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M─ (78/101)

21 .M─

의사는 레이의 증상이 뇌 이상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검진 결과를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선 해리성 기억장애로 판단됩니다. 환자에 따라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나므로 당분간은 정서안정 치료와 약물 치료를 병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테스트에서 지능지수가 굉장히 높게 나오더군요. 혹시나 해서 테스트를 두 번이나 더 했는데도 결과는 같았어요.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기 힘든 존잰가 봅니다. 허허허.”

의사가 보여 준 차트 기록에 나도 눈을 의심할 뻔했다. 레이가 그린 그림들도 훑어보았다. 솜씨가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케이크 그림에서 슬며시 웃다가 멈칫했다.

“……이건?”

“그렇죠? 이상하지요?”

의사가 말했다. 나는 그림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이런 그림에는 보통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 마련인데, 아리사 씨는 긴 검은머리에 드레스를 걸친 여자를 유난스레 많이 등장시키고 있죠. 여자와 아리사 씨의 깊은 연대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긴 뭣하지만, 게이들 중 일부가 여성에 자신을 이입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걸 감안해도 좀 야릇하죠.”

나는 레이의 눈의 여왕 취미와 감금 과거를 설명했다.

“그랬군요. 그렇잖아도 그림들이 사뭇 이상했거든요. 한번 보시죠.”

그림들을 한 장씩 넘겼다. 섬뜩했다. 우리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에서도 레이는 족족 검정머리였다. 눈의 여왕이 왕과 신하들을 짓밟고 있는 그림도 상당수였다. 왕과 신하들은 하나같이 선지피를 흘리고 있었다. 집요히 덧칠된 피 색깔이 선명했다.

흰 집을 배경으로 검정머리 레이와 내가 나란히 서 있는 그림에서는 오싹한 한기마저 느꼈다. 도화지를 잡은 손끝에서 체온이 내려갔다. 뭔가 잔뜩 비틀릴 대로 비틀린, 이제껏 교묘히 숨겨져 있던 레이의 어떤 내면을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서 눈의 여왕이 나오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내 질문에 의사는 사람의 심리는 수학공식이 아니라며 길게 지켜봐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미술 치료사는 그림의 전반적인 색감이나 배치로 판단컨대 레이가 현재 기분이 비교적 좋고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건강검진 결과는 모레 나올 예정이었다.

레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검은머리 레이와 내가 서 있는 그림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망치로 뒤통수를 강타당한 것 같았다. 이 의미는 자명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확신이 들어섰다. 그건 바로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의 정체였다.

왕.

바로 그 명칭에 답이 있었던 것이다. 데이탄즈가 바로 왕 아닌가. 그리고 레이의 꿈. 깃이 뾰족한 두건을 쓴 사내들에게 고문을 당했다. 그건 중세시대 이단 고문관의 복장과도 일치했다. 아울러서 레이는 무신귀족들을 싫어했다. 눈의 여왕의 죽음에는 무신귀족들이 깊이 관여되어 있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나는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제아무리 눈의 여왕에 몰두해도 그렇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연대감을 떠나서, 숫제 레이가 눈의 여왕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의미 아닌가. 그건 곧, 레이가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는 소리 아닌가!

나는 핸들을 확 내리쳤다.

“빌어먹을!”

레이가 화들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왜, 왜 그래요?”

“아, 별것 아닙니다. 차가 너무 막혀서요.”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정면을 노려보았다. 일단은,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정신병이 달리 정신병인가. 따지면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나부터가 정신병자라고 할 수 있었다.

게이, 그것도 바텀임을 감안하면 여자에게 자신을 이입하는 것은 있을 수 있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다 해도 솔직히 나로서는 큰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그 대상이 눈의 여왕이라는 점이었다.

내가 세운 가정이 적중했다면, 레이가 정쟁으로 뛰어든 이유는 자신을 눈의 여왕으로 믿은 탓이었다. 복수하겠답시고 10년이나 온갖 해괴한 짓을 벌려온 것이다. 내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었다.

차라리 원더우먼으로 믿지 그래.

그래. 원더우먼. 얼마나 좋은가. 하늘도 날고, 마술밧줄도 휘둘러대고, 나름대로 공주 아닌가. 왕관까지 썼다.

