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L. (79/101)

22 ─L.

「소위, 레이 아리사. 이만 출동하겠습니다.」

나는 힘차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고는 타임머신에 올라탔다. 과학자들과 진보적인 젊은 정치인들의 뜨거운 박수를 뒤로 하고 스위치를 눌렀다. 공중에서 파란 문이 열리며 16세기가 펼쳐졌다.

준비는 완벽했다. 고성능 레이저 빔과 바주카포를 탑재한 이 타임머신은 로봇병기를 겸한 최신형 시간여행 기구였다. 머리는 황소, 몸체는 문어 모양으로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괴물형체를 하고 있었다. 이런 외형으로는 대낮에 마음껏 폭주해도 멍청한 16세기 사람들은 기껏해야 ‘신의 분노’, ‘사탄의 습격’,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나 받아들일 터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의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대형사고가 예수나 루시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잘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지금부터 벌어질 이 괴이한 사건을 대수롭잖게 치부해 버릴 것이다. 「또 미개한 옛날사람들이 전염병이나 전쟁을 악마의 소행으로 몰았군. 조악한 상상력하고는.」라며 비웃으리라. 16세기 사람들이 세밀하게 묘사한 타임머신 그림을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릴 터였다. 완전범죄였다. 나는 차갑게 웃었다.

왕궁이 보였다. 밤하늘에서 광채를 뿌리며 등장한 타임머신에 왕궁 호위병들이 경악했다. 너도나도 창과 칼을 집어던지며 뿔뿔이 흩어졌다. 왕궁의 연회장에서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쏟아져 나왔다. 내 저럴 줄 알았다. 왕놈이 오늘도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나는 문어발을 힘차게 휘둘러 왕궁의 지붕을 날려 버렸다. 연회장으로 폭우처럼 쏟아지는 먼지를 새까맣게 뒤집어쓴 채 얼어붙은 왕과 모후, 귀족들이 드러났다. 뻣뻣이 굳어 있는 것도 잠깐, 삽시간에 울부짖으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귀부인들이 드레스자락에 걸려 넘어지고 난리였다. 테이블 아래로 숨는 무신귀족들도 숱했다.

개중 왕이 제일 빠르게 냉정을 회복하고 복도를 달려갔다. 과연 백전불패의 왕다운 처세였다. 나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 레이더 스코프를 벗어날 순 없지.」

나는 왕을 집요히 추적하며 레이저 빔을 발포했다. 왕놈이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레이저 빔을 피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커다란 왕관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푸른 망토도 찢어졌다. 끝내 왕놈이 레이저 빔에 홀랑 타 해골로 변해 푸시식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속이 아주 후련했다.

여세를 몰아 미친 듯이 왕궁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인 왕궁을 바라보며 으하하하하하 소리 높여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유치해…….

정말이지 유치했다. 복수의 꿈이 대개 그렇긴 했지만, 이번에도 배꼽 빠지게 코믹했다. 나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거렸다. 시트가 젖혀지며 으슬으슬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잠들기 전까지 읽고 있던 책이 어깨에 닿아 불편했다. 치울까 하다가 관두었다.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쉬다가 재차 킥킥거렸다.

‘복수의 꿈’. 환각과 꿈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연놈의 정체를 깨달은 13세 때부터 꾸기 시작한 몽상이었다. 사춘기 소년다운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내용 일색이었다. 유난히 상상력이 부족한 레이 아리사답게 유치함은 극을 달렸다.

이를테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올라가서 미친 듯이 왕궁을 때려 부수고 불을 질러 댄다든가. 혹은 초상화 앞에서 데이탄즈가 좌절감에 몸부림치며 술을 퍼마셔 댄다든가. 아니면 기사인 내가 드래곤 데이탄즈를 무찌르고 자작나무를 탑에서 구출해, 이웃나라 왕자에게 새로 시집보내 주며 감동으로 눈물을 닦는다든가.

나는 킥킥 웃었다.

진짜 유치하다…….

문득, 어깨를 누르던 책이 살그머니 빠져나갔다. 젖혀진 시트까지 가슴 위로 조심스럽게 끌어 올려졌다. 홀연 뺨에 감촉이 닿았다. 누군가의 손길이었다. 온기가 서린 손끝이 닿을락 말락 내 뺨을 매만졌다.

