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 ─L. (77/101)

20 ─L.

“……아리사 씨?”

미술 치료사의 독촉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크레파스를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내내 정신이 멍했다. 몸 한구석이 지끈거리기도 했다.

메사라와 나눈 시간이 자꾸만 생각나서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흘 내내 메사라와 함께 지냈다. 그와 함께 케이크를 굽고 온실의 화초에 물도 주었다. 대화를 나누었다. 눈꽃이 만발하는 거리도 산책했다. 그리고 밤에는 섹스를 했다.

메사라와 함께한 여러 가지 중에서 제일 많이 떠오른 것이 섹스였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너무도 달콤했다.

메사라와 나눈 행위를 떠올렸다. 달콤하면서도 부끄러웠다. 할 때는 지각하지 못했는데 맨 정신으로 돌이켜 보니 낯이 화끈거렸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행위의 연속이었다. 내가 남자의 성기를 빨다니. 정액을 삼키다니. 아랫도리를 활짝 벌려 보여 주다니. 그럼에도 그 행위들을 달콤하게 느끼다니.

메사라는 우리 관계가 2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42번가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메사라와 만났다고 했다. 중간에 한 번의 부침을 겪긴 했지만, 지금은 관계를 회복해 동거하는 중이라고 했다.

메사라는 덧붙여 말했다. 이 관계를 앞으로도 길게, 죽을 때까지 지속하고 싶다고.

앞으로도 길게, 죽을 때까지…….

이게 현실일까. 요정에게 호박 마차와 유리구두를 얻은 신데렐라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다정한 연인과 따스한 집. 그런 것들이 내게 생기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현실이 분명했다. 찰나에 벌어진 이 엄청난 변화에는 아직도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훌쩍 떨어진 기분이었다. 다행히 나쁜 미래는 아니었다. 기초교육도 받지 못한 고아치고는 괜찮게 밟아온 행적이었다.

사실, 11년 전 이맘때의 나는 마넨 경과의 계약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해져 눈앞이 까마득하던 참이었다. 두 연놈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생활비 문제로 한숨짓기 일쑤였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작은 헌책방 주인이었다.

메사라가 설명하길 헌책방은 8년 전, 옆 룸의 노파가 내게 물려주었다고 했다. 그의 말을 종합하면, 나는 헌책방을 운영하면서 조용하게, 열심히 산 것 같았다.

마넨 경과는 결별하고.

나는 붉은색 크레파스를 집어 들며 생각에 잠겼다. 점심시간에 병원 휴게실의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한 터였다. 마넨 경과 관련한 기록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기록을 읽는 내내 전신의 피가 얼어붙었다.

마넨 경은 반년 전에 몰락했다. 철저히, 완벽하게. 딸을 왕비로 봉하고 문신계급 최고직 로터스까지 올라가는 영화를 누렸으나, 비자금 스캔들로 한순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마넨 경의 사망 기록에는 등골까지 서늘했다. 체포당해 이송되는 도중 차 사고로 불에 타 죽은 것이다.

울프삭과 엑달, 수오미넨과 에델마가 누린 영화와 몰락의 스토리도 놀랍기만 했다. 한 편의 영화가 따로 없었다. 나는 멍해져서 브라우저 창을 닫았다.

마넨 경은 몰락했다. 그러나 나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결론은 자명했다. 자작나무의 형상이 완전히 걷힌 현 상태로 판단컨대, 마넨 경을 보좌하던 도중 나는 떠나 버린 듯했다. 심신이 편안해지자 타오르던 복수심도 시들해지지 않았을까.

그것이 제일 그럴싸한 답이었다. 그렇게 마넨 경과 결별하고, 평범하게 살다가 메사라를 만나 여기까지 다다른 듯했다.

포우 메사라…….

