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L.
“먼저 자리 잡고 기다리라는데요.”
일렉스가 전화통화를 끝내며 말했다.
일렉스 스파르테, 오늘 처음으로 대면한 메사라의 친구였다.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체격이며 분위기며 메사라와 흡사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친구를 보내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깨달았는데, 메사라는 의처증이 좀 있었다. 산책할 때, 젊은 남자에게 내가 조금이라도 눈길을 보내면 즉각 흰자위가 벌게지며 이마에서 핏줄기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수차례 목도했다. 매일저녁 식사를 하며 반드시 “오늘 밖에서 누굴 만났느냐, 혹시 남자?” 하고 캐묻기도 했다. 성적으로 너절한 이십대의 레이 아리사가 메사라의 속을 많이 썩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일렉스와의 만남은 즐거웠다. 게다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그와 내가 만난 적이 있었다니. 더 놀라운 이야기는, 일이 잘(?) 풀렸다면 지금쯤 나는 메사라가 아닌 자신과 사귀고 있었으리라는 일렉스의 주장이었다.
“진짜 그랬단 말이에요?”
수목원의 테이블에 앉으며 되묻자, 일렉스가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요! 내가 먼저 레이에게 관심을 품었거든요. 레이도 내게 호감이 있었고요. 그러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만나질 못했는데, 그새 포우가 레이에게 접근해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수작을 걸었지 뭡니까. 염치도 없이 말이죠!”
듣고 보니 진짜 염치없었다.
“그것도 모르고 저는 레이에게 정식으로 교제를 신청해야겠네, 선물은 뭐가 좋을까, 하며 포우에게 속내를 탈탈 털어놨단 말입니다. 정말이지 우정을 저버린 짓거리였죠, 그건. 놈이 수작의 황제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암만 그래도 뒤통수가 띵했어요.”
갑자기 꿈에서 침대에 나체로 드러누워 내게 농을 던지던 메사라가 눈앞을 스쳤다. 퍽 능글맞긴 했었다. 그나저나, 메사라는 변태성욕만 빼면 꽤 보수적이고 가정적인데…… 수작의 황제였다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메사라가 예전엔 플레이보이였어요?”
“네? 뭐…… 흐흐흐. 아,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나저나 그놈이 레이에게 잘해 줍니까? 다들 궁금해하고 있어요. 괜찮으니까 툭 털어놔 봐요.”
일렉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는 “그럭저럭.”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낯이 화끈거렸다. 일렉스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보건대 메사라의 괴이한 성벽이 친구들에게 꽤 알려진 모양이었다. 남자끼리 나누는 이야기야 전부 그렇고 그런 거니까…… 생각하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메사라는 직장에서 어찌 지내나요. 야근도 잦던데 일이 많나 봐요?”
“아무렴요, 얼마나 많은데요. 요즘 빌어먹을 본부장이 가이거 체질개선이니 어쩌니 하면서 인사개편을 단행했거든요. 덕분에 사무직 대원이 대폭 줄어들어서 우리 일이 옴팡지게 늘었지요.”
“인사개편이요?”
“정국이 안정세로 들어서서 가이거도 할 일이 많이 줄었거든요. 그러자 스크루지 본부장이 하는 일 없이 가이거 예산을 축낼 순 없다며, 가이거 대원의 일부를 무신귀족들에게 수행원으로 강제로 떠안겼지 뭡니까. 하여간에 염병할 본부장입니다. 실적이 시원찮으면 사정없이 해고의 칼날을 휘둘러 대는 통에 죽을 맛이라니깐요. 까딱 잘못하면 저희도 목이 잘릴 뻔했죠.”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사라의 해괴한 변태성벽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짐작대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탓이었다. 한시바삐 이직을 권유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렉스가 직장 욕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구내식당 음식이 어찌나 맛이 없는지 직장생활 11년 동안 거기서 식사를 한 적은 딱 두 번뿐이었다는 둥. 지급되는 후진 디자인의 제복은 방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둥. 전기료를 아낀답시고 사무실의 형광등을 반만 켜 놓는 통에 장님이 될 것 같다는 둥, 끝이 없었다.