나는 눈을 설핏 떴다. 허무맹랑한 꿈에서 현실로 안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형광등 불빛이 게슴츠레 빛나는 병실이었다. 야근으로 늦는 메사라를 기다리며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든 듯했다. 그런데 이 감촉은 뭘까.

아…….

메사라였다. 내 뺨을 만지며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으로.

나는 멀거니 그를 바라보았다. 불현듯 기시감이 스쳤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도 있었다. 그래. 있었다. 병실에서 자는데…….

병실에서 자고 있는데, 메사라가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나는 잠이 깼다. 그러나 일부러 계속 자는 척했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하며 자는 척했다. 실눈을 뜨고 메사라를 훔쳐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메사라가 코트를 벗으며 의자에 앉았다. 나를 들여다보다가 시트를 가슴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내 뺨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지금같이 부드럽고 다정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며…… 그리고…….

“자는 데 방해가 됐나 보네요.”

메사라가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언제 왔어요?”

“막 왔어요.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으려 했는데 그래도 방해가 된 것 같네요. 늦었으니 이만 집으로 가죠.”

메사라가 내 이마에 입맞춤하며 말했다. 벌써 아홉 시였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가랑비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쌀쌀한 밤이었다.

“그런데 무슨 꿈인데 그렇게 웃었습니까. 꽤 즐거워 보이던데요.”

“……개꿈이요. 황당무계해서 웃었어요.”

“흐흠. 그래요?”

메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피했다.

창문에 스물여덟 살의 레이 아리사가 비쳤다. 여전히 낯설었다. 미술치료 중에 무심코 내 머리카락을 검정색으로 칠할 만큼, 기억 속의 레이 아리사는 흑발에 추한 얼굴의 괴물이었다. 그러나 창문에 비치는 레이 아리사는 금발의 하얀 얼굴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지금같이 격렬했을까. 열일곱 살의 레이 아리사처럼?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계약의 성공으로 심신이 평화로워져, 보다 성숙하고 여유로운 자세로 자작나무를 포용했으리라.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따져 볼수록 모순이었다.

나는 11년간 평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최근 기억을 잃었다. 왜? 어째서?

혹시 자작나무가 할퀴고 간 상처가 지나치게 깊어서였을까. 그 후유증 때문에? 아니면 별개의 다른 이유라도?

원인이 무엇이든 얼른 회복하고 싶었다. 메사라와 함께한 시간을 되찾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나누었던 시간이 궁금했다.

갑자기 병실에서 설핏 떠오른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광경은 대체 뭐였을까. 메사라가 들어오는데도 일부러 자는 척하다니. 그것도 메사라가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해하며.

놀라웠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메사라에게 기억이 조금 떠올랐다고 털어놓을까 하다가 관두었다. 내 입으로 늘어놓기에는 어딘지 민망한 이야기였다.

내가 왜 그랬을까. 실눈을 뜨고 메사라를 훔쳐보다니.

나는 메사라를 곁눈질했다. 메사라는 생각에 잠긴 기색으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꿈에서 데이탄즈가 우스꽝스럽게 등장한 탓일까. 자꾸만 데이탄즈와 메사라가 비교되었다.

냉랭한 인상의 데이탄즈와 달리 메사라는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금발과 회색 눈동자가 조화로운 단정한 미남이었다.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감돌았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자칫 싸늘해 보일 인상을 희석시키는 것도 저 특유의 미소였다.

내게 요리를 가르치거나 함께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불시에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이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매일 아침 내게 면도를 해 달라며 졸랐다. 만화영화 채널을 좋아해서 미술 채널을 선호하는 나와 케이블 리모컨 쟁탈전을 종종 벌이기도 했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메사라가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리며 “아니, 그냥요.” 했다. 메사라는 눈치가 빨랐다. 내 사소한 행동에도 매서우리만치 빠르게 반응했다.

메사라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냥요? 흠……. 그런데 거기 대시보드 위에 뭐 보이는 거 없어요?”

나는 대시보드를 보았다. 웬 책들이 여러 권 있었다.

“이건 뭐죠. 동화책 같은데.”

“잘 봤어요.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선물인가. 메사라는 내게 자주 선물을 안겼다. 흡사 소매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이는 마술사처럼, 매일매일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언제나 쇼핑백을 한 아름 들고 돌아왔다. 그제는 보석 핀, 어제는 털장갑과 목도리 세트를 선물했다.

