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L. (75/101)

18 ─L.

만월의 밤이었다. 달빛이 낡은 침실의 램프 불처럼 고요히 떨어졌다.

나는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을 뒤따라 긴 복도를 걸어갔다.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괜찮아. 누가 나를 알아보겠어? 잠깐만 구경하다가 몰래 떠나면 돼.

어느덧 연회장 앞이었다. 나는 심호흡한 뒤 회장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한여름의 타오르는 붉은 태양도, 표독스레 차가운 달빛도, 눈앞의 이 광경에는 소스라칠 듯했다.

한없이 높고 넓은 연회장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촛불이 죽음의 사신마저 단숨에 내쫓을 기세로 일렁거렸다. 회장 곳곳에서 가면을 쓴 귀부인과 남자귀족이 우아하게 춤추며 거닐었다. 부채로 가려진 귀부인들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소한 손짓 하나하나 오선지의 음표처럼 날렵한 맵시로 넘쳤다.

이 정도였던가…….

나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묘한 감각이 내부로 스며들었다. 나뭇가지에 조용히 걸린 녹슨 새장이 갑작스런 8월의 소나기에 격렬히 흔들리는 듯한 감각. 바로 통증이었다. 알고 있었다. 창밖 멀리, 잿빛색깔 뾰족한 지붕 아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웃고 춤추는지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뱀에게 손끝을 깨물린 듯한 이 아픔은 삭이기 어려웠다.

귀부인들의 비단 드레스가 아름다웠다. 오만하게 세운 칼라는 귀밑까지 닿았으며, 풍성하고 넓은 소매는 바닥을 질질 끌 만치 길었다. 머리는 베일을 겹겹이 늘어뜨린 뾰족한 관과 여러 장신구로 꾸미고 있었다. 목과 팔, 허리에서 온갖 보석이 위태롭게 흔들리며 색색의 빛을 뿌렸다.

나는 쓰게 웃었다. 여기서 나만큼 초라한 여자는 없을 것 같았다. 하녀들조차 간단한 장신구는 걸치고 있건만, 나는 장신구는커녕 드레스도 제일 허름했다.

구경이나 하자…….

주변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렸다. 멀찍이서 눈에 확 띄는 남녀가 있었다. 보석이며 옷이며 좌중의 다른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했다. 그런데 남자가 낯이 익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난 콧날과 입매가 익숙했다.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언젠가 축제에서 나와 함께 춤을 춘 그 남자였다. 귀족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저 여자는 뭘까.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무척 다정했다. 연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축제 때 남자가 내게 던진 언어와 눈짓과 몸짓이 떠올랐다. 나조차 잠깐 착각에 빠지리 만치 진실했다. 태양마저 소멸시킬 듯 뜨겁고 간절했다. 몇 달의 밤을 한숨짓게끔 나를 몰아세운 그것…… 요컨대 구애. 그것이, 실은 한 장의 린넨 손수건보다 얄팍한 유혹에 불과했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뭘 놀라는가. 깨닫고 있지 않았던가. 그날 밤 나를 사로잡은 미열은 축제가 부린 마법에 불과하다고. 더운 여름밤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와 나는 단지 축제에 취해 밤하늘 아래를 내달렸을 뿐이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눈이 가려져, 거짓말을 내뱉고, 쾌락의 구렁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축제는 끝났다. 이미 오래전에.

광장을 밝히던 횃불은 덧없이 꺼져 버려 가느다란 연기만 피어오르고, 코끝을 간질이던 빨간 꽃은 향기를 잃고 목을 늘어뜨렸다. 모든 것이 죽고 시들어 버렸다.

벽난로 불꽃 속에서 사그라지는 낡은 연애편지처럼, 이 기억도 언젠가는 한줌의 재가 되리라…….

남자에게서 고개를 돌릴 찰나였다. 시녀들이 남녀를 가리키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대화를 엿듣던 나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아주 깊디깊은 우물 속으로 온몸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왕이라니. 저 남자가 왕이라니.

내가 격렬히 증오하는 그자라니.

불신하고 싶었으나 정황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정확했다. 축제에서 남자가 내 어깨를 잡으며 뭐라고 불렀던가. 불쾌한 이름이었다. 곧 남자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변명하며 내게 춤을 청했다. 그리고…….

