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M─ (87/101)

7 .M─

「……그러면서 그가 좋다고 말하더구나. 그나저나 얘야. 어째서 왕비의 침상을 찾지 않는 거니? 너는 왕이야. 후사 생산은 중대한 의무라고.」

또 저 소리. 끔찍했다.

나는 창밖만 응시했다. 잠깐 침묵하던 모후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간 마녀가 안타까워. 마법에만 손대지 않았으면……. 젊으니까 후사 걱정도 덜했을 테지.」

「……네?」

나는 고개를 돌려 모후를 쳐다보았다.

이 웬 엉뚱한 소리인가. 어이가 없었다. 후사만은 정처에게서 보겠다는 나를 들볶아 넉 달간 여덟 번이나 레비탄과 동침시킨 장본인이 누군데 갑자기 웬 소리인가.

이쪽을 흘끔거리던 모후가 고개를 숙이고 헛기침했다.

「그, 그럼 파티에서 보자.」

모후가 등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어딘지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탁자를 톡톡 쳤다. 기분이 묘하게 나빴다. 모후뿐 아니라 요사이 왕궁 사람들 태도가 부쩍 이상해진 감이 있었다. 먼데서 나를 훔쳐보며 킬킬거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그새 레비탄에게 새 애인이라도 생겼나.

갑자기 또 그 왼팔이 눈앞을 스쳤다. 그날,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간 육중한 충격이 다시금 내달렸다. 나는 떨쳐내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악취가 코끝을 찌르는 듯했다. 일그러진 바이올린 선율이 귀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흡사 비명처럼.

대체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왜 마법에 손을 대고, 어째서 편안한 죽음을 요구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왜. 왜?

대체 왜? 어째서!

시간이 흐를수록 전처의 저주사건에 온 생각이 쏠렸다. 돌이킬수록 의문뿐이었다. 그렇게나 고문당하면서도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 내가 귀환할 때까지도 수사관들은 탑에서 주술도구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음모.

역시 로렌의 모함일까.

종교재판관들이 내게 털어놓은 말을 뇌리에 되살렸다.

―사실, 우리가 왕비를 신속히 체포한 건 모후의 사촌인 로렌 추기경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왕궁 뒤뜰에서 귀족들에게 전처의 시신을 보여 주었던 그 자리에 로렌도 참석했다. 그때 놈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거적 밖으로 삐져나온 그 왼팔을 바라보면서.

모후만 아니었으면 벌써 놈을 체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로렌에 관해 캐물을 때마다 모후는 펄펄 뛰었다.

―내가 로렌의 사주를 받고 고문을 명령했다니! 난 악역을 자처했을 뿐이야! 고것이 마녀로서 화형당하느니 일찌감치 편안한 죽음을 스스로 선택케 해서 죽는 편이 낫잖아! 난 사건을 묻으려고 했어! 유모 남매를 없앤 것도 마녀의 사술이 탄로 날까 봐 한 조치였고!

―아귀가 맞지 않습니다, 어머님. 유모 남매를 설득해, 허위신고를 했다고 고소를 번복시키는 편이 백배 낫지 않습니까?

―허위신고가 아니라니까! 고것은 진짜 마녀야! 그래서 내 딴에 머릴 쥐어짜낸 거라고 몇 번을 말했니! 나만 잔인한 시어머니로 욕먹고 끝날 줄 알았다구! 내가 전쟁 지원금 모금으로 왕궁을 떠나 있지만 않았으면 진작 고것을 편안하게 보내 줬어!

―진실을 말해 주십시오.

내가 물러서지 않고 추궁하자, 끝내 모후는 울음을 터뜨렸다.

―로렌이 도르래로 고것의 내장을 끄집어내 이단들에게 보여 주자고 했어. 유모 남매를 살해한 것도 실은 로렌이야. 고소를 번복 못 하게 해야 한다며……. 아무튼 고것이 레비탄을 마법으로 저주한 것은 사실이야. 이것만은 진짜야. 고것은 마녀 맞아.

모후의 표정은 참이었다.

요즘에는 의혹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혹, 왕비 자리를 노린 음모일까.

이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17년이나 얌전히 있다가 왕비를 확실하게 보장받은 지금에야 음모를 꾸민다? 음모라고 쳐도, 두 달이나 전처를 살려 두고 수고롭게 고문을 가할 까닭이 없었다. ‘편안한 죽음’을 위장해 일찌감치 살해하면 그만 아닌가.

