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M─ (80/101)

23 .M─

조간을 펼쳤다. 1면 헤드라인이 ‘고구마에 압사한 로터스’였다.

……기폭제가 된 것은 오디너리 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이다. 이 사건은 작년 의원선출 대회에서 오디너리주(州)에 푸셔 경이 내건 공약에서 시발되었다.

오디너리주는 푸셔 경의 영지이자 왕국 최대의 비닐하우스 고구마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푸셔 경은 고구마를 대량 사들이겠다고 약속하여 오디너리주에서 문신귀족들로 의석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의원선출대회가 끝나자 푸셔 경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결국 생산농가는 큰 손해를 입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마침내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고……

당연하지만, 이번 고구마 농성의 배후는 바로 나였다. 농민단체장에게 돈 좀 쥐여 주고 시위를 사주했다. 마넨이 부랑자들에게 시급을 주고 시위를 조장했던 짓거리를 이번 기회에 과감히 표절한 것이다. 재미가 아주 짭짤했다.

그리고, 카발리 후작의 횡사가 2면에 ‘보너스’로.

카발리는 사교계의 늙은 귀부인들에게서 용돈을 뜯어내길 일삼은 제비였다. 30센티 물건으로 명성이 짱짱한 종마로서, 푸셔의 최측근 참모이자 차기 후계자인 딸 로즈먼드의 남자정부이기도 했다.

어제 점심시간을 틈타 레오파드와 함께 푸셔의 딸과 카발리가 자주 만나는 바에 갔다. 화장실에 들어선 카발리의 목뼈를 180도로 손수 돌려 준 다음, 맥주 한 잔으로 가뿐하게 입가심하고 바를 나섰다.

하하하.

나는 지그시 웃었다.

재규어가 일명, ‘고구마의 늪’ 관련 기사로 온 매스컴이 난리라고 전해 왔다. 왕국 농민들은 백년 넘게 지속된 이상기후로 큰 고통을 겪었다. 그걸 푸셔가 이용해 의원직을 꿀꺽한 후 나 몰라라 내팽개친 것이다. 마침 심심하던 매스컴에게 좋은 먹잇감이 나타난 셈이었다.

농민에게 도움도 주고, 푸셔의 인기도 떨어뜨리고, 꿩 먹고 알 먹고였다. 거기에 보너스까지. 나는 원래부터 악질사채업자였다. 원금에서 다섯 배는 쳐서 돌려받아야 직성이 풀렸다.

부장 회의 도중 폰타네 의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소식 들었는가. 푸셔가 사태 수습차 오디너리주로 달려갔다가 계란세례를 받았다더군. 우리는 다음번 의원회의에 이번 일을 의제로 올릴 생각이네. 본부장만 믿겠어.

통화를 마친 뒤 텔레비전을 켰다. 스펙터클했다. 계란에 온몸이 범벅된 푸셔가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었다. 마스크와 점퍼로 중무장한 리포터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몰려드는 성난 농민들로 광장이 아수라장입니다.」하고 멘트를 날리다가, 농민에게 각목으로 뒤통수를 맞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공중으로 카메라가 휘리리릭 날아오르더니 화면이 툭 끊겼다. 황급히 광고방송이 잇따랐다. 제법 볼만했다. 작품의 흥행이 기대를 훌쩍 능가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푸셔와 평민의원단의 혈투를 감상하는 것뿐이었다. 당분간 푸셔는 칼과 차 한잔 나눌 짬도 안 날 것이다. 하하하.

회의를 끝낸 뒤 업무실에서 공무를 보았다. 재포니카 공무를 내 하고픈 대로 해치우니까 신나고 재미있긴 한데, 그만큼 업무량이 늘어난 것은 또 단점이었다. 조만간 부장들의 역할분담을 다시 짜야 할 듯했다. 어느새 4시였다.

“있어?”

쿠퍼헤드와 레오파드였다. “잠깐 담배나 피자고.” 하면서 나란히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도 오늘 처음으로 담배를 뽑았다. 레오파드가 내 담뱃갑을 흘끗 쳐다보더니 “아이구, 일주일 내내 반 갑을 유지하네.” 했다.