생각할수록 눈앞이 아득했다. 하필이면 눈의 여왕이라니.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만치 끔찍하게 죽은 여자라니. 그림에 자기 머리카락을 까맣게 칠할 만큼 동일시하다니.

“이 머리 안 이상해요?”

레이가 불쑥 말했다. 그렇잖아도 머리카락 생각에 골몰해 있던 참이었다. 무의식중에도 멈칫하고 말았다.

“이상하다니요? 어디 가요?”

“루이즈가 이렇게 묶어 주었는데 영 어색해서요.”

레이가 머리카락을 만지며 대답했다. 평소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니던 머리카락이 뒤로 묶여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괜찮은데요. 그런데 루이즈가 누굽니까.”

“미술 치료사요. 내 머리카락이 바닥을 자꾸 쓸고 다닌다며 이렇게 해 줬는데. 정말 안 이상한가요.”

“네, 단정해 보입니다. 그런데, 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혹시 그 핀 색깔이 금발하고 어울리지 않아서?”

유도질문을 던져보았다. 레이가 덤덤히 대답했다.

“이렇게 틀어서 묶으니까 여자 같아서요.”

나는 레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여자 같아서 이상하게 느꼈다? 이건 또 뭘까. 모순 아닌가.

레이는 자신을 눈의 여왕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레이=눈의 여왕=여왕=여자=레이=눈의 여왕. 이렇게 돌아가야 내가 세운 가정이 아귀가 맞았다. 그런데 여자 같아서 이상하다?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나는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처음부터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이제껏 만난 바텀들과 레이를 비교해 보았다. 취향상 내가 만난 바텀들 대부분이 반반하고 체구가 작았다. 아앙아앙 징징거리고 몸을 꼬아대며 자기를 이년저년 혹은 암캐라 불러 달라고 조르기 일쑤였다. 덕지덕지 화장하고 여자 옷차림으로 하이힐 딸각거리던 새끼들도 숱했다.

그럼 레이는?

레이는 그런 적 없었다. 사실 상상도 안 됐다. 애교? 부디 씨라도 봤으면 하는 게 내 소원이었다. 내 제일 큰 불만이 레이의 무신경한 성격이었다. 아앙?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이년저년 호칭도 질색했다. 첫날밤에 나와 레오파드가 “아가씨! 빨리 엉덩이 흔들어 봐!”, “이년아!” 했다가 판 깨질 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아니면 차분한 성격? 남자는 파랑색, 여자는 분홍색으로 구분 짓는 행위만큼 멍청한 소리였다. 그것도 아니면 화초를 좋아하는 취향? 그러나 정원사들 대부분이 남성 아닌가. 내가 봤던 일본영화에서도 용맹한 사무라이들이 난초를 반들반들 닦아대는 장면은 여러 번 나왔다고 기억했다.

물론 레이의 머리카락이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길긴 했다. 그러나 마초를 대표하는 록스타들의 상징이 장발머리였다. 인형놀이? 화장품? 여자 옷? 하이힐? 터무니없었다. 사실 이런 말은 레이 앞에서 대놓고 못하지만, 모든 면에서 너절한 노총각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다 떠나서 나는 레이가 자신을 여자라고 믿는 낌새를 추호도 느낀 적 없었다. 하다못해 평소 레이가 새끼손가락을 살짝 올리고 찻잔을 드는 습관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까지 경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역시 동일시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깊은 연대감 수준에서 그치는 듯했다. 귀결은 다시 눈의 여왕이었다. 암만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느껴도 그렇지 라푼첼이면 모를까, 눈의 여왕은 좀 심하지 않은가.

이걸 대체 어떻게 교정한다?

나는 옆을 곁눈질했다. 레이는 계속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순간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 머리카락.

내일부터 매일아침 손수 레이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금발을 찬양하기로 했다. 하다보면 레이도 자신의 머리카락이 흑발이 아니라 금발임을 똑똑히 인지할 것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시간이 흐르면 레이가 연대감을 느끼는 대상도 눈의 여왕에서 라푼첼로 바뀌지 않을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내친 김에 레이에게 선물할 보석 핀도 잔뜩 사 줄까 고려했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기분이 엉망이었다. 오늘자 조간에 칼의 핑크빛 약혼소식이 실렸다. 상대는 푸셔의 측근 오바스카 후작의 딸.

결국 로터스에게 비비기로 했다, 이거지…….