고문관들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취조할 때 살펴보니까, 자백만 안 할 뿐이지 마녀의 기색이 보통 수상쩍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시신을 수습한 그 날, 밤을 새며 검토한 재판기록에는 온통 《아, 나의 왕이시여》라는 두서없는 사랑고백뿐이었다. 듣는 내내 모골이 송연했다. 검토하자마자 당장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할 만큼.

그래도 의문뿐이었다. 아무리 골몰해도 전처가 마법을 부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왕실 시종장은 이렇게 지적했다.

―15년이나 혹독한 탑 생활을 하신 분이 레비탄 님을 질투할 리 없지요.

재판기록을 처음부터 되짚었다. 전처는 《아, 나의 왕이시여》라며 계속 나를 찾았다. 언뜻 듣기에는 두서없는 사랑고백 같지만, 다른 뜻으로도 해석될 여지는 충분했다. 혹시 그 말이, 자기를 살려 줄 유일한 사람을 찾는 간절한 호소였다면?

만약 전처가 누명을 호소코자 그 고문을 견뎌가며 나를 기다렸다면…….

홀연, 무덤에서 새어 나온 듯한 차디찬 한기가 주변을 감쌌다. 왜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이런 불길한 감각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나는 《빨간 꽃 아가씨》가 내게 선물로 남긴 자작나무 가지를 서랍에서 꺼내려다가 관두었다. 그 왼팔이 눈앞을 어른거려 차마 꺼낼 수 없었다.

「나가실 시간입니다, 폐하.」

시종이 서재 밖에서 말했다. 기분이 엉망이지만 할 수 없었다. 포도주 잔을 남김없이 비우고 일어섰다.

벌써 문 쪽에서 똥오줌 비린내가 솔솔 풍기고 있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레비탄이 웃고 있었다. 어김없이 구취가 여기까지 풍겨왔다. 악몽이었다. 얼른 후각이 마비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내게, 무서울 만큼 가까이 다가온 레비탄이 서신을 억지로 쥐여 주며,

「러브레터예요.」

하고 속삭이고는 은밀한 눈빛을 던졌다. 괴로웠다. 장님이 되고 싶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일단 로쉬를 시켜 로렌을 비밀리에 캐 보기로 결심했다. 그 왼팔이 자꾸만 떠올라 저주사건을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로렌이 신교도를 몰아낼 꿍꿍이로 전처를 모함했다면, 내 손으로 놈을 직접 육시해 버릴 작정이었다.

벨벳 휘장이 열렸다. 무도회장에서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석과 갓 잡은 수사슴들, 최고급 향유, 은술잔 세트, 왕족 초상화 연작 등등, 갖가지 왕세자 탄생 축하선물이 무도회장 한복판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일그러진 입매에 미소를 덧칠했다. 그리고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무도회장으로 걸어갔다.

“웬 잠이야, 응? 스네이크.”

레오파드의 말에 의식이 조금씩 돌아왔다.

“음…… 제기랄…….”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뒤통수가 무거웠다. 뭔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꿈을 꾼 것만은 분명한데 기억나는 거라고는 똥오줌 비린내뿐이었다. 물 안 내린 변기통에 익사라도 하는 꿈이었나.

레오파드가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고대하던 재포니카 선출회가 열리는 날인데 벌써 졸고 난리냐. 선출회 끝나고 축하파티까지 논스톱으로 수행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어제 밤일이라도 거하게 한 거야?”

나는 대꾸 없이 담배만 한 대 피워 물었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똥오줌 비린내가 용트림하는 꿈을 꾸다니, 분명 어제 핫 칠리에서 있었던 일이 원인이었다.

어제 집으로 돌아와 새벽 2시까지 잠도 못 자고 침실 천장을 노려보았다. 핫 칠리에서 목도한 레이의 모습만 되씹고 또 되씹었다. 머리가 띵했다.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이야, 그런데 레드폭스 말이야. 눈의 여왕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거 아니야.”

레오파드의 말에 나는 퍼뜩 생각에서 벗어났다.

“……네가 봐도 그러냐.”

“어. 우스개랍시고 던진 한마디에 싹 바뀌는 표정이 무시무시하던걸. 달콤한 생크림 같기만 한 레드폭스의 흰 얼굴에서 핏줄기가 울긋불긋 솟구치고 흰자위까지 벌겋게 뒤집히는 꼴을 볼 줄이야 이날 여태껏 상상도 못해 봤다고.”