집의 드레스 룸에도 메사라가 선물한 내 옷과 액세서리, 소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내게 갈아입히고 걸어주며 즐거워하는 것이 메사라의 취미였다. 고맙긴 하지만 부담스러웠다. 혹시 메사라에게 낭비벽이 있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어제는 넌지시 ‘우리, 아껴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말해 보았다. 그러자 메사라는 파안대소하며 대꾸했다.

―아껴 살지 않아도 됩니다. 부모님께서 남긴 유산이 넉넉해서요.

“고마워요. 그런데 웬 동화책이죠?”

“흠.”

메사라가 특유의 코웃음을 흘렸다.

“레이는 아직 기억 못하니까 설명하지요. 레이는 내게 동화책을 낭독해 주길 좋아했습니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자주 읽어 주었지요.”

“그랬어요?”

나는 놀라며 반문했다. 메사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랬습니다. 레이 덕분에 나는 동심으로 돌아갔지요. 하하하.”

“그랬군요…….”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동화책 낭독이라. 나는 목소리가 썩 낭랑한 편이 아닌데 그랬단 말인가.

몹시, 생소했다.

“오늘 밤에는 레이의 목소리로 동화책을 듣고 싶군요. 한번 골라 봐요.”

메사라가 유쾌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을 훑어보았다. 「라푼첼」, 「개구리 왕자」, 「열두 왕자」, 「당나귀 공주」……. 모두 잘 알려진 동화책이었다. 그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스노우 화이트와 일곱 난쟁이Snow―White And The Seven Dwarfs」.

나는 그 책을 들어 책장을 천천히 넘겼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하늘에서 희디흰 눈송이가 날렸습니다. 흑단으로 만든 창가에 아름다운 왕비가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지요.

바느질을 하던 도중, 왕비는 밖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그만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피 세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하얀 눈 위에 떨어진 붉은 피가 너무도 아름다워, 왕비는 소원을 빌었지요.

내게 눈처럼 하얀 피부와, 핏방울처럼 붉은 입술, 이 창틀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있다면!

하얀 눈 위로 떨어진 핏방울…….

뭘까, 이건.

갑자기 눈앞으로 이상한 광경이 스쳤다. 흑단같이 검은 코트 위로 한 줄기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얀 눈밭으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은 정말로 선명했다.

섬광처럼 스친 영상은 금방 사그라졌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소녀가 숲을 거니는 그림이 전면으로 펼쳐졌다.

스노우 화이트(백설공주).

스노우 화이트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건 자작나무야.” 하며 웃었다. 둘은 여러 면에서 흡사했다. 길디긴 흑단빛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도 그렇고, 유혹과 방어의 게임에서 끝내 지고야 만 어리석은 면모까지도. 차이라면, 스노우 화이트는 일곱 난쟁이와 왕자가 구해 주었지만 자작나무는 모든 이들에게서 버림받아 감옥에서 죽어 간 것이랄까.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나는 고소를 삼키며 책장을 넘겼다.

“흐흠. 스노우 화이트라?”

메사라가 싱긋이 웃었다. 어딘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굳이 그 책을 고른 이유라도?”

“음…….”

나는 우물쭈물했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궁리하다가 “그림이 예뻐서요.” 하고 얼버무렸다. 메사라가 핸들을 꺾으며 이쪽으로 눈길을 향했다. 잠깐 내가 당황할 만큼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하하하. 스노우 화이트. 오늘은 그 책을 들으면서 잠들어야겠군요. 세상에는 아름다운 왕비와 공주가 많죠. 다들 역경을 거치지만 결국에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입니다. 그렇지요?”

“네…….”

나직이 대답하며 책장을 넘겼다. 마녀가 스노우 화이트의 허리를 허리띠로 힘껏 조르고 있었다. 다음 페이지에서는 스노우 화이트의 긴 머리카락을 마녀가 머리빗으로 빗겨 주며 웃고 있었다.

나는 머리에 고정된 보석 핀을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요즘 메사라는 아침마다 내 머리를 손수 빗겨 주고 묶어 주었다. 저 머리빗보다는 메사라가 선물해 준 보석 핀이 훨씬 아름답다…… 생각하며, 동화책을 덮어 버렸다.

차 속도가 느릿느릿 떨어졌다. 폭설 때문에 차가 밀려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 걸릴 듯했다. 메사라가 이쪽을 흘끔거렸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혹시, 또……?