“그런데 어찌 된 거야. 독일에서 소식은 왔어?”

“왔지. 제발 귀국시켜 달라는 하소연 전화만 오전에 두 통이나 걸려왔지.”

쿠퍼헤드가 담뱃재를 털며 툴툴거렸다. 레오파드가 “칼은 오늘내일 또 연속으로 티파티와 마녀파티를 연다더군.” 하고 말했다.

“그럼 약혼식은 사흘 남았나.”

“그렇지. 다음 주 월요일.”

레오파드가 말했다. 쿠퍼헤드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기다려 봐. 좋은 소식 없겠어? 조만간 거창하게 한 건 저지르겠지.”

나는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독일 파견대원들이 건수를 찾아내지 못하면 칼이 본격적으로 부정을 저지를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이 부장들의 견해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놈은 확실하게 기반을 닦지 않는 한 섣불리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종자였다. 어차피 돈 많은 새끼였다. 한 달 안에 건수를 잡지 못하면 최종카드를 꺼낼 심산이었다. 사고사였다.

사실 썩 뽑고 싶지 않은 카드였다. 칼은 대중에게 인기가 폭발적인 스타였다. 섣불리 암살해 버리면 대중은 거세게 반발하리라. 대중의 분노는 곧 무신귀족 지지율의 축소로 이어질 것이다. 한마디로 수많은 표가 허공으로 날아가는 셈이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며 잔에 펀치를 들이부었다.

마녀파티와 티파티라.

이것도 칼의 이미지에 플러스알파를 보태 주는 요인이었다. 젊은 귀족과 평민들에게 베푸는 마녀파티는 문화축제를 표방하는 콘셉트로 이제껏 고작 두 번 열렸음에도 인기가 대단했다. 티파티에서는 유명인사의 부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은근슬쩍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마녀파티와 티파티 관련자료, 몇 개나 들어와 있지?”

“칼 측에 포섭한 하인이 찍은 비디오 자료들이 열여덟 개 들어와 있긴 해. 오바스카 양과 처음 만난 티파티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고. 그건 왜?”

“한 번쯤은 내가 직접 검토해 봐야지 싶어서. 특히 티파티는 한 번도 안 봐서 말이야.”

“푸핫!”

레오파드가 박장대소했다. 쿠퍼헤드가 담배를 한 개비 더 뽑으며 말했다.

“티파티 검토만은 말리고 싶군. 내 직급이 뭐냐. 모든 자료는 반드시 1번 타자로 봐야 하는 의무를 진 정보부장 아니냐. 잠깐 봤는데 어떤 의미론 소름이 돋던걸. 코흘리개들이 장난감을 휘둘러대고 까악까악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데 악마들이 따로 없었어.”

농담이 아닌 듯 쿠퍼헤드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귀부인들이 칼에게 호감을 품을 만해. 그 악마들에게 과자를 구워 주고 피아노까지 쳐 주니 말이지. 유부남 클럽은 칼의 야망이 오죽하면 저런 가시밭길을 다 걸어가느냐고 입을 모으더군.”

“아이들더러 악마가 뭐야. 그 나이 때의 너는 더 심했을 것 같은데.”

“하긴, 고귀한 귀족 아이들이 저 정도이니 우리 본부장님의 어린 시절은 얼마나 호러무비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에 전율하긴 했어.”

쿠퍼헤드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받아쳤다. 하여간에 주둥이로는 절대 안 졌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어린 시절에 저지른 악동 짓으로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쿠퍼헤드는 지나가는 아주머니들 치마를 물총으로 쏴 맞추는 일이 큰 기쁨이었다고 떠들었다. 레오파드는 여섯 살까지 절대 옷을 입으려 하질 않아 아침마다 팬티만이라도 어떻게든 입히려는 어머니를 애먹였다고 했다. 이웃집의 골든 레트리버를 조랑말 삼아 만날 호령하며 타댄 나 못지않은 악동들이었다.