나도 그랬다.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네가 내 구두앞코를 짓밟아대기 전에 이미 깜짝 놀라 버렸단 말씀. 내가 계속 사기꾼이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던데, 너도 조심해. 눈의 여왕을 연예인으로 치면 레드폭스의 증세는 광팬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단 말이야. 연예인 스토킹이 얼마나 무서운 정신병인데. 존 레논이 어떻게 죽었는지 상기하란 말이야.”

나는 담배 필터 끝을 깊숙이 빨았다. 존 레논이라. 거 말 한번 잘했다. 참으로 적절한 비유였다. 어젯밤 내가 잠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도 그것이었다.

어제 레이는 텔리니를 살해할 기세였다. 기세가 완전히 불도저였다. 레오파드와 내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아니, 장정 백 명이 덤벼들어도 레이를 막지 못했을 터였다. 미친 사람 힘에 누가 대적한단 말인가.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병원에서 두 달간 발작을 일으키던 무렵, 레이는 여러 차례 괴력을 발휘해 부장들을 경악시켰다. 몸을 꽁꽁 묶은 가죽 끈도 다섯 번이나 찢어발겼다.

그처럼, 광기에 찬 눈빛을 번득이며 텔리니를 잔인하게 죽인 후 철창으로…… 레이와 나는 생이별을 하고……. 농담이 아니었다. 그나마 소렐과 프리버드 회원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사고를 쳐 줘서 방지된 일이었다.

여태껏 나는 레이의 기억상실 증세를 나름대로는 긍정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힘들었던 과거를 깨끗이 잊었으니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완전히 오판이었다. 왜 이걸 놓쳤을까. 지금의 레이는 스물여덟 살의 레이보다 감정이 풍부했다. 이건 곧, 분노도 훨씬 깊다는 의미였다. 고작 사기꾼에게 자제심을 잃고 살의를 불태울 만큼 격렬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이것이 가장 무시무시한 깨달음인데, 레이의 눈의 여왕 탐닉은 단순한 연대감 수준이 아니었다. 어제 똑똑히 깨달았다. 레이는 자신을 눈의 여왕으로 믿고 있었다.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타인에게 그저 무심한 사람이 그토록 적개심을 불태울 리 없었다.

대체 이것을 어찌 타개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갑자기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붙었다. 충동적으로 레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를 배경으로 레이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밝았다.

―디아나가 똥오줌을 못 가려서 양탄자가 난리 났어요.

“그렇습니까? 똥오줌 가리게 하는 향수가 있다고 하던데. 퇴근하는 길에 사 가야겠군요.”

―그럴 필요까지 있나요. 훈련시키는 재미도 있는 걸요.

“그럼 다른 필요한 건 없습니까. 오늘 어디 나갈 일이라도?”

―필요한 건 없어요. 나갈 일이야 오후에 운전 강습 받는 것 외에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연습 잘하고 저녁에 봐요.”

전화를 끊었다. 레오파드가 “똥오줌?” 하면서 실소했다. 나는 무시하고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아무튼 어제의 일은 나 자신을 돌이켜 보는 계기도 되었다. 레이의 광증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원인에는 내가 그를 대해 온 방식이 일조했는지도 몰랐다. 감금은 레이의 불행에서 큰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레이를 철두철미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이도 일종의 감금에 속했다.

아울러서 내 의처증도 문제였다. 면담에서 내가 의처증을 털어놓자 담당의는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레이를 휘두르려 하지 말고,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끔 도와주라고 충고했다. 아무리 배려해도 답답함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담당의의 말을 수용해야 옳건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어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레이가 스노우 화이트에서 아무 남자(들)와 나가 버리는 모습을 똑똑히, 그것도 수십 차례나 목격했다. 첫 시작은 지금 내 앞에서 운전 중인 레오파드와의 트리플 섹스로 맺었다. 그 뒤로도 십여 번 넘게 했다.

레이가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세상 아무 남자 붙잡고 물어 봐라.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다리를 좍좍 벌려 주는 금발 미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뻔하지 않은가.

