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M─
레이가 먼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을 송두리째 내버린 채, 11년 전으로 돌아갔다. 11년 전으로. 기억이 사라졌다. 반지를 주고받고, 축제에서 절정의 행복을 누린 한때가, 고작 몇 시간 만에 산산이 찢어졌다. 또 나 혼자 내동댕이치고 도주해 버렸다.
그리고 레이는 타인 바라보듯 나를 노려보았다. 당장 나가라고 소리 질렀다.
표현할 수 없이 쓰디썼다. 절망감이 견고한 쇠창살처럼 내 온몸을 둘러쌌다. 두려움도 엄습했다. 세 번째였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만약 앞으로 또 반복하면……. 아무리 행복한 시간을 나누어도, 그것을 잊어버리면 나는 그에게 고작 타인일 뿐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이런 상황이 거듭 일어날 가능성에 공포감마저 들었다.
뭘까.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우선 그를 지켜보았다. 어떤 면에서는 흥미로웠다. 열일곱 살의 레이는 내가 처음 만난 2년 전의 레이와는 사뭇 달랐다. 섹스를 나눈 뒤의 행동부터 그랬다. 평소에는 바로 등을 돌려 버리던 그가, 어제는 내 품에 깊숙이 머리를 기울였다.
그건 외로움에 내몰리고 내몰려 기운이 쇠해 버린 자의 몸짓이었다. 아직은 상처에 아픔을 느끼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고독이 할퀴고 지나간 생채기가 두텁게 파이고 또 파이다 못해, 결국에는 무뎌져 버린 2년 전의 레이는 그런 고단한 몸짓조차 망각한 사람이었다.
확실히 달랐다. 2년 전 그는 어떠했던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엉망진창의 상황에 무신경하게 일관하기 일쑤였다. “노력할게요. 기억이 빨리 나도록.” 하는 말도 스물여덟 살의 레이에게는 거의 기대하기 힘든 태도였다.
열일곱 살의 레이는 좀 더 밝고 활기가 넘쳐흘렀다. 스물여덟 살의 레이에 비해 덜 무신경하고, 덜 무감정하고, 덜 우울했다. 쉽게 놀라고 쉽게 당황하고 쉽게 기뻐했다. 11년 전의 레이는 저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월을 감안하면 당연했지만 그래도 충격이었다.
11년이라…….
본부로 차를 몰며 생각에 잠겼다. 연도와 날짜를 묻자 레이는 지금이 2118년 5월 11일이라고 말했다. 레이의 스승 마라타…… 풀네임 마라타 레이코 오기사는 2118년 4월 28일에 사망했다. 마넨은 마라타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령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렇다면 지금 레이의 기억은 정쟁에 막 뛰어든 시기에 멎어 있을 터였다.
여태껏 나는 레이를 둘러싼 어둠의 으뜸가는 원인을 왕인지 뭔지 하는 새끼로 추측해 왔다. 이제 보니 놈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라타와 마넨도 단단히 한몫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육시를 해도 시원찮을 연놈들이었다.
마라타는 어린 레이를 다락방에 가두고 주술을 전수했다. 마넨은 령이 소년임을 뻔히 알면서도 정쟁판으로 끌어들여 간계를 가르쳤다. 인간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레이는 엿 같은 스승들을 만나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주술을 배우고 정쟁을 치르면서 서서히 망가진 것이다.
물을 주지 않으면 바싹 말라 버리는 식물과도 같았다. 비정상적인 생활이 긴 세월을 돌파하는 동안, 최소한 지금보다는 밝고 활기차던 레이의 화분에서 남김없이 물기를 박탈해 버린 셈이다. 그 결과물이 내가 처음 만난 무렵의 메마르고 퍼석한 레이였다.
일장일단인가. 레이는 우리가 나눈 시간과 더불어 뼈가 시릴 만치 가혹한 기억까지 함께 털어냈으므로. 정쟁도, 가난도, 내게 총을 맞은 기억까지도.
나는 담배를 빨아들이다가 멈칫했다.
―인생에 돌이킴이란 존재하지 않아…… 모든 비극은 어둠 속을 떠도는 바람처럼 되돌아온다네.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사흘 전 축제의 밤에서 한 줄기 바람이 레이의 머리카락을 심술궂게 흩뜨리고 도망갔었다. 그때 나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빌어먹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좆같았다. 염병이었다. 일단 오늘 레이를 병원에 넣어 두고 왔다. 스물여덟 살의 고집불통 레이와 달리 열일곱 살의 레이는 순순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들였다. 이것도 일장일단에서 장에 속했다. 무엇보다도 섹스를 나눈 후 레이가 먼저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레이는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인물이었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순간의 쾌락에 경솔히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었다. 기억은 사라졌어도 나를 향한 감정은 변함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나까지 돌아 버릴지도 몰랐다.