절망감이 덮개처럼 나를 짓눌렀다. 이 무슨 잔인한 농간인가.

음악이 그쳤다. 춤추던 사람들이 무도회장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그 빈자리에 왕의 여자만 남아 있었다. 여자가 가면을 벗었다. 두텁게 분칠한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여자의 붉은 입술에서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다. 별안간 난쟁이와 광대들이 구석에서 튀어나와 여자를 둘러쌌다.

여자가 소리쳤다.

「여러분! 저는 왕비입니다!」

낭랑하고 당당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왕비라니. 저 무슨 소리를…….

곧 여자의 말뜻을 깨달았다. 대뜸 여자가 등을 굽혀 꼽추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러며 우스꽝스럽게 걷기 시작했다. 일견 천박한 몸가짐으로 엉덩이를 요염하게 흔들며 흐느꼈다.

「아아, 전하께서는 언제 오실까!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잠도 안 자며 이리도 기다리고 있건만!」

웃음이 치솟았다. 왕을 위시한 귀족들, 하녀들, 시종들 모두가 한꺼번에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여자의 1인극에 모두 미치게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특히 왕이 제일 즐거워했다.

여자가 능숙하게 연기를 펼쳤다. 꼽추부터 절름발이와 추녀, 각양각색의 레퍼토리를 동원해 이른바 《왕을 기다리는 왕비》 연극을 오랫동안 늘어놓았다. 난쟁이와 광대들이 그녀 주변을 뛰어다니며 흥을 고취시켰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우아하게 치마를 펼치며 인사했다. 그녀의 입매에 만족감이 가득했다.

열화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번에도 왕의 박수가 가장 열렬했다.

다시 춤이 시작되었다. 왕과 여자가 격렬히 뒤엉켜 회장을 누볐다. 춤사위가 흐드러졌다. 여자에게서 늘어진 겹겹의 베일과 길디긴 옷소매, 목과 허리에서 찰랑거리는 보석이, 왕을 어지럽게 휘감았다. 그들이 몇 번이고 내 앞을 지나치며 소리 높여 웃었다. 웃었다. 웃고 웃고 또 웃었다. 잔혹하리만치 열렬한 연인들이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치도록 즐겁게 춤추는 그들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뜨겁게 휘몰아치는 춤이 사그라질 때까지, 송장처럼 얼어붙어만 있었다.

춤을 끝낸 왕이 회장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무심히 옮기던 시선이 문득 이쪽에서 정지했다.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놀라움이었다.

「아니…….」

왕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때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몸을 확 돌려 회장을 빠져나갔다.

여자…… 아니, 레비탄의 연극을 보는 내내 뒤통수가 수십 개의 화살로 꿰뚫리는 듯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왕과 귀족들이 파티에서 나를 웃음거리로 삼으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추호도. 단 한 번도.

내 외모가 추하다고 소문났다는 사실은 유모의 귀띔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나는 거기에 썩 신경 쓴 적 없었다.

「왕이 오랫동안 찾지 않은 왕비라면 못생긴 여자려니 단정하기 마련이지. 실컷 떠들라고 그래. 나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니까…….」

하고, 되레 비웃었다. 왕과 이혼하면 한껏 치장하고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내겠다고, 나를 내팽개친 왕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하며 거울을 응시하고는 했다.

텅 빈 복도를 걸어갔다. 창밖에서 숨어든 달빛이 복도 기둥에 늘어진 어둠 속으로 힘없이 스며들었다. 소리도, 사람도, 아무것도 없었다. 낡은 드레스자락 끝에서 검고 앙상한 그림자만 나를 훔쳐보며 뒤따라올 뿐이었다. 사무치게 고독한 밤이었다.

왜지.

한참 만에야 나는 의문을 떠올렸다.

저들의 폭소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에 관해 아는 게 뭐가 있어서, 나를 얼마나 안다고 저토록 거침없이 경멸을 표출한단 말인가. 왜 나는 저들의 조롱과 멸시와 증오를 받아야 하는가. 왜 나는 저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왜.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한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뒤에서 기척이 일었다.

한심하다…….

나는 눈을 떴다. 또 빌어먹을 꿈이었다. 한동안 눈만 껌벅거렸다.