레이가 조금만 더 까다롭게 굴었으면 내가 지금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다. 첫날밤 뒤 레오파드가 한 말도 “요구한다고 정액을 모조리 삼키다니, 초짜 주제에…… 이거 무지하게 쉬운 년이네, 흐흐흐.”였다.

알고 있다. 별별 놈들에게 좆을 휘둘러 댄 음란의 황제 포우 메사라에게 감히 의처증을 앓아댈 자격이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과거야 어떻든 레이가 지금은 내게만 충실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레이가 무심결에라도 딴 남자에게 눈길을 주면 피가 거꾸로 돌아갔다.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 솟구쳤다. 이건 정말이지 이성으로 제어되지 않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것까지 입 밖으로 차마 못 꺼냈지만, 헌책방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내가 벌어 오는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나만 봐 줬으면 하는 게 내 진짜 속마음이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그간 떨어온 궁상과 가난보다는 훨씬 좋으리라고 자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혹, 이런 내 욕심이 레이의 눈의 여왕 탐닉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쳤다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할 것 같았다. 제아무리 싫어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의 감방살이를 뒷바라지할 의향은 내게 추호도 없었다. 사식이나 챙겨 들고 형무소에 찾아가 오렌지빛 수의를 입은 레이를 하염없이 쳐다보는 미래 따위, 상상하기도 싫었다.

레오파드가 핸들을 돌리며 “잘해.” 하고 말했다.

“잘 살펴보란 말이야. 레드폭스가 겉만 생크림 케이크지 안은 도통 모를 사람 아니야? 부장들도 네 그릇이 레드폭스를 수용할 정도는 된다고 믿으니까 가만히 있는 거라고. 솔직히 어제, 레드폭스의 그 광란을 내가 아니라 쿠퍼헤드가 봤으면 지금쯤 레드폭스는 싸늘한 시체였을걸.”

“알아. 우리 사생활에 참견은 이쯤 하시지.”

“자식, 성질머리하고는……. 그나저나 일주일 만에 폰타네 의원을 보게 되었잖아. 지하철 건 때문으로라도 네게 연락해야 하는데 여태 잠잠하다며. 무슨 생각이야, 그 털보 아저씨.”

“우리가 칼과 손잡았다고 생각하나 보지.”

나는 담배를 비벼 껐다. 하나같이 기분 잡치는 이야기뿐이었다.

어제, 왕이 국고에 다시금 손대기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올라왔다. 이번에도 지하철 건설사업이었다. 평소라면 벌써 내게 전화로 울고불고 할 폰타네 의원이 아직도 깜깜무소식이었다.

폰타네 아저씨가 의외로 멍청하군.

미쳤다고 우리가 칼과 손잡는단 말인가. 이리나가 왕비가 되려면 천 년을 이어 내려온 왕실전통과 자웅을 겨루어야 했다. 그건 왕의 눈에 씐 콩깍지로는 간단히 이길 수 없었다. 나는 수도원에서 은거 중인 왕실 최고 어른이자 울프삭 경의 누이인 태후 리네아에게 압박을 가할 심산이었다.

“본부장님. 다 왔어. 어, 이거 제법 떨리는데.”

레오파드가 말했다. 벌써 왕궁이 눈앞이었다.

알토넨을 호위해 왕궁 의회관으로 향했다. 8년간 수없이 들락날락한 곳이건만 오늘따라 감흥이 남달랐다. 내 손으로 뽑은 허수아비를 드디어 재포니카에 앉히는 날이라서 그런가.

이는 곧, 나와 동료들이 무신귀족 최고직에 올라서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떨림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넥타이 매무새를 고치던 알토넨, 아침부터 흥분에 차 있던 부장들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픽픽 웃음이 나왔다.

나름대로 기념비적인 날이긴 하군…….

의회관으로 들어갔다. 샹들리에 빛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거대한 회장에 귀족들이 기립해 있었다. 다른 재포니카 후보들도 알토넨과 나란히 들어왔으나 모든 이의 눈길은 이쪽으로만 쏠렸다. 우리가 알토넨과 함께 단석으로 올라가자 박수가 빗발쳤다.

왕실 문장이 박힌 푸른 휘장을 등진 채 귀족들을 굽어보았다. 흔치 않은 감상이 들었다. 폭풍같이 내달린 11년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어쩌다가 대타로 시위진압에 뛰어든 첫 시작. 화염병과 최루탄에 휩싸여 열광적으로 부랑자들을 두들겨 잡으며 뛰어다닌 길거리 생활 3년. ‘독사’라는 닉네임을 하사받고 부장으로 승진해 지하고문실에 처박혀 온갖 고관대작나리들의 살가죽을 벗기며 기쁨을 유락한 1년.

