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L. (88/101)

8 ─L.

“뭐 하고 있어요?”

메사라가 병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나는 “어서 와요.” 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웬 수학문제를 그렇게 열심히 푸는 겁니까? 담당의가 시킨 일인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정서안정을 위해서.”

“그래요? 나는 수학책 표지를 보면 정서가 불안해지던데.”

메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코트를 걸쳐 주었다. 나는 수학책을 덮고 메사라의 뒤를 따라나섰다.

메사라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내게 선물을 안겨 주긴 했으나,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극심해서일까. 요 며칠간 계속 저랬다.

나는 선물을 풀어 보았다. 강아지용 드레스 두 벌과 장난감, 동화책 네 권, 구두 한 켤레였다. 선물보따리를 다시 봉한 다음 창밖을 응시했다.

수학문제 풀기는 자작나무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이었다. 우뇌는 직관력 같은 본능적인 감각을 관장한다. 좌뇌는 현재의 문제를 처리하는 실무적인 업무를 다룬다. 즉, 발달한 직관력인 ‘오르키투니카’는 우뇌기능의 연장선상에 속했다.

투시능력을 활성화하려면 좌뇌를 고요하게 가라앉혀, 우뇌를 향한 좌뇌의 간섭을 억제시키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가장 주효한 수법으로 통했다. 따라서 투시능력이 필요한 수정구 주술사들은 잔잔한 수면을 본다거나 촛불을 지그시 응시하여 좌뇌의 움직임을 가라앉혔다.

역으로, 좌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수학문제를 풀거나 원고를 쓰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추정했다. 이렇게 판단한 후, 병원에 올 때마다 틈틈이 수학문제를 풀었다. 원고 집필에도 더욱 몰두했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자작나무가 나를 골탕 먹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멈칫했다. 또 빌어먹을 성당이 저만치서 보였다.

“……이 길 말고 다른 길로 둘러 갈 순 없나요. 전에는 다른 쪽으로 갔었다고 기억하는데.”

“아아. 그쪽이요? 물론 그쪽으로 둘러 갈 순 있긴 합니다만, 이 길이 지름길이니까요. 지금 시간이 꽤 늦기도 하고, 사실 전에 둘러 갔던 그 길은 좀 찝찝해서.”

“찝찝하다니요?”

“별건 아닌데. 그쪽 길에 안 좋은 소문이 무성해요. 유령이 나온다나요. 뭐, 나는 유령을 믿지 않지만 거기에 유난히 자살자나 사고가 많긴 해서요. 레이는 모르겠지만, 운전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괴담이 꽤 먹히거든요.”

“그래요? T필드인가 보네요. 그럼 그쪽 길로는 가지 말아요.”

“내가 괜히 겁을 준 모양이로군요. 그런데 T필드는 또 뭡니까? 역시 유령 출몰지대?”

“음.”

나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유령은 아니에요. 죽은 사람들의 사념이 잔류로 쌓인 장소를 말하죠. 그런 곳에서는 강력한 마이너스 에너지가 발생해서 사고가 자주 나죠. 그런 장소를 T필드라고 불러요.”

“호오, 그렇습니까. 그나저나 레이는 엉뚱한 지식을 정말 많이 압니다.”

메사라가 어이없어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쓰게 미소 지었다. 내 오르키투니카가 투시였다. 그런 쪽 지식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차창 밖 성당을 응시했다. 핸들을 돌리던 메사라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전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요.”

“궁금한 거라니요?”

“저 성당 이름 말입니다. 제비꽃이요. 특이하지 않습니까. 성당에는 보통 성인의 이름을 붙이기 마련인데 무슨 의미라도 있었을까요.”

“알게 뭐예요.”

나는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알게 뭐기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저 성당 명칭의 유래를 모른다니, 메사라는 역사시간에 잠만 잔 것이 틀림없었다.

비올라는 데이탄즈의 모후 ‘바이올렛’의 라틴어 표기였다. 놈이 사제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성당 명칭을 비올라로 정하자, 모후는 매우 흐뭇해했다고 한다. 역시 짜증났다. 가족들에게는 그렇게나 잘해 준 새끼가, 자작나무에게만은 밥 먹을 돈조차 제공하길 아까워했다.

나는 뺨을 찰싹 때렸다. 생각하지 말라니까.

“흐흠…….”