여기가 어딘지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병실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천장을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혹시 길에서 쓰러지기라도 했을까. 그랬는지도 몰랐다. 거식증 때문에 최근 음식을 도통 넘기지 못하던 터였다.

그나저나 얼른 집에 돌아가야 했다. 엑달 관련으로 마넨 경의 연락만 기다리며 24시간 대기하던 참이었다. 병실 벽에 걸린 시계가 벌써 새벽 5시를 가리켰다.

그런데 내 옷.

일순 아연해졌다. 만날 입고 다니던 주술사 코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 옆 옷걸이에 고급스런 코트가 한 벌 걸려 있었다. 망설임 끝에 코트를 걸쳤다.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이의 코트가 분명했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내일 옷을 갖다 주겠노라는 메모를 남긴 뒤 병원을 나섰다. 다행히 코트 주머니에 상당량의 지폐가 들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42번가로 향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상황을 헤아렸다. 현재 마넨 경은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임이 들었다.

암살 아닌가. 사람의 생사가 내 결정에 달려 있었다. 루히미에스 자작이 이번 파티에서 어떻게 변심할지 채집한 뒤 결정하겠노라고 마넨 경에게 말해 두었지만, 사실상 귀결은 뻔했다.

제거해야겠지.

어차피 마넨 경은 그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루히미에스 자작은 마넨 경과 관련한 여러 정보들을 엑달에게 부지런히 물어다 주는 참새였다. 그를 죽 의심하던 마넨 경은 이번에 받은 내 상담을 계기로 마음을 굳혔다. 굳이 내 결정을 기다리는 이유는 막 ‘사랑’을 맺은 우리의 파트너십을 시험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드디어 나도 손에 피를 묻히는구나.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묻힐 줄은 몰랐다. ‘사랑’을 맺은 지 고작 2주 만에 암살에 가담하다니. 나는 쓰게 웃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차창 밖에서 밀려온 네온사인 빛이 무릎을 적셨다. 점멸하는 빛 무리가 나비날개처럼 화려했다.

그런데 내가 왜 먼 58번가의 병원에 있었을까. 혹시 날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이 그 병원 직원일까.

어쨌든 이 한겨울에 도움 받아서 다행이었다.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해서 내일 병원을 방문해야겠다…… 생각하며 차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순간 움찔했다.

전신이 얼어붙었다. 만돌린으로 얻어맞은 양 뒤통수가 얼얼했다. 한동안 꿈쩍도 못하다가 간신히 눈을 깜박거렸다.

뭐…… 뭐, 뭐지.

창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참 뒤에야 가까스로 손을 들어 뺨을 만졌다. 믿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자작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한 낯선 사람이 있었다. 경악이 서린 푸른 눈을 크게 뜬, 길디긴 금발의 남자.

숨이 가빠졌다. 맥박이 미친 듯이 달음질쳤다.

사랑이 완성된 것인가.

그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계약 후, 환각과 환청은 덜해지되 자작나무의 형상은 여전하던 터였다. 2주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나는 계약을 절반의 성공으로 단정해 버리고 자포자기했다. 그러나 섣부른 짐작이었다. 시간만 걸렸을 뿐, 사랑은 마침내 완성된 것이다.

오랫동안 갈구해온 안녕을 드디어 고한 셈인가. 자작나무에게서 완전히 해방된 것인가. 완전히?

아직은 얼떨떨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레이 아리사의 얼굴이 마냥 신기했다. 추측했던 얼굴과 딴판이었다. 마라타가 누차 말했던 대로 멀쩡한 용모였다. 머리카락도 굽이치는 금발이었다. 언제나 상상해 오던 추한 괴물이 아니었다.

“손님. 어디서 내려드릴까요?”

택시기사의 말에 나는 급히 정신을 차렸다. “저기 횡단보도에서요.” 하고는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침착하자…….

모두 예상한 바 아닌가. 조금 늦게 결과가 나타났을 뿐, 굳이 흥분할 필요는 없었다. 문득 마라타가 떠올라 가슴 한구석이 아파왔다.

당신의 유언을 어기고 계약을 맺고 말았습니다. 이기적인 나를 용서하지 말아요. 이 죄는 지옥에서 갚겠습니다.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관리실 수위에게 비상열쇠를 달라고 부탁했다. 수위가 열쇠를 건네며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나는 웃기만 하고 열쇠를 받았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코트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토록 꿈꿔온 해방을 맞이했건만 기분은 묘하기만 했다.