채찍으로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칼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여동생을 왕의 정부로 계속 붙여 놓고 ‘막후실세’를 해 먹으려는 꿍꿍이였다.

철새도 이런 철새가 없었다. 여동생이 잘 나갈 때는 한량클럽과 함께 푸셔를 대놓고 무시하더니, 여동생의 왕비옹립이 불가능해지자 재빠르게 푸셔에게 달라붙었다. 나는 신문을 훑어보았다.

칼은 은거 중에도 일주일에 한 번씩 귀족 아이들을 상대로 티파티를 열었다. 2주 전, 티파티에 조카와 함께 참석한 오바스카 양에게 반했다는 것이다. 칼 왈, 오바스카 양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히고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고 했다.

놀고 있네. 나는 망설임 없이 비웃음을 흘렸다.

147센티의 단신에, 가슴은 아스팔트에 눌어붙은 껌처럼 평면적인 여자에게, 첫눈에 숨이 막히고 온몸이 뻣뻣이 굳었다? 게다가 오바스카 양은 칼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군…….

사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미남과 껌딱지의 결합이라서 그런가. 약혼식은 일주일 뒤에 치를 예정이었다. 칼의 마음이 바뀔까 봐 사돈 집안의 근심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이로써 놈의 야심을 재확인했다. 정신을 도통 못 차리고 있었다. 여동생을 추호도 생각 안 하는 새끼였다.

지금이 마넨과 울프삭 경 치하였다면 옛날에 칼과 이리나는 골로 갔다. 푸셔가 살인을 즐기지 않고, 우리도 평민계급과 손잡는 바람에 정국의 살벌함이 덜해진 것을 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놈을 어떻게든 숙청하긴 해야 하는데 말이지…….

문제는 마땅한 건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유리하게 돌아갔으나, 독일 파견대원들이 1차로 이리나의 자료만 보낸 이유도 기실 이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도 매너 좋은 예술가 청년으로 호평만 자자하더라고 전해 온 것이다. 나는 대원들에게 칼의 티끌을 찾아내지 못하면 독일인으로 귀화하라 윽박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있어?”

노크가 울렸다. 쿠퍼헤드였다. 레오파드도 따라 들어섰다.

“음. 뭐냐.”

“뉴스 봤냐고. 큰 건 아니지만 퍽 재미나서 말이지. 공중파 지금 켜 봐.”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 가득히 알토넨이 나왔다. 전신의 3퍼센트만 비키니로 겨우겨우 가린 글래머 여배우의 발가락을 수줍어하는 낯으로 쭉쭉 빨고 있었다.

나는 턱을 긁으며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뻔했다. 푸셔가 동업자에게 선사한 선물이었다.

“제법 깜찍하군.”

“뭐, 저 정도야 스캔들 거리도 아니지만 나름대론 구경거리라서 말이야.”

쿠퍼헤드가 말했다. 나는 채찍을 까딱까딱 놀리며 “알토넨은 뭐하고 있는데.” 했다. 레오파드가 잔에 보드카를 들이부으며 대답했다.

“어쩌긴. 마누라에게 얻어터지고 있지.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나는 보드카를 마시며 상황을 저울질했다. 왕이 새 왕비를 들일 때까지는 최소 넉 달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칼과 푸셔는 손을 잡았다. 바야흐로 둘 중 하나를 단단히 손봐줄 때라는 의미였다.

누구부터 애무해 줄까.

답이 나왔다. 푸셔였다. 이번에 그 늙은이를 한 방 단단히 먹여 줄 심산을 굳혔다. 마침 기획해 놓은 작품도 있었다. 이참에 상영하면 꽤 쏠쏠한 재미를 볼 것 같았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내일 오전까지 본부로 이스트에덴 신문쟁이들을 소집시켜.”

쿠퍼헤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푸셔?” 했다. 과연 눈치가 좋았다.

“기다려 봐.”

나는 잔을 들어 보였다.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싱긋이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잔을 비운 후 벌떡 일어섰다. 오늘 오후에 있을 오바스카 후작의 파티에 알토넨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중요한 파티였다. 푸셔를 비롯한 여러 문신귀족의 구도를 파악해낼 기회였다. 나는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코트를 걸쳤다.

“이만 간다. 따라 와.”

