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L.
자작나무는 높이 쌓인 화형의 장작 위에 서 있었다. 쇠사슬로 팔과 발목이 나무기둥에 묶인 채 불길의 열기를 무력하게 견디고 있었다. 탐욕스레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왔다.
화염이 발등에 붙었다. 멀리서 불어온 한줄기 겨울바람이 화형대를 가로질렀다. 불길이 낡은 수의자락을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 종아리와 허벅지를 삼켰다. 화염에 새카맣게 그슬려가는 자작나무를 응시하며, 광장에 밀집한 군중이 즐겁게 낄낄거렸다.
아, 나의 왕이시여.
자작나무가 울면서 소리쳤다.
어째서 나를 이토록 방치하십니까. 자작나무숲에서 하신 말씀이 전부 거짓이었습니까.
겨울바람이 연기를 갈랐다. 저만치 떨어진 높은 제단 위에서 왕좌에 앉아 있는 왕이 드러났다. 자작나무는 일순간 숨을 들이켰다. 왕이 왼손에 든 포도주 잔을 느긋이 흔들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흡족해하는 눈빛이었다. 포도주를 음미하던 그가 오른손으로 왕좌를 톡톡 치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제야 자작나무는 깨달았다. 자작나무 가지를 본 순간, 왕은 의미를 꿰뚫어 보았다. 알면서도 외면했다. 시원하게 기지개 켜고, 탑 쪽을 한 번 힐끗 쳐다본 후, 「용무 끝났군.」 하고는 싱긋이 웃으며 왕궁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왕이 지그시 웃었다. 「하룻밤 재미도 주고, 권력에 든든한 반석도 쌓아 주고, 꽤 쓸 만한 벌레로군.」
그러고는 레비탄을 끌어안았다. 레비탄이 왕의 품에 안기며 자작나무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들이 격렬히 기뻐했다. 미치게 즐거워했다. 「아하하하!」하고 웃으며 이쪽을 손가락질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버려, 이 벌레! 죽어! 죽어 버리란 말이야! 아하하하하!」
불길이 자작나무의 얼굴을 덮쳤다. 살갗이 타오르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입술과 잇몸이 타들어 갔다. 소용돌이치는 화염 속으로 광란의 웃음이 파고들었다…….
나는 눈을 떴다. 어둠이 흐르는 침실이었다.
창밖에서 빗소리가 얇게 깔리는 밤이었다. 전신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잠깐 숨도 쉬지 못하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즐거운 광소가 아직도 생생했다. 불에 타 죽어 가는 자작나무를 구경하며 흡족하게 포도주를 마시는 데이탄즈가 눈앞을 어른거렸다. 세상이 퍼부어 댄 무시무시한 증오와 경멸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무서웠다. 끔찍한 외로움이 몰려왔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기며 “으음.” 하고 침음했다. 메사라였다. 설핏 눈을 뜨더니 잠에 취한 음성으로 “안 자고 뭐 하는 겁니까.” 하고 말했다.
“……잠깐 깼어요.”
메사라가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를 깊숙이 끌어안았다. 내 등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또 나쁜 꿈이라도 꿨습니까. 괜찮아요…….”
메사라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완만하고 조심스런 손짓이었다.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귓가에 울리는 메사라의 심박소리가 멀리로 떨어졌다.
음악과 텔레비전 소리가 섞인 아침이었다. 아침 8시까지는 메사라의 출근을 돕느라 나도 정신없이 움직여야 했다. 메사라가 운동하고 씻는 동안 나는 식사를 준비했다. 스튜 냄비에 소금과 후추를 넣어 간을 한 후 맛을 보았다. 처음 만들어 본 부야베스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손을 닦은 다음 운동실로 향했다.
러닝팬츠만 걸친 메사라가 힘껏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었다. 격투기에 까막눈인 내가 봐도 여러 사람 잡을 노련한 솜씨였다. 메사라는 휴일과 공휴일에도 절대 빼먹지 않고 하루에 한 시간씩 운동을 했다. 사무직 대원인데도 저렇게 몸 관리를 하다니 놀라웠다.
나는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씻어요. 음식 다 돼 가요.”
“아, 네.”
메사라가 샌드백으로 주먹을 날렸다. 묵중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샌드백이 높이 치솟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저걸 한번 맞으면 웬만한 사람은 그대로 갈 듯했다. 메사라가 타월을 목에 걸치며 “뭘 그렇게 봅니까?” 했다.
“아, 아니. 그냥. 메사라는 운동을 참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흐흠. 열심히 해야죠. 그래야 나도 좋고 레이도 좋겠지요.”
메사라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내 허리를 쳐다보았다. 민망했다. 나도 좋고 레이도 좋다니, 무슨 뜻인지 뻔했다. 나는 머리를 긁다가 음식이 타는 냄새에 후다닥 식당으로 달려갔다.
식사 도중 메사라가 간밤에 무슨 꿈을 꿨냐고 물었다. 나는 “좋은 꿈이었어요.” 하고 얼버무렸다.