왜일까. 암살 때문일까. 아니면 마라타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아무튼 지금은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치워야 했다. 창틀로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한참을 더듬거려도 휴대전화가 잡히지 않았다. 굉장히 피곤했지만 몸을 일으켜 창틀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룸을 둘러보았다. 시선이 닿는 어느 곳에도 휴대전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때는 잠시 뒤였다. 가구 배치가 평소와 달랐다. 항상 화병에 꽂아 두었던 자작나무 가지까지 보이지 않았다. 황당했다. 이 괴이한 상황을 설명할 답은 하나뿐이었다. 도둑이 든 것이다.

이런 낭패가.

하필 이런 때에 도둑이 들다니. 자작나무 가지는 왜 훔쳐 갔을까. 그럼 공중전화로 마넨 경과 통화해야 하나. 자작나무 가지야 바깥에서 꺾으면 그만이지만, 공중전화 박스에서 중얼중얼 주술을 부릴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그나마 사람이 뜸한 새벽이라서 다행이었다.

일단 배를 채우기로 했다. 길거리에서 또 쓰러지는 사태를 피하려면 조금이라도 배는 채우고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냉장고를 열었다. 이번에도 멍해지고 말았다. 냉장고에 든 것이라고는 오트밀 봉지뿐이었다. 기가 막혔다. 도둑이 먹을 것까지 싹쓸이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오트밀 봉지를 꺼냈다. 냄비에 물을 받다가 또 움찔했다. 손가락에서 웬 사파이어 반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건 뭐지…….

반지를 훑어보았다. 대체 이런 게 왜 내 손에 끼여 있는 것일까. 게다가 왼손약지라니, 보통 여기에는 결혼반지를 끼던데.

어리둥절했지만 그냥 놔두었다. 나를 도와준 사람이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을 수도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냄비를 렌지에 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사랑’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넨 경을 보좌하는 일뿐이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도울 생각이었다. 무신귀족들에게 부지런히 엿을 먹여 줄 심산이었다.

아까의 꿈을 돌이켜 보았다. 불덩이 같은 증오심이 솟구쳤다.

미친 새끼. 레비탄의 연극에 즐거워하던 그 뻔뻔한 면상이라니. 그러고도 어찌 자작나무의 뒤를 밟았을까.

내게 타임머신이 있다면, 주저 없이 16세기로 날아갔을 것이다. 자작나무의 뒤를 밟는 그 새끼 등짝에다가 비수를 꽂아 주었을 터였다. 자작나무도 실컷 패 버렸을 것이다. 두 연놈을 생매장해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물이 끓었다. 급히 상념을 몰아내고 냄비를 식탁으로 옮겼다. 오트밀을 먹으며 계획을 정리했다. 암살은 결정됐다. 이제 남은 것은 집행이었다.

마넨 경에게 나는 ‘안락한 죽음’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잔혹한 암살이 판치는 정쟁판에서 마넨 경의 방식은 인심을 사는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암살 수법도 이미 정해 놓았다. 독살이었다.

청산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혈액을 섭씨 4도에서 1, 2주간 보관하면 혈액이 부패하는 과정에서 세균의 작용으로 청산이 생기는 경우가 발생했다. 시체 서른세 구를 실험한 결과 열여섯 구에서 청산이 검출될 만큼 발생 확률이 높았다. 표적을 납치해 청산을 주입한 뒤, 물류센터의 보관창고에 처박아 버리라고 조언할 생각이었다. 청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뿐더러 치사율도 높았다. 최고의 독살 도구였다. 앞으로 청산은 마넨 경의 ‘경고서명’이 될 것이다.

밖에서 판자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한 걸음걸이였다. 이 새벽에 누굴까…… 하며 스푼으로 오트밀을 뜨다가 멈칫했다. 노크소리가 난폭하게 터졌다. 다름 아닌 내 룸 출입문이었다.

이 야밤중에, 내 룸의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라니.

나는 아연하게 문을 응시했다. 노크를 하다못해 숫제 발로 쾅쾅 걷어차고 있었다. 문짝을 부숴 버릴 기세였다. 혹시 룸을 잘못 찾아온 사람인가 싶었다. 오트밀을 간신히 삼킨 뒤 주춤주춤 일어섰다.