직장상사, 즉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 욕도 빼먹지 않았다.
“그 엿 같은 수행원 사업체 설립으로 얼마나 우리 머리털이 빠졌는지 생각만 해도 치가 다 떨립니다. 사업체 하나 설립하는 데 준비해야 할 서류가 어찌나 많은지…… 사무직 대원들이 그저 밥이죠.”
“하지만 수행원 사업이 나쁘진 않아 보이는데요. 가이거는 국민세금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닐뿐더러 이윤 창출도 불가능한 소모집단이니까요. 그걸 감안하고 본부장도 보디가드 사업을 단행했는지도 모르죠. 가이거 예산을 아끼고 귀족 감시도 하며 일거양득이잖아요.”
“……호오. 뭐, 아무튼 상사들이 으스대는 꼴이 어찌나 밥맛인지 말도 못합니다. 레이도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봤죠? 본부장 휘하 그 부장 새끼들 말이에요.”
“봤죠. 굉장히 무섭던데.”
“그게 무서워요? 우스꽝스럽지.”
일렉스가 이를 갈며 내뱉었다.
“모가지가 뎅겅 잘린 아줌마 그림 자수가 등에 떡 박힌 제복코트를 펄렁펄렁 휘날려대는 꼴을 코앞에서 보면 웃기지도 않아요. 특히 그 괴물가면이 압권이죠. 그 흉물스러운 디자인에 번들거리는 은 소재라니…… 푸핫! 프로레슬러 가면이 따로 없지요.”
직장상사들에게 반감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일렉스가 적대감이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
“그런 꼴로 떼거리로 뭉쳐서 본부를 으쓱으쓱 쏘다니는 새끼들을 보고 있으면 배꼽만 아프다니까요. 그중에서 최고로 우스꽝스러운 놈이 바로 본부장 아닙니까.”
가이거 본부장, 스네이크. 데시벨의 기사를 읽을 때는 무섭기만 했는데……. 만찬회에서 실물로 볼 때도 으스스한 인상만 받았다. 그러나 본부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들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디가 웃긴데요?”
내가 묻자, 일렉스가 칼바도스를 잔에 부으며 대답했다.
“본부 지하에 사격연습장이 있어요. 거기서 자주 본부장과 부장 새끼들이 사격 연습을 하거든요. 하루에 한 번은 꼭 들러서 총질을 해대는데 그 자리에서까지 가엾게도 가면과 제복코트를 걸친 꼴을 보면 웃음도 안 나오죠. 보안이 뭔지…… 흐흐흐.”
“생활이 불편하긴 하겠네요.”
“말이라고요! 콧물이 흘러도 손수건 하나 제 맘대로 못 꺼내죠! 하여간, 거기서 본부장과 부장들이 곧잘 돈을 걸고 총을 봐바방 쏴대거든요. 그중 제일 실력 좋은 놈이 본부장이에요. 판돈을 싹쓸이하기 일쑤죠. 그런데 말입니다. 오랫동안 부대낀 직장동료들이면 가끔은 좀 봐주고 뭐, 그래야 인정 아닙니까? 그런데―!”
일렉스가 탁자를 주먹으로 쾅 쳤다.
“듣자 하니 본부장 새끼는 한 번도 양보한 적이 없더랍니다. 단 한 번도요! 어김없이 판돈을 뜯어간다고 하더군요. 쫀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꼴에 모토가 차별 없는 인재등용이니 하고 있으니 코웃음도 안 나옵…… 윽.”
갑자기 뒤에서 머리를 맞아, 일렉스가 신음했다. 메사라였다.
“무슨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그렇게 늘어놓고 있어.”
메사라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일렉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기는. 스크루지 본부장 욕이었지. 너도 자주 욕했잖아. 빌어먹을 가면, 염병할 제복코트, 입만 열면 비용절감 타령이네, 했잖아.”