예상대로였다. 메사라가 슬며시 내 상의로 손을 넣었다. 그러며 키스를 했다. 몸이 녹을 것같이 농밀한 키스였다. 창문에 선팅이 되어 있긴 했지만 창피했다. 메사라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하복부로 밀착시켜 만지게 했다. 바지 바깥으로 페니스의 형상이 완연했다. 지퍼를 내려 내 손을 더욱 안으로 끌어들였다.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메사라도 내 다리 사이로 손을 향했다. 은밀한 곳을 더듬더니 옷을 벗겼다. 나도 모르게 내부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차가 정체될 때마다 메사라가 얌전하게 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요 며칠간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메사라는 그걸 심하게 밝혔다. 엉큼하다고 해야 할지 정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애매했지만, 아무튼 좀 그랬다. 집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병원을 오가면서 깨달았다. 메사라는 그걸 굉장히 좋아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덤벼들었다.

장소도 안 가렸다. 병원에서도 화장실이나 상담실에서 종종 그걸 했다. 차에서 오럴섹스는 기본이었다. 내키면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참았다가 집에서 하자고 호소해도 소용없었다. “밖에서 하는 섹스가 자극적이죠.” 하고 쉰 목소리로 대꾸했다. 다른 부분은 나를 끔찍하게 배려해 주는 사람이 섹스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심지어 어제는 이상한 일도 있었다.

한창 섹스를 하는 도중 돌연 메사라가 벌떡 일어나 주방에서 앞치마를 가져왔다. “그건 갑자기 왜 가져왔어요?” 하고 묻는 내게 메사라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내 알몸에 앞치마를 둘둘 둘러 주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침대 밑에서 검은색 박스까지 꺼내 열었다.

순간 나는 숨을 훅 삼켰다. 상상도 못한 이상야릇한 도구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알몸에 앞치마만 두른 채, 충격에 휩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를 향해 메사라가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손에는 이상한 도구를 들고서.

그런 건 대체 언제 샀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메사라의 기색이 너무도 태연해서 끝내 물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알몸에 앞치마만 두른 채로 수상쩍은 도구 플레이를 당했다. 메사라의 몹시 자연스러운 태도로 보건대 평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종종 즐긴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색하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메사라를 병적인 사람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무례한 짓인 것이다.

사실상 내가 메사라의 성벽에 거부감이 심했다면 동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아마 나도 11년 동안 섹스 취향이 대담하게 변하지 않았을까.

용모에 대한 열등감 탓에, 열일곱 살까지의 레이 아리사는 다락방 창문 밖으로 창녀들을 훔쳐보며 울적해 하는 것이 고작이던 한심한 녀석이었다. 못생긴 얼굴 때문에 평생 총각딱지도 못 떼고 죽으리라 확신하며 슬퍼했다. 그러나 자작나무의 형상이 깨끗이 가셔진 뒤부터는, 레이 아리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외모에 단단한 자신감을 품었으리라.

그래. 이만한 얼굴이면 당연히.

이후 레이 아리사는 몇 차례(어쩌면, 수십 차례) 연애를 경험하며 대담한 섹스취향을 갖추게 된 어엿한 성인남성으로 변모하지 않았을까. 메사라의 행동에 민망해 하다가도 결국에는 오르가즘을 기대하며 몸을 맡겨 버리는 지금 내 행동만 봐도 분명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메사라가 내 머리를 눌렀다. 손에 닿는 메사라의 허벅지 근육이 화강암처럼 탄탄했다. 메사라의 바지 지퍼를 뚫고 나온 굵고 커다란 그것이 바짝 서 있었다. 붉고 검은 성기에서 시큰한 냄새가 났다. 메사라가 내 귓불을 애무하며 속삭였다.

“어서.”

「끝났으면 얼른 나가기나 해요.」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식사나 같이 하지요. 벌써 점심인데. 배 안 고픕니까.」

남자가 딴청을 부렸다. 웃기는 사람이네…… 생각하며, 나는 가운을 걸쳤다. 오전 내내 사람을 못살게 굴었던 인간이 얼굴색 하나 안 바꾸고 저런 말을 하다니. 하여간에 희한한 사람이었다. 나는 컵에 물을 부으며 낮게 투덜거렸다.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고 화분에 물만 주었다.