“누구세요?”

문을 열었다. 곧바로 불청객이 난입했다. 생판처음 보는 남자였다.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들어오자마자 남자가 내뱉었다.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태도였다. 나는 옴짝달싹못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남자가 내 어깨를 꽉 잡더니 이쪽을 빤히 노려보았다. 회색빛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엄청난 장신에 체격까지 대단해서 절로 주눅이 들어 버렸다.

“무, 무슨……. 소리 지르겠습니다. 이거 안 놓습니까?”

더듬거리며 말하는 내게 남자가 “하.” 했다. 어이없어하는 눈초리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까.”

“모르겠는데요.”

내 대꾸에 남자가 안면을 굳혔다.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무례하군요. 꼭두새벽에 남의 집에서 무슨 행패입니까. 당장 안 나갑니까.”

“무례라.”

남자가 짧게 웃었다. 회색 눈동자를 무섭게 일렁거리며.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면 똑똑히 가르쳐 드리죠. 나는 포우 메사라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애인이죠.”

“네? 누가 누구의 뭐라고요?”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이 웬 미치광이지. 애인? 눈앞의 이 무례한 작자가 내 애인? 내가 연애를 해? 그런데 언제? 어느 틈에?

“아하하, 이 아저씨 좀 봐!”

나는 파안대소하며 포우 메사라의 손에서 어깨를 떨쳐냈다.

“이봐요, 아저씨! 저는 미성년자예요. 보아하니 그쪽, 성인과 미성년자의 성행위는 철창행이라는 정도는 알 만한 나이 같은데요. 기가 막혀서…… 그걸 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이나 찾아봐요. 여긴 42번가예요. 널려 있는 게 남창이라고요.”

“……지금이 몇 년 몇 월 며칠이죠?”

포우 메사라가 딱딱하게 말했다.

“날짜나 물으려고 한밤중에 남의 집에서 행팹니까? 2118년 5월 11일이죠. 됐어요? 이만 나가요.”

나는 포우 메사라의 가슴을 떠밀었다. 꿈쩍도 안 했다.

“잘못 알고 있군요. 오늘은 2129년 2월 18일입니다. 당신은 현재 스물여덟이에요. 우린 2127년 11월에 만났죠. 그리고 지금은 동거 중입니다.”

“…….”

나는 눈을 껌벅거렸다. 포우 메사라의 너무도 멀쩡한 말투에, 미치광이는 혹시 내 쪽이었나 하는 의심을 잠깐 품을 뻔했다.

“빨리 나가라니까요!”

끝내 언성을 높여 버렸다. 이 미치광이 무뢰배의 횡포를 더는 참기 힘들었다.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이 안 들립니까! 당장 나가라니까!” 하고 소리 질렀다.

포우 메사라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네. 나가지요.” 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안 갑니다.”

겨우 진정하고 숨을 몰아쉬다가, 나는 “네?” 했다. 포우 메사라가 내 팔을 꽉 움켜쥐었다. 힘이 어마어마했다. 공포가 치달았다. 이곳은 강간과 살인이 횡행하는 42번가였다. 이 시간에는 경관도 뜸했다. 도와줄 사람이라고는 이웃뿐이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치고 발버둥 쳤다. 포우 메사라가 아무 반응도 없이 나를 질질 끌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복도 문이 하나둘씩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다.

그제야 포우 메사라가 우뚝 멈춰 섰다. 이웃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재차 고함쳤다.

“누구 제발 도와줘요! 제발! 미친놈이에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고함쳐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도와줘요, 제발…….”

미칠 것 같았다. 내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였다. 가만히 있던 포우 메사라가 갑자기 어느 부인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부인이 나와 포우 메사라를 번갈아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저와 초면은 아니시죠, 부인. 제 애인 정신상태가 또 이상해져서 말입니다. 저를 통 알아보지 못하는군요. 심지어 올해가 몇 년도인지도 헷갈려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인이 설명을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머, 저런.”

부인이 손으로 입을 막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부인의 측은한 시선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어쩌다가 또……. 아리사 씨, 이 청년과 동거한다고 한 달 전에 여길 나갔잖아요. 그리고 올핸 2129년이고요.”