오바스카 후작의 저택으로 향하면서 보석 핀을 만지작거렸다. 점심시간을 틈타 본부 근처의 보석점에서 구입한 선물이었다. 신호가 걸려 차가 잠깐 멈췄다. 운전대를 잡은 레오파드가 룸미러에 비치는 이쪽을 흘끔거렸다.

“그건 또 뭐야. 레드폭스 주려고?”

“음.”

“레드폭스가 요즘 머리를 묶고 다니나 보지. 아주 재미가 쏟아지나 봐.”

나는 픽픽 웃었다. 레이가 현재 정신병원을 오가는 것을 알면 레오파드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레오파드가 가자미눈으로 내 왼손을 노려보았다.

“……엊그제부터 묻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 왼손 약지. 너를 알고 지낸 8년 동안 한 번도 못 본 게 거기에 떡하니 등장하셨더군. 그것도 사파이어 반지라? 설마 팍스1)에 동거 신고라도 한 거야.”

“곧 해야지.”

내 대답에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물론이었다. 조만간 팍스에 신고할 계획이었다. 정표인 반지를 주고받았으니 다음은 법적절차를 밟을 차례였다.

한참 뒤 쿠퍼헤드가 “령은 잘 지내냐?”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팍스 신고까지 하겠다는 녀석이 뭐가 그리 시큰둥한 대답이야. 설마 벌써 권태기라도 온 거야.”

권태기였으면 차라리 좋았겠다. 제발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다. 지나치게 다이내믹해서 탈이었다. 나는 쓰게 미소 지으며 보석 핀을 케이스에 넣었다.

길이 끝내주게 막혔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 고작 27번가였다. 레오파드는 연발타로 하품해 댔고, 쿠퍼헤드는 독서 삼매경이었다. 쿠퍼헤드가 넘기는 책장에서 데이탄즈니 자작나무니 따위가 보였다.

“뭐냐. 너도 눈의 여왕에 관심이라도 생긴 거야.”

“그냥. 령이 눈의 여왕 팬이기에 나도 괜스레 흥미가 생기더라고.”

“흥미를 줄 건수라도 있긴 해?”

“생각보다는 꽤. 막연히 알던 이야기를 전문적으로 파고드니깐 희한한 게 많군. 아니, 어이없다고 해야 하나.”

“뭐가.”

“이를테면 비올라 성당이 자작나무 사건을 계기로 세워졌다든가…….”

“비올라 성당이?”

비올라 성당은 왕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성당이었다. 그 성당에 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왕족의 무덤이 대대로 안치된 곳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자작나무는 주말미사도 왕에게 금지당한 채 탑에 갇혀 살았다고 하더군. 그 탓에 마녀로 몰리기 전부터도 자작나무가 빗자루를 타고 야산으로 날아가 악마와 논다느니, 몰래 개종한 신교도라느니, 하는 소문이 자자했대.”

“하하하. 빗자루? 말이 돼?”

“옛날사람들 사고방식은 요즘과 완전히 다르니까. 잔 다르크만 해도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마녀로 선고받았는걸.”

그 정도면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능의 문제였다.

“좌우간, 그렇게 마녀 소문이 무성했는데도 자작나무의 죄는 엄청난 의혹을 샀대. 뻔하잖아. 왕과 이혼할 날만 오매불망 기다렸을 자작나무가 레비탄을 질투한다니 말이 돼?”

“당연히 안 되지.”

피식 웃다가 멈칫했다. 어쩐지 귀에 익은 내용이다 싶더니 곧 기억났다. 《푸른 피》에서 접한 내용이었다. 나는 짜증을 삭이며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자작나무라…….

《푸른 피》에서 언급된 ‘자작나무의 저주사건’ 내막을 되짚었다. 자작나무를 마녀 죄로 고발한 자는 자작나무 유모의 동생이었다. 왕비가 레비탄을 마법으로 저주하더라고 누님이 말했다며 고소한 것이다. 종교재판소는 고소장을 신중히 검토하기는커녕 곧바로 왕비를 체포했다.

직후 왕의 모후는 밀실로 유모를 불러들여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날 밤, 유모 남매는 의문사했다. 고소를 번복해 자작나무의 마녀 죄를 무마해 줄 유일한 증인의 사망이었다. 체포 하루 만에 자작나무는 모후의 명령으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두 달간 재판은 비공개로 딱 한 번 열렸다. 탑에서는 주술도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전쟁 동안 문신귀족들은 무의미한 고문을 중지해 달라는 편지를 왕에게 수십 차례 보냈다. 그러나 왕은 끝까지 고문을 방치했다. 한술 더 떠 모든 재판기록까지 파기해 버렸다.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문신귀족들에게 엿이나 좀 먹이고, 마침 임신한 정부와 결혼도 하려고 자작나무에게 마녀 죄를 뒤집어씌운 거 아니야. 꿩 먹고 알 먹고.”