나는 어깨를 펴며 시계를 보았다. 4시 15분이었다. 퇴근을 어중간히 앞둔 이즈음에는 종종 지루함이 들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지루함이라. 부장들도 엄지를 치켜세우는 워커홀릭인 이 내가 지루함을 느낀다라. 언제부터였을까.

역시 레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레이를 처음 병원에 입원시킨 뒤부터였다. 얼마나 강렬했으면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퇴근하자마자 레이의 병실로 향했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레이는 침대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사 중이었습니까.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췄군요.」

너스레를 떨며 병실로 들어서는 내게, 레이가 우유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눈웃음을 지었다.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처음으로 보는 눈웃음이라 나는 일순간 멈칫했다. 레이가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입가에서 한줄기 우유가 흘러내렸다. 나는 잠깐 넋을 잃었다. 갑자기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치솟는 욕구가 엄청났다. 그러나 식사 중인 사람에게 차마 덤비지는 못하고 일단 자리에 앉았다. 내 숨소리가 노골적으로 거칠어졌지만, 무신경한 레이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느릿느릿 식사만 했다.

그동안 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자제심을 잃고 짐승처럼 달려들 것 같았다. 20분 뒤 병원직원이 와서 식판을 수거해 갔다. 직원이 나가자마자 나는 문을 잠그고 레이에게 덤벼들었다. 레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랑곳 않고 레이의 팬티를 벗겼다. 레이의 가랑이를 활짝 벌려 좆을 처박고 질질 쌌다. 논스톱으로 세 번이나 했다.

왜 그토록 흥분했을까. 그때는 우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레이의 입가를 흐르던 한줄기 우유가 정액을 연상시켜서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명료하게 알았다. 우유가 아니라, 레이의 말 때문이었다.

어서 와요.

처음으로 들은 말이었다. 내 방문에 시큰둥하기만 하던 사람이, 그날 처음 내게 “어서 와요.” 하고 말했다. 눈웃음치며 반가워했다. 나는 그 말과 눈빛에 흥분한 것이다. 미치도록 기뻐한 것이었다. 그것을, 나는 성욕으로 착각하고 말았다. 좆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이맘때면 으레 시계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어서 와요.” 소리를 떠올리면서. 퇴근하는 나를 맞이하며 레이가 맨 처음 하는 말도 “어서 와요.”였다. 기억을 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는 자기 말버릇을 알고나 있을까. 그 말을,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고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나는 혀를 찼다. 그 무신경한 사람이 그걸 깨닫고 있을 리 만무했다. 펀치를 마시며 쿠퍼헤드에게 빌린 책을 꺼냈다. 쉬는 김에 이거나 읽어 보기로 했다.

내용파악 겸 앞을 훑어보았다. 전쟁 중 하반신 불수가 된 선왕을 대신해 13세에 즉위. 같은 해에 11살이나 연상인 레비탄을 정부로 들임. 독립심이 강한 봉건주의 귀족들을 길들이고, 자신의 입장도 표하는 정치적 장(場)으로써 파티를 교묘히 활용…….

이쪽도 음모에는 잔뼈가 굵은 놈이라, 놈이 복잡한 정국을 풀어나갈 열쇠로 무엇을 활용했는지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알겠다. 바로 그거였군.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놈이 당시에 품은 구상이 대강 파악됐다. 마녀재판을 음모의 도구로 활용하고, 종교재판관들이 고소장을 신중히 검토하지도 않고 왕비를 체포해 버린 까닭도 깨달았다. 바로 종교전쟁이었다.

16세기는 신교와 구교의 대립으로 전 유럽이 내란을 겪던 시기였다. 왕은 신교도 의혹을 받던 왕비를 짓이겨, 정국안정과 종교전쟁의 불씨까지 한 방에 해결한 셈이다. 현명한 잔인함이 곧 진정한 자비라고 했던가. 일벌백계. 왕은 한 사람을 시범적으로 잔인하게 처벌해 공동체 전반의 기강을 바로잡은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실리적이었다.