“그래도 본부장이 봉급이며 보너스를 전면적으로 팍팍 올려 줬잖아. 그때 제일 좋아서 펄쩍펄쩍 뛴 사람이 누구였던가.”
“나는 아니야. 그건 딱따구리였어.”
메사라와 일렉스가 기네 아니네로 설왕설래했다. 나는 일렉스와 수다를 떠는 메사라를 응시했다. 사뭇 의외로웠다. 내 앞에서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던 사람이 일렉스한테는 간간이 욕설을 섞으며 개구쟁이처럼 굴었다. 그래도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며칠간 우울하던 기분이 회복되는 듯했다.
나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간 계속 골몰했다. 기억의 파편에서 발견한, 검은색 머리카락에 관해서였다.
그 기억대로라면 나는 불과 1년 전까지도 자작나무를 떨쳐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기억을 상실한 이유가 풀렸다. 10년이나 자작나무에게 괴롭힘당한 탓이었다.
한데 자작나무가 왜 지금은 깨끗이 사라졌을까. 왜?
하나는 분명했다. 현재의 나는 자작나무를 극복했고,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 다 된 것인가.
간단히 치부하기에는 불안했다. 자작나무가 재발할 가능성 때문일까.
“레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이만 일어나죠.”
메사라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하며 허겁지겁 일어섰다.
자작나무가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만 하면 무조건 소름만 돋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으로선 다른 방도도 없었다.
번화가로 향했다. 메사라와 일렉스가 저녁 먹기 전에 쇼핑이나 ‘간단히’ 하자며 길거리를 죽 돌았다. 간단한 쇼핑이 전혀 아니었다. 열광적으로 옷과 구두, 시계, 프라모델을 사대는 메사라와 일렉스를 헉헉거리며 따라갔다.
메사라는 오늘따라 유난히 쇼핑에 열중하는 기색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선물을 내게 한 아름 떠안겼다. 일렉스가 오랜만에 만난 기념이라며 떠안긴 선물보따리까지 합세해 어깨가 빠지는 듯했다.
일렉스가 문득 어느 레코드숍 앞에서 멈칫했다.
“……이야. 이 자식이 드디어 판을 냈네? 어이, 포우. 이 포스터 좀 봐. 요즘은 리코딩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나 보지.”
“음. 이놈도 자기 몸값이 지금이 가장 높을 때라는 걸 알 테니까.”
“흥, 포스터 한번 죽이네. 타이틀부터 폭소감인데.”
일렉스가 싸늘하게 웃었다. 은근한 적대감이 풍겨 나왔다. 덩달아서 나도 레코드숍의 쇼 윈도우에 붙은 포스터를 훑어보았다. 「칼 바르디의 러브 발라드」라는 타이틀 아래, 한 갈색머리의 근육질 미남이 피아노 옆에서 나른히 웃고 있었다. 느끼했다.
“흠.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봅니까. 관심이라도 생기나 보지요?”
메사라가 내 옆구리를 잡아끌며 말했다. 나는 “뭐, 별로.” 하고 얼버무렸다.
“관심까진 아니고. 잘생겼네요. 유명한 연주자인가 보죠.”
“뭐, 그럭저럭. 레이 말대로 확실히 잘생기고 유명한 연주자이긴 하지요. 하하하.”
메사라의 말에 일렉스가 “흐흐흐.” 하고 웃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둘이서 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왜 저러지. 게이로서 성적흥미라도 느꼈나.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옆집 남자라면 나도 조금 긴장하겠지만, 우리 같은 소시민에게 저런 유명 피아니스트는 머나먼 미국의 할리우드 스타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오필리아에게 한눈을 파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만 식사하러 가죠. 《핫 칠리》라고, 괜찮은 곳을 내가 압니다.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내가 한턱내겠습니다.”
일렉스의 안내로 핫 칠리로 들어갔다. 독특한 곳이었다. 붉은 회벽 담이 원형으로 둘러싼 넓은 실내 가운데,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에서 뚱뚱한 돼지 바비큐가 모락모락 구워지고 있었다. 바닥은 골풀과 장미꽃잎이 깔려 있었다.