“그거지. 정황증거도 있어. 고문당하는 왕족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속칭 ‘편안한 죽음’을 고문관들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더군. 그런데 소문엔, 왕의 모후가 고문관들에게 왕비가 ‘편안한 죽음’을 원해도 절대 들어주지 말고 매우 잔인하게 고문하라고 지시했다는 거야. 그런데도 자작나무는 기개 있게 혐의를 부인했어. 이만 봐도 뻔하지.”

쿠퍼헤드가 ‘기개 있게’를 발음하며 불끈 쥔 주먹을 올려 보였다. 끔찍했다.

“사실상 이단 심문관도 아닌 모후가 마녀재판에 개입하는 것부터가 법적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다고. 무엇 하나 절차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도 종교재판관들은 시종일관 침묵했대. 세속인이 아닌 로마교황청 소속인데도.”

구역질났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의 병증 때문에라도 어느 정도는 알아 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한 개비 피워 물었다.

“그러니까, 왕이 성당을 빌미로 종교재판관들을 녹였다?”

“그렇지. 자작나무 사후 1년에 비올라 성당 공사에 착수했다는 거야. 왕과 가톨릭계의 결탁 의혹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하나둘이 아니지.”

나는 의자를 톡톡 쳤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제야 「빌즈 남작의 회고록」에 내포된 행간이 이해됐다. 그게 그런 뜻이었군. 「이단 심문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싸늘한 눈초리에 모두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왕이 부하들을 찌릿찌릿 흘겨본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누명설이 파다한 시점에서 왕은 어떻게든 거짓 자백을 받아내 명분을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사건이 미해결로 남아 있었으니 부하들이 퍽 한심했을 터였다.

그런데 찝찝한 점이 하나 걸렸다. 레이의 악몽에 등장한 고문관들은 자백 취득에 무관심했다. 모순 아닌가.

“자작나무의 사망 시기에도 음모설이 파다해. 하필 왕의 귀환이 임박한 무렵에 사망. 즉, 전쟁 동안 실컷 고문해 왕실에 남아 있는 문신귀족들에게 공포감을 잔뜩 안겨 주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질 즈음에 살해해 버렸다는 거지.”

들을수록 역겨웠다. 내가 이제껏 해온 악당짓을 전부 합쳐도 데이탄즈의 악행에는 따르지 못할 듯했다. 그런데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저 음모론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작나무가 거짓 자백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틴다》는 절대조건하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빌즈 남작의 회고록」이 묘사한 왼팔의 상태는 무척 참혹했다. 그 수위의 고문에는 일찌감치 거짓 자백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럼에도 왕은 저 절대조건을 굳게 확신하고 전쟁터로 떠나 버렸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환생인가.

나는 의자를 톡톡 쳤다. 「빌즈 남작의 회고록」을 죽 되짚어 보았다. 놈이 전쟁터로 떠나며 구상한 시나리오의 윤곽이 슬슬 잡혔다. 그래. 알겠다. 바로 그거였군.

어차피 떠들썩한 누명설, 놈은 처음부터 거짓 자백을 받아낼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거지.

소름이 돋았다. 놈이 구상한 미장센대로라면 마누라를 일찍 평화롭게 보내 줘도 하등 상관없지 않은가. 한데 그토록 고문을 가한 이유가 무엇일까. 회고록의 문구가 떠올랐다.

「정실이 고문을 못 이겨 죽을 때까지 방치해 버린 건, 사랑하는 정부를 위한 왕의 배려이기도 할 겁니다. 평민 출신 정부가 귀부인들에게 또 곤욕을 치를까 봐 본보기로 삼은 거죠.」

그런 거였나. 희대의 미친 종자였다.

그래도 의문은 남았다. 시체에 거적은 왜 씌웠을까. 악취가 너무 고약해서?

왕놈이 이단 심문관들을 그리 노려본 까닭은 무엇일까. 푸른 수염 연기에 심취한 나머지 눈깔에 힘이 꽉 들어가서?