「내가 사겠습니다. 같이 나가지요.」

「잘 거예요.」

나는 서랍장에서 새 시트를 꺼내며 칼같이 대꾸했다. 남자 때문에 시트가 온통 체액으로 젖어 있었다. 이런 것도 화가 났다. 침대에 누운 채 뻔뻔스레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한 번 쳐다본 후,

「비킬래요? 시트 갈아야 하는데.」

하고 말했다. 남자가 「아. 네.」 하며 싱긋 웃었다. 벌떡 일어나서는 욕실로 들어갔다. 잠깐 뒤 욕실에서 고개를 내밀더니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거품 목욕제가 있네요? 같이 거품 목욕이라도 할래요? 욕조가 좁긴 하지만.」

어처구니없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능글맞기 짝이 없었다. 내가 대꾸도 안 하고 시트만 갈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욕실 문을 닫았다.

「기가 막힌다, 참 기가 막혀.」

나는 투덜거리며 시트를 간 뒤 바닥에 흐트러진 남자의 옷을 챙겼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남자가 키스하며 내 손에서 억지로 떼어 내는 바람에 떨어뜨렸던 휴대전화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리사 씨? 아리사 씨!”

“음. 으음.”

나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담당의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전용병실 놔두고 휴게실에서 웬 낮잠을 그리 곤하게 자요? 감기 기운이라도 있어요?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아……. 그, 그냥. 어제 좀 집안일을 많이 해서요.”

나는 몸을 일으키며 얼버무렸다. 어젯밤 메사라를 진 빠지도록 상대하느라 피곤이 쌓인 여파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은 뒤 휴게실에서 원고를 훑어보다가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담당의가 원고를 들어 훑어보았다.

“그런데 이건 뭐죠? 책이라도 쓰고 있나 봐요?”

“아, 별것 아닙니다. 그냥 쓰는 거예요.”

담당의가 원고를 넘기며 “꽤 전문적인 내용 같은데요?” 하고 말했다.

“……출판될지도 미지수예요. 아무래도 이쪽 전문가가 쓴 원고는 아니라서.”

“흠?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이쪽에 관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민간요법과 식물에 이 정도 지식이 있었다니 놀라운데요. 독학한 겁니까?”

“그럴 리 있나요. 아는 선생님에게 배운 거지요.”

“그렇군요. 어쨌든 계속 써 봐요. 아리사 씨 같은 사람은 창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되기도 하고, 원고 내용도 훌륭한 것 같으니까요. 원고 집필이 끝나면 제게도 보여 줘요. 출판사로 콘택트를 넣어 줄 수도 있어요.”

“네? 정말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담당의가 “제 동생이 출판사 사장이랍니다.” 하며 웃었다. 이 웬 행운인가 싶었다. 사실 출판 때문에 걱정이 많던 참이었다.

“그러니까 열심히 써요. 제 동생은 무척 까다롭거든요. 그럼 내일 상담 때 봅시다.”

담당의가 내 어깨를 툭 때린 다음 휴게실을 나갔다. 나는 머리만 벅벅 긁다가 원고를 챙겨 가방 안에 넣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꿈은 뭐였을까.

메사라 아니던가? 침대에 나체로 드러누운 채 쾌활하게 웃으며 내게 농지거리를 연거푸 던졌다. 짓궂은 태도며 말투며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상한 쪽은 나였다. 꿈속에서 나는 메사라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남자’라고만 호칭하며 귀찮아했다.

정황도 괴이했다. 섹스 후의 상황 아니던가. 이름도 모르는 상대방과 어떻게 섹스를, 그것도 내 집에서 할 수 있었을까. 분위기도 스스럼없이 자연스러웠다. 메사라의 은근히 나를 관찰하는 듯한 표정이며, 슬그머니 떠보는 듯한 말투며, 뭔가 상당히 리얼했다.

아니야…… 개꿈이겠지.

개꿈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에 곰돌이 인형들을 발 디딜 틈도 없이 쌓아 놓은 채 둘이 벌거벗고 그럴 리 없었다. 스트레스가 요즘 심했나, 하며 가방을 닫았다.

자판기에서 차를 뽑아 마시며 휴게실 한구석에 비치된 주간지들을 훑어보았다. 한 잡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극좌파 성향의 주간지 「데시벨Decibel」이었다. 가이거 부장들이 쓰고 다니는 사신 가면이 표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인 표제가 ‘채찍의 하데스’였다.