암살부로 옮긴 뒤 갖가지 거물들을 처치하며 음모에 몰두한 2년. 본부장으로 승진한 후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가이거 체질개선을 이뤄내고 정적들을 몰락시킨 3년. 그리고, 울프삭 경의 지시로 42번가를 순찰하다가 우연히 가난뱅이 헌책방 주인을 만난 어느 추운 겨울날까지.

그렇게 맨주먹 하나로 시작해 마넨과 울프삭 경을 숙청하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왜일까. 언젠가 레이가 내게 한 말이 귓가를 울리는 까닭은.

이왕 하는 거,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되는 악당이 되는 게 좋을 거예요.

신선한 발상이군, 하고는 금세 잊어버린 말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서고 나니 예사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는 귀족나리들을 훑어보았다. 저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비전을 갖춘 자가 몇이나 될까.

단언컨대 한 사람도 없었다. 무신귀족들마저 살인과 음모로 단련된 악당들을 등에 업고 마음껏 권력을 휘둘러댈 꿈에 부풀어 기뻐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감상은 금물이었다. 창업은 쉬우나 수성은 어려운 법이다. 내가 아직도 울프삭 경의 셰퍼드였다면 이 진흙탕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의 놀이터였겠지만, 지금은 처지가 달랐다. 당분간은 조용히 반석을 닦을 심산이었다. 음모도, 사랑도,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멋지게 질주할 작정이었다.

나는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어, 지긋지긋해. 논스톱으로 일곱 시간이나 서 있었더니 온몸이 뻐근하군. 그런데 폰타네 아저씨, 너무하지 않아? 이제껏 뒤 닦아 준 우릴 봐서라도 이러면 곤란한데.”

운전대를 잡은 쿠퍼헤드가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보드카 잔을 흔들며 “음.” 하고만 대꾸했다.

예상대로 알토넨은 재포니카에 입성했다. 썩 마음에 드는 대관식은 아니었다. 몰표를 확신한 평민의원단에서 무려 열다섯 표가 덜 나온 것이다. 심지어 폰타네 의원은 선출회 내내 침묵만 지켰다.

이건 확실히 지나쳤다. 요령 있는 대나무와 줏대 없는 갈대는 천지차이 아닌가.

나는 혀를 차며 보드카를 마셨다. 재포니카 당선 축하파티를 위해 왕궁 서남 방향에 위치한 재포니카관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울창한 동백나무숲이 차창 밖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희디흰 눈송이와 뒤엉킨 빨간 동백꽃들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어, 풍치 한번 일품이군.”

중얼거리던 쿠퍼헤드가 대뜸 말했다.

“스네이크. 재포니카, 하면 뭐가 떠올라?”

“뭔 시시껄렁한 질문이야. 무인의 기개지. 동백꽃이 툭 떨어지며 져 버리는 형상이 사람 목 잘리는 것과 비슷하잖아.”

“스네이크도 그렇게 대답하는군……. 이거 재미난데.”

“뭐 다른 심오한 의미라도 있는 거냐.”

대학물 먹은 녀석 아니랄까 봐 또 강의 한판 펼치려는 모양이었다.

“나름대로는. 생각해 봐. 타 유럽국가에서 동백나무, 하면 라 트라비아타의 동백꽃 아가씨나 떠올리는 것이 고작일걸. 한데 본부장님은 무인의 기개라며, 목 잘리는 형상 운운했잖아? 꼭 세뇌라도 당한 듯이 말이야. 후후후.”

“세뇌라니. 웬 엉뚱한 소리야.”

“삼정승을 대표하는 꽃과 수목 모두 서양보다 동양에서 많이 떠받드는 종이거든. 동백나무, 난초, 연꽃. 그게 전부 명재상 ‘로터스’ 드루레인이 붙인 명칭이래. 그가 일본 마니아였거든.”

“18세기 귀족답군.”