“좋은 꿈인데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습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음…… 불이 나는 꿈이었는데, 해석을 하면 길몽이 되거든요. 불이나 오물이 등장하면 좋은 꿈이에요. 이를테면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온다든가.”
“호오. 그렇습니까? 이거, 오늘 복권이나 한 장 사야겠네요.”
“그래야 할까 보네요.”
나는 샐러드를 뒤적거렸다. 밤새 악몽에 시달려선지 입맛이 없었다.
메사라가 내 접시를 흘끗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레이와 식사하고 있으면 초식동물과 함께 사는 기분이에요. 입맛을 다양하게 바꿔 보지 그래요?”
“아아, 어쩔 수 없죠. 나도 채식이 좋아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폐가 안 좋은 사람은 혈관을 수축시키는 음식은 피해야 하니까.”
메사라가 일순간 멈칫했다. 나는 우유 잔을 들며 “왜 그래요?” 하고 물었다.
“뭐…… 그냥, 당신이 의학에 밝았나, 하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내가 말 안 했나요? 좀 공부하긴 했죠. 총알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면서요. 그럼 당연히 폐가 상했을 텐데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것 때문에 채식을 주로 했습니까.”
“네. 그런데 내가 이쪽을 조금 공부한 걸 메사라가 몰랐다니 의외네요. 아하하. 내가 민간요법에 관해서 글을 쓰는 것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이제 보니 그렇군요. 실은 내가 눈뜬장님이거든요. 한데 레이는 잡다한 지식이 많나 봐요. 민간요법과 식물의 효능도 모자라 의술까지라니.”
메사라의 말에 나는 샐러드만 뒤적거렸다. 내심 뜨끔했다. 이참에 내가 한때 주술사였다고 털어놓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주술 수업에서 의술은 중요했다. 마녀가 국자로 큰 통을 휘젓는 그림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주술사의 주수입이 다양한 효능의 몰약이었다. 따라서 전문의까지는 못 되어도 일정 수준의 지식은 꼭 갖춰야 했다. 자칫하면 고객의 몸에 큰 해를 끼치니까.
식사를 마친 뒤 옷을 입은 메사라가 나를 거울 앞에 앉혔다.
“정말 아름다운 금발입니다. 이렇게 근사한 플래티나 블론드는 드물걸요. 그거 알아요? 50년 뒤에는 금발이 거의 사라진다고 하더군요. 열성유전이라서 복잡한 조건하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라고요. 나는 행운아입니다, 하하하.”
메사라가 내 머리를 빗겨 주며 속사포같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이 벌겠다. 매일 아침 겪는 일이었다. 반드시 거울 앞에 나를 앉히고 메사라는 낯 뜨거운 칭찬을 늘어놓았다.
메사라도 금발인데 왜 내 금발에만 유독 칭찬을 퍼붓는 걸까. 같은 금발이되 빛깔은 완연히 다르긴 했다. 그래도 민망했다.
머리를 빗은 다음, 출근하는 메사라를 배웅했다. 키스를 나눈 뒤 메사라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나를 포옹했다. 오늘따라 포옹이 다정했다.
차를 끓여 마신 뒤 설거지를 시작했다. 가랑비가 내리는 화요일 오후였다. 담당의는 이번 주부터 수요일과 토요일만 내원해도 좋다고 말했다.
「감당하기 힘든 사건에서 파생된 심리적 부담이 근본원인이죠. 대개는 갑작스럽게 깨끗이 회복되지만, 사람에 따라 경과가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힘들더라도 도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쳐 해결하게끔 교육을 시켜서, 재발이나 기억을 되찾을 경우를 대비해야 해요.」
뭘까.
11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지워 버리게끔 한 끔찍한 일이란.
솔직히 찾고 싶지 않았다. 11년을 단번에 증발시킬 만큼 고통스런 사건이라면 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나는 기억이 얼마나 날카롭고 억센 손톱을 휘둘러대는 괴물인지 잘 알았다. 그건, 자작나무의 백골이 황무지를 파헤치고 일어나 피로 얼룩진 수의자락을 펄럭거리며 앙상한 손가락을 뻗쳐 오는 악몽과도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접시를 건조대에 넣었다.
꿀꿀한 생각은 그만하자.
할 겨를도 없었다. 그간 병원을 오가느라 밀린 집안일이 산더미였다. 갖가지 일을 마치고 나니 오후 두 시였다. 남은 시간 동안 원고를 검토할 생각이었다.
거실에 앉아 자료집을 넘기다가 멈칫했다. 탁자에서 지포라이터가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메사라의 지포라이터였다. 깜박 잊고 놔 두고 간 모양이었다.
탁자 아래에서 재떨이를 꺼내 살펴보았다. 필터까지 닳은 꽁초가 두 개비 있었다.
지포라이터를 들어올렸다. 메두사가 조각된 백금 지포라이터였다. 여인의 머리에서 뱀들이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뒤엉켜 있었다. 나는 지포라이터를 켰다. 찰칵, 소리가 나며 불이 붙었다.