메사라가 나를 흘끔거리며 코웃음을 흘렸다.

“다른 길로 둘러 가자고 한 게 저 성당 때문인가 봐요? 레이가 눈의 여왕 팬이니까……. 저 제비꽃 성당을 그 왕놈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습니다. 뭐, 신경 쓰지 말아요. 듣자하니 물건도 변변찮은 양반이던데. 하하하.”

메사라가 유쾌하게 웃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네? 뭐가 변변찮다고요?”

“뭐긴요. 아랫도리지요. 놈이 괜스레 정부의 땟물을 핑계로 잠자리를 그리 꺼려했다면서요? 아이를 덜렁 하나만 낳은 것도 요상하고…… 하하하. 뻔한 거 아닙니까? 제 새끼발가락만 한 놈이죠.”

“…….”

“들어 보니까 왕놈의 정부 친정집이 무진장 부자던데. 뭐, 그러니까 레이도 왕이 정부를 둔 건 말 잘 듣는 평민머슴들을 끌어들여 골치 아픈 문신, 무신들이나 다스리는 데 부려먹고자 한 심산이었으려니, 하고 속 편히 생각해 버려요. 거시기도 안 하고 연인관계를 오래 유지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사랑과 그쪽의 욕구는 비례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상식.”

메사라가 내 다리 사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낯이 화끈거렸다. 사랑과 그쪽의 욕구는 비례하는 것이 상식이다라……. 참으로 메사라다운 주장이었다.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내게 덤벼드는 사람다운 발상이었다.

메사라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사랑과 섹스는 별개인 경우도 엄연히 존재했다. 자작나무가 가면무도회에서 본 그들은 끔찍하게 열렬한 연인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사랑이 존재하는’ 앙리 4세와 마르고 왕비1)에 종종 빗댔다. 사랑은 한 사람에게, 성욕은 여기저기서 실컷 해결한 것이다. 그리고 아이 문제는 왕세자 출산 얼마 뒤, 평소 앓아온 잦은 성병과 고령으로 레비탄이 불임을 판정받은 탓이었다.

그래도 놈의 욕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메사라가 카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부드러운 왈츠 선율이 차 내부를 감쌌다.

“암만 커다란 왕관 쓰고 비단옷 걸쳐도 그걸 못하면 소용없지요. 하하하.”

“그러게요.”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메사라가 내 팬티를 발목까지 끌어내렸다. 나를 자기 허벅지 위에 앉히며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단단한 가슴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메사라는 변태성욕자답게 잠자리에 욕심이 많았다. 내가 자기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행동해 주기를 원했다. 그뿐 아니라 내게 가르치기까지 했다. 애무하는 방법이며 오럴이며 다양한 섹스테크닉을 가르치며 즐거워했다. 정말이지 기운이 넘치는 남자였다. 루이 14세처럼 일흔까지 정력을 과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엉뚱한 고민도 들었다. 지금이야 나도 메사라와 나누는 잠자리가 즐겁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떡하나 싶었다. 메사라는 함께 절정을 맞이하길 좋아해서 나도 여러 번씩 가기 일쑤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이면 모르되, 거의 매일 잠자리를 하려니 부담스러웠다.

실은 요즘 이따금 하늘이 노랬다. 마늘과 호두의 집중적 섭취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요즘이었다. 이런 고민에 골몰하는 내가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메사라의 품에 안기며 성당을 곁눈질했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거대한 성당이, 겨울비를 맞는 길 잃은 고양이처럼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다음날, 캐슬마인 부인과 함께 마트로 갔다. 식료품을 고르며 호두도 샀다. 오후 내내 호두를 깠다. 퇴근한 메사라와 저녁을 먹은 뒤 디아나와 장난치며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냉장고를 여는 순간 아연해졌다.

호두가 한 알도 없었다. 마침 주방으로 들어서던 메사라가 유쾌하게 말했다.

“생각할 게 있어서 어제 레이보다 조금 늦게 잠들었는데, 간식삼아 먹다 보니까 동나 버렸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워낙 좋아해서 어릴 적에 거의 매일매일 먹었죠.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겨울에는 호두를 까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최곱니다. 다음에는 같이 해 봐요, 우리.”

어릴 적에, 거의 매일매일, 먹었다라. 무시무시했다. 다음에는 반드시 호두를 숨겨 놓기로 결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