한구석에서는 밴드의 연주에 맞춰 사람들이 즐겁게 민속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축제 같았다. 나는 신기한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귀족들이나 연예인들이 많이 보이네요. 보통 레스토랑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레스토랑이 특별할지 모르지만, 저치들에게 이런 곳은 패스트푸드점에 속할 겁니다. 아, 어쨌든 오늘은 레이도 푸짐하게 먹어요. 하루쯤 바비큐 뜯는다고 해서 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진 않을 테니까. 여긴 입장료만 내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메사라가 말했다. 나는 “그래요.”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럭무럭 김이 올라오는 돼지 바비큐를 잔뜩 먹으며 브라스 밴드의 연주도 감상했다. 메사라와 일렉스는 술만 마시며 나직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간간이 “성가신 새끼”, “어떻게 조져 버릴까”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메사라에게 파이 접시를 건넸다.
“뭔데 그렇게 살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음식도 거의 안 먹고.”
“아. 하하하. 별것 아닙니다. 그냥 재수 없는 직장동료 험담을 하고 있었어요. 아, 파이 모양이 특이하네요. 구유에 놓인 아기예수 모양이라니, 하하.”
메사라가 파이에서 아기예수만 떼어 내 입에 넣어주며 웃었다. 달콤한 아기예수를 깨물 때였다.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 밀었다.
“맞군요, 역시! 저 아시죠? 껄껄. 이런 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뒤를 돌아본 나는 미간을 모았다. 웬 중년 아저씨가 활짝 웃고 있었다. 뭐하는 짓이지,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소니아 마슨 오윈처럼,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알고 지낸 사람일 수도 있었다. 어떡해야 하나, 고민할 찰나 메사라가 중년남자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뵙다니 놀랐습니다, 타넬리 소렐 씨.”
“그러게 말입니다. 전생에 무슨 인연이라도 있었는지…… 껄껄. 아, 그런데 제가 그쪽 이름도 묻지 못했네요? 이것 참.”
내 이름도 모르다니 썩 친한 사이는 아니던 모양이었다. 나는 조금 긴장을 풀고 말했다.
“레이 아리사라고 합니다.”
“아리사? 독특한 성이네요. 여긴 친구들과 제 가족입니다.”
소렐 씨가 동행들을 소개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새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첫눈에도 라틴계가 분명한 아내와 어린 아들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다.
“아까부터 그쪽이 눈에 띄더군요. 이렇게 길디긴 금발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재미난 우연입니다. 혹시 텔리니를 보러 여기 왔습니까?”
소렐 씨의 말에 나는 예?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텔리니가 누군데요? 여긴 친구가 추천해서 들렀습니다만.”
“아, 이런. 제가 엉뚱하게 넘겨짚었군요.”
소렐 씨가 민망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긁었다. 이내 한쪽을 턱짓하며 “저 사람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소렐 씨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건장한 검정머리 사내가 글래머 미녀들과 정신없이 플래시를 터뜨리는 파파라치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되게 요란하네, 하고 중얼거리던 나는, 이어지는 소렐 씨의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1주일 전에 특급스타로 떠올랐죠. 유서 깊은 무신가문 자제에, 《전생을 찾아라》에서 배출한 여러 유명인사들 중 유일하게 모든 문제를 풀어내 사람들을 경악으로 빠뜨렸지요. 타반느 텔리니. 바로 데이탄즈의 환생체입니다.”
데이탄즈의 환생체입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손끝도 꿈쩍할 수 없었다. 글래머 미녀들을 주물럭거리는 텔리니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치달았다. 거의 폭발하다시피 했다. 포크를 쥔 손으로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갔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꽤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한평생 파티를 즐기고 미녀들을 줄줄이 거느린 미남 왕다운 모습이죠, 껄껄껄. 아, 쓸데없는 이야기로 너무 시간을 끌었군요. 그럼 남자친구와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소렐 씨가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얼떨떨하게 침을 삼켰다. 진정하려 애썼다. 아무리 자작나무가 환생했다지만 데이탄즈마저 같은 시공에 존재할 확률은 낮았다.