그러나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단언컨대,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수법이 아니라도 치세의 반석을 닦을 방법은 많았다. 음모도 일종의 창작행위 아닌가. 널리고 자빠진 게 모티브였다.

책을 덮어 버릴까 하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 얼마나 이상한 기록이기에 눈의 여왕 팬들이 헛소리를 해 대는지 궁금했다.

자작나무의 사망 한 달 뒤부터 급속도로 퍼진 출처 불명의 이 설화는 그간 자작나무에게 냉담하던 민심을 완전히 돌려놓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문신귀족들은 궁전과 수도 곳곳에 「왕은 왕비를 15년은 죄수로, 하룻밤은 창녀로, 두 달은 마녀로 취급해 잔인하게 죽였다!」는 내용의 비방문을 몰래 붙여 여론을 교란했다.

왕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러나 자작나무 사후 31년, 궁정화가 소렐의 사망 뒤 회고록이 출판되면서 최악의 여론에 직면한다.

「왕비는 점심으로 피죽을 먹었고 서너 벌의 옷은 모두 구멍이 나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왕비의 얼굴과 손만 스케치한 다음, 작업실에서 가공의 흰 예복을 첨가해 그렸다」는 회고록 내용으로, 그간 왕이 숨겨온 자작나무의 빈궁한 탑 생활이 적나라하게 폭로된 것이다.

18세기의 명재상 로터스 드루레인은 이 설화의 선전 효과에 주목했다. 드루레인은 극작가 필립 브레멘을 기용, 연극으로 제작해 왕권 약화 선전술에 치밀히 이용했다. 브레멘이 희곡 「하얀 여왕」에서 활용한 실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초상화 공개 직후 로렌 추기경이 일으킨 반란에 고문관들 전원이 가담, 반란 진압 도중 자살했다.

왕은 소렐의 회고록이 출간되자마자 오랫동안 왕실재산을 횡령한 혐의로 왕실 시종장을 체포하고, 「실은 시종장이 자작나무에게 책정된 생활물품 예산을 횡령한 것」이라고 신속히 발표해, 들끓는 비난여론을 억눌렀다. 그러나 시종장은 재판에서 혐의를 극구 부인했다.

왕은 결혼 후 레비탄과 잠자리가 일절 없었으며 후사도 아들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묏자리를 자작나무 몇 그루만 있는 황무지로 친히 정하고, 순장을 거부하고 홀로 묻혔다.

극작가 브레멘은 로렌 추기경의 반란을 쏙 빼고, 고문관들이 왕에게 비밀리에 살해되는 것으로 날조해 버렸다. 분노한 왕이 시종장을 찢어 죽인다든가(실제로는 재판에서 화형을 선고받음), 죄책감으로 레비탄을 멀리한다든가, 자작나무를 생각하며 숨을 거두는 장면들 역시 브레멘의 윤색이다.

브레멘의 희곡은 ‘독재자 왕의 쓸쓸한 말로’를 의도한 드루레인을 몹시 흡족하게 했다. 몇몇 주요장면은 그 자신이 뛰어난 작가이기도 한 명재상이 직접 썼다. 브레멘의 희곡은 지금도 많은 영화·소설의 모티브로써 숨 쉬고 있으며……

“…….”

안면근육 한쪽이 꿈틀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쿠퍼헤드가 실실 웃으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네가 말한 야릇한 기록들이냐?”

“응.”

당장 쿠퍼헤드에게 책을 홱 집어던졌다. 쿠퍼헤드가 “이게 얼마짜리 책인데.” 하며 책을 날렵하게 받아들었다. 나는 저 녀석을 창밖으로 던져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니까, 무려 400년 동안이나 수많은 대중이 한갓 극작가의 손바닥 위에서 널뛰고 자빠지고 있었다, 이 소리냐.”