괜찮았다. 여기서 무너질 의향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독하고 질긴 새끼였다. 천성부터 인내심이 강했다. 어둠 속을 떠도는 바람? 웃기고 자빠졌네. 자연재해라면 몰라도, 바람 따위가 좀 분다고 비극이 벌어진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저건 어디까지나 정신병이었다. 치료하면 그만이었다. 더럽게 넘치는 돈, 정신병원에 실컷 처박아서 완치시키면 끝이었다. 앞으로가 중요했다. 이런 때일수록 겨울바람보다 싸늘한 이성이 필요했다. 더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만전을 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칼을 생각해 보자…….
눈발에 휩싸인 가이거 본부가 형체를 드러냈다. 나는 닳아 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한 개비 또 뽑아 물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며 상황을 헤아렸다.
레오파드의 전화와 레이의 발작을 동시에 맞이한 그 날 저녁, 공중파 뉴스가 왕비의 스캔들을 톱기사로 보도했다. 왕실 마부가 왕비와 다섯 번에 걸쳐 잠자리를 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증거물로 왕실문장이 수놓인 왕비전용 팬티 두 장과 휴대전화에 녹음된 음란한 통화내용 및 문자 메시지, 수표 등을 제시했다. 유산으로 가뜩이나 입지가 불안해진 왕비에게 결정타를 가한 대형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도 우연일까. 아니면 칼의 짓일까.
칼이 왕실 마부와 접촉했다는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왕실 마부는 최근 거액의 도박 빚을 졌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지었다. 이 건은 우연이었다. 신께서 칼에게 미소를 지은 것이다.
왕비 스캔들이 터진 그 날, 왕이 칼을 불러 “왕비와 이혼하고 이리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논의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그 이튿날 칼은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그 자리에 칼을 추종하는 한량클럽이 몰려와 신나게 샴페인을 터뜨리고 갔다.
그동안 우리는 침묵만 지켰다. 칼은 우리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짐작했을 것이다.
흥, 천만에.
여신들이 관여한 고대의 전쟁이 몇 년을 끌었던가. 그 지루한 10년 전쟁을 종결시킨 것은 여신들의 미소가 아니라 인간의 우매함이었다.
나는 지그시 미소 지었다. 본부에 도착해 자료부로 들어서자 쿠퍼헤드가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여, 본부장님. 기사 끝내주게 나왔어.”
나는 신문을 받아들어 훑어보았다. 이리나의 과거가 대서특필된 이스트에덴 조간이었다. 제법 볼만했다.
칼을 보우하는 신은 아레스가 틀림없었다. 그리스 신화 최초로 간통 재판에 회부된 멍청한 남신. 반면 포우 메사라를 총애하는 신은 헤라일 것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승부욕이 강하고 영리한 올림푸스 최고여신.
왕비 스캔들이 터진 그 날 밤, 대책수립에 몰두하는 우리에게 국제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독일로 출장 간 대원들이었다. 이메일로 1차 자료를 보냈으니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이리나는 독일에서 남자와 넉 달간 동거했다. 즉 숫처녀가 아니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웬 처녀성을 따지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단했다. 억울하면 왕실을 탓하라. 왕비 후보는 반드시 처녀막을 검사받는 것이 왕실 전통이었다. 정력 좋은 현 왕비도 처녀성을 검증받았다. 그야 물론 현대의학이 거둔 쾌거였지만, 그 왕비도 동거를 했다면 혼인은 불가능했다. 처녀막과 달리 동거경력은 빼도 박도 못할 증거로 남으므로.
관례상 이리나가 왕의 정부라는 사실이 매스컴에 대놓고 오르내린 적은 없었다. 일단은 이리나도 공식적으로는 숫처녀였던 것이다. 왕족의 혼인에는 온갖 승냥이 떼가 발톱을 세우고 맹렬히 달려들었다. 전쟁이었다. 그렇건만 이런 증거를 남긴 칼이 멍청이였다. 여동생을 왕비로 올리고 싶었다면 독일로 해결사를 급파하여 동거남을 제거했어야 했다.