사기꾼이겠지.
왕국은 전통적으로 환생체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관련 설화며 속담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세간의 관심을 끌고자 환생 타령을 하는 유명인사나 귀족들도 숱했다.
저 작자는 사기꾼이야. 사기꾼이 맞아.
그러나, 저 꼬락서니라니.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술을 쭉쭉 빠는 꼴이라니. 검정머리의 건장한 체구에, 찢어진 차가운 눈매에, 심지어 명망 있는 무신귀족 가문 자제라니. 기가 막힐 만큼 데이탄즈와 흡사하지 않은가. 숫제 소름이 끼쳤다.
기가 막혔다. 누구는 지금도 빌어먹는 가난뱅이건만, 저놈은 끝까지 부잣집에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있었단 말인가. 살의가 이글이글 들끓었다.
“레이, 2층에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아쿠아 관이라고, 싱싱한 해산물을 맘껏 먹을 수 있어요.”
메사라가 내 팔을 당기며 말했다. 나는 단칼에 대꾸했다.
“싫어요.”
입술을 힘껏 짓깨물었다. 가서 물어볼까. 대중에게 알려진 자작나무 설화에도 나오지 않은 몇 가지 비밀을 물어볼까. 연놈이 나눈 대화, 연놈이 벌컥벌컥 처마신 술, 연놈이 들고 다닌 꽃, 연놈이 입고 다닌 망토 색깔…….
일렉스가 텔리니를 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아아, 저 작자……. 하여간 귀족나리들 이상한 취미하고는, 흐흐흐. 눈의 여왕 설화도 진짜였대나, 어쨌대나. 저주사건이 자기 때문에 일어났다며 눈물에 젖어 살다가 10년 뒤에야 마녀 따위에게 빠진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말년에 열심히 비올라 성당에서 참회했다고 말했더군요. 웃기지 않아요?”
하나도 안 웃겼다.
“레이, 춤이나 출래요?”
메사라가 또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나는 “싫어요.” 하고 대꾸했다. 일렉스가 메사라를 흘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눈의 여왕이 워낙 인기가 많으니까 저런 사기꾼들이 활개 치는 거죠. 면상부터 딱 사기꾼 티가 폴폴 나잖아요, 흐흐. 그래도 작자가 왕국 내수경제에 나름의 기여는 했죠. 놈 덕분에 꽃집이 근래 호황을 누린다지 뭡니까. 축제에서 눈의 여왕과 빨간 꽃을 들고 다녔다나. 그것부터가 순 사기예요. 텔리니의 부친이 왕국 최대 규모 온실화원의 경영주거든요.”
나는 멍하니 있었다. 전신으로 한기가 내달렸다.
빨간 꽃.
연놈이 축제에서 들고 다닌 피처럼 붉은 꽃, 석산은 설화에도 안 나오는 이야기였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틀림없었다. 타반느 텔리니는 그 개자식이었다. 뼈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 개새끼였다.
나는 포크를 꽉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메사라가 따라 일어서며 “레이. 나, 해산물 먹고 싶습니다.” 하며 내 손에서 포크를 빼앗았다.
“아쿠아 관으로 올라가지요. 여긴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숨이 좀 막히네요. 레이 몸에도 안 좋을 것 같은데. 나, 해산물 먹고 싶다니깐요. 하하하.”
“혼자서 먹어요.”
메사라를 뿌리치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래도 메사라가 내게서 포크를 뺏는 통에 이성이 조금이나마 돌아왔다. 몇 대만 패주고 끝내기로 했다. 괜찮을 것이다. 고작 매질이었다.
메사라에 뒤이어 일렉스까지 일어서서 나를 쫓아왔다.
“어어, 레이.”
일렉스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우리, 춤이나 같이 추죠. 민속춤 스텝은 밟을 줄 알죠? 모르면 이 기회에 한번 배워 봐요.”