내 폐를 의식한 탓인지 메사라는 내 앞에서는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았다. 저 담배꽁초들은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피운 것들인 듯했다. 지포라이터를 재차 켰다. 칙, 소리와 함께 불꽃이 피어올랐다.
뭐지, 이건.
이런 때가 있었다. 그래……. 지금과 비슷한 때가 있었다. 나는 혼미한 기분으로 지포라이터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불꽃을 주시했다.
이번에도 병원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메사라가 두고 간 지포라이터를 껐다 켜고 있었다. 창밖에서 맑은 햇빛이 총총히 떨어졌다. 링거 주사바늘이 꽂힌 팔이 앙상했다.
긴 시간 나는 말없이 지포라이터만 껐다가 켰다. 피어올랐다가 점멸하는 불꽃을 응시하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왜지.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내게 관심이 있는 걸까.
나를 좋아해서 저러는 걸까. 혹시, 내게 마음이라도 있어서?
끊임없이 뇌까리며 지포라이터를 껐다가 켰다. 그 찰칵거리는 소리가, 프라고나르의 마술적인 암시로 들어찬 화폭같이 미묘한 리듬을 띠며 흩어졌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계 분침 소리가 찰칵찰칵 뛰어가는 조용한 거실이 눈앞으로 들어섰다. 뭘까, 아까 그것은. 병원에서의 두 번째 기억이었다.
멍하니 건너편의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탁한 브라운관이 금발의 레이 아리사를 반사했다. 잠깐 뒤 나는 실소했다.
뭐냐.
관음증 환자들이 이런 맛에 타인을 훔쳐보는 걸까. 막 스친 기억에 등장한 내가 어딘지 웃겼다. 거기서 등장한 나는, 지포라이터를 껐다 켜면서 메사라의 심중을 재고 있었다.
연애 초기 무렵일까.
처음 떠오른 병실의 기억을 되살렸다. 거기서 나는, 막 병실에 들어서는 메사라가 어찌 나올지 궁금해하며 일부러 자는 척했었다. 실눈을 뜨고 메사라를 훔쳐보았다.
두 번째의 나는 메사라의 마음을 이리저리 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 혹시 나를 좋아해서 저러나…… 하고. 그 상황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메사라가 내게 얼마나 관심 있는지 신중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고의적으로 자는 척하며 메사라의 반응을 떠보았다. 지포라이터를 찰칵거리며 메사라의 심중을 곰곰이 헤아렸다.
여우같네.
우스운 표현이지만 그 외에는 딱히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3류 영화나 로맨스 소설에서 왜 연애 초반부를 일컬어 흔히 ‘탐색전’ 운운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담당의에게 털어놓기에는 민망한 기억이었다.
사랑은 ‘보여 줄까, 보여 주지 말까’의 게임이라더니…….
나는 킥킥거리며 지포라이터를 찰칵거렸다. 빨간 불이 치솟았다. 불 때문일까. 간밤의 꿈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나는 지포라이터를 켜며 혀를 찼다.
한심했다. 자작나무가 주술 도구를 사용해 증거를 잡혔다면, 그 꿈은 고스란히 현실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자작나무는 왜 그렇게 놈을 기다렸을까. 왜? 레비탄과의 섹스는 병적으로 기피하던 놈이 자작나무에게는 매우 빨리 육체관계를 원해서? 자기가 레비탄보다 훨씬 젊으니까?
터무니없었다. 29세의 왕에게 후손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자마자 보란 듯 레비탄을 임신시킨 것만 봐도 그녀를 향한 놈의 깊은 사랑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동시대의 앙리 2세와 디안도 산증인이었다.
아무튼 짜증났다. 갈수록 잔악해지는 고문으로 자작나무는 끝내 미쳐 버렸다. 재판에서도 왕 타령이나 하며 횡설수설했다. 재판기록을 읽으며 배꼽을 잡았을 왕놈을 상상하면 짜증만 났다.
내가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할 때냐.
지포라이터를 내려놓았다. 오후 4시부터 운전 강습을 받을 예정이었다. 원고에, 통원 치료에, 넉 달 안에 운전면허를 취득할 계획까지 겹쳐 요즘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게다가 운동까지 시작했다. 하루에 한 시간씩 러닝머신 위에서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움직이길 싫어하는 두더지에게는 이것도 고역이었다. 주말에 메사라와 함께 운동할 때는 꾀부릴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평일에는 건너뛰기 일쑤였다.
오늘도 건너뛸까 망설이다가 운동실로 향했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간밤의 꿈을 떨쳐내려면 한바탕 운동이 최고의 약이 될 듯했다. 러닝머신의 스위치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잘살아야지.
자작나무를 그렇게 해 놓고 50년이나 더 잘 먹고 잘산 그 개자식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돌았다. 나도 놈 못지않게 잘 먹고 잘살아 줄 심산이었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 줄 심산이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였다.
그렇게 다짐하며, 러닝머신에서 당장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열심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