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유리정원 2-1 .M─ (81/101)

1 .M─

“어, 놀랐는데. 레드폭스가 그 자리에 있다니 말이야. 요즘 또 정신이 이상한가 봐? 레드폭스가 그 자리에 간다는 거 알고 있었어?”

레오파드의 말에 나는 “대강은.” 하고 짧게 대답했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오늘 아침, 병원에서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갈 예정이라고 레이가 말하는 순간 감 잡았다. 어떻게든 레이의 만찬 참석을 막아 보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꼬여 버렸다. 그렇잖아도 속 쓰리던 판에 웬 미친 할망구까지 난동을 부렸다. 진정 개떡 같았다.

나는 빌어먹을 가면을 벗어던지고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다. 재규어가 금연 껌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런데 령이 좀 이상하던데. 우리를 보고도 반응이 그냥 그렇더라고.”

나는 필터 끝을 빨며 말했다.

“음. 제대로 봤어. 레이는 11년간 기억을 몽땅 까먹었거든. 령으로서 정쟁에 참여한 기억까지도. 지금 그는 자신을 평범한 헌책방 주인으로 알고 있어.”

“뭣!”

“진짜?!”

레오파드와 재규어가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놀라면서도 화색이 발그레 도는 얼굴이, 이 웬 떡이냐 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그게 진짜야? 이야아, 이거 나름대로 긍정적인 정신병 아닌가. 그럼 기억은 되찾을 수 있대?”

재규어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낄낄거렸다. 한 대 패주고 싶었다. “몰라.” 하자, 재규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영원히 기억을 찾지 말아야지.”

“아무렴.”

레오파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레드폭스는 왜 그런대. 그 두 달간 일으켜댄 발작의 연장인가…… 하기야 그 할멈도 만만치 않더라만. 점잖던 할망구가 갑자기 프로레슬러로 변신해서 장정들을 무찌르리라고 누가 상상했겠어.”

“뭐, 한시름 놨군. 네게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애인이겠지만 우리로선 시한폭탄을 안고 자는 기분이라 조마조마했다고. 이렇게 되었으니 딱 새사람으로 만들어 놔. 무슨 뜻인지 알겠지.”

재규어와 레오파드가 쌍으로 사람을 들볶았다. 알아, 하고 시큰둥이 대답할 찰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음. 뭐냐.”

―아까 난동을 부린 남녀 말입니다. 신분증을 확인했는데요. 여자는 아그네스 라몰 리, 남자는 랜스 리. 모자지간이랍니다. 어떡할까요.

“고문소에 구금해. 취조는 고문부장에게 일임한다.”

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담배를 비벼 껐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령을 향한 부장들의 경계심이 덜해진 셈이었다. 나름대로는 수확이었다.

레이의 가랑이나 떠올리며 기분을 회복하기로 했다. 이틀 연이어서 나눈 화끈한 잠자리를 돌이켜 보았다. 끝내주었다.

특히 욕실에서 벌인 플레이가 백미였다. 우선 관장을 했다. 창피해하며 필사적으로 참던 레이가 끝내 질질 쌌다. 그 꼴이 아주 짜릿했다.

나는 관장 플레이를 좋아했다. 손쉽게 수치심을 줄 수 있기에 하룻밤 상대들과도 곧잘 즐긴 행위였지만, 연인끼리 하는 것은 또 의미가 달랐다. 나를 위해 노력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플레이였다. 알 것 다 알고 볼 것 다 본 사이라는 확실한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관장 플레이 뒤에는 오일을 바르지 않은 채 삽입했다. 조임이 엄청났다. 처음에는 몸부림치던 레이도 얼마 못 가 정신을 못 차리며 쩔쩔맸다. 자지러지며 내게 매달렸다. 나도 실컷 싸 주었다. 구멍이 느슨해질 때까지 쑤셔 박았다. 그리고는 거품목욕으로 산뜻하게 마무리.

이런 것도 다 레이의 기억상실이 낳은 호재였다.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즐긴다고 거짓말을 치면, 레이는 망설이다가도 결국에는 순순히 다리를 벌려 주었다. 연인끼리의 색다른 섹스라고만 단순하게 믿는 눈치였다.

연인끼리의 색다른 섹스.

나는 지그시 웃었다. 이 또한 괜찮은 수확이었다.

언젠가 나는 레이가 날 어찌 생각하는지 슬그머니 떠본 적 있었다. 그러자마자 주저 없이 돌아온 대답이 “매너가 비교적 좋은 변태”였다. 매너가 비교적 좋은 변태. 변태. 그때 나를 강타한 충격의 강도가 어느 만큼인지 레이는 추호도 모를 것이다. 염병이었다. 정말이지 좆같았다.