채찍의 하데스라. 메사라의 직장상사(?)가 극좌파 성향의 주간지 데시벨의 표지를 장식하다니 사뭇 흥미로웠다. 게다가 표제도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코웃음 치며 잡지를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성의 없이 읽는 것도 잠시, 나는 곧 얼어붙었다. 울프삭과 마넨 경이 맞이한 비극적인 사고 이후 벌어진 급격한 정국 변화에 가이거가 도사리고 있음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그 울프삭 경의 최측근들 중에서도 현직에 있는 자는 스네이크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의문사 당했거나 지방에서 은거 중이다.

가이거의 핵심, 본부장 스네이크는 어떤 자인가.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그의 철저한 정체불명성뿐이다. 그 탓에 암살은커녕 스캔들조차 터뜨리기 불가능하다고 익명의 어느 문신귀족 인사는 분통을 터뜨렸다.

「쏘고 싶어도 목표물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조준을 할 수 있는데, 그조차 모르는 셈이지요.」

가이거 대원들은 부장들이 총 열한 명이며,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추정, 그들 중에서 본부장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은 데모대로 출동할 때마다 곧잘 들고 다니는 채찍뿐이라고 말했다. 파티수행시에는 그 채찍마저도 들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파티에서 마주치는 귀족들은 스네이크가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처지다.

정계의 여러 인사들은 조만간 스네이크가 수족 같은 부장들과 함께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 귀족사회에 존재를 드러내리라 확신하고 있다. 귀족들에게 스네이크의 별칭은 하데스로 통한다. 하데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아 발견에 어려움이 많았다는 명왕성의 명칭이자 지하세계의 왕.

기사 아래에 「본 기사는 익명의 필자가 작성했으며, 본지의 입장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라는 작은 박스 메시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나는 얼얼한 머리를 흔들며 데시벨을 덮었다. 엑달과 에델마, 수오미넨 그리고 마넨 경의 화려한 추락에 품은 의혹이 확신으로 굳혀지는 순간이었다.

이 기사대로라면 암흑 속에 도사린 누군가는 가이거였다. 가능했다. 11년 뒤의 정국에서 내가 놀란 것 중의 하나가 멍청이 울프삭이 재포니카까지 올라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거물 5인방 중 식물인간 신세나마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스네이크가 상관에게 베푼 그 나름의 자비일지도 몰랐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난 일찌감치 그쪽에서 손 씻었으니까.

역시 정쟁 바닥은 아무나 날뛸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마넨 경과 안녕을 고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데시벨을 제자리로 돌려놓다가 멈칫했다.

휴대전화…….

꿈속에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휴대전화가 눈앞을 스쳤다. 지금 나는 휴대전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개꿈이 아니라면 최소 1년 전까지는 내가 휴대전화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뜻 아닌가.

메사라에게 휴대전화에 관해서 한번 물어볼까.

생각에 빠질 찰나, 뒤에서 어깨를 톡 밀렸다. 메사라였다.

“많이 기다렸습니까. 전용 병실 놔두고 왜 여기 앉아 있어요?”

“아…… 차나 한잔 마시려고요. 병실에는 자판기가 없어서.”

“흐흠. 그렇습니까. 티 포트라도 하나 구비해 둬야 할까 보네요. 참, 이것.”

메사라가 긴 노란색 케이스를 내게 내밀었다. 또 선물인가, 하며 “이건 뭐죠?” 하고 묻자 메사라가 싱긋이 웃었다.

“거품 목욕제입니다. 레몬과 재스민 향이라는데 머리가 상쾌해진대서 하나 사 봤습니다. 오늘 밤에 한번 사용해 보죠.”

“네…….”

오늘 밤에 사용하자니. 나는 민망한 기분으로 거품 목욕제를 가방에 챙겼다.

메사라는 거품 목욕을 좋아했다. 섹스 후 반드시 나와 함께 거품목욕을 하며 여운을 즐겼다. 신제품에 호기심이 많아 욕실에 즐비한 입욕제만 스무 개가 넘었다.

내게 코트를 걸쳐 주며 메사라가 말했다.