“말했잖아,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이를테면 결혼 후 데이탄즈와 레비탄의 시원찮은 부부 사이라든가. 자작나무를 향한 죄책감이네 뭐네 해석하지만, 이유는 따로 있었대. 사실 결혼하기 전에도 데이탄즈는 레비탄과의 섹스는 물론이고 키스조차 병적으로 기피했거든. 왠지 알아?”

“고자였나 보지.”

나는 펀치를 잔에 들이부으며 내뱉었다.

“그게 엄청 웃겨. 그 시대에는 귀부인도 잘 안 씻었잖아. 그런데 평민출신이라선지 레비탄은 특히나 심하게 더러웠대. 목욕은커녕 대소변을 눈 뒤 밑조차 제대로 안 닦아서 드레스 아래로 똥오줌 비린내가 진동해대고, 치아는 몽땅 까맣게 썩어 버려 입만 열면 구취가 10미터 근방까지 뭉게뭉게 퍼졌다더군.”

나는 펀치를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레오파드도 “우웁.” 하며 입을 움켜쥐었다. 쿠퍼헤드가 배꼽을 잡고 굴렀다.

“뭐, 나머지도 얼토당토않지. 고문관들만 해도, 왕이 눈이 뒤집혀서 추격한 건 고문관들이 아니라 로렌 추기경이었다던데 뭘. 순장 거부도 모후가 뒤늦게야 숨을 거둔 식물인간 선왕과 함께 생매장당한 탓이라는 견해가 유력해.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생매장을 막지 못해 왕이 그렇게 눈물을 흘렸다더군.”

“어차피 엉터리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나는 펀치를 마시며 냉소했다. 바보들 아닌가. 눈의 여왕 팬들은 극히 상식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데이탄즈가 관련자들을 백번 처벌해도, 그 자신이 눈의 여왕을 살해한 일등주범이라는 사실은 절대 씻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라면 자살했다.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팬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토록 깊이 사랑했다면 자살해야 마땅했다.

나는 픽픽 웃으며 업무를 재개했다. 더는 눈의 여왕 연구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업무만 산더미였다. “진정한 프로페셔널은 일과 사생활을 성공적으로 병립하는 법”이라고 아버지께서 귀 따갑게 강조하신 터였다. 얼른 끝내고 병원으로 달려가 “어서 와요.”를 듣고 싶었다.

“어머니의 강요에 결국 왕은 왕비를 화형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왕비는 왕궁 마당에서 불에 타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왕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뻘건 불길이 왕비의 옷자락을 덮칠 때 7년의 기한이 다 찼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새들이 날개 치는 소리가…….”

레이가 열심히 동화책을 낭독했다. 나는 레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또박또박 동화책을 낭독하는 저 모습이 재미났다. 원래는 레이의 이상형을 바꿔 주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뜻밖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마침내 여동생이 그들을 구해 준 것입니다…….”

레이가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나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정말이지 흥미진진했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열일곱 살의 레이는 참으로 순진했다. 조용한 와중에도 언제나 날카로운 경계심을 비수처럼 숨기고 있던 스물여덟 살의 레이와 판이했다. 그야말로 색다른 매력이 풍겼다.

물론 나로서는 어느 쪽이든 좋았다. 하여간에 도리 없는 녀석이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잘살았습니다. 왕의 사악한 어머니는 왕궁 마당에서 끓는 기름과 독뱀들로 가득한 통에 갇혀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었습니다.”

레이가 후우, 숨을 내쉬며 책을 덮었다. 이마에 땀이 보송보송했다. 나는 손뼉을 치며 고개를 짐짓 끄덕거렸다.

“멋집니다, 「열두 왕자」. 감동적인 가족애로군요.”

“그래요?”

레이가 웃었다. 나는 「개구리 왕자」를 뽑아서 “이것도.” 하며 내밀었다. 단박에 레이가 사색으로 변했다.

“연달아서 세 권이나 읽었는데요.”

“흐흠. 하긴, 목이 좀 아프긴 하겠군요. 그럼 좀 쉬었다가 하죠.”