물론 나도 염치없이 ‘인품이 훌륭한 남자’라든가, ‘마음이 참 고운 남자’ 따위의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설마 대놓고 변태 취급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다소 짓궂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 정도로 평가받을 줄 알았다. 하다못해 ‘성적소수자’로 에둘러 평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 뒤 레이가 더는 변태 운운하지 않았지만, 그 칭호를 내가 깨끗이 잊기란 무리였다. 트라우마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불쑥불쑥 떠오를 때마다 피가 절절 끓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칭호와도 홀가분히 굿바이했다.

레이와 메사라는, 단지 ‘색다른 섹스’를 즐길 뿐이었다. 그것만이겠는가. 내가 온갖 변태도구와 성병검사 서류를 챙겨들고 찾아가 너스레를 떨어댄 추접한 과거도 레이는 씻은 듯이 잊어먹었다. 그 과거만 떠올리면 낯이 절로 뜨끈했는데, 지금은 그 망신스러운 지난날도 후련히 떨쳐냈다.

한마디로 포우 메사라는, 점잖고 신사적이며, 매너 있는 ‘착한 남자’로 참신하게 재탄생한 것이다. 하하하.

하여간에 도리 없는 녀석이라니까…….

나는 쓰게 미소 지으며 자료파일을 펼쳤다. 오늘 스케줄은 낮에는 자선만찬, 저녁에는 카멘 호텔에서 있을 칼의 약혼식 참석이 전부였다. 티파티 자료부터 검토했다. 별거 없었다. 아이들의 까악까악 소리에 스트레스만 잔뜩 받아 버리고 끝났다.

나는 손가락으로 의자를 톡톡 쳤다.

역시 암살뿐인가.

방법이 그것뿐이면 할 수 없었다. 평소라면 칼과 적당히 놀아 줬을 테지만, 지금의 내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현재의 나는 귀족의 셰퍼드 따위가 아니었다. 재포니카 업무 하나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바빴다.

어제, 중요한 보고서가 들어왔다. 우리가 포섭한 이리나 여자친구의 증언이었다. 왕의 정부 노릇을 강요하는 오빠 때문에 이리나가 괴로워한다는 거였다.

내 예측이 적중했다. 칼은 처음부터 세도가가 될 야심으로 여동생을 이용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리나가 왕비 자리에 야심이 있었다면 그녀도 암살대상에 넣어야 했을 터였다. 미녀의 죽음은 늙은 정객 열 명의 죽음에 맞먹는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칼만 제거하면 가뿐하게 끝나는 일이었다. 남은 문제는 제거 수단의 선택뿐이었다.

“차에서도 일이냐, 워커홀릭 본부장님. 쉬엄쉬엄 하라고.”

레오파드가 내 옆구리를 톡 건드렸다. 심심하다, 놀아 달라는 의미였다. 나는 파일을 닫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레오파드가 진 잔을 내게 건넸다.

“그런데 이거 물어봐도 돼?”

“음. 뭐냐.”

“본부장님 부부의 잠자리가 생각할수록 궁금해서. 레드폭스가 네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줘? 아니면 네가 알아서 참는 거야?”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 재규어가 “오우.” 하며 휘파람을 불면서 룸미러에 비치는 이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날카롭게 되묻자 레오파드가 근심스럽게 말했다.

“뭐기는. 그냥 둘이 잠자리가 잘 맞느냐, 그거지. 피스트 퍽도 레드폭스의 체구가 작다면서 안 했던 너잖아. 괜찮아? 참을 만해? 이건 진짜 걱정해서 하는 소리야.”

재규어가 핸들을 돌리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피, 피스트 퍽? 아니, 스네이크의 취향이 그 정도였어? 프흐흐……. 말이 났으니 말인데 잠자리, 중요하지. 뭐, 령이야 겉만 보면 번드르르한 금발 인형이긴 하다만, 제아무리 보기 좋은 떡이면 뭘 하냐. 속까지 착착 맞는 상대를 만나야지. 맛이 좋아야 오래가는 법이라고.”

“그래. 좋겠다. 겉과 속이 착착 맞아서 너는 애를 넷이나 팡팡 낳고 참 좋겠다.”

내가 비꼬자 재규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누이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품 불량 탓이었어. 찢어진 콘돔.”

나는 운전석을 발로 걷어차고 담배를 뽑아 물었다. 뒤에서 부장들끼리 어찌 입방아를 까댔는지 훤히 보였다. 내가 사랑에 눈이 멀어 욕구마저 억누른 채 경건히 살고 있으리라 단정한 것이다. 레오파드의 저 측은해 하는 눈빛도 그것을 장렬히 웅변하고 있었다. 악당 스네이크 졸지에 수도승 됐다.

마음대로 떠들라지.