하기야 우리의 철통같은 감시하에서는 해결사를 고용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리나의 동거남은 탄탄한 허벅지에 구릿빛 피부의 쾌남아였다. 내 요구대로 이스트에덴은 그자의 늠름한 전신사진을 대문짝만하게 1면에 박아 주었다. 땅딸보 왕은 크게 상처받을 것이다. 일명, ‘아내와 함께 정부도 사라지다’.
그리고 재미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리나의 독일 친구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파견대원이 말했다.
―칼이 입버릇처럼 자기 여동생은 왕비감이라고 말했답니다. 녹취자료를 확인해 보십시오.
‘입버릇처럼’이라.
나는 여기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좍 그었다. 잘하면 왕비 모함죄로 엮을 수 있을 듯했다. 알고 있다. 좀만 인물이 잘나면 왕비감이네, 장군감이네, 흔하게 운운하는 말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악당 스네이크도 부모님에게는 우리 왕자님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없으면 창조해서라도 트집 잡아야 하는 곳이 이 바닥이었다. 그리고 나는 트집 잡기의 명수였다.
부장 회의실로 올라가 회의를 시작했다. 재규어가 “칼은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이스트에덴과 동거남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는 중이라더군.” 했다.
나는 픽픽 웃었다. 거 희소식이었다. 이쪽도 얼른 법정에 가고 싶었다. 미공개 자료 중에는 동거남과 이리나의 섹스동영상도 있었다. 나는 배수의 진 따위에는 취미 없었다. 승률 90프로를 확신할 때만 행동을 개시했다.
회의 도중 왕비의 주치의에게서 연락이 왔다. 왕비가 회고록을 출판해 떼돈을 벌 궁리에 몰두해 있더라고 귀띔했다. 마넨의 딸답게 왕비는 문재가 뛰어났다. 왕의 부실한 잠자리 기술 및 온갖 유명인사들의 섹스 테크닉이 주옥같은 언어로 묘사된 희대의 명작이 탄생할 것 같았다.
나는 손을 깍지 끼며 싱긋이 웃었다.
“이제 남은 일은 왕비 후보감 물색인가.”
“일단 톨라 가문을 알아봤어. 마리안느 톨라. 나이는 서른셋. 알토넨과 친인척 가문에 파티를 질색하고 신앙심도 깊고. 늙은 왕과 나이까지 적당하고.”
“로터스 일파의 동향은.”
“대원의 보고를 기다려 봐야지. 푸셔도 조간을 본 이상 우리와 비슷한 생각일걸. 신붓감 물색하러 열심히 친척들을 뒤져 보고 있겠지.”
레오파드가 스카치위스키 잔을 이쪽으로 건네며 말했다. 나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퍽 괜찮았다.
남신 아레스의 미소는 칼에게 외려 무덤이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나는 왕세자비에 이어 새 왕비까지 무신세력에서 추대할 작정이었다.
독일 파견대원이 보낸 1차 자료를 검토하면서 심산을 굳혔다. 바로 이스트에덴으로 연락을 취해 자료를 건넨 뒤, 왕이 왕비와 이혼을 선포하는 이튿날에 이리나의 동거 건을 터뜨리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휴가를 사흘 더 연장하고는 주저 없이 퇴근해 버렸다.
어제 왕과 왕비는 이혼절차를 위한 별거를 공식선언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스트에덴은 멋진 기사를 1면에 실어 주었다. 칼의 세도는 사흘 천하로 끝난 것이다.
나는 스카치위스키를 끝까지 비운 후 “그럼 오늘 스케줄을 말해 봐.” 했다.
“오랜만에 대규모 시위가 오후 두 시, 56번가 광장에서 벌어진다더군. 경찰이 울며불며 얼른 와 달라고 연락해 왔어. 밤에는 알토넨 주재 파티가 있고.”
쿠퍼헤드에 이어서 레오파드가 말했다.
“아직 확실하진 않은데, 이번 시위 배후가 칼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대. 마넨에게 부랑자들을 공급하던 브로커들이 최근 바르디 가문 쪽 사람들과 접촉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긴 했으니까 신빙성 있는 소문이라고 봐. 지금 확인 중이야.”
“좋아. 쿠퍼헤드, 레오파드, 재규어, 팔콘, 데모대로 출동한다. 나머지는 알토넨을 호위해. 따라 와.”
나는 잔을 탁 내려놓았다. 잘 걸렸다 싶었다. 레이 때문에 기분이 끔찍스레 안 좋은 참이었다. 부랑자들이나 신나게 때려잡으며 울적함을 날리기로 했다. 밖에서 대원들의 함성이 벌써 요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