“내 부모님은 금슬이 아주 좋았나 봐요.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부모님 침실과 전용 욕실을 써보니까 알겠더군요. 특히 침실에 딸린 전용 욕실 말입니다. 근사한 빅토리안 욕조에 이탈리아산 고급 갈색 타일이 멋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낼뿐더러, 한쪽 벽면이 유리 창문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어 바깥에 펼쳐진 호랑가시나무숲을 즐기며 목욕할 수 있지요. 눈이 내리면 풍치가 일품이지요.”

“그런가요? 나는 밖에서 누가 쳐다볼까 봐 조바심 나던데.”

“하하하. 걱정 푹 놓으십시오. 밖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유리니까.”

메사라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메사라의 말대로 전용 욕실이 유난히 크고 화려하긴 했다. 침대도 서너 명이 뒹굴어도 넉넉한 사이즈였다. 콘돔 착용을 싫어하는 메사라 때문에 매트리스 커버 위에 따로 요 커버를 깔고 섹스해야 했다. 그래도 메사라 어머님이 만드신 요 커버들이 수십 장에 달해서 그나마 빨래 부담은 덜했다. 처음에는 웬 수제 요 커버가 이리 많나, 하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별안간 요상한 생각이 들었다. 절로 뺨이 달아올랐다. 나도 메사라처럼 엉큼해졌나 싶어 고개를 푹 숙였다.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메사라의 기분이 좋은 듯했다. 싱글싱글 웃기도 하고 핸들을 톡톡 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이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흐흠, 그럼요. 오늘이 바로 보너스를 탄 날 아닙니까. 월급쟁이에게 보너스처럼 기분 좋은 일은 없죠. 하하하.”

메사라가 유쾌하게 웃었다. 덩달아 나도 따라 웃었다. 메사라가 카 오디오 볼륨을 귀가 멍멍해지리만치 높였다. 경쾌한 왈츠가 흘러나왔다.

메사라가 음률에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어깨를 흔들었다. 자동차가 신시가지의 고가 도로로 진입했다. 좌우로 늘어선 빌딩 숲이 뿜어내는 네온사인과 전광판이 차창을 쑥쑥 지나쳤다.

메사라가 차창을 내리며 소리쳤다.

“드라이브나 하고 가죠. 오늘은 눈이 안 내려서 한판 달리기에 딱입니다. 여기가 왕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예요.”

차창 밖에서 바람이 확 쏟아졌다. 나는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으며 “와앗…….”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야경을 색색으로 밝히는 네온사인이 긴 줄을 그으며 칠흑빛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전광판과 입체영상이 쉼 없이 광고를 뿜어냈다. 문득 메사라가 한 전광판에 시선을 던지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폭소에 가까웠다.

무심결에 나도 눈길을 던지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전광판이 난폭하게 쏟아붓는 빛 무더기에 눈이 아팠다. 설핏 점멸하는 전광판 영상 속에서 현 로터스 푸셔가 허둥지둥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뒤이어 「유력 문신인사 카발리 후작, 단골 카페에서 변사체로 발견―경고 살인?」 문구와 함께 경관들이 들것을 들고 앰뷸런스로 향하는 영상이 떴다. 화면은 곧 붉은 입술로 「일레스티카의 새 향수, 디기탈리스…….」 하고 속삭이는 나른한 미녀의 영상으로 바뀌었다.

메사라가 액셀을 밟았다. 갑자기 확 올라가는 속도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숙였다.

“하하하! 하하! 사고 싶은 거 아무 거나 말해요! 무조건 사 줄 테니까!”

메사라가 소리쳤다. 나는 “속도나 줄여요!” 하며 안전벨트를 꽉 잡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내 비명과 메사라의 웃음이 왈츠에 섞여 어지럽게 치솟았다. 광기에 찬 달빛이 산산조각 났다. 톡 쏘는 레몬같이 싸하고 날카로운 밤이었다.

그날 밤, 메사라는 또 깜짝선물이라며 케이스를 내밀었다. 상자를 푼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풍스런 빈티지 휴대전화였다. 혹여 또 기억을 잃을 때를 대비해 구입했다고 메사라가 말했다.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는 몇 달 전에 분실했다고 덧붙였다.

빈티지 제품이라 인터넷은 되지 않았다. 메사라는 “예쁜 장난감”이라고 했다. 이 구닥다리 제품이 최신형 휴대전화보다 수십 배 비싼 고가품이라는 사실은, 이틀 뒤 루이즈가 말해 줘서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