재규어의 말에 답이 이미 나와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성격이 맞아도 잠자리가 수틀리면 얼마 못 가서 깨지는 것이 세상지사였다. 이건 상식이었다. 나와 레이라고 이 상식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서로가 잠자리에서 노력하지 않았다면 관계유지가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코웃음 치며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멈칫했다. 홀연, 귓전을 스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힘든 사랑을 하고 계십니다. 괜히 욕심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사십시오.

바로 염병할 주술사의 말이었다. 사랑점을 쳐 달라던 칼에게 작자는 그렇게 답을 내놓았었다.

이런 제기랄. 내가 왜 이걸 지금에야 다시 기억해냈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았다. 키 큰 도둑을 쫓던 프랑스인 형사가 담배를 피우면서 뇌까리던 말을 떠올렸다. 기적에 관한 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 기적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에 있다고 했던가.

평범하게 사고하는 사람들은 놓쳐 버리기 쉬운, 짓궂은 꼬마요정이나 만들어낼 법한 우연이 우리 삶에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놀랍게도 프랑스인 형사의 통찰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짓궂은 꼬마요정이나 만들어낼 법한 우연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바로 이리나의 마법파티에서.

주술사가 알토넨에게 무엇이라 경고했던가. 허수아비 노릇에만 충실하라 했다. 칼은 주술사의 점괘에 어찌 반응했던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족집게네, 하며 웃었다. 뒤이어 나까지 주술사가 던진 점괘에 놀라 잠깐 미동도 못 했다. 알토넨과 칼, 나, 무려 세 사람이 주술사의 점괘를 ‘인정’한 것이다.

즉 그 주술사는 엉터리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렇다면 이것이 실마리였다. 얄팍한 상식을 깨끗이 버리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실마리가 분명했다. 칼은 힘든 사랑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힘든 사랑이 아닌, 순리마저 거스른 사랑을.

이거 꽤 재미있는걸…….

소리 없이 웃으며 담배를 비벼 껐다. 흥분으로 피가 끓었다. 우선은 칼의 약혼식을 지켜보며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했다. 카멘 호텔이 저만치서 보였다.

대중스타의 약혼식답게 매스컴의 취재열기가 화끈했다. 온갖 귀족들을 위시하여 재계 인사들, 기자들과 구경하러 온 평민들까지 인산인해였다. 알토넨이 “약혼식이니까 그쪽에서 오늘은 수행인원을 좀 줄여 달라고 전해 오던데.” 하고 사전에 호소했지만, 싹 무시하고 되레 전 부장들을 동원했다. 우우 몰려가서 단단히 초를 쳐 줄 작정이었다. 끔찍하게 재수 없이 굴어 줄 심산이었다. 이런 때만은 빌어먹을 가면과 제복코트가 고마웠다.

알토넨 뒤에 주르르 서 있자니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식장으로 들어서던 푸셔가 멈칫했다. 트레이드마크인 일본식 부채를 탈탈 흔들어대며 우리를 가재미눈으로 한껏 흘겨보고 지나갔다. 제법 볼만했다.

칼과 오바스카 양이 등장하자 플래시가 빗발쳤다. 안절부절못하는 오바스카 양을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손쉽게 바람피우기 위한 대외용 마누라라면 참으로 잘 골랐다 싶을 만큼 순진해 보였다.

지루한 절차를 거쳐 축하파티가 뒤이었다. 기자들이 칼에게로 우르르 몰려가서 “약혼녀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느냐”, “소감을 말해 달라” 하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칼이 싱긋 웃었다.

“말했다시피 티파티에서 처음 만났지요. 하하핫. 이상형이 그야말로 눈앞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이랄까요. 저런 미녀가 존재한다니, 온몸에서 소름이 돋으며 몇 초 동안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모두 축복해 주십시오.”

알토넨이 “푸허.” 했다. 나도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백만 번 양보해 오바스카 양의 내면을 찬양했으면 그럭저럭 수긍했을 것이다. 그렇건만 뭣이 어쩌고 어째. 눈알이 구두밑창에 달리기라도 했나. 물론 그럴 리 없었다. 칼의 취미가 명화감상이었다. 그건 미적 안목이 뛰어나다는 의미였다.

칼과 오바스카 양이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185센티의 칼과 147센티 오바스카 양이 저러고 있자니 삼촌과 어린 조카딸 같았다. 신부 측 가족만 제외한 모든 하객들이 킥킥거렸다. 칼을 쫓아다니던 사교계 여인네들 웃음이 특히 요란했다.

오바스카 양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이 비정한 나마저 측은지심이 일 만큼 안쓰러웠다. 저 많은 추종자들을 내팽개치고 하필 저 왜소한 여인을 정략혼의 제물로 삼다니, 칼도 너무하네 싶었다.

…….