“뭐, 그렇지. 아무튼 동백꽃에 내포된 상징성도 드루레인이 퍼뜨렸대. 재포니카라는 명칭도 드루레인의 소행이고. 외국에선 보통 동백나무를 카멜리아Camellia라고 부르거든. 18세기 이전까진 왕국 사람들도 동백꽃에 대한 생각이 타 유럽국가와 다를 바 없었대. 하지만 지금은 동백꽃, 하면 하나같이 무인의 기개를 떠올리지. 저 울창한 동백나무숲도 드루레인의 명령으로 조경되었다고 하더군.”

“한마디로, 옛날 귀족의 개인적인 취미가 왕국 사람의 사고방식 체계까지 길들였다? 세뇌라는 말이 그 뜻이었냐.”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럴싸했다.

드루레인이라…….

왕국에서 데이탄즈와 더불어 특급스타로 손꼽히는 역사적 위인이었다. 어찌나 시험에 자주 나오던지, 역사과목을 질색한 나조차 작자에 관련한 몇 가지는 외울 정도였다. 데이탄즈가 확립시킨 왕정정치를 몰아낸 주역. 의회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삼정승 제도를 최초로 수립한 18세기의 명재상. 《무능한 왕은 국가에 이익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그 양반 덕에 내가 지금 저 절경을 즐기고 있는 셈인가. 그러고 보니 눈의 여왕 연극도 그 양반의 푸닥거리였군.

갑자기 휴대전화가 메시지를 알렸다. 직속부하였다.

―푸셔가 전신마비에서 회복되었답니다. 경과를 봐서 3차 성형수술에 들어간답니다.

기가 막히다 못해 골이 다 때렸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도 배꼽을 잡았다.

“오죽하겠어. 젊은 날의 별명이 아도니스였잖아. 지금이야 일본식 부채가 트레이드마크지만 젊은 날에는 손거울이셨고. 요즘 코미디언들의 주요 소재가 성형수술 중에 전신마비를 일으키신 로터스라고 하더군.”

쿠퍼헤드가 낄낄거렸다. 나도 픽픽 웃었다. 푸셔의 왕자병은 악명이 자자했다. 워낙 명문가 출신인 덕에 재물에는 무관심한 대신, 면상에 들이는 노력이 광적이었다. 35년에 걸친 정신과 치료로 지금은 좀 덜해졌는데, 청소년기에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자기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착각, 걸핏하면 울부짖으며 경찰서로 뛰어갔다고 한다. 당시 푸셔에게 성희롱으로 고소당한 애꿎은 학교 선생님들이나 공원을 산책하던 선량한 아저씨·아주머니들이 셀 수도 없었다고 했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칼이 날뛰는 이 시점에까지 면상에 목숨을 걸다니.

물론 푸셔는 맹탕이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계산에서 여유를 부리는 것뿐이었다. 이리나의 왕비 옹립 실현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본격적으로 왕비 옹립 전쟁이 시작되면 외모고 뭐고 다 내팽개칠 터였다.

나는 코웃음 치며 창밖을 응시했다. 동백나무숲이 차창을 지나쳤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일까, 생각하는 찰나 레오파드가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본부장님, 이만 준비하지.”

나는 빌어먹을 가면을 썼다. 알토넨을 호위하여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어김없이 박수가 쏟아졌다. 평민의원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왕 주위에 칼과 이리나를 비롯해 한량클럽과 온갖 문신귀족들이 몰려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이제껏 푸셔에게 의리를 지키던 몇몇 골수파까지 합세해 있었다. 내 예상대로 잘들 놀고 있었다.

알토넨을 따라 긴 시간 연회장을 돌자니 끔찍하게 지루했다. 희희낙락하는 왕과 칼 패거리의 면상에는 속이 다 메슥거렸다. 어차피 화무십일홍이지만.

실컷 웃어 봐라…….

나는 싸늘히 미소 지으며 허리를 쭉 폈다. 그래도 대충 삼십여 분만 인내하면 파티가 끝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저 새끼 좀 보게.

또 칼이 좆같은 피아노로 유유히 향하고 있었다. 옆에서 쿠퍼헤드가 “허억.” 하며 숨을 삼켰다. 칼이 한번 피아노 앞에 앉으면 두 시간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눈앞이 껌껌했다. 칼이 디리이이잉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저 꼴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급히 칼을 제거해야 했다.

칼이 피아노를 치면서 간간이 아이들과 귀부인들에게 그윽한 눈길을 던졌다. 이따금 우리 쪽을 향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엿 같았다.