뭐?

온몸이 포르말린에 담긴 개구리로 변한 기분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다시피 했다. 이건 악몽일까. 다들 미리 짜고 나를 농락하는 연극배우들 같았다. 포우 메사라가 나를 질질 끌고 다니며 이웃들에게 같은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모든 이가 한결같이 대답했다. 나는 이십대 후반이고, 올해는 2129년이며, 포우 메사라는 내 애인이라고. 내게 비상열쇠를 준 관리실 수위는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보고 포우 메사라와 다투었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느 아저씨는 어제 신문을 보여 주며 올해 연도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를 가리켰다.

잠깐 잠이 든 사이 나는 11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것이다. 1년도 아닌 무려 11년을. 열일곱 살의 레이 아리사에서 스물여덟 살의 레이 아리사로. 그야말로 찰나에. 삽시간에.

포우 메사라의 차를 타고 그와 내가 함께 산다는 집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더러 메사라라고 부르라고 했다. 내가 이름 대신 성을 불렀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의 왼손약지를 보여 주며 이래도 의심스럽냐고 물었다. 그의 왼손약지에는 내 왼손약지에 끼여 있는 똑같은 사파이어 반지가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의문만 꼬리를 물었다. 그럼 나는 11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이 남자하고는 어쩌다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을까. 사라진 11년의 기억을 복구할 수는 있을까.

두려움만 몰려들었다.

“도착했어요. 웬일로 오늘은 잠을 안 자는군요.”

메사라가 차고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의문이 담긴 내 시선에 그가 어깨를 으쓱 올렸다.

“평소에는 차만 타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거든요.”

한 점 스스럼없이 자연스런 태도였다.

“아까 보니까 식사를 하고 있던데. 아직도 배고픕니까?”

메사라가 집에 불을 켜며 말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실내로 들어섰다. 실감이 안 났다. 을씨년스런 원룸이 갑작스레 하얀 2층 저택으로 바뀌다니, 난데없이 등장한 애인만큼이나 황당무계했다.

메사라가 체크무늬 천이 덮인 소파를 가리키며 “식사 준비할 동안 여기서 기다려요.” 했다. 소파에 주춤주춤 앉는 내게 카디건까지 둘러 주었다.

“난방이 완전히 가동될 때까지는 좀 추울 겁니다. 그럼 곧 오겠습니다.”

식당으로 향하는 메사라를 멀뚱히 응시했다. 누군가가 추위를 염려하며 내게 카디건을 덮어 준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분히, 침착하게, 레이 아리사.

우선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메사라의 꾸밈없는 태도와 이웃들의 증언을 종합하건대 최소한 이 상황이 합동 연극은 아닌 듯했다. 사실 냉정히 판단하면, 두 연놈에게 갖은 시달림을 당한 내 쪽에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유를 찾으려 노력하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세련되고 아늑한 분위기였다. 앤틱 가구로 꾸며진 실내 곳곳에 화초가 가득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화초들이었다. 오른쪽 벽에는 액자들이 빼곡했다.

죽 훑어보다가 한곳에서 주춤거렸다. 코르크판에 핀으로 고정된 폴라로이드 사진에 어느 사람이 찍혀 있었다. 바로 알아보았다. 오늘에야 처음으로 구경한 레이 아리사였다. 책을 읽고 있는 나, 어깨를 드러낸 채 손으로 턱을 괴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나, 화분에 물을 주는 나, 모두 세 점이었다. 메사라가 찍은 듯했다.

어깨를 드러낸 사진에는 놀라움이 밀려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보건대 나체로 찍힌 사진 같았다. 누군가가 쳐다볼새라 이슬람 여자처럼 온몸을 꽁꽁 감싸고 돌아다니던 내가, 메사라 앞에서는 몸을 드러낸 채 사진까지 찍었다니. 그것도 저렇게 무방비한 표정으로.

화초들을 위시하여 저 사진들까지, 모든 것이 메사라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물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음식을 데우느라 좀 늦었네요.”

메사라가 식사를 탁자에 차렸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이거라도 좀 먹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스푼을 들며 말했다. 일순 메사라의 눈초리에 야릇한 빛이 서렸다. 음식을 먹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검지로 탁자를 톡톡 쳤다. 저 의미는 뭘까. 미치광이 애인과 헤어져 버릴까 고심하는 중인가.