얼음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듯했다. 머리가 멍했다. 나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앞의 광경을 뚫어지게 훑어보았다. 확연히 들어왔다. 그건 바로 질투에 휩싸여 오바스카 양을 노려보는 수많은 미녀들이었다.

어처구니없었다. 내가 왜 이걸 놓치고 있었을까. 세상에서 으뜸가는 눈뜬장님이 포우 메사라였다.

뻔한 것 아닌가. 칼에게는 윙크 한 방이면 단박에 달려올 미녀들이 산재해 있었다. 오바스카 후작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약혼식을 서두를 만큼 칼은 인기가 많았다. 제아무리 로터스 푸셔와 결탁이 급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오바스카 양보다 젊고, 키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라면 푸셔의 측근 문신귀족가문에서 최소 서른 명은 찾을 수 있었다.

약혼발표 사진에서 느낀 위화감의 원인을 비로소 이해했다. 오바스카 양이었다. 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바스카 양 그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구체적인 단서를 드디어 잡아냈다. 오바스카 양은 칼이 ‘힘든 사랑’을 하기 위한 면피용 가면이 분명했다. 어쩌면 오바스카 양 주변에 칼이 연정을 품은 상대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하하, 이런.

운 한번 더럽게 좋은 새끼였다. 오늘 일로 비명횡사는 면했다. 나는 휴대전화를 들어 직속부하를 호출했다.

“오늘부터 오바스카 양까지 24시간 감시해. 감시팀도 세 배로 늘리도록 해. 매일 빼놓지 않고 도청자료도 입수해.”

이튿날 조간에 칼와 오바스카 양의 댄스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두 사람이 약혼이 끝나자마자 동거에 돌입, 실질적인 부부생활을 시작했다는 기사와 함께.

사흘 뒤 도청자료가 들어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칼과 오바스카 양이 떡 치는 소리만 귀 따갑게 쏟아졌다. 그간 우리 사이에서 갑론을박으로 오간 고자설, 게이설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칼이 오바스카 양더러 「나의 베이비! 오오, 베이비이이!」하고 부르짖으며 맹렬히 박았다. 속이 다 메슥거렸다.

이런다고 눈앞이 흐려질 내가 아니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나는 즉각 암살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는 정보부장 쿠퍼헤드에게 도청자료 검토를 몽땅 떠안겨 버린 다음, 단단히 살펴보라고 호통쳤다.

빌어먹을 가면을 벗어던진 후 의자에 풀썩 앉았다. 며칠간 끔찍하게 바빴다. 의원회의에서 벌어진 난리통까지 합세하여 좆털 날리도록 뛰어다녔다.

폰타네 의원이 올린 의제더러 “농민을 앞세운 비열한 정치적 수작”이라고 푸셔가 맞받아치는 통에 의원회의에서 귀족들과 평민의원들끼리 주먹다툼이 오간 것이다. 왕년에 권투깨나 한 폰타네 의원은 푸셔를 비롯한 여러 문신귀족들을 KO패시켰다. 폰타네 의원이 푸셔의 코에 어퍼컷을 날렵하게 먹이는 장면은 해외토픽이 되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코가 뭉개진 미남 할아버지 푸셔는 큰 충격에 휩싸여 곧장 성형외과에 입원하고 전치 3주 진단서를 끊었다. 그 탓에 성명서며 언론 수습이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뛰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폰타네 의원의 빼어난 권투실력은 대중을 열광시켰다. 사실 농업은 왕국의 산업에서 차지하는 퍼센티지가 미미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푸셔가 헛소리를 깠는데, 전세가 역전된 셈이다.

“있어?”

레오파드가 보고서 한 부를 들고서 들어왔다. 나는 “음. 뭐냐.” 했다.

“어, 다른 게 아니라 월요일 만찬에서 난동을 부렸던 할망구 있잖아. 그거 신문 자료. 검토하고 자시고도 없는데, 일단은 보고를 올리려고.”

“그래. 뭐 하는 작자들이야.”

나는 펀치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레오파드가 보고서를 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별거 아냐. 그들 주장대로 이쪽과는 하등 관련 없는 일반인이더라고. 일단 내 재량으로 오늘 석방했어.”

“그럼 됐군.”

“뭐, 그렇지. 아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까 사연이 퍽 구슬프더군. 막내가 하도 골치 아프게 굴어서 부모가 혼내 주겠답시고 공원에다가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고 자취를 감췄대. 그러고 30분 만에 돌아갔는데 그새 아이가 사라졌더라나. 그 후로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면서 꺼이꺼이 울더라고.”

“저런.”

나는 펀치를 마시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레오파드가 “여하튼 그렇더라고.” 하며 어깨를 으쓱 올렸다.

안타까운 사연이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후 업무를 시작했다. 평민의원단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그간 밀린 일이 산더미였다. “어서 와요.”를 떠올리며 업무에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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