼의 앨리스였던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시선에는 왜소한 노처녀일 뿐인 그녀가, 소아성애자의 눈에는 얼마나 ‘미녀’로 보였겠는가. 나이만 많을 뿐, 껍데기는 어린 소녀 아닌가. 그러고 보면 우리가 검토한 도청자료도 참으로 소름 돋았다. “나의 아기! 오오, 귀여운 나의 아기!” 하면서 꼴깍꼴깍 울부짖었다.

이리나가 올케를 환영한 까닭도 아귀가 들어맞았다. 이리나가 오빠의 괴이한 성벽을 모를 리 없었다. 근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오빠의 성벽에 딱 들어맞는 성인여성이 나타나 줬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나는 지그시 웃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칼과 부대낀 아이들을 들쑤셔 보면 그만이었다. 독일에서 터진 일도 칼이 부인의 아이를 건드린 탓이 분명했다. 이거 은근히 재미난 자식이었다.

아니, 대단한 자식이었다. 적어도 작업 솜씨 하나만은.

내 판단이 맞는다면, 칼이 파티에서 여러 차례 아이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정교한 계산속에서 나온 행위였다. 변태들이 포진한 귀족사회에서 소아성애자는 흔했다. 따라서 칼은 일부러 파티 때마다 피아노를 연주하여 ‘아이들을 플라토닉하게 사랑하는 착한 오빠’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천천히 주입시킨 것이다. 일종의 세뇌행위였다. 그렇게 아이 부모들이(나까지 포함해서) 경계심을 풀게끔 유도한 뒤, 티파티를 열어 아이들과 행복하게 뒹굴었다.

나는 픽픽 웃었다. 실크바지를 입고 비음을 킁킁거리던 칼이 떠올랐다. 나긋나긋한 어린 소녀는커녕, 193센티에 탄탄한 체격의 깡패두목을 유혹하고자 실크바지 입고 설사약 챙기는 내내 얼마나 울적했을지 안 봐도 훤했다. 끔찍하게 웃겼다.

그래도 하나가 걸렸다. 동백나무숲. 그건 뭘까. 드루레인의 ‘세뇌’와 칼의 세뇌작업이 겹치면서 나온 단순한 연상작용이었나.

어쨌든…….

나는 손을 깍지 끼며 웃음을 흘렸다.

너는 이제 끝났다. 개망신 당할 일만 남았다. 그래도 명줄 하나는 질긴 새끼였다. 데드라인에 딱 맞춰서 꼬리를 밟히다니. 덕분에 나도 좋게 되었다. 인기스타의 암살로 민심을 잃어버리는 짓은 면하게 된 셈이었다. 속이 아주 후련했다.

“메사라?”

레이가 쟁반을 들고 서재로 들어왔다. 페일 에일 한 병과 유리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거라도 마시면서 일해요. 여긴 난방이 잘 안 되잖아요. 맥주로 몸을 데워가면서 일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하하. 그러죠.”

나는 기분 좋게 페일 에일을 마셨다. 맛이 괜찮았다. 레이가 “그런데 이건 뭐죠.”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모 용지를 들어 훑어보았다.

“아하하? 이 그림은 뭐예요? 웬 여자애?”

“별거 아닙니다. 일하려니까 지겨워서 딴청을 피우던 중이었어요. 망할 놈의 본부장. 이게 다 구두쇠 직장상사 탓입니다. 집에서까지 일해 봤자 따로 수당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너스레를 떨며 레이에게서 메모 용지를 슬쩍 빼앗았다.

“한데 메사라도 그림 솜씨가 엉망이군요. 하하, 머리카락만 아니었으면 버섯동자로 착각할 뻔했어요.”

“사실 미술점수가 엉망이긴 했습니다. 이만 나가지요. 그냥 쉬는 게 좋겠군요.”

페일 에일을 남김없이 털어 마셨다. 레이와 함께 서재를 나섰다.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정적을 숙청할 때가 눈앞에 다가오면 으레 맹렬한 성욕이 들끓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레이를 확 들어올렸다. 레이의 낯이 벌게졌다.

“아, 아직 초저녁이에요.”

“오늘은 일찍 자야겠습니다.”

레이를 안고 침실로 직행했다. 달려가다시피 했다. 코털 빠지도록 나를 맹렬히 추격하는 디아나를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침실 문을 꽝 닫았다. 레이의 가랑이를 신나게 탐하고 수면을 푹 취한 다음, 내일 아침 부장들에게 멋진 소식을 알릴 작정이었다. 벌써부터 아주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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