“어쨌건 마누라를 죽여서 얻은 이득이 보통 막대한 게 아니던걸. 지금 봐도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친구야. 나중에 이 부분이라도 읽어 보지, 후후.”

쿠퍼헤드가 페이지를 접어 책을 내게 건넸다. 나는 책을 받아 옆으로 던져 버렸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보석 핀을 다시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거나 보면서 기분을 풀기로 했다. 다이아몬드가 잔뜩 박힌 나비모양 핀이었다.

레오파드가 룸미러에 비치는 보석 핀을 흘끗거리며 중얼거렸다.

“허, 눈이 부시네.”

나는 보석 핀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아침 레이의 머리를 직접 묶어 주었다. 세뇌를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생각 외로 재미가 쏠쏠했다. 보석 핀 쇼핑도 즐거웠고, 헤어잡지를 뒤지는 재미도 퍽 쏠쏠했다. 날 잡아서 레이의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생머리로 펴 볼까 고려했다. 미용사들이야 초주검이 돼 쓰러지겠지만.

이런 빌어먹을…….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갑자기 또 염병할 산사나무 가지 꿈이 떠올라 버렸다. 말없이 긴 시간 레이의 몸뚱이를 짓뭉개던 그 개새끼들만 생각하면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돌아갔다. 제아무리 꿈이래도 참을 수 없었다.

꿈을 역사에 딱 맞춰 꿀 수도 있단 말인가. 그래도 꿈일 뿐이길 바랐다. 내가 추측한 윤간이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들면, 무조건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날아갔다.

나는 보석 핀을 만지작거리며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놈들 말이야.”

“그놈들이라니? 누구?”

“눈의 여왕을 고문한 놈들 말이야. 깃이 뾰족한 두건을 쓴 고문관들.”

“어, 그놈들. 왜?”

“그놈들에 관한 기록은 없나? 눈의 여왕을 실컷 고문해서 문신귀족들을 겁주는 데에 지대하게 공헌한 놈들 아니야.”

“왜 없겠어. 당연히 있지.”

쿠퍼헤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는 보석 핀을 만지작거리며 “데이탄즈에게 관직이라도 얻었다든가 뭐, 그런 내용이냐.” 했다.

“그건 아니고. 책을 읽어 봐. 전부 나오니까. 몇몇 기록이 꽤 야릇하던데. 그걸 읽어 보니까 왜 눈의 여왕 팬들이 헛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긴 하더군.”

나는 파안대소했다.

“뭔 소리야? 혹시, 황무지에 묻어 주오 한 그 유언 때문에? 하하하.”

“그것도 그렇고. 뭐,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다고나 할까. 이런 요소들 때문에 지금껏 여러 매체의 소재로 다뤄졌구나 싶더라고. 짜 맞추는 재미가 퍽 은근해.”

“웃기는 소리.”

나는 코웃음 쳤다. 터무니없었다. 저 세세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그건 바로 《눈의 여왕》이 엉터리 설화라는 것이었다.

비올라 성당만 봐도 엉터리 소설이 확실했다. 그 성당이 뭐였는가. 종교재판관들에게 찔러 준 수고비 아닌가. 얼마나 종교재판관들이 기특했으면 그 으리으리한 성당을 수고비로 떠안겨 줬을까. 설화가 사실이면 그럴 수는 없었다.

놈이 어떤 종자인지 뻔히 보였다. 귀족의 셰퍼드로 복무하며 신물 나게 구경한 타입이었다. 조카들을 깡그리 살해해 놓고 너털웃음을 터뜨린 울프삭 경이나, 5년치 국가예산에 맞먹는 부정을 저지른 마넨과 똑같은, 전형적인 ‘푸른 피’였다.

다시 한번 뒤통수가 뻐근했다. 파면 팔수록 속만 메슥거리는 이야기였다. 나는 레이가 이런 피 냄새 물씬한 이야기에 골몰하는 것이 싫었다. 자고로 인생은 즐겁게 살아야 하는 법이다. 레이에게는 바람직한 이상형을 새로이 정립할 필요성이 시급했다.

아무래도 머리 빗겨 주기만으로는 약발이 신통찮을 듯했다. 나는 행복한 결말을 맞는 공주왕자들이 나오는 동화책을 레이에게 한 아름 안겨 볼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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