나라면 바로 이별해 버릴 듯했다. 이웃과 메사라가 주고받은 말로 보건대 지금 같은 상황이 누차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닿자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그래도 궁금한 것이 있었다.

“우리, 어떻게 만났어요?”

“네?”

메사라가 멈칫했다. 잠깐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말했다.

“뭐, 어쩌다가 만났지요. 그다지 로맨틱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하하하.”

대답하기 싫은 기색이었다. 말하기도 껄끄러울 정도면 확실히 그럴싸한 출발은 아니었던 듯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두 연놈의 달콤하기 그지없던 첫 만남이 떠오르고 말았다.

나는 수프를 뜨면서 말했다.

“로맨틱한 만남이 아니면 뭐 어때서요. 지금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니 관계가 그럭저럭 괜찮게 진행된 것 같은데요. 그럼 됐죠, 뭐.”

메사라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메사라가 “아, 미안합니다.” 하며 고개를 돌렸다. 내 습관을 배려하는 저 행동 또한 폴라로이드 사진과 동일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포우 메사라는 내 연인이 맞는 것 같았다. 연인……. 이 단어를 떠올리면 뒷골만 띵했다.

내가 연인을 두다니. 연인이라니.

오랫동안 스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났다. 어색함이 짙어질 무렵 메사라가 불쑥 말했다.

“하나도 기억 안 납니까?”

“……네.”

나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긴 시간 뒤 메사라가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한 감정도?”

나는 스푼을 멈추었다.

메사라에 대한 감정.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갑작스레 들이닥친 상황에 혼이 팔려 여기에는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감정……. 연인 관계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나와 이 사람은 연인 관계였다. 그건 내가 이 사람을 사랑했음을 가리켰다. 사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이 남자와는 동거까지 할 만큼 사랑한 것이다. 누드로 사진이 찍혀도 무방비하리만치 이 사람을 친밀하게 여겼다. 적당히, 보통 사랑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나도 모르게 스푼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입 밖으로 꺼낸 말은 고작,

“곧 기억이 나겠지요.”였다.

메사라는 입매를 비틀어 웃기만 했다. 한동안 적막이 부유했다.

나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노력할게요. 기억이 빨리 나도록.”

“나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메사라가 말했다. 냉소와 씁쓸함이 반반 섞인 낯이었다.

“식사 다 했으면 이만 자지요. 며칠 동안은 나도 휴가입니다.”

메사라가 일어섰다. 그가 나를 데리고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시폰 소재 캐노피와 오리엔탈풍 쿠션으로 화려하게 꾸민,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침실이었다.

침대.

가슴이 쿵 떨어졌다. 얼굴까지 홍당무로 변해 버렸다.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폴라로이드 사진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동거하는 연인이니 당연히 한 침대에서 잤을 터였다. 당혹감이 뼈까지 사무쳤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착착 들어맞는 정황도 그렇고, 메사라의 말투며 눈빛이며 나를 배려하는 태도며 저건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포우 메사라는 내 연인이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차분히, 침착하게, 레이 아리사. 경솔하게 행동했다간 이 사람에게 상처 줄 수 있으니까.

“안 입어요? 계속 들고 있자니 팔 아픕니다.”

메사라가 파자마를 건네며 재촉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파자마를 받아 갈아입었다. 메사라도 파자마로 갈아입었다. 동작이 그저 태연했다. 겉보기에도 엄청난 장신에 체격이 좋았는데 맨몸은 더 훌륭했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내가 어이없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했다.

“여기 누워요, 하하하.”

메사라가 짓궂게 웃으며 자기 옆을 탁탁 때렸다. 나는 민망한 기분을 꾹 참고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연속으로 낯만 뜨거운 상황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루히미에스 자작을 암살할 계획에 몰두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랬건만 지금은 웬 남자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평생 섹스할 일도 없으리라 자포자기하며 살아온 이 내가.

메사라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나는 이날 이때까지 섹스는커녕 여자 손 한번 잡아볼 엄두도 못 내고 살아왔다. 용모가 추하리라는 망상 탓이었다. 한창 혈기가 끓어오르던 사춘기 때도 다락방 창밖으로 길거리의 창녀들을 훔쳐보며 울적해한 것이 전부였다.