나는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레이의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은 깨끗이 무시했다. 세뇌 작업이 슬슬 결실을 맺고 있는 즈음이었다. 며칠간 금발을 손수 빗겨 주며 혓바닥이 헐도록 칭찬했더니, 드디어 그제부터 레이가 머리카락을 노란색으로 칠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등장하던 눈의 여왕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동화책 낭독도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 확신했다. 내친김에 어제는 60권짜리 전집까지 주문해 버렸다. 나는 한다면 하는 놈이었다.

“어떻습니까. 이번에 읽은 책 중에서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

“그냥 뭐…… 다 좋아요.”

레이가 겸연쩍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온실에서 차나 마시죠.” 했다. 차를 끓여 온실로 향했다. 붉은 흙에서 꽃씨가 싹을 틔우며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곳곳에 놓인 화분들에서도 색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빗줄기가 온실 유리를 토독토독 때렸다. 쏟아지는 폭포에 갇힌 듯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먹구름이 총총히 흘러갔다. 일순간 먹구름 한구석에서 불빛이 점멸하며 천둥이 터졌다. 섬광과 함께 벼락이 쳤다. 찰나 하늘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먹빛으로 확 되돌아갔다. 장관이었다. 레이가 숨을 들이키며 “와아…….” 했다. 나는 싱긋이 웃었다.

분위기가 제법 좋은데.

나는 스푼으로 찻잔을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레이의 건강검진 결과에는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폐 상태도 좋았다. 의사는 되레 운동을 권유했다.

그럼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레이의 기억상실은 정신이상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의사는 장기간 치료를 요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쯤 되자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레이가 앞으로 더는 기억상실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굳이 11년을 되찾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었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스물여덟 살의 레이에 비해 열일곱 살의 레이가 밝고 안정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내게 이로운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악당이었다. 진정 못 말릴 녀석이었다.

나는 레이에게 내 신상명세 및 여러 오점에 관하여 족족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가슴의 총상은 무장 강도가 한 짓이며, 나는 평범한 가이거 사무직 대원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 안에 도사린 뱀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았다. 레이의 내부에 무엇이 숨었는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그저 보통사람들처럼, 우리도 평범하게 만나 조용히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빛을 뿌리는 은박지같이 화사하고 얄팍한 거짓말로 진실을 포장했다. 레이를 상대로 사기를 쳐 먹었다. 알고 있다. 이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이에게 늘어놓은 거짓말들은 내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그것도 무척 간절한. 헤어져 있는 동안 내가 망상 속에서 얼마나 많이 우리의 시작을 새로 고쳐 썼는지 레이는 모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흰 눈이 떨어지는 늦겨울의 어느 날, 나는 탐정소설이나 한 권 구입할 생각으로, 우연히 발견한 낡은 헌책방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먼지투성이 바닥에 아마빛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채 졸고 있는 아름다운 헌책방 주인에게 첫눈에 반하여 교제를 신청한다, 그리고 순탄하게 사랑을 완성한다…….

거기서 등장하는 레이는 정쟁과 주술 따위와는 털끝만치도 관련 없는, 온화한 헌책방 주인일 뿐이었다. 내 정체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것이 내 소원이었다. 일이 꼬이지만 않았다면 나는 레이에게 평생 신분을 숨겼을 것이다. 평범하고 다정한 연인의 면모만 드러냈을 터였다. 내가 걸어가는 추악한 음모의 길은 연인에게 과시할 만한 자랑거리가 절대 못 됐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다 지난 일이다.

아무튼 이렇게 되었다. 기억을 되찾을 가능성이 희박하면 과거에 미련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편도 나쁘지 않았다. 뭐 어쩌겠는가. 살 사람은 살아야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잘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쓰게 웃었다. 하여간에 본성부터 추악한 사기꾼 같으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레이가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뭐, 별거 아닙니다. 그냥 이런저런 잡생각이죠. 빗소리가 좋네, 차 맛이 괜찮군, 그런 생각이나 했지요.”

그랬군요, 하며 레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불쑥 말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요?”

“메사라는 어떻게 가이거에 들어갔어요?”