도화지를 색칠하며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아직 메사라를 많이 알지는 못했지만, 좋은 사람 같았다. 직업은 가이거 말단 사무직 대원. 체격으로 봐서는 도저히 사무직 대원 같지 않아서 놀라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무직이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일반대원보다 한 직급 높습니다. 이래 봬도 대장급이라서, 이 자릴 얻으려고 3년간 헐레벌떡 뛰어다녀야 했죠.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메사라는 이웃에게 자신의 직업을 함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가이거의 악명을 의식한 탓 같았다. 메사라는 내가 쓴 원고도 보여 주었다. 동거 기간에 나는 책을 쓸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원고의 필체는 틀림없는 내 것이었다. 원고를 한 장씩 넘기며 묘한 감흥에 사로잡혔다. 공기처럼 실체가 잡히지 않던 현실감이 비로소 무게를 품고 안착하는 듯했다. 연인도, 집도, 원고도, 모든 것이 한 지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이 남자와 함께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포우 메사라를 사랑하며, 포우 메사라에게 사랑받으며, 앞날의 시간을 채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막 싹을 틔우는 화분을 감싸는 햇볕같이 따스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은가 봐요?”

미술 치료사가 불쑥 말했다. 나는 “네?” 했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색깔이 밝고 중심에 사람이 부각되어 있잖아요. 이건 웬 케이크예요?”

“어제 친구와 함께 케이크를 구웠거든요.”

“흐흠, 그렇구나. 그럼 쉬고 있어요. 그림 그리기는 이만하지요.”

미술 치료사가 그림들을 챙겨 방을 나갔다.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피곤이 조금씩 몰려오는 오후 세 시였다. 내가 다니는 정신과 병원은 신시가지의 한 빌딩 18층에 위치해 있었다. 창밖 아래로 드넓은 광장이 한눈에 보였다.

나는 통원치료 환자였다. 메사라의 출퇴근길을 이용해 이곳을 다니기로 한 터였다. 오늘은 그 첫날이었다. 오전에 문진과 간단한 상담을 받았다. 오후에는 그림만 계속 그렸다. 생각나는 거 아무 거나 그려 보라 해서 그렇게 하긴 했는데, 그림 그리는 내내 화가는 꿈도 꾸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갑자기 우울해졌다.

언제쯤에나 회복할 수 있을까. 가이거 말단대원의 월급으로는 치료비 부담이 상당할 터였다. 이 생각만 하면 메사라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창밖 광장을 응시했다. 눈이 세차게 흩어지는 하늘 아래서 격렬한 시위가 진행 중이었다. 11년이 지나도 정쟁은 여전하구나 싶어 쓴웃음이 나왔다.

정쟁이라…….

내 판단에 마넨 경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다. 울프삭이 딱 그 시기에 식물인간으로 전락했다. 제아무리 현실이 소설을 능가하기 마련이라지만, 그런 절묘한 우연이 동시다발로 발생할 리는 만무했다.

엑달과 에델마, 수오미넨도 마찬가지였다. 엑달은 정부에게 살해당하고 다섯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에델마는 극장에서 일어난 화재로 사망했다. 수오미넨은 반역죄로 구치소에 수감된 지 하루 만에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이 사건들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자연사가 없었다. 하나같이 대중 통속소설을 방불케 하는 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둘째는 정계의 쟁쟁한 거물들이 자신을 변호할 기회, 즉 재기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점이었다. 입도 뻥긋 못하는 식물인간 신세로 전락한 울프삭만 봐도 적잖게 의미심장했다.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음모였다. 어둠 속에 도사린 누군가가 정계의 거물들을 차례대로 숙청한 것이다. 누굴까. 어느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아무튼 저들의 최후만 봐도 내가 정쟁에서 손을 턴 것은 잘한 일이었다. 마넨 경을 끝까지 보좌했다면, 나 역시 오래전에 백골로 변했을지도 몰랐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한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생각하지 말자…….

가슴을 진정시키며 성에가 핀 창문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시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부랑자들, 가이거 대원들, 경찰들이 사방팔방으로 얽혀 날뛰었다. 최루탄이 쉴 새 없이 치솟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매캐하게 채웠다. 함성이 짱짱하게 치솟았다.