메사라와 일렉스가 나를 붙들고 댄스 스테이지로 끌고 가려 했다. 나는 그들의 손을 한 번에 확 떨쳐 버렸다. 음악소리가 멀어졌다. 연기로 자욱한 실내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 속에서 뚜렷이 보이는 것은, 미녀들을 주물럭거리며 웃고 있는 텔리니뿐이었다.
“레이, 춤이나 추자니까요.”
메사라가 뒤에서 나를 붙잡았다. 일렉스도 내 앞을 가로막았다.
“레이, 아까부터 왜 자꾸 저쪽으로 가요? 설마 텔리니에게 관심이라도 생겨서? 별로 미남도 아닌데, 흐흐흐. 저놈은 그냥 순 사기꾼입니다. 여자들에게 인기 끌고 겸사겸사 장미꽃이나 잔뜩 팔아먹으려는 사기꾼이라고요.”
…….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뭔가 물벼락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이윽고 점차 제정신이 돌아왔다. 한 마디만 뇌리를 맴돌 뿐이었다. 장미꽃.
장미꽃……?
정신을 차리니, 메사라와 일렉스가 나를 질질 끌고 댄스 스테이지로 올라서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장미꽃이요?”
“네. 장미꽃이요. 텔리니의 부친이 왕국에서 손꼽히는 온실 재배 장미꽃 화원의 경영주거든요. 텔리니는 데이탄즈를 사칭해 부친의 사업 아이템을 홍보한 셈이죠. 레이 같은 로맨티스트들을 등쳐먹는 나쁜 사기꾼입니다. 천벌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겁니다. 자자, 춤이나 추죠.”
일렉스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줄곧 혼미하던 시야가 간신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얼얼한 머리를 흔들며 정면을 응시했다.
내가…… 하마터면 생사람을 잡을 뻔했구나.
별안간 비명이 천장을 찢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돌아보다가 아연실색했다. 웬 사내들이 양동이를 들고 텔리니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소렐 씨와 친구들이었다. 표정이 몹시 험상궂었다. 미녀들이 놀라며 소렐 씨 일당을 막으려 했다. 소용없었다. 가슴만 큰 말라깽이 미녀들은 힘 하나 못 쓰고 공중으로 붕 날아갔다.
소렐 씨 일당이 양동이를 열어 정체불명의 내용물을 텔리니에게 무차별 퍼부었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덩어리들과 누런 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텔리니가 아아아악 하며 일어섰다. 분신자살하는 사람처럼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절규했다.
소렐 씨 일당이 맹렬히 부르짖었다.
“국민의 피를 빠는 돼지들은 물러가라! 군주제 철폐! 공화정 만세!”
“군주제 철폐! 공화정 만세!”
“귀족들은 죽어라! 죽어라!”
그들은 곧, 득달같이 달려온 경비원들에게 사지를 붙들려 밖으로 끌려 나갔다. 요란하게 플래시를 터뜨리는 파파라치들이 기쁨에 찬 낯으로 두두두 뒤쫓아 갔다. 바닥에서 먼지바람이 일었다.
남은 것은 경악한 객들과 천장을 찌르는 텔리니의 비통한 절규, 그리고 실내에 남실남실 떠도는, 똥오줌 냄새뿐이었다.
일렉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음부터 내가 여길 오나 봐라.”
이튿날 병원 휴게실에 비치된 신문 1면에 소렐 씨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등장했다.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텔리니에게 똥물을 투척하고 있었다. 헤드라인은 《미치광이 갑부, 왕비에 이어 왕까지 잡다!》.
촉망받는 영재 텔리니는 큰 정신적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고성방가를 포함한 경범죄와 공중위생법 위반죄, 왕실모욕죄로 긴급 체포된 소렐 씨와 군주제 폐지단체 《프리버드》회원들은 “그 사건은 술김에 식당을 화장실로 착각, 오물을 잘못 조준·투척해 일어난 본의 아닌 실수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텔리니의 부친과 보상금액을 협상 중이라는 것이 기사의 요지였다.
그날에야 나는 약 한 달 반 전 자작나무 초상화가 소렐 씨의 손에 넝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