“네?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왜 굳이 가이거에 들어갔을까 싶어서요. 싸움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11년이나 거길 다녔다니까 좀 신기하기도 해서.”

“흐흠. 그건 말입니다.”

나는 싱긋 웃었다. ‘살인과 음모의 제왕 스네이크’에서, ‘싸움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라. 레이의 기억상실 덕분에 절로 내 이미지가 괄목한 만한 개선을 이룬 듯했다.

“우연하게 들어갔지요. 아는 형이 가이거 대원이었는데 데모진압을 나가는 날 무릎을 다쳤어요. 그래서 내가 대타를 뛰었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여기저기 기웃거릴 무렵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화염병과 돌멩이가 빗발치고 최루탄이 자욱한 거리에서 무려 다섯 시간이나 사나운 부랑자들과 조폭들에게 맹추격을 당했죠.”

“저런.”

“태어나서 그렇게 열심히 뛰어 본 적이 없었어요. 부랑자들의 머리털 한 올 건드리지 못했죠. 어찌나 무섭던지……. 도망치는 내내 내가 다시는 이 일을 하나 봐라, 돌아가는 즉시 형을 두들겨 눕혀 버릴 테다, 하고 저주를 퍼부었죠. 아니, 그런데 일당으로 무려 백오십 탈란텐을 주지 뭡니까?”

“지금 물가로 계산해도 큰돈이네요.”

“그 순간 나를 맹렬히 쫓아오던 부랑자들과 빗발치던 화염병들이 단번에 잊혀졌습니다. 그날로 당장 입단했죠. 넉 달 뒤, 나는 소원하던 오토바이를 구입했습니다. 그러자 더한 욕심이 생기더군요. 자동차를 사자. 딱 1년만 더 부랑자들의 주먹을 참아보자. 1년 뒤, 나는 자동차를 샀습니다. 뭐, 그런 식으로 달리다보니까 11년이 지나더군요.”

나는 손짓발짓을 섞어 가며 흥겹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대타로 뛰어든 일만 빼면 당연히 전부 거짓말이었다. 레이가 와, 하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랬군요. 실은 얼마 전에 병원 앞 광장에서 벌어진 엄청난 시위에서 끔찍한 걸 봤거든요. 시위현장 한가운데를 마구 달리던 지프가 갑자기 멈추더니 채찍을 든 가이거 부장이 뛰어나와서…….”

나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레이가 급히 내 등을 두들기며 “괜찮아요?” 했다. 엿 같았다.

“괜찮습니다.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요. 부장이 뛰쳐나와서?”

“아…… 네. 그러니까, 어느 부장이 뛰쳐나오더니 채찍으로 부랑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어요. 그렇게 손속이 잔혹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 사신가면과 펄럭거리는 검붉은 코트자락에 채찍하며……. 그자뿐 아니라 가이거 대원들이며 부랑자들이며 모두 피투성이로 뒤엉켜서 싸워 대는데…… 짐승이 따로 없었어요.”

짐승.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조용히 대꾸했다. 레이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메사라 덕분에 가이거에 대한 편견이 많이 깨졌죠. 어제는 메사라의 동료들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메사라가 사진을 찍는다거나 요리도 좋아하니 그들도 비슷할까, 뭐 그런 생각이요. 어때요, 메사라의 동료들은?”

“…….”

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레이의 오해가 점입가경을 달렸다. 레이의 말대로 사진이 취미이긴 했다. 매일 아침 부장 회의실 문을 열면 목도하는 것이, 부장들이 고관대작 나리들의 음란사진을 넘기며 콧구멍 양쪽으로 담배연기를 뭉게뭉게 뿜어대는 광경이었다.

나는 으쓱 어깻짓했다.

“뭐, 대충 맞췄습니다. 레이는 역시 예리하군요.”

“이 정도로 예리하다는 말을 듣다니 민망한데요.”

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더는 나도 할 말이 없어서 차만 마셨다. 고즈넉이 깔린 적막 사이로 맑은 빗소리가 파고들었다. 무겁게 깔린 먹장구름에서 쉴 새 없이 빗줄기가 쏟아졌다. 바야흐로 겨울장마 시기였다.