난투극을 벌이는 사내들 대개가 피투성이였다. 서너 명의 부랑자들이 뛰어가다가 넘어졌다. 그 위로 대여섯 명의 가이거 대원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쇠파이프와 발길질을 퍼부었다. 흰 눈 위로 핏물이 왈칵왈칵 흩어졌다. 색색의 유인물과 신문지 조각이 허공을 펄렁펄렁 떠돌았다.

왜일까. 저 아비규환의 현장에 빨간 꽃이 겹치는 까닭은.

나는 홀린 듯이 시위 현장을 응시했다. 이것은 잃어버린 기억의 한 토막일까. 희디흰 눈발에 섞여 펄펄 날아가는 색색빛깔의 종이. 나는 거리의 군중에 섞여…… 빨간 꽃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광장의 시위 현장이 속도를 더해갔다. 몇 대의 지프와 여러 대의 트럭이 종횡무진 누볐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질주하는 듯했지만, 잘 보면 계산적으로 시위대를 교란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지프들의 기세가 사나웠다. 지프 밖에 부착된 확성기로 대원들을 끊임없이 지휘하며 시위대를 몰아세웠다. 지프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부랑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정중앙의 지프가 압권이었다. 몰아치듯이 부랑자들을 조여 가더니 갑자기 급정거했다.

앞에서 가이거 대원들이 부랑자들에게 얻어터지는 중이었다. 돌연 지프의 문이 확 젖혀지며 붉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은색 가면에 검붉은 전신코트를 걸친 장신의 사신이었다. 먼 데서 봐도 위압감이 대단했다. 등에 황금색 실로 수놓은 울프삭가의 문장, ‘머리를 손에 든 성인’이 나한테까지 또렷이 보였다.

사신이 손에 든 채찍을 핑 휘둘렀다. 채찍이 공중에서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며 부랑자들의 등을 강타했다. 부랑자들이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곧 부랑자들이 사신에게 노도같이 달려갔다. 사신은 전혀 피하지 않았다. 외려 채찍을 까딱까딱 놀리며 여유를 부리더니, 지척까지 부랑자들이 다가올 즈음에야 행동을 바꾸었다. 채찍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하나씩 뭉개기 시작했다. 잔인무도하기 그지없는 손속이었다. 부랑자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하나같이 사신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지는 그 모습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었다. 따가운 최루탄이 눈바람에 섞여 병실로 몰려왔다. 머리카락이 창밖으로 펄펄 날아갔다. 짙은 레몬 빛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돌연 내 앞으로 빨간 꽃이 펄렁펄렁 떨어져 내렸다. 힘없고 위태로운 움직임……. 창백한 달빛에 물든 광장의 교수대로 끌려가는 죄수 같은.

펄렁펄렁 떨어지던 빨간 꽃이 사신의 어깨를 문득 스쳤다. 나는 멀거니 그것을 응시했다. 싸늘하게 빛나는 총구가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한줄기 총성이…….

“아리사 씨?”

“헛.”

나는 하마터면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담당의가 놀란 표정으로 “아니, 왜 그래요?” 하며 나를 부축했다.

“최루탄 때문에 바깥 공기가 안 좋은데 창문은 왜 열었어요? 몸이 밖으로 빠져나간 채 아슬아슬했다고요. 여긴 18층이에요.”

“시위 구경에 정신이 팔렸나 봐요.”

어색하게 대답하며 당혹감을 삼켰다.

아까 그건 뭘까.

눈앞을 장악했던 빨간 꽃이, 총구가, 사신마저, 삽시간에 사라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하게.

나는 창문을 닫으며 시위 현장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사신이 지프에 유유히 올라타고 있었다.

총과 빨간 꽃……. 혹시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 있을까. 나는 왼쪽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11년 동안 일어난 변화 중의 하나도 이것이었다.

나는 가슴에 총상 자국이 있었다. 밤중에 헌책방을 나오다가 무장 강도를 만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메사라는 설명했다.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관통상이었다. 당시 내가 빨간 꽃이라도 들고 있었나.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리사 씨,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종합검진을 받아야 합니다.”

담당의가 말했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나는 재차 창밖으로 눈길을 향했다. 검은 연기만 매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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