그랬는데 남자애인이라니. 레이 아리사, 너 11년 동안 진짜 어떻게 살아온 거야?

말똥말똥 천장만 쳐다보았다. 잠이 안 왔다. 옆에 닿는 메사라의 몸만 엄청나게 의식이 됐다. 분명, 여기서 잠만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했을 것이다. 성인이, 하물며 동거하는 연인들이 침대에서 같이 자며 그것을 안 했다면 되레 이상할 일이었다. 찰나 흠칫했다.

메사라가 내 잠옷 단추를 느릿느릿 풀고 있었다. 나는 옴짝달싹도 못했다. 무섭고 창피했다. 귀까지 화끈화끈했다. 메사라가 속삭였다.

“거부감이 들면 싫다고 밝혀요. 기억을 잃어서 어색하기는 할 테니까.”

그러고는 내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열일곱 살의 레이 아리사는 처음으로 경험하는, 그것도 남자의 손길이었다. 두려웠다. 겁만 더럭 치솟았다. 메사라가 귓불을 부드럽게 핥으며 내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

예상 밖이었다.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소름과도 비슷한 이 느낌에는 놀라움이 더 앞섰다. 머리와 달리 몸은 메사라를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엇인가가 조금씩 눈을 떴다. 그것은 흡사, 메마른 겨울 땅바닥에 잠들어 있던 꽃씨에서 싹이 올라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친근하고 달콤한 이 애무가 낯익었다. 낯익었다……. 나는 이 손짓을 숱하게 경험한 것이 확실했다. 수도 없이 그와 몸을 섞은 것이 틀림없었다. 다름 아닌 몸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열렸다. 내게 몸을 겹치는 메사라의 어깨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다리까지 벌려 그의 허리에 둘렀다.

메사라가 내 유두를 머금으며 혀로 희롱했다. 몸이 녹을 것 같았다. 다정하고 따스한 손짓이었다. 어느새 나는 알몸으로 메사라에게 안겨 있었다.

메사라가 좋으냐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이 감각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아프지만 곧 여기에 섞여들 쾌감을 기다리는 자신에게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메사라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 움직임에 맞춰 나는 신음했다. 그것이 곧 비명으로 변했다. 놀랍고도 굉장한 쾌감이었다. 메사라가 끝없이 내 이름을 속삭였다. 나를 부르며 몸을 움직였다.

눈앞이 하얗게 빌 즈음, 내 몸속이 젖어 들었다. 메사라가 내게서 몸을 떼어내며 숨을 골랐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키스했다. 부드럽고 농밀했다. 사소한 손짓, 설핏한 눈빛 하나하나에도, 이 남자가 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닿았다. 표현할 수 없이 짙은 일체감이었다. 그리고 깨우쳤다. 왜 섹스를 다른 말로 사랑을 나눈다고 표현하는지를.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최초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안개 낀 새벽거리 같은 냉담한 시간만을 헤쳐 온 내게, 처음으로 다가온 온기였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뚜렷했다. 누군가가 나를 원하는 것도, 내 이름을 간절히 불러 주는 것도, 하나하나 모두가. 모든 것이 뚜렷했다.

홀연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가파르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 터지는 꽃망울처럼 갑작스러웠다. 돌연하고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늘지고 생기 없던 잿빛정원이 빛으로 환하게 물들었다. 알 것 같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메마른 땅바닥 깊숙이 잠들어 있던 꽃씨의 이름을.

그것은 감정이었다.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사랑인 것 같았다. 냉기와 어둠에만 싸여 있던 나로서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사랑이었다.

무심결에 소리 없이 뇌까렸다. 친숙한 문구였다. 나는 이 말을 습관적으로 중얼거린 모양이었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레이 아리사는 포우 메사라를 사랑합니다…….”

입 밖으로 말해 보았다.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메사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회색 눈동자에 기쁨이 들어찼다.

“저도요.”

메사라가 말하며 내게 키스했다. 입술을 떼어내며 “한 번 더 하지요. 레이도 만족한 것 같은데.” 했다. 그러며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 연인은 짓궂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부하지 못하고 메사라에게 다시 몸을 맡겼다. 문득 궁전 복도를 쓸쓸히 걸어가던 자작나무가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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