나는 의자에 몸을 느슨히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아내와 정부에게 쌍으로 뒤통수 맞은 왕은 어제부터 우울증 치료에 들어갔다. 주치의 왈, 왕은 이제껏 자신이 이리나의 무려 ‘첫(!)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다는 것이다. 양치기 소년이 거 사람 심금 한번 심각하게 울려 주었다.

왕이 이참에 이리나와 바이바이하면 좋은데 말이지…….

미간을 찡그릴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캐슬마인 부인인가, 하며 일어섰다.

“갔다 올 테니까 레이는 기다리고 있어요.”

현관문을 열기 전에 출입관리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퇴물 형사처럼 생겨 먹은 중절모 양반이 현관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순간 기분 나쁜 예감이 몰려왔다. 나는 침실로 가서 숨겨 놓은 권총을 꺼내 옷 속에 넣었다. 그러고는 “누구십니까.” 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아이구, 추워라. 늦은 저녁에 실례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중절모가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예상대로 경찰이었다. 나는 짐짓 놀란 음성으로 “무슨 일입니까.” 했다. 내 반응에 중절모가 기분 좋게 웃었다.

“이 신분증 꺼낼 때마다 괴물로 취급받는 기분이네요, 껄껄. 저도 집으로 돌아가면 마누라 바가지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올즈 경사라고 불러요. 별일은 아니고, 탐문수사 때문에 잠깐 들렀습니다.”

“탐문수사라니요?”

“혹시 이 집 사람들 중에서 그린 오윈 씨와 소니아 마스 오윈 씨를 아는 분이 계신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소니아 마스 오윈이라면 잘 알았다. 한때 레이와 동거했던 술집여자였다.

“네. 제 동거인이 소니아 마스 오윈 양과 친구입니다.”

“그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무슨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군요. 사실은 제 동거인이 병원을 다니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사람에게 충격을 줘선 안 될 것 같아서요.”

나는 레이의 정신병원 출입기록을 가져와 보여 주었다. 올즈 경사가 콧잔등을 긁었다.

“음, 설명하자면 일주일 전에 신고가 접수되었습니다. 오윈 씨가 도통 직장에 나오질 않아서 직장동료가 자택에 들렀답니다. 한데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이웃들도 근래 오윈 부부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더라고요. 오윈 씨 직업이 암흑계 사람들을 가드하는 일이라 원한을 꽤 져서 모종의 보복을 당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재 수사 중입니다.”

“그랬군요.”

“집 전화와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추적해 보니 오윈 부부 모두 2월 2일부터 전화를 받지 않았더군요. 그중엔 이 집에서 걸려온 전화도 있었습니다. 어디 보자……. 2월 2일 전후로 1월 28일, 1월 29일, 2월 2일, 2월 3일, 해서 총 여섯 차례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깐 대화를 나눌 수 있게끔 자리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올즈 경사를 대동하고 온실로 돌아가자 레이가 의아한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올즈 경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레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레이는 모른다로 일관했다.

올즈 경사는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협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 출두 요청을 할지도 모르니 연락처를 주십시오.”

“저와 제 동거인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드리죠. 웬만하면 제게 먼저 전화를 주십시오.”

올즈 경사를 배웅한 뒤 침실로 가서 권총을 제자리로 넣었다. 찝찝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2월 2일, 레이는 42번가로 갔다. 그날 저녁 친구에게서 선물 받았다며 끔찍하게 매운 샐러드를 식탁에 내놓았다. 레이에게 선물을 건넬 만큼 친하고, 42번가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한 사람뿐이었다. 소니아.

즉, 레이는 소니아가 실종된 당일에 그녀를 만난 것이다. 올즈 경사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어야 했을까.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짚어도 그 부부의 실종과 레이의 연관성은 전혀 없었다. 올즈 경사도 형식적으로 이곳에 들른 낌새였다. 여기까지 결론지은 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온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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