딱따구리 탓에 전 부장들이 일명, ‘실크바지의 유혹’을 알고 있었다. 놈의 눈알을 뽑고 싶어 손가락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저놈에게 전신마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셔야 할 것을, 신께서 낮잠이라도 주무시는 모양이었다.

미동도 않고 서 있자니 멀미가 났다. 앞에서 오바스카 양이 한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갔다 했다. 아이는 칼의 티파티 비디오에서 낯을 익힌 오바스카 양의 조카였다. 어린 조카가 오바스카 양보다 5센티는 더 컸다. 나는 픽픽 웃다가 멈칫했다.

뭐…….

일순간 목덜미가 찌르르했다. 뒤이어 “브라보!” 하는 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지, 이건.

칼이 일어서서 예를 표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른 뒤 다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시감이 스쳤다.

곧 깨달았다. 칼의 티파티였다. 도촬 비디오로 본 칼의 티파티 광경과 흡사했다. 거기서도 칼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귀부인과 아이들의 호감 어린 눈빛을 받으며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레오파드가 내 팔을 툭 건드렸다. 알토넨이 “가야겠어.” 하며 일어서고 있었다. 알토넨을 따라가며 재포니카 관을 나서는 내내 기분이 야릇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목덜미를 스치던 찌르르한 느낌. 대어를 낚을 때마다 으레 느끼던 감각이었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그건 칼의 약혼식에 이은 두 번째 단서였다. 신께서 낮잠만 주무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신에서 흥분이 들끓었다. 나는 머릿속에 오늘의 광경을 단단히 새겨 두었다.

다음날 아침, 재포니카를 상징하는 동백꽃 배지를 가슴에 단 알토넨이 각종 일간지에 대서특필됐다. 업무실에 들어가자 에베레스트처럼 높다랗게 쌓인 쿠키 상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속부하로 하여금 다 치우게 하는 데만도 한 시간이 소요됐다.

이번 쿠키들은 우리에게 달라붙으려는 문신귀족들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터이니 리스트를 파악해 보고서로 올린 뒤, 냉장고(뇌물 보관실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에 얼려 두라 시켰다. 쿠키 중 일부는 가이거 시설유지 비용으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했다.

오후 세 시에 리스트가 올라왔다. 총 일백일흔둘의 고관대작나리에 무려 마흔다섯의 문신귀족 인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칼이 보낸 그림이 있었다.

리스트를 훑어보며 탁자를 톡톡 두들기는데 노크소리가 났다. 레오파드가 “있어?” 하면서 들어왔다.

“이것 좀 보지.”

레오파드가 잡지 한 부를 툭 던졌다. 오늘자 데시벨이었다. 헤드라인은 《백골단 두목, 왕좌에 등극하다!》.

커버가 퍽 볼만했다. 염병할 제복코트에 동백꽃 배지를 단 피둥피둥한 돼지가 정면을 맹하니 쳐다보는 캐리커처였다.

“자식들, 이왕이면 셰퍼드로 해 줄 것이지.”

나는 혼잣말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징조가 나빴다. 평민들의 속내를 가장 솔직하게 대변하는 언론매체가 데시벨이었다. 이 캐리커처는 우리가 문신귀족과 야합하려 든다고 대중이 생각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레오파드가 주먹관절을 또독또독 꺾으며 흐흐흐, 웃었다.

“어때. 손 좀 봐줄까.”

성질대로라면 바로 “모셔 와. 내가 직접 접대한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번 의원선출대회 때 우리는 민심을 등에 업고 지지난 시즌보다 무신귀족들을 20퍼센트나 더 당선시켰다. 그러므로 참아야 했다. 이 심각하게 좆같은 캐리커처를 인내해야 했다.

나는 채찍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기다가 멈칫했다.

이건 또 뭐냐…….

전율이 손끝을 찔렀다. 돼지의 가슴에 달린 저 동백꽃 배지.

저 배지 위로, 동백나무숲이 돌연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동백나무숲이 내 신경을 건드린 횟수가 벌써 두 번째였다. 이 바닥에서 밥벌이하면서 갈고닦은 건 직감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직감이 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확실했다.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다. 나는 “나가 봐.” 하고는 보드카를 마셨다. 야릇했다.

동백나무숲과 티파티, 오바스카 양.

이 퍼즐조각들이 완전하게 이뤄낼 그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30분가량 칼의 티파티 비디오를 